<레디앙> 2009년 11월 05일 (목) 13:2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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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좌파정권'으로 불렸을까 | |||||||||||||||||||||||||
[DJ-노무현 정권은 진보?①] "민주파의 봄날은 벌써 갔다" | |||||||||||||||||||||||||
이대근 / 경향신문 논설위원 redian@redian.org | |||||||||||||||||||||||||
1. 2009년 9월 21일 서울 종로구 수운회관. 1970년대,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과거 재야의 원로들을 포함해 수백명이 모였다. 이창복 전 전민련 상임의장, 이해학 목사, 함세웅 신부, 김종철 전 민주통일민중 운동연합 사무처장, 조성우 전 민족화해협력 범 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이들은 한 때 재야인사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졌던 분들이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 김근태 전 열리우리당 의장,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 이병완 전 노무현대통령 비서실장, 장영달 이호웅 안희정 이광재 전의원. 이들은 대부분 민주화 운동의 화려한 경력을 배경으로 지난 10년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핵심이 되었거나, 정부 요직을 거쳤던 인사들이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민주통합 시민행동’ 창립대회를 위한 것이다. 한 때 쟁쟁한 인사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세상은 이들이 왜 모였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재야의 봄날도 간다 그런 철저한 무관심에도 아랑곳없다는 듯 그들은 반민주세력인 이명박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민주세력이 대동단결하자는 민주대연합을 제안했다.
창립 선언문은 “반역사적, 반생명적, 반민주적 행태들이 넘실대고…우리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재촉하는 현 정권의 행태를 묵과하거나 방치할 수 없”어 “흩어져 있는 민주세력을 하나로 묶어 민주와 평화의 새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해” “정파와 이념, 지역과 세대, 종교의 차이를 넘어서” “진보와 중도의 차이를 넘어” 4개 야당, 시민단체, 연대 운동체가 연석회의를 열자고 호소했다.
이들 중 일부는 이 모임이 결성되기 22개월 전 대통령 선거 국면에도 유사한 활동을 한 바 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박형규 목사, 함세웅 신부, 김성훈 상지대 총장, 고은 시인, 황석영 소설가 등이 ‘민주개혁 세력의 후보 단일화’를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은 관심이 없었다. 이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뒤 후보들은 각자 출마하는 것으로 굳혀졌다. 그러자 이들은 다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역시 시민들은 그들의 호소에 별로 주의를 하지 않았다.
한 때 수십만, 수백만의 시민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며 민주화를 이끌던 재야인사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중요한 순간, 절절한 호소문을 내지만, 과거 세상의 흐름을 선도해온 그들의 권위와 힘은 이제 흔적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른 바 ‘민주개혁세력’에 대한 이 냉담한 반응은 어찌된 일인가.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이 2007년 말 발간한 “민주정부 10년, 대한민국은 성공하고 있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10년 국정보고서”를 보아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정권의 경제지표와 서민의 행복지수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렸으며, 정경유착과 관치경제를 청산하고 민주적 시장경제를 정착시켰다. 성장제일주의, 강자독식을 반대하고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사회로 방향을 선회했으며, 국민의 정부에서 처음으로 복지정책의 틀을 잡고 참여정부에서 그 내용을 채웠다.
항상 대결과 적대로 불안했던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도록 했다. 경제규모는 세계 12위, 국가경쟁력은 11위의 선진국으로 성장했으며, 2007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로 늘고 주가지수는 2065포인트, 경제성장률은 5%, 외환보유고는 2,601억 달러로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한마디로 국가 부도 위기를 극복하고 선진국 문턱까지 진입한, 성공한 10년이라는 것이 집권세력 자체의 평가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지난 10년 정권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이 왜 이렇게 차가운지 설명되지 않는다. 지난 10년을 평가할 수 있는 다른 숫자들을 보자. 1998년을 기준으로 소득5분위 배율, 지니계수 등 소득분배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지표는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소득 5분위 배율(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 차이)은 1990~1997년 약 4배 정도에 머무르다 1998년 4.94배로 급등했고, 2007년 6.2배에 이르렀다. 1992년 0.256으로 최저치에 머물던 지니계수는 1997년 0.268로 약간 상승한 뒤 외환위기 이듬해 0.295를 기록하고는 계속 상승하다 2008년 0.325에 이르렀다.
삶의 질은 악화되었다. 한국 노동자들의 2008년 연간 근로시간은 2316시간으로 OECD 30개국 가운데 1위이다. 가난한 사람은 6번째로 많으며, 빈곤율은 0.15로 6위이다.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은 18.7명으로 3위이며 출산율은 2006년 기준 1.13명이고, 2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여가 시간은 주당 30.7시간으로 세계 평균(39.2시간)에 미치지 못하며, 평균 수면 시간은 하루 470분(7.8시간)으로 잠을 가장 적게 잔다.
