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가을 철학연구(대한철학회)에 실렸던 논문.
논문에서도 말했지만, liberum arbitrium은 자유의지 또는 자유선택이 아니라 자유결단으로 번역해야 옳다.
영어로는 free will이나 free choice가 아니라 free decision이 더 적합한 번역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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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 자유결단 이론의 의미와 한계
1. 들어가는 말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는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이 다루는 여러 특수 주제들 중에서도 오늘날 연구자들에 의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 이유는 당시의 다양한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항하여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던 토마스의 이론이 그 사유의 엄밀함과 근본성으로 말미암아 의지의 자유를 둘러싼 현대의 논의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이유 외에도, 토마스의 자유 이론이 현대의 토마스 연구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론되는 데에는 보다 특수하고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우리는 토마스의 자유이론 자체가 지니고 있는 하나의 중대한 해석의 난점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토마스의 자유이론이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1269년 혹은 1270년을 기점으로 의지의 자유에 대한 토마스의 이론에는 중요한 단절 혹은 변화가 감지되는 바, 이 변화를 전후로 하여 나타나는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론들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야말로 현대 토마스 연구자들에게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문제이다. 이 문제가 끊임없이 연구자들의 논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이 변화 문제를 올바로 해석해야만 토마스 자유이론의 정체성과 통일성을 파악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13세기의 논쟁사적 맥락 속에서 토마스 자유이론이 지니는 역사적 위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자유이론에 변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20세기 초반의 유명한 토마스 연구자 로땡(Dom O. Lottin)이었다. 그는 1920년대부터 토마스의 자유이론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토마스의 자유이론이 초기에는 주지주의적 특징을 띠고 있다가 후기에 주의주의적 입장으로 변화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12세기와 13세기의 심리학과 도덕(Psychologie et Morale aux XIIe et XIIIe siécles)������에서 토마스의 초기 저작인 ������진리론(De veritate)������에서는 의지가 지성의 실천적 판단을 필연적으로 따른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심리결정론(déterminisme psychologique)이 나타나고 있으나, 나중에 토마스는 자신의 이론이 자신이 비판해야 할 아베로에스주의자들에 의해 오용되는 상황을 목도하고 후기 저작에서 기존 이론을 수정하여 의지의 자기결정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자유이론을 형성했다고 주장한다.1) 이러한 해석은 그 이후 로너간(B. Lonergan), 클러버탠즈(G. Klubertanz), 리젠후버(K. Riesenhuber)등의 쟁쟁한 학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주었으며, 부분적인 비판이나 수정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어느 정도 일종의 공인된 해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 같다.2) 만일 이런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토마스 자유이론의 진정한 면모는 그의 후기 저작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며 초기의 이론은 후기의 성숙한 이론에 도달하기 위한 다만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자유이론의 변화는 심리결정론에서 출발하여 주의주의로 향하는, 상반된 입장으로의 방향 전환 혹은 노선의 전면적 수정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논문에서 다룰 주제는 로땡의 ‘변화 테제’가 제기하는 이러한 해석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토마스의 초기 자유이론, 즉 자유결단이론을 살펴보고 그 의미와 한계를 규명함으로써, 위에서 소개한 ‘토마스 자유이론의 변화’라는 문제에 올바로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기초적 시각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물론,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는 이 문제를 온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마스의 초기 이론과 후기 이론의 직접적,미시적 비교와 더불어 그가 당시의 논쟁 상대자들과 주고받았던 이론적 영향 관계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일 것이다. 더욱이 앞서 소개한 로땡 이후의 주요한 토마스 연구자들의 해석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비판 역시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번에 해결될 수 있는 과제들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논문에서 토마스의 초기 이론이 주지주의적 심리결정론의 특징을 띠고 있다고 했던 로땡 식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검토로 그 일차적 관심 대상을 제한하고자 한다. 우리가 제기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질문은 ‘토마스의 초기 자유이론이 과연 주지주의적 결정론의 혐의를 받을 소지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떤 한에서 토마스 초기 자유이론의 역사적 한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논의를 내실 있게 진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토마스의 다양한 초기 텍스트에 근거하여 자유결단 개념에 대한 그의 이해 방식과 증명 방식을 철저하게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3) 토마스는 12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를 수미일관 자유결단의 문제로 이해하고 자유결단이라는 용어를 통해 사유했다. 