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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의 대중종교의 개념(2004, 이병창)

by 마리산인1324 2010. 1. 2.

 

함석헌의 대중종교의 개념(이병창).hwp

 

 

2004년 7월 10일 씨알사상연구회에서 발표

 

 

함석헌의 대중종교의 개념

- 떼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적 영향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동아대학교 철학과 이병창

 

1. 서론

 

잘 알려진 대로 함석헌에게 1952년경 사상적 변화가 있었다. 「말씀 모임」(57.8)이란 글을 보면,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크리스마스 날, 그동안 같이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들 앞에서 ‘흰손’이라는 장편시를 읽으면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그 시를 통해 정통신앙과 심지어 무교회주의도 인정해 왔던 “ 대속(代贖)론에 대해 반대하고,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하나 되는 체험이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격의 자주성을 살려서 스스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런 함석헌의 사상적 변화의 정확한 시점이나 그 원인에 대해서 여러 설명들이 제시되어 왔는데, 필자는 그런 설명에 덧붙여서 여기에 샤르댕 사상의 영향도 한 계기가 되었다 생각한다. 샤르댕(Pierre Theilhard de Chardin: 1881- 1955)은 베르그송의 창발적 진화이론을 발전시켜 생명 및 인류의 진화를 우주적 그리스도의 구현으로서 파악한다. 함석헌이 「역사 속의 민족관」( 78.5)에서 회고한 바에 따르면, 부산 피난 시절, 그는 타임지에 난 샤르댕의 소개글을 읽고, 샤르댕의 대표작 ?인간현상?을 구해 읽었다 한다. 이를 통하여 함석헌에게 샤르댕의 사상적 영향이 가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가 여기서 샤르댕 사상의 영향을 부각시키려는 것은 이런 방증(傍證)에 기초하기 보다는, 오히려 50년대 초부터 60년대 중반까지 연이어 그가 제시하는 대담한 신학적 논제들에 샤르댕의 사상과 유사성 또는 그 흔적이 현저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함석헌 사상과 샤르댕 사상들을 비교하거나, 또는 그 흔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런 기본적 목표를 수행한 다음 필자는 1967년 그가 퀘이커 회원이 된 이후 그가 고백한 것과 같은 자기비판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혹시 함석헌에게 나타난 샤르댕적 사상의 내적 한계 때문은 아니었는지, 그렇다면 과연 퀘이커리즘이 그런 한계에 대한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어쩌면 이 문제가 이 논문에서 더 중점적인 것이라 고도 말할 수 있겠다.

 

2. 속죄론과 인격의 자주성

 

가. 속죄론의 비판

바로 앞에서 인용했지만 함석헌의 사상적 변화에서 결정적인 것은 자주적 인격관이다. 인간의 자주성이란 사상은 그 이후 그의 사상의 대들보가 되어, 씨알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지만, 당장 이런 자주성의 개념은 속죄론이라는 정통 교리와 충돌하게 되면서, 그의 신학적 탐구는 우선 속죄론의 문제를 향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속죄에 대하여서」(54)란 글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노출시키고 있는데, 우선 그의 속죄론의 비판은 실천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에서 중심교리인 속죄론이 어떻게 보면 도덕적 의식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도덕적 능력을 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은 그의 글 「죄는 참말로 없다」(53.10)에서 단적으로 제시된다.

 

“예수께서 대신했다는 소리만 밤낮 불러서 그야말로 도덕력은 약하게만 하고 떨치고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는 오늘의 기독신자”

 

속죄론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은 마침내 한국교회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로 발전했다. 그는 「한국기독교 무엇을 하고 있는가?」(56.1)에서 특히 한국교회가 기복적 신앙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런 현실이 속죄론의 필연적 결과라 지적한다.

 

속죄론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은 언뜻 보기에 어렵지 않게 이해된다. 그가 말한 인격의 자주성이 우선 근대적 이성철학이 강조해온 자유선택의 의지(자율성)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의 속죄론 비판이 대속론에 대한 비판으로 간주된다면,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이런 표면적인 논리를 넘어서 그보다 심원한 차원에 걸쳐있다는 것은 「죄는 참말로 없다」(54)라는 논문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여기서 속죄론 비판을 ‘죄가 없다’는 주장으로 연결시켜 가는데, 이는 단순한 자율적 이성의 자기책임의 논리만으로 이해될 수 없는 주장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죄가 없다’는 함석헌의 주장은 어떤 맥락에서 제기된 것일까? 함석헌의 주장의 핵심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a. 실재의 세계에서는 생명과 사랑만이 있다.