삶에 대한 만족도 조사에서 한국은 100점 만점에 23.1점으로 최하위 수준인 24위이다. 한 해 동안 겪은 고통, 우울, 슬픔 등을 나타내는 부정적인 경험 수치도 61.5점으로 OECD 평균인 35.6점보다 높다. 한마디로 한국은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자지만, 가난한 사람은 많고 자살률은 높고 우울한, 행복하지 않은 사회이다. 삶의 불안은 비정규직이 850만 명까지 육박하고 있다는 사실로도 감지할 수 있다.
경제성장을 나타내는 숫자와 삶의 질을 보여주는 두 종류의 지표는 얼핏 보기에 서로 충돌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서민의 희생이라는 그늘을 드리운 경제 성장. 두 종류의 지표는 가진 자 및 기득권 세력에게는 ‘성공한 10년’이었고, 가난한 서민 및 보통 시민에게는 ‘잃어버린 10년’이었다는 한국 사회 10년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국정 과제는 권위주의 청산, 정치 개혁, 정경유착 탈피, 관료에 대한 민주적 통제 등 민주주의 개혁과 함께 외환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된 관치경제와 재벌을 개혁하고 중소기업을 강화하며 공정한 시장 경쟁 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 시장을 관료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효율성, 공정성, 경쟁성을 추구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적절하고도 옳은 방향이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 김대중 정권은 개혁 후퇴로 일관했다. 집권 전반기는 재벌개혁등 개혁 과제를 놓치지 않았으나 구조조정이 완료된 뒤 개혁은 사라지고, 시장에 의한 개혁은 시장 자율성으로, 이는 다시 시장 만능으로 발전하면서 시장은 곧 선이라는 맹목으로 빠져들었다.
시장 맹신과 재벌 집중으로 회귀 재벌 규제가 완화되면서 재벌의 독점과 집중 현상이 다시 나타났다. 외국 투기자본의 공격에 대한 보호책 없는 무분별한 개방은 한국을 외국 자본의 투기장으로 변모시켰으며 부동산 거품, 카드 사태 등 단기적 경기 부양책은 경제를 왜곡시키고 서민생활을 악화시켰다.
생산적 복지 개념을 도입, 기초 생활 보장의 초석을 놓고 의료 보험 통합, 국민연금 확대, 고용보험 확대, 국민기초 생활보장법 제정 등 사실상 최초의 복지정책을 펴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복지에 머물렀을 뿐이다. 사회적 합의제도인 노사정위원회를 구성, 정리해고와 노조 합법화를 상호 교환했으나 국제통화기금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음은 잘 알려진 바다.
김대중 정권의 개혁 포기는 시장주의라는 강력한 이념이 전 사회에 급속히 펴져나가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임기 말 측근 및 가족들에 의한 각종 권력형 부정부패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심각한 권력 누수 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환멸의 씨앗이 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 때 좌절된 사회 개혁에 대한 기대를 다시 불러일으키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참여정부 국정 운영 백서’는 그 기대를 감동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보도록 하자.
“참여정부는 국민들이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 압축적 근대화는 사회의 모든 부문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였고, 그로 인해 특권과 차별, 배제의 갈등구조가 형성되었으며, 공동체의 분열이 야기되었다. 참여정부는 이 같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한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여 지역, 계층, 성, 세대가 더불어 잘사는 균형사회를 실현하여 국민통합을 이루어낼 것이다.
사회적 불균형의 시정은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사회구성원 모두가 동등하게 경쟁에 임할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적 약자가 경쟁에서 기본적으로 배제되지 않고 참가할 수 있는 ‘국민적 최소한도’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감동적이었던 참여정부의 국정 목표 약자를 사회공동체의 테두리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적극적 차별해소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또한 사회적 부, 권력, 가치의 재분배를 통하여 계층간, 지역간, 중앙, 지방간, 양성간에 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균형발전사회는 경제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도모함으로써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 되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노동자에게도 좋은 나라가 되는 것이 균형발전 사회이다.… 관용과 배려는 공동번영의 기초이다.