자유결단 이론에 대한 우리의 연구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이루어질 것이다. 먼저 우리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유결단이라는 개념의 일반적 의미를 간략히 고찰하고 토마스가 그 개념을 어떻게 받아들여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토마스 자신이 설정한 ‘과연 인간이 자유결단의 능력을 지니는가’라는 물음을 초점으로 삼아, 자유결단에 대한 토마스의 논증을 면밀히 분석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의지의 자유에 대한 토마스의 초기적 사변의 근본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앞에서 제기한 두 가지 구체적인 질문의 해답을 구하는 보다 논쟁적이고 해석적인 논의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에서 우리는, 토마스 자유결단 이론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그 한계가 자유결단이라는 역사적 용어 자체가 지니고 있는 이론적 문제 지평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2. 자유결단 개념의 의미
토마스가 사용하고 있는 자유결단(liberum arbitrium)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대단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 그것은 신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나타났던 ‘autexousion(자발)’이라는 개념의 라틴어 번역어로서 등장한 말이다. 자유결단이라는 말은 이미 초기 교부들에 의해 자유롭게 원욕(願慾)하는 인간의 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하나의 전통적 용어로 굳어지게 되었다.4) 그리하여 우리는 예컨대 안셀무스나 베르나르도 클레르보같은 초기 스콜라 신학자들에게서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가 이 용어를 통해 제기되고 논의되는 전형적인 상황을 관찰할 수 있다.5) 이러한 개념적 전통은 토마스의 시대에도 여전히 이어져서, 토마스 역시 당시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와 보나벤투라와 마찬가지로 이 용어를 통해 자신의 자유이론을 전개한다.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토마스의 시대에 와서 이 개념에 대한 보다 ‘철학적’이고 보다 명료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자산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이었다.6) 그리하여 토마스의 자유결단 개념에 있어 두드러지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받아들인 이 용어의 의미를 ������니코마코스윤리학������의 수용을 통해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선택(prohairesis)’ 개념을 원용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7)
자유결단이라는 중세적 개념이 담고 있는 일반적인 의미는 오늘날 현대의 철학자들이 ‘의지의 자유’라는 말로 표현하는 의미 내용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liberum arbitrium’이라는 용어를 그 표면적인 의미 대응만을 쫓아 단순히 ‘의지의 자유’ 혹은 ‘자유의지’라고 옮길 수는 없다. 그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의지’에 해당하는 라틴어 용어 ‘voluntas’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8) 두 번째 이유는, 인간 영혼의 특정한 능력을 가리키는 그 개념의 해석을 둘러싸고 중세 이론가들 사이에 심각한 의견의 불일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자유결단의 본질이 의지가 아니라 지성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자유결단의 본질이 의지에 있다고 보는 사람들 가운데에서조차도 그 관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자유결단보다 더 심한 의미의 동요를 겪었던 용어는 없었다는 질송의 말에서도 압축적으로 드러난다.9) 우리는 자유결단에 대한 의지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코롤렉(J. B. Korolec)이 올바로 지적하고 있듯이, 의지 그 자체는 보통 이성적 욕구, 혹은 이성에 의해 파악된 선에 대한 욕구로 정의되지, 여러 대안들 사이의 선택 혹은 결단의 능력이라고 정의되지는 않기 때문이다.10)
그렇다면 토마스는 자유결단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토마스의 이해방식은 당시의 유력한 사상가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보나벤투라의 이해방식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는 자유결단이 의지와도 구분되고 지성과도 구분되는 제삼의 영혼능력이라고 보았고, 보나벤투라는 자유결단이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의지와 지성의 협력 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습성(habitus)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11) 이에 대해 토마스는 자유결단이 분명한 하나의 영혼 능력이기는 하지만, 이성 및 의지와 구분되는 제삼의 능력도 아니고 이성과 의지가 본질적으로 합성되어 이루어진 능력의 어떤 습성도 아니라고 보았다. 토마스의 입장은, 자유결단은 의지와 구분되는 어떤 독자적인 영혼능력이 아니라, 의지가 선택의 활동과 관련하여 지니는 규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12) 토마스의 이러한 이해가 원욕(願慾, velle, wollen)과 선택이 다른 종류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토마스는 원욕을 목적에 대한 의지의 활동으로 규정하고 선택이란 그 목적을 위한 수단에 관계하는 활동으로 규정한다.13) 이 두 가지는 분명 상이한 종류의 활동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이한 종류의 활동이라고 해서 그것들이 반드시 상이한 종류의 능력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14) 예컨대 이해(intelligere)와 추론(ratiocinari)이 분명 상이한 인식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지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능력에서 나오는 활동들인 것처럼, 원욕과 선택 역시 상이한 종류의 활동이기는 하지만 모두 의지에서 나오는 활동이다. 즉 토마스가 주장하는 핵심은, 하나의 동일한 능력인 의지가 목적에 대한 원욕(velle)의 원리인 한에서는 의지로, 수단에 대한 선택(eligere)의 원리인 한에서는 자유결단으로 불린다는 것이다.15) 이것은 하나의 동일한 능력이 지성(intellectus)이 직접적 이해의 원리인 한에서는 단순히 지성으로, 추론 활동의 원리인 한에서는 이성(ratio)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3. 자유결단의 증명