“절대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우주를 꿰뚫는 사랑의 생명이 있을 뿐이지, 거기 무슨 죽음이니 죄니가 따로 있을 수 없읍니다”

b. 불신의 눈으로 보면, 즉 상대의 세계에서, 이원적 세계가 나타난다. 의와 죄, 생명과 죽음이 차별화된다. “상대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죄는 실재입니다. 죽음도 실재입니다.”

c. 여기서 죄는 죽음으로 처벌된다는 응보사상이 나타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가 억제된다고 생각된다. “과거에 지은 죄과의 값만을 중대시하기 때문에 대속이니 속죄니...죄성은 두고 죄과만을 뒤따라가며 처분하려 했기 때문이요.”

 

속죄론에 대한 비판은 어떻게 생각하면 단순히 응보사상에 대한 비판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사실 신의 처벌이란 신앙적 차원의 문제지 현실적으로 확인되는 법칙은 아니므로 이런 부정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은 굳이 응보사상을 부정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신의 처벌을 믿고 있다는 것보다, 오히려 이런 응보사상의 부정만으로는 도덕적 능력의 고양이라는 그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함석헌의 비판은 근본적으로 죄의 실재성 자체로 향하고 있다. 즉 실재계에서는 의와 죄의 구별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인격종교로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점이 인간의 자율성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도덕적 악에 대해 기독교는 죄의식을 강조하게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함석헌은 여기서 기독교 사상 자체를 떠나는 것이라 볼 수 있을까?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함석헌이 당시 섭력(涉歷)하던 샤르댕 역시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르댕의 어떤 영향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하여튼 샤르댕은 죄란 자연에 산재하는 악의 한 형태, 즉 자율적 인간에게 고유한 악이라 한다. 그런데 이는 인간에게 자율성이 주어지는 한 불가피 하게 나타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런 죄를 범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은 그 진화과정에서 인간에게 이런 대가에도 불구하고 자율성을 발전시켰는데, 그것은 이런 자율성을 통해 보다 고차적인 선 즉 인류의 인격적 통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죄를 부정하는 샤르댕의 논리는 위에서 함석헌의 논리와 무척이나 닮았다. 그러나 우주창조의 관점에서 보는 샤르댕에게서 도덕적 문제의식은 강하지 않다. 반면 도덕적 사회의 실현이라는 강한 메시아적 기대를 가진 함석헌에게서 이 문제는 매우 주요한 문제이다.

 

나. 인간의 자주성과 이성의 역할

샤르댕이 밝혀 준 바, 자율성과 선의지의 통일을 통해 이제 함석헌의 인격의 자주성이라는 개념이 더욱 분명하게 규정될 여지가 생겨난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단 자주성이란 서구 근대 이성철학이 제기한 자율성을 의미하지만, 이 자주성의 개념 속에는 선의지란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 선의지는 자발적인 것이어서 의무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행함으로써 곧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선의지는 결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장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자주 씨앗에 비유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자율성과 선의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일찍이 서구철학사에서 헤겔은 이성의 간지 개념을 통해, 그리고 쉘링은 어두운 충동이라는 개념을 통해 양자의 통일을 추구했는데, 여기서 선의지는 의식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것이지만 필연적으로 자기를 관철하면서, 표면적인 자율성을 압도해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헤겔이나 쉘링에게서 자율성은 현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샤르댕의 창발적 진화의 이론에서는 오히려 자율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선의지는 확률론에서 통계의 법칙에 비유할 수 있겠다. 수없이 많이 되풀이 해 본다면 결국은 일정한 점에 수렴되기는 하지만, 그 법칙은 항상 점근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샤르댕의 영향을 받은 함석헌 역시 인간의 자주성 가운데 자율성의 측면을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함석헌이 이처럼 인간의 자주성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자연의 중심에 놓는 근대적 휴머니즘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즉 그는 인간의 자주성은 결국 신적 생명의 중심에 의해서 담지 되고 있으며 그것에 의해 견인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자주성이 지향해 가는 점은 바로 신이며, 신적인 보호와 양육을 통해 인간의 자주성이 성장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특히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양심은 순수에 가까울수록,..자기는 창조주가 아니라 한 개의 지음을 받은 물건이라 느낀다...절대자의 의지를 느끼는 것이야 말로 인격의 본질이다...사람은 자유이지만 또 넘을 수 없는 절대의 너에게 얼굴을 맞대인 자유이다. 거기서 도덕이 나온다”