기업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이윤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만 보지 않고 재생산을 위한 수요를 창출하는 요인으로 보고, 노동자들은 기업의 이윤을 자신의 소득향상을 위한 원천으로 볼 때 노사가 더불어 잘 사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 효율적 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구성원간에 협력을 위한 비용과 혜택에 대한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형평성은 협력의 핵심적 요건이다. 형평성의 기준은 수학적 평등으로 기계적으로 설정하기보다는 사회적 약자와 소외세력에 대한 우선적 배려를 고려하여야 한다. 특권과 차별을 없애고 사회적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은 불평등으로 인한 사회통합의 위기를 해결하는 기본 원리이다.(청와대 브리핑, 참여정부 국정운영 백서 중 <국정 목표와 국정원리>)”
노무현 정부가 스스로 제시한 의제는 특권과 차별의 철폐,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사회적 부 ․ 권력 ․ 가치의 재분배, 소수자나 약자 보호를 통한 사회적 균형 유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은 보수가 압도하는 사회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수준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실현한다 해도 일정한 진보적 성취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달성하지 못한 국정목표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정목표들은 달성되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가 키운 시장의 힘은 노무현 정부에 의해 배가 되었다.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를 시장의 원리에 위배된다며 반대하고, 법인세 ․ 특소세 인하, 출자총액 제한 ․ 지주 회사 등에 대한 규제 완화 조치를 통해 재벌은 독점적 경제권력과 사회 지배력을 높여갔다. 권력은 시장에게 넘어갔으나,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재벌 개혁하겠다는 정권은 재벌에 의탁하는 정권으로 변질되었다. 삼성공화국의 파트너로 전락한 노무현정권은 삼성의 비전인 2만 달러 시대를 노무현 정권의 비전으로, 삼성이 던진 의제는 노무현 정권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심지어 참여정부의 요직 인선에 관해 삼성에 자문을 구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법조계에 이른바 떡값을 뿌리는 내용을 녹음한 삼성 X파일의 진실을 찾아내려는 언론과 시민사회의 줄기찬 노력에 대해 “녹음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도청이 본질”이라며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당시 노대통령이 삼성과 이회장을 옹호한 배경이 의아하게 여겨졌지만,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이라는 사회적 합의 없는 돌발적 개방도 추진되었다. 이와 같은 갑작스레 한국의 미국화, 좌파든 신자유주의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무원칙과 정체성 및 국정 방향의 상실은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노대통령이 명명한 신종 실용주의 노선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그에게 붙은 좌파 딱지는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보수세력이 보낸 트로이의 목마였다고 할 정도로 시장주의로 내달리면서 진보개혁 내부를 와해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하는 정권, ‘진보 혹은 좌파가 신자유주의와 혼란스럽게 공존하는 정권’이라는 이미지도 얻었다. 보수세력은 흔히 좌파정권으로 불렀다.
풀어볼 가치가 있는 의문, '좌파정권'이었나? 이 의문은 풀어볼 가치가 필요가 있다. 사실 노대통령의 진보의 수사학 동원은 그리 잦은 편이 아니었는데도 진보 정권, 좌파 정권이라는 딱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은 야당과 보수언론을 자주 공격했고 그로 인해 보수 세력의 갈등이 잦았다. 이런 정치적 공세는 내용이 사실에 부합하는지와 상관없이 대중적으로 상당히 먹혀들었다.
그리고 민주화 운동 배경의 정권이므로 당연히 진보적일 것이라는 선입견도 작용했다. 그 외 대북 포용정책, 동북아 균형자 추구,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를 보수 세력이 좌파 정책으로 규정하고 비판해왔던 것도 여전히 정치 공세 차원에서는 유용했다고 할 수 있다.
노대통령에 대한 이런 공세는 그가 실제 한나라당에게 권력을 나눠 주기를 그렇게 열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설적이다. 노대통령은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개헌, 중선거구제 개편을 잇달아 제안하면서 정권을 보수정당에게 통째로 넘겨줄 있다는 발상을 할 정도로 갑작스럽고도 과격한 정치 개혁을 시도, 세상에 충격을 준 바 있다.
그는 서민들을 위한 사회 경제적 개혁을 약속하고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혁을 어떻게 실현할지 노력하기보다 개인적 결단에 의한 권력 구조 변화에 더 관심을 보였다. 지지세력의 열망을 업고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으면, 지지세력의 욕구를 국정 과제에 반영해야 했지만, 서민들의 이익을 무시한 독자적인 의제를 추구하고, 민주노총, 전교조와의 갈등을 넘어 투쟁하고, 노동운동에 대한 적개심까지 표출하며 지지기반을 해체했다.
이는 정치가 잘못되고 있다는 명백한 신호였지만, 그는 끝내 정치를 바로 잡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의 기능 자체를 마비시키는 반정치를 했다. 빈번하게 사려 깊지 않은 갈등 유발적 발언을 함으로써 사회 분열을 촉진하고, 반대세력을 결집시켰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반정치 이로 인해 자연히 국정 동력은 상실되고, 스스로 정치적 고립 상태에 빠져 들었다. 노무현 시대의 갈등은 노선과 정책을 둘러싼 것도 있지만, 불필요한 자극 발언에 의해 초래된 것도 적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이렇게 힘을 낭비하는 정치, 소모적 대결 정치를 했다.
이런 반정치, 분열의 정치, 배반의 정치, 해체주의 정치는 그의 탈권위주의, 권력기관의 정치화 배제, 지역균형 발전의 추구, 남북화해 노력 등 다른 업적을 가리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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