이제까지 우리는 자유결단에 대한 토마스의 형식적 개념 규정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자유결단을 증명하는 토마스의 논변을 통해, 자유결단의 근본적 근거와 의미를 파악해보도록 하자. 우리의 논의의 실마리는 ‘인간이 과연 자유결단을 지니는가’라는 토마스 자신의 물음이다. 이것은 1270년 이전, 구체적으로 말해 ������악론������ 제6문과 ������신학대전������ 2부 1편 이전까지 토마스가 의지의 자유를 연구할 때 제기하는 전형적인 물음으로서,16) 이러한 물음의 형태 자체가 토마스 초기 자유이론의 특징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 인간이 자유결단을 지닌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 인간의 결단을 굳이 자유로운 결단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답하기 위한 가장 일차적인 관건은 수단에 대한 의지의 비결정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1) 수단적 선에 대한 의지의 비결정성
의지는 언제나 인식하는 지성과 함께 작용한다. 즉, 의식적 욕구 혹은 지성적 욕구로서의 의지의 원욕 활동은 지성이 선으로 파악하여 의지에게 제시하는 대상을 향한다. 그런데 의지와 함께 작용하는 인식능력으로서의 지성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특수한 지위를 지니고 있다. 즉, 지성은 그 활동에 있어 질료적 기관에 의존하지 않는 정신적 인식능력이기 때문에, 그 대상 범위는 특정한 질료적-감각적 속성을 지닌 사물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성적 인식은 원칙적으로 모든 존재자에 접근가능하며, 존재자 그 자체를 본래적 대상으로 한다. 이렇게 지성의 인식 대상이 원칙적으로 제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성과 함께 작용하는 의지에게도 그가 지향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대상의 영역이 열리게 된다. 다시 말해, 지성에 의해 인식된 선은 어떤 특정한 관점에서 선으로 나타나는 개별적인 사물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 그 자체 혹은 보편적 선(bonum universale)이며, 따라서 이러한 선의 형상 하에 포괄되는 모든 것은 의지 활동의 대상이 될 수 있다.17)
의지가 어떠한 개별적인 유한한 선에 의해 필연적으로 움직여지는 능력으로 규정되지 않는 까닭은, 방금 살펴보았듯 의지의 형상적 대상이 그 범위에 있어 제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18) 만일 의지가 부분적으로 선한 어떤 특정 대상을 향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선 일반 즉 자신의 형상적 대상을 향한 근원적인 지향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유한하고 제한적인 그 특정 대상의 선성이 의지를 필연적으로 운동시키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한하고 부분적인 선성을 지니는 대상이 아니라 모든 관점에서 선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는 어떤 완전한 대상이 주어질 경우에는 어떠할까? 그런 경우에는 의지가 그 대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피할 수 없을 일일 것이다. 토마스가 인간의 최종 목적(finis ultimus)이자 최고의 선(summum bonum)이라고 부르는 지복(至福, beatitudo)이 바로 이러한 대상이다. 의지가 최종 목적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은 의지의 본성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19) 최종 목적을 향한 욕구 혹은 경향성은 인간 의지의 뿌리와도 같은 것이어서, 의지 자체가 소멸되지 않는 한 이러한 경향성도 사라지지 않는다. 의지는 본성적으로 - 다시 말해 외부적 강제에 의하지 않고 - 이 최종 목적을 향하며, 인간에게 이러한 본성적이고 필연적인 경향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결정권 안에 있는 사항이 아니다.20)
여기서 우리는 최종 목적에 대한 의지의 필연적 고착이라는 사실과 관련하여 한 가지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만일 의지가 최종 목적을 ‘필연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다면 자유결단이라는 관념은 허구가 아닐까? 그러나 토마스는 최종 목적에 대한 필연적 추구와 의지의 자유가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토마스의 근거는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앞서 말했듯 의지가 최종 목적을 추구하는 필연성은 외부에서 부과된 강제가 아니라 의지의 내적 본성 자체에 속하는 것이다. 자유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자연적 필연성이 아니라 다만 강제(coactio)로서의 필연성일 뿐이다.21) 둘째, 최종 목적이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관점에서 선하고 적합한 것으로서 의지에게 제시되는 무제한적 선이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인식되고 추구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의지가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특정한 수단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최종 목적과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은 수많은 유한한 선들에 대해 의지는 전혀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유한한 개별적 선들에 대한 의지의 비결정성(Indeterminiertheit)은 최종 목적 혹은 최고선에 대한 필연적 경향성과 전혀 모순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22) 오히려 개별적 선들에 대한 비결정성이 이 최종 목적에 대한 필연적 경향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해야 더 옳을 것이다. 의지가 그 필연적 대상으로서의 최종 목적에 지향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부분적이고 개별적인 선들에 어느 정도 거리를 취하고 그것들을 ‘수단으로서’ 욕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지에게 주기 때문이다.