 

자주적 인격의 문제는 인식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인간의 의지가 선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함석헌은 이성을 통한 과학이 신앙의 차원에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새 시대 종교」(55.3)에서 그는 이성이 신을 직접 파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신에 대한 직접적 파악은 어디까지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 계시는 자발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속에서 기다림의 태도를 요구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성이 미래를 추측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인데, 이런 추측의 노력이야 말로 계시를 받을 준비에 속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종교와 과학, 계시와 이성의 관계를 마치 마주 보면서 굴을 파는 것에 비유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파지만 언젠가는 둘이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나타나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는 그가 영향을 받았던 샤르댕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샤르댕은 물질을 연구하는 과학은 분해의 과정을 통해 연구한다고 한다. 이는 가장 단순한 요소로 환원하는 과정이지만, 이 단순요소는 모든 성질을 제거한 추상적 성격을 가질 뿐이며, 무수하게 분할되어서, 이런 요소들의 결합을 통해 풍부한 전체를 재구성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런 풍부한 전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단순한 결합이 아니라 창발적인 결합이며, 따라서 여기서 계시의 빛이 요구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과학은 한계를 지니지만, 그 한계 내에서 세계를 밝혀주며, 또한 자기를 넘어서 계시를 간청한다는 점에서 긍정적 역할을 지닌다.

 

함석헌이 이성의 역할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이처럼 샤르댕의 영향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만, 약간의 차이는 있다. 어떻게 보면 샤르댕의 신학은 이성의 가설추론(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외삽(外揷)법)에 의존한다. 계시는 다만 그 방향을 제시할 뿐이다. 그러기에 그의 사상은 상당히 형이상학적이다. 반면 함석헌은 과학은 비판적인 기능 또는 추측만을 담당하며 그 위에 계시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계시를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의미

기독교의 종교적 특징은 예수의 사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 자신에 대한 믿음에 있다. 이러한 예수에 대한 믿음은 대속론이나 속죄론에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대속론을 주장하는 개신교에서는 예수의 믿음으로 인간은 구원된 것이며, 반면 카톨릭의 경우 예수는 교회의 기초가 되어,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인간도 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죄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면, 예수의 믿음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인가? 샤르댕의 경우 예수는 우주적 차원으로 재해석되면서 예수는 신의 창조과정 즉 신의 육화에 대한 일반적 상징일 뿐이다. 이처럼 예수가 우주론적으로 재해석되면, 믿음의 문제도 윤리적 차원보다는 우주창조라는 존재론적 차원으로 파악된다. 즉 그에게서 믿음이란 우주적 생명의 흐름 속에 합치하는 것이며, 이런 믿음은 그에게 신의 우주창조에 기여하려는 노력을 활성화시킨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 신의 우주창조가 완성된다. 이런 점에서 샤르댕에게서 실질적으로 예수에 대한 믿음은 고유한 역사적 의미는 상실된다.

 

그러면 마찬가지로 죄의 실재를 부정하는 함석헌에게서는 믿음은 어떻게 규정될까?

