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2009-05-29 오후 07:21:17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7692.html
‘일반’은 없다, 미적으로 타당한 개인이 있을 뿐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⑩ 크리스토프 멩케 Christoph Menke
크리스토프 멩케는 독일 포츠담대 윤리학·미학 교수이자 인권중앙위 공동대표다. 통상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 철학자로 분류되며, 특히 아도르노 미학을 계승한 독보적인 비판이론가로 평가된다. 하이델베르크/콘스탄츠 대학에서 철학·독문학·예술사를 수학했고, 베를린자유대에서 교수자격 논문을 제출했다. 박사논문인 ‘예술의 지고성’을 통해 세계적인 차세대 미학자로 주목을 받았다. 지성계에서의 학술활동뿐 아니라, 인권운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유일한 인권이 존재한다는 이념을 포기해야 한다. 인권은 결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많은 특수한 방식에 따라 이해되고 설명된다…‘미학의 시대’인 현재, 심미적인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예술의 과제는 심미적인 것이 지닌 비판적인 힘을 지키는 것이다.
헤겔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화해할 수 없는 실천적 갈등 상황을 형상화한 것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는 근대의 자율적 주체가 이성의 원리에 기초해 실천적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함으로써 비극은 극복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크리스토프 멩케의 철학적 반성은 근대를 비극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다. 곧 헤겔이 생각한 것과 달리 근대의 윤리·정치적 질서는 화해 불가능한 갈등에 빠져 있으며, 이는 본성상 이성적 반성을 통해 극복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자유주의 철학자들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들 역시 근대는 환원 불가능한 가치 다원성의 시대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규범 질서를 통해 이런 다원성이 규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달리 멩케는 근대성의 규범적 질서 자체가 근원적으로 갈등적이라고 주장한다. 그 갈등의 핵심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평등의 원리가 항상 구체적이고 저마다 상이한 조건에 놓인 개인들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보편적 평등의 원리와 구체적 개인들의 고통 사이의 괴리는, 줄일 수 없는 영원한 인간적 한계일까?
멩케는 한편으로 비판적 성찰을 통해 규범적 원리를 정초하려는 비판이론의 전통과,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고통에 대한 연대에 근거를 둔 아도르노의 통찰을 결합하여 이러한 괴리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독일에 있는 멩케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멩케의 생각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최근 저작 <비극의 현재>는 매우 독창적인 비극론이다. 이 책은 비극을 서구 문화의 근본 토대로 설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 행위의 보편적·근원적 구조로서 간주하는 것인가?
“둘 모두 맞다. 비극은 인간 행위의 보편적인 사태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행위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좌초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다. 우리가 아무 허물도 없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 비극적인 것의 본래적인 구조가 아니다. 우리가 이런 인간적인 근본조건을 벗어나고자 할 때, 비로소 비극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서양 문화의 기본 동인(動因)을 발견한다. 서양 문화는 학문과 법(법칙)을 통해 실패 가능성을 배제하려고 한다. 비극 형식은 성공을 확실하게 하려는 이런 계획에 대한 반성으로 출현했다. 비극은 우리가 실수를 배제하려는 시도를 기획해야 하지만 동시에 이런 기획이 처참하게 좌초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비극은 서구 문화(계몽)의 내적인 자기모순을 펼쳐 보인다.”
-당신은 최근 인터뷰에서 인권운동이 과거와는 달리 탈정치화되는 위험을 지적하면서, 그것이 혁명적 역동성을 상실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혁명적 역동성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또 인권 개념 역시 비극처럼 서구의 산물이지 않은가?
“인권 사상은 18세기 프랑스, 미국, 영국과 독일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권 사상이 서구의 산물 이상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것이 서구의 산물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자체로 모순된다. 왜냐하면 인권의 근본이념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만일 인권이 이런 서구적 평등 이해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하려 한다면, 그것은 평등에 곧바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비극으로 간주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어떤 출구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단순한 해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맞지만, 우리는 무엇인가를 할 수는 있다. 그 첫걸음은 유일한 인권이 존재한다는 이념을 포기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평등 이념이다. 이런 요구 위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견뎌내야 하며 모든 적대자에 반대해야만 한다. 여기에 인권 이념의 혁명적 힘이 존재한다. 이런 힘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인간을 예속시키고 노예로 만드는 모든 관계들을 전복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이념의 구체적인 의미는 상이한 상황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정식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인권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인’ 설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념은 더는 유지될 수 없다. 이를 ‘비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권은 결코 일반적인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많은 특수한 방식에 따라 이해되고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수성이 결코 평등 이념의 좌초를 의미하지 않는다. 평등 이념은 이런 다수성을 전개시키라는 것을 요구한다.”
-아도르노 미학의 계승자로서, 당신은 비판이론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모든 합리주의와 철학적 낙관주의를 회의(懷疑)한다는 점이다. 그 회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니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서양철학을 규정하는 소크라테스적 동일화, 곧 덕과 앎의 동일화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통해 정의된다는 믿음, 주체의 이성이 보증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활동이 성공하고 그것이 좋다는 믿음에 대한 비판이다. 곧 주체의 이성만이 아니라, 주체 내부에 있는 자연과 이성 사이의 해소 불가능한 변증법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비판이론은 보여준다.”
-헤겔의 ‘예술의 종언’ 테제 이후 미래의 예술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미학의 세기’라고 불리는 우리 시대에 철학적 미학자의 역할과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예술의 종언’이라는 헤겔의 테제는 예술의 전통적 과제와 연관이 있다. 전통적 규정에 따르면, 예술이란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가 1800년 이래로 끝났다는 점에서 헤겔은 옳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도르노가 말하듯, 같은 시기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타당한 이념이 전개되기 시작했는데, 예술의 과제는 진리를 현시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은 현시와 경험의 또다른 종류이자 방식의 장소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의 (재)인식으로 정향되지 않고, 감각적이고 상상적인 잠재태의 유희를 통해 규정된다. 그것을 니체와 베냐민은 ‘도취’라 불렀고 아도르노는 ‘미메시스’라 불렀다. 현재를 ‘미학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심미적 상태가 예술로부터 떨어져 나와 사회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사회의 심미화는 실러에서 마르쿠제에 이르는 전통이 희망했던 혁명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심미적인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종의 생산력이 되어버렸다. 소비의 본질적인 매체가 된 것이다. 예술과 비판이론의 과제는 이것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이다. 예술은 사회의 심미화에 반대하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힘으로서 심미적인 것을 수호해야만 한다.”
김동규/연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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