2) 의지의 결단이 ‘자유로운’ 결단인 이유
의지는 유한하고 부분적인 수단적 선들에 대해 결코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자유결단은 바로 이러한 수단에 대한 의지의 비결정성이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어떤 피조물도 그의 활동들이 개별적인 선을 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면, 자신의 활동에 대한 지배권을 지닐 수 없을 것”23)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 일반에 대한 의지의 원칙적 개방성과 유한한 선에 대한 의지의 비결정성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결단의 자유에 대한 충분한 증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의지가 유한한 선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은 결단의 자유의 본래적 의미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자유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 또는 자유의 한갓된 가능조건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이다.24) 따라서 우리는 의지가 개별적 선들에 대한 단순한 비결정성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적으로 수행하는 결단의 활동에 눈을 돌려, 그 현실적인 결단의 활동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물음을 제기하고 결단 활동의 구조를 분석했을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비결정성에 근거한 의지의 결단이 왜 굳이 ‘자유로운’ 결단으로 불려야 하는지, 다시 말해 의지의 비결정성이 어떤 의미에서 결단의 자유를 의미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지는 목적을 원욕함으로써 수단을 원욕한다. 그런데 특정한 유한적 선에 대한 결단이 내려지는 것은, 그 유한선이 목적에 비추어 보았을 때 유용하고 적합하다고 지성이 판단하고 그 최종적인 실천적 판단을 의지가 따르는 한에서이다. 그러므로, 수단을 향한 구체적인 의지의 활동으로서의 결단은, 의지의 본성에 내재하는 목적을 향한 경향 뿐 아니라 적합한 대상에 대한 인식능력의 판단을 전제한다.25) 토마스는 결단 행위를 낳는 이러한 판단의 고유한 특성을 탐구함으로써 결단의 자유를 입증하고자 한다. 결단 혹은 선택 활동과 연결되어 있는 지성의 판단은 어떤 고유한 특성을 지니는가? 그것은 합리성이라는 특성이다. 즉 지성의 판단은 합리적 판단(iudicium rationale)이다. 합리적 판단이란 어떤 사람이 수단의 선성이나 적합성을 판단함에 있어 목적의 의미(ratio finis)와 목적에 대한 수단의 관계를 인식하고 있을 때 성립하는 것이다.26) 그리하여 지성의 능력을 지닌 인간은 그가 어떤 목적을 원욕하고 어떤 수단을 그 목적에 적합한 것으로 판단할 때, 그가 이 목적을 욕구한다는 사실과 이 목적 때문에 그 수단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27)
이렇듯 인간의 결단은 언제나 지성의 합리적 판단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합리적 판단이란 곧 반성적 판단을 의미한다. 인간은 지성으로써 목적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가 왜 그렇게 판단하고 그렇게 결단하며 그렇게 행동하는지를 판단의 목적에 비추어 다시금 판단할 수 있다. 토마스는 ������진리론������ 제24문 제1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의 힘으로 행위들에 대해 판단하는 인간은, 그가 목적과 수단의 의미, 그리고 그 양자 간의 관계와 질서를 인식하는 한에 있어 자신의 결단에 대해 판단한다.”28) 토마스는 자유결단의 본래적 근거가 인간이 자신의 판단과 결단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바로 이러한 능력 안에 있다고 본다. 여기서 토마스가 전개하는 논변의 핵심적 구조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판단하는 자가 자신의 판단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한에서, 판단은 판단하는 자의 힘 안에 있다.29) (2) 판단의 근거를 인식하고 그로써 자신의 판단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자, 다시 말해 자신의 힘 안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만이, 자신의 행동의 원인일 뿐 아니라 본래적 의미에서 자신의 판단의 원인이기도 하다고 말해질 수 있다.30) (3) 그런데 ‘자유롭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자기원인(sui causa)이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31) (4) 따라서 자신의 결단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그로써 자신의 결단의 원인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이성적 존재자의 결단은 ‘자유로운’ 결단이다.
이로써 토마스는, 인간은 합리적 판단 혹은 반성적 판단의 능력을 지닌 한에서 자유결단의 능력을 지닌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이 자유결단 능력을 지닌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표지는, 인간이 자신의 결단을 통해 어떤 것을 행할 수도 있고 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있다. 토마스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자기 행위의 주인이라고 불린다고 설명한다.32) 토마스가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 자기 행위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dominium)은 바로 이러한 자유결단의 능력에 근거한다.33) 자유결단의 능력과 이 능력이 가능하게 하는 자기 행위에 대한 지배권, 토마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자유(libertas)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34)
4. 토마스의 자유결단 이론은 주지주의적 심리결정론인가?