 

a. 믿음은 ‘인격적 접촉’, 심정(‘분열이 생기지 않은 근본아’)의 일. ‘자유로운 생명의 운동’ 즉 자율적인 것. 또한 실천, 즉 ‘윤리적 세계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b.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c. 예수에게 이 사실은 ‘자기만 아는 어느 지경의 경험’, 그러므로 우리에게 그것은 ‘영원한 비밀’이다. ‘이성적일수록 더 알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d. “우리가 그를 구주라 하는 것은 그로 인하여 이제 세계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e. 예수는 불꽃으로서 우리의 가슴을 태운다. 그는 우리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부나비처럼 이 불꽃으로 우리를 날라들게 한다

f.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 육의 흙 속에 잠자고 있는 아들의 씨를 불러내어 광명 속에 피게 한다.”

g. “믿는다는 것은 생활, 하나님의 사랑은 곧 이웃의 사랑, 죄 사함을 받으려면 형제의 죄를 사해주어야 한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함석헌이 믿음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규정하면서도 그것을 인격적 접촉으로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접촉의 상대는 예수의 인간성이기보다는 오히려 그 신성이다. 그러므로 예수에 대한 믿음은 실상 성령에 대한 접촉을 의미한다. 이런 인격적 접촉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유로운 생명(영적 생명)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곧 내적으로 잠재된 영적 생명이 활성화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샤르댕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서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믿음의 의미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르댕과 달리 예수는 단순한 상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함석헌은 예수 믿음의 독특한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위에 제시된 바 c- f에 이르는 논지라 하겠다. 이런 말들을 살펴 보건대, 그에게서 예수는 인간에게 어떤 충격 내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예수는 성령의 완전한 육화이기에 인간에게 어마어마한 영적 진동을 야기하며, 거꾸로 말하자면 인간은 예수를 통해서 우리 자신 내부에 있는 영적의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인간의 영적 각성을 야기한다는 주장은 앞에서 전개했던 속죄론과도 연관될 수 있다. 그에게서 믿음은 곧 속죄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속죄는 죄과를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능력의 고양이기 때문에, 양자는 일치한다. 그러기에 그는 속죄는 다름 아닌 하나됨(at- one- ment)이라 규정된다. 예수는 창녀와 같은 죄인들에게서도 그 속에 잠재된 영적 생명을 ‘알아차림’으로써 그를 구원해 주었다고 한다.

 

a.불신이 죄, 믿으면 죄가 없어진다.

“아버지 신앙을 일으켜 ...심령을 밝힘으로써 죄의 위력을 무로 화하심으로써”

b. ‘알아주는 맘’이 필요.

“그는 죄인을 보지 않고, 그 가슴 속에 영원의 사랑의 님을 찾아 헤매는 깃이 상한 영혼을 봅니다 ”

 

이렇게 본다면 샤르댕이나 함석헌이 서로 유사한 주장을 전개함에도 불구하고, 그 주장의 의미는 갈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샤르댕에게서 믿음은 그리스도의 창조활동에 기여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면, 함석헌에게서 믿음이란 성령 즉 도덕적 능력의 각성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차이점과 더불어 샤르댕에서 예수는 실질적 의미를 상실한 반면, 함석헌에게서 예수는 영적 진동의 중심으로 되면서 독특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3. 역사, 혁명, 종교

 

50년대 중반에 속죄론을 중심으로 형성된 함석헌의 사상은 60년대 초로 이어지면서 사회역사적 차원으로 확대 심화된다. 이미 57년 8월 그는 지금까지 이름 없이 모이던 모임에 이름을 붙이기로 한다면서 이는 최소한의 조직을 갖추는 것인데, “민중의 성격을 가다듬어(민중의 자주성을 강화하여)”, 민중 스스로의 힘을 통해 사회의 도덕적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것(“현실의 죄악과 싸워 이김으로써 나타나는 하나님”)이라 했다.

 

그러나 사회의 도덕적 개혁이란 가능한 일인가? 무조건 의롭기 때문에 해야 된다는 것은 함석헌의 자주적 인격 개념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자주성 개념 속에 선의지는 스스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무리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한들, 그것은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역사적 물음이 그에게서 주요하게 대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역사적 물음으로 이행하면서 함석헌에게서 샤르댕의 영향은 보다 완연하게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도덕적 개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샤르댕의 사상을 자기 식으로 변형하게 만들었다. 이 점은 많은 연구자가 이미 지적하고 있다. 특히 김경재는 함석헌 사상에서 목적론적 섭리사관의 요소와 공의(公義)의 실현이라는 두 요소를 지적한 바 있는데 전자는 샤르댕의 창발적진화론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영향 받았으며, 후자는 예언자적 메시아적 사상의 전통이라 간파하였다. 필자 역시 이 점에 동의하면서 이 두 가지 측면이 함석헌에게서 어떻게 종합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 역사

함석헌 사관은 발전사관이며 동시에 도덕적 역사관이다. 이미 일제 때 그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34.2- 35.1)를 발표하는데, 이는 역사를 수난사로서, 즉 예수의 대속 개념을 한국역사에 전개시킨 작품이다. 이런 수난사 개념은 성서의 신명기에서 보듯이 도덕적 역사론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아직 발전사관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타락과 구원이라는 반정(反正)사관에 가깝다. 그런데 그는 1961년 제3판을 발행하면서, 이름을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바꾸는 동시에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서부터 그의 사관은 발전사관의 형태를 취한다. 사실 발전사관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근대 이성철학이 이성의 발전사관을 제시한 이래, 서구 역사이론에서 이는 일반화되었다 하겠다. 하지만 그의 사관은 발전사관인 동시에 도덕적 역사관이다. 그의 사관의 이중적 성격은 아무래도 50년대 내내 그에게 영향을 미친 샤르댕의 우주창조론과 관련시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샤르댕의 신학사상의 핵심은 그의 창조론에 있다. 아다 시피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창조는 일시적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는 무에서 창조된 것이며, 신의 무상의 은혜이다. 신은 피조물에게 자신의 충만을 나누어 주지만, 신에게 이 피조물은 잉여적 존재이고, 따라서 창조는 신의 유희에 그친다.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조론과 비교해 볼 때 샤르댕의 창조는 점차적 진화의 과정이다. 창조는 신의 자의적인 과정이 아니고, 필연적인 과정이며, 신이 자신을 우주에 충만시키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 피조물은 나름대로 기여하게 된다. 신은 자기를 물질세계에 잠입시킴으로써만 물질세계를 자기에게로 복귀시킬 수 있다.

 

샤르댕의 우주창조론에서 사실 역사 세계에 대한 관심보다는 생물 진화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다. 더구나 창조의 과정 끝에 마침내 전개되는 역사적 과정에 있어서조차, 비록 여기서 사랑이라는 인격적 질서가 충만해지기는 하지만, 이 도덕적 세계는 어디까지나 우주에 관통하는 생명 진화 법칙의 전개로서 파악될 뿐이다. 즉 그것은 인간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자유, 정향진화로서 파악되어 그 인격적 질서는 근본적으로 존재론적 질서로 규정된다. 즉 샤르댕에게서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본질적으로 우주창조의 과정인 것이다.

 

샤르댕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하나, 함석헌에게서는 자연의 진화과정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보아도 과언 아니다. 그의 주요관심은 주로 역사 세계에 있다. 그런데 역사의 발전에 대한 그의 관점은 샤르댕과 마찬가지로 발전론적이다.

 

여기서 간단히 그의 사관을 살펴보면, 우선 그는 역사 전체를 꿰뚫는 하나님의 뜻을 설정한다. 이 뜻은 진리이다. 이런 뜻은 각 시대 사회마다 고유한 뜻 즉 말씀으로 분화되는데,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각 시대 사회에서 독립적인 고유한 의미를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의 연속적 발전과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말씀은 역사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힘이다. 역사의 표면에는 자율적 인간의 활동이 있으며, 이런 자율성의 활동 가운데 말씀이 실현된다.

 

“생명의 근본원리는 스스로 함, 하나님은 스스로 하는 정신이므로 지은 그 세계도 스스로 하는 생명에 이르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자기를 항상 자유하는 생명을 지닌 인격을 통해 나타내기를 쉬지 않는다”

 

또한 이런 역사는 수난의 역사이다. 하지만 이제 수난은 결코 죄에 대한 신의 처벌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난은 역사의 필연적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단계에 속한다. 이미 속죄론을 다루면서 말하였지만, 말씀에는 선악의 구별이 없다. 선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측면에 있으며, 말씀은 이를 다 살려 나간다고 한다.

 

“말씀에는 선악이 없다. 설혹 선악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 살리는 말씀이다. 선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악으로도 산다. 선악이 합해서 하는 말씀으로