이제 우리는 토마스 자유결단 이론에 대한 보다 논쟁적이고 해석적인 논의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논의의 초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은, 토마스의 이러한 자유결단 이론이 과연 로땡이 주장하듯이 주지주의적 심리결정론의 특징을 띠고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이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토마스의 자유결단 이론의 주지주의적 특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토마스 자유결단 이론의 주지주의적 특징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토마스는 결단의 자유를 개별적 선에 대한 의지의 결단 과정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지성적 판단의 고유한 특성을 규명함으로써 증명한다. 단적으로 말해, 토마스의 논변에 따르면 자유결단의 능력은 결국 자유로운 판단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판단의 원인이기 때문에 그 판단을 따르는 결단의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토마스가 결단의 자유를 반성적이고 자유로운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 즉 이성으로 소급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토마스는 “전체 자유의 뿌리는 이성 안에 있다.”35)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결단은 지성적 능력을 지닌 존재자에게만 속하며, 인간은 그가 지성적 존재자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유결단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36)
자유결단을 자유로운 판단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끌어내는 이러한 증명 방식은, ������신학대전������ 제83문 제1항에서도 다시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토마스는 자유결단을, 인간의 실천적 이성이 우연적 작용대상들과 관련하여 어느 하나에 필연적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고 비결정성을 지닌다는 사실로부터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판단으로써 행위한다. 그가 인식의 능력을 통해 어떤 것을 피해야 한다고 혹은 추구해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은 자연적인 충동에 의해 개별적인 작용 대상들(particularia operabilia)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의 비교에 의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로운 판단으로써 행위하며 다양한 사물들을 향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이성은 우연자들(contingentia)에 대해서는 대립자를 향한 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연적 논증과 수사학적 설득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다. 그런데 개별적 작용대상들은 우연자들이다. 그러므로 이 개별적 대상들과 관련하여 이성의 판단은 다양한 사물들을 향할 수 있으며 한 가지 결과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바로 이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결단이 속하는 것은 필연적인 바, 이는 그가 이성적이기 때문이다.”37)
여기서 우리는 토마스가 의지의 결단과 지성의 판단 사이에 존재하는 밀접한 개념적 연관성과 더불어, 의지와 지성의 어떤 특정한 평행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판단의 비결정성과 결단의 비결정성을 동시에 말할 수 있게 하는 의지와 지성의 이러한 평행 관계는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그것을 ������신학대전������ 제82문 제2항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지성이 본성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제일원리들에 고착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지는 최종 목적에 고착되어 있다. 그런데 제일원리들에 대해 필연적인 연관성을 지니지는 않는 어떤 지식내용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그것들을 제거한다고 해서 제일원리들마저 제거되어버리지는 않는 우연적 명제들이 그것이다. 지성은 이런 명제들에 대해 필연적으로 동의할 필요가 없다. (...) 의지의 경우에도 사정은 유사하다. 지복에 대해 필연적인 연관성을 지니지 않는 개별적 선들이 존재한다. 그것들 없이도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에 의지는 필연적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다.”38)
우리는 지성과 의지의 평행적 관계에 대한 이 설명을 토마스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의지의 자유에 대한 직접적인 논거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즉, 토마스는 여기서 의지의 활동이 필연성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우연적 인식 대상들에 대한 이성의 실천적 판단과 평행 관계에 있는 부분선에 대한 의지의 비결정성으로써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단히 주지주의적 증명 방식이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엄밀하게 말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자유결단에 대한 토마스의 증명들만을 놓고 보면, 토마스는 언제나 의지의 자유를 인간 인식능력의 반성성이나 비결정성으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 같다. 의지의 자유가 지성적 인식능력의 차원에서 해명되는 한,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의지의 자유, 즉 지성에 대한 의지의 자율성으로서의 자유 혹은 의지의 독자적 자기결정으로서의 자유는 논의의 주제로 부각되지 못한다. 토마스가 초기 저작에서 의지의 비결정성과 지성의 비결성성 사이에 존재하는 구조적 평행성 뿐 아니라 의지와 지성의 상호적 운동 관계 또한 깊이 있게 연구했다는 점, 그리하여 지성이 의지를 규정할 뿐 아니라 의지가 지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 또한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39) 토마스가 의지의 자유에 대한 증명에 있어서 유독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주지주의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의외로 보이기까지 한다. 물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주지주의적 증명 방식은 당시 토마스가 처해 있었던 나름의 문제 지평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주지주의적 특징들이, 로땡과 같은 연구자들이 토마스 초기 자유이론을 심리결정론으로 해석하는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2) 토마스의 자유결단 이론은 심리결정론인가?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유결단을 자유로운 판단으로부터 이끌어내는 토마스의 논증 방식은, 결단과 판단의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토마스의 자유결단 이론을 심리결정론으로 간주하는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기 위해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판단과 결단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판단과 결단의 관계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가장 먼저 던져볼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은, 결단과 판단이라는 것이 결국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활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토마스는 하나의 활동이 지닌 인식적 측면과 욕구적 측면을 각각 판단과 결단이라는 다른 개념으로 부르는 것이 아닐까? 즉, 판단과 결단의 구분은 실제적 구분이 아니라 관점에 따른 구분 혹은 개념적인 구분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사실 토마스의 텍스트 자체가 이러한 의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소지를 어느 정도 담고 있다. 토마스가 자유결단이라는 용어와 자유로운 판단이라는 용어를 아무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는 듯한 구절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40) 심지어 ������이교도대전������에서 토마스는 자유결단을 “이성에 의한 자유로운 판단(liberum de ratione iudicium)”41)이라고까지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결단의 활동과 판단의 활동을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보는 관점, 즉 자유결단이 사실상 최종적인 실천적 판단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관점은, 적어도 토마스적 사고원리를 준수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관점이다. 토마스는 하나의 동일한 활동이 결코 두 종류의 동등한 능력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다고 본다. 즉, 의지와 지성이라는 두 능력이 하나의 동일한 활동에 동등한 원리로서 공동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결단 혹은 선택의 활동에는 의지와 지성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의지와 지성은 결코 동일한 차원에서 이 활동에 대한 원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42) 즉, 의지는 작용인의 의미에서 실체적으로 결단의 활동을 만들어내고 지성은 다만 의지의 작용을 위한 목적의 제시라는 역할을 할 뿐이다.43) 따라서 결단의 활동이 판단이라는 인식적 계기를 포함하며 따라서 지성의 능력과도 관계되어 있다고 해서, 결단이 본질적으로 욕구능력 즉 의지의 활동이라는 분명한 사실이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44) 결단에 지성이 참여하되 결국은 의지의 활동인 것과 마찬가지로, 판단의 활동이 있기 위해서는 의지의 작용 역시 개재되어야 하지만 결국 판단은 실체적으로는 지성에 귀속되는 일종의 인식활동이다. 그러므로 결단 혹은 선택은 현실적으로 최종적 실천적 판단과 동시에 일어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양자를 결코 실체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활동으로 볼 수는 없다.45) 토마스가 자유결단이 마치 자유로운 판단과 동일한 것처럼 표현하는 것은, 다만 자유결단의 인식적 근원(origo)이라는 측면을 분명하게 나타내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는다.46)
결단과 판단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두 번째로 던질 수 있는 물음은, 결단은 과연 지성의 판단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과연 의지는, 욕구할 만한 것이라고 지성이 판단하고 제시한 것을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가? 이것은 우리의 논의 문맥상 보다 직접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물음이다. 로땡은 이 물음에 대해 초기의 토마스가 긍정적으로 답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그의 이론을 심리결정론으로 평가했다. 로땡은 토마스의 ������진리론(De veritate)������ 제24문 제2항을 독해하면서, 여기서 토마스가 자유란 본래적으로 의지의 영향력 안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대상에 묶여 있지 않은 실천적 판단의 비결정성에 근거하고 있다고 이해했으며, 또한 의지는 ‘지금 여기서 선택되어야 할 것’에 대한 실천적 판단의 결정을 필연적으로 따른다고 이해했다고 해석한다.
토마스가 의지의 결단이 지성의 판단을 필연적으로 따르는가라는 문제를 초기 저작에서 체계적으로 다루거나 해명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토마스의 텍스트를 면밀히 관찰해보면, 로땡의 결정론적 해석이 토마스 자유결단 이론의 주지주의적 요소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서 기인하는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우리는 다음의 구절에서 로땡의 심리결정론적 해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토마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선택은 어떤 것이 쫓아야 할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최종적 수취(受取, acceptio)이다. 이것은 분명 이성의 일이 아니라 의지의 일이다. 이성이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선호하더라도, 의지가 그것에 더 기울어질 때까지 그것은 활동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의지는 이성을 필연적으로 따르지는 않기 때문이다.”47)
여기서 토마스는 결단 혹은 선택의 활동은 결코 이성적 판단을 통한 인식 활동으로써 완성되지 않으며, 오히려 지성이 선택의 대상으로 제시한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된다고 본다. 여기서의 받아들임 즉 수취함(accipere)이란, 수동적 의미보다는 의지 편에서 발휘되는 자발적이고 능동적 계기로서의 의미를 더 지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의지가 자기 자신을 지성의 판단에 일치시키는 행위, 즉 지성의 판단을 현실적인 선택으로 전화시키는 행위이다. 의지는 지성이 제시한 선이라 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지성으로 하여금 또 다른 대안을 숙고하도록 만들 수 있다. 지성이 제시한 선한 대상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토마스가 강조하듯이 전적으로 의지의 사안일 뿐이다.48) 선택 활동이 현실적으로 수행되는 이 능동적 수취의 계기 속에서 토마스는 지성의 판단을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의지의 능력을 간파하고 있다. 따라서 최종적인 결단 혹은 선택이 일어나기까지 지성과 의지 사이의 잠정적인 불일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49) 현실적인 결단 활동이 일어나는 순간 지성과 의지 사이의 불일치는 해소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지의 결단이 지성의 최종적인 실천적 판단으로 해소되는 것도 아니며 그 불일치의 해소가 지성의 판단 본위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결정적인 것은 선택 가능성을 제시하는 판단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의지의 힘이며, 따라서 지성의 판단을 비로소 ‘최종적’ 판단으로 만드는 것은 의지이기 때문이다.50)
3) 주지주의적 특징에 대한 재론
지성에 대한 의지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토마스 초기 저작의 이러한 전거들을 로땡식 해석의 추종자들이 완전히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이러한 부분적인 ‘주의주의적’ 요소들이 토마스 초기 이론이 기본적으로 심리결정론이라는 사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본다. 그들은 주지주의적인 심리결정론과 의지의 자율성에 대한 인정이라는 주의주의적 요소가 토마스의 초기 사상에 혼재되어 있다고 보며, 주의주의적 변화가 일어나는 후기 저작에 가서야 비로소 이러한 동요가 사라진다고 본다.51) 그러나, 일견 융통성이 있어 보이는 이러한 해석의 가장 큰 약점은 상이한 이론적 요소들 사이의 양립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단순한 ‘동요’와 ‘혼재’를 말하면서 토마스 초기 이론의 통일적 해석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포기해버린다. 토마스가 하나의 이론을 취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와 반대되는 이론으로 입장을 선회했다는 해석이야 형식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해석일 수 있지만, 토마스가 동일한 시점에 작성한 하나의 저작 안에서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이론들을 동시에 표명하고 있었다는 해석은 간편한 해결책일지는 모르나 상식적 개연성의 차원에서도 최소한의 설득력을 지닌 해결책이라고 보기가 힘들다.
모순적 이론을 동시에 무매개적으로 인정하는 이러한 해석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은, 앞서 살펴본 토마스 자유결단 이론의 주지주의적 특징이 결코 심리결정론적 결론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토마스가 자유결단이 이성적 판단에 의해 가능하고 따라서 이성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할 때, 그의 이 말은 결단의 자유가 이성적 판단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니고 의지가 판단의 내용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한갓된 수행의 계기에 불과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의 말은, 인간의 결단이 도대체 자유로운 결단이기 위해서는 그 결단의 활동이 이성적이고 반성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이어야 한다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가 ‘주지주의적 증명’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로운 결단을 내릴 수 있기 위해서 인간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그것을 왜 원하는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이성적-반성적 결단의 가능조건은 이성적 판단의 능력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일 뿐이다.52)
따라서 우리는 토마스 자유결단 이론의 주지주의적 특징을 다만 의지의 자유에 대한 증명 형식에 국한된 것으로 엄밀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심리결정론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또한 마찬가지로 지성에 대한 의지의 자율성에 대한 충분하고 적절한 해명도 될 수 없다. 이렇게 토마스의 자유결단 이론을 엄밀하게 제한된 의미의 주지주의적 이론으로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만 시야를 넓혔을 때 발견되는 소위 주의주의적 전거들, 즉 지성에 대한 의지의 독자적, 자율적 운동 가능성을 인정하는 전거들이 토마스 자유결단 이론의 주지주의적 특징들과 해석적 충돌 없이 통합적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우리는 토마스의 자유결단 이론을 살펴보고 또한 그에 대한 심리결정론적 해석의 문제점을 밝혀보았다. 우리가 자유결단 대한 토마스의 텍스트들을 분석함으로써 밝혀낸 핵심적인 사실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토마스는 의지의 자유를 자유결단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힘 안에서 판단하는 반성적 판단으로부터 증명한다. 둘째, 그러나 토마스는 한편으로 지성의 판단에 일방적으로 복속되지 않는 의지의 자율적 운동의 가능성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외관상 이질적인 요소로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해 어디까지나 양립 가능한 입장들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요컨대, 자유결단에 대한 ‘주지주의적 증명 방식’의 실질적 함의가 반드시 ‘주지주의적 심리결정론’이어야 할 까닭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토마스의 초기 자유이론이 지닌 이 두 가지 측면 - 즉 자유결단에 대한 주지주의적 방식의 증명과 의지의 자율적 자기결정 가능성의 인정 - 이 그 자체로 서로 적극적인 이론적 친화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즉, 자유결단에 대한 주지주의적 방식의 증명은 의지의 자율성에 대한 인정과 모순을 이루지 않을 뿐이지, 의지의 자율성이 적절하게 해명될 수 있는 충분한 토대가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상적 측면들 중에서 토마스 초기 자유이론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첫 번째 측면, 즉 자유결단에 주지주의적 증명의 논변이다. 의지의 자율성 혹은 자기결정의 문제는 독자적인 논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여타의 문맥 속에서 부수적으로 다루어지면서 원칙적인 인정을 받을 뿐이다. 그런 한에서 우리는 토마스 초기 자유이론이 지성과 의지에서 평행적으로 나타나는 반성적 자유라는 다분히 주지주의적 자유 개념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 의미의 자유, 즉 지성에 대한 의지의 자율성 혹은 자기결정으로서의 자유를 충분히 주제화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언급한 이러한 한계는 자유결단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닌 역사적 한계성이기도 하다. 자유결단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초기 자유이론 뿐 아니라 13세기 초중반의 자유이론 전반을 규정하는 개념이었다. 13세기 초의 알렉산더 할레스, 요한네스 로셸, 상서국장 필립 같은 인물들 뿐 아니라 보나벤투라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경우에도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는 철저히 자유결단 개념을 통해 탐구된다.53) 이러한 자유결단에 대한 탐구의 중심은 언제나 자유결단의 심리학적, 형이상학적 본성과 구조에 대한 물음이었다. 즉, 자유결단의 능력이 본질적으로 의지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지성에 근거하는가, 또는 의지와 지성의 어떠한 관계 구조가 자유결단의 능력을 구성하는가가 탐구의 초점이었다. 그러나 1260년대 후반부터 비로소 문제 지평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즉 의지의 자유를 자유결단이라는 특정한 능력의 본성으로부터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의지의 운동이 지니는 고유한 특성으로서 설명하려는 이론적 노력이 생겨난다.54) 이러한 새로운 이론적 문제 지평에서 핵심적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의지의 대상이 의지의 운동에 어떤 인과적 영향을 미치는가, 그리고 의지의 운동은 여타의 자연적 운동들에 대해 어떠한 고유한 차이를 지니는가라는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을 통해 의지와 지성의 불일치 혹은 갈등의 가능성, 그리고 지성에 대한 의지의 자율적 자기결정의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탐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토마스 자유이론의 ‘변화’는 이러한 문제 지평의 이동과 무관하지 않다. 토마스 자신도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점점 자유결단이라는 용어 대신 의지의 자유(libertas voluntatis) 혹은 자유로운 의지(voluntas libera)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결단(arbitrium)이라는 전통적 용어 자체도 선택(electio)이라는 좀 더 시대적이고 ‘철학적인’ 용어에 의해 대체된다. 그리하여 1270년 이후의 텍스트에서 자유결단, 혹은 결단이라는 용어는 그 의미의 중요성을 상실하고 다만 산발적으로 사용될 뿐이다.55) 1270년대 이후 ������신학대전������ 2부 1편과 ������악론������ 6문에서 그가 제시하는 의지의 자기운동 이론은 그의 시야가 근본적으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지에 다름 아니다. 이 단계에 와서야 의지의 자유는 결단의 자유로 제한되지 않고 본래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의 영역을 획득한다. 물론 토마스는 후기 저작에서도 끝까지 당시의 주의주의자들과는 뚜렷한 입장 차이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의지의 자기운동 이론을 통해 적극적 의미의 의지의 자유를 논구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공동의 문제 지평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토마스 자유이론의 변화에 대한 논쟁을 온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토마스의 초기 이론 뿐 아니라 후기 이론에 대한 연구와 양자의 면밀한 비교, 그리고 당시의 전반적 이론적 정세와 논쟁 관계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본 논문에서 다루지 못한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밝혀낸 토마스 자유결단 이론의 의미와 한계는, 향후의 연구에 따른 종국적 해석의 방향을 이미 어느 정도는 암시하고 있다. 만일 토마스의 초기 자유이론이 심리결정론의 한 형태라면, 토마스 자유이론의 변화는 상반되는 입장으로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밝혀낸 바, 토마스의 초기 자유이론이 심리결정론과 무관하고 주지주의적 특징 역시 엄밀히 말해 자유결단의 증명 형식에 국한된 것인 한에서, 소위 이론의 ‘변화’라는 것은 근본적인 입장의 전환이나 노선의 수정이라기보다는 다만 문제 지평의 확장에 따른 논의 중심의 변화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본 논문의 연구를 통해 마련한 기초적 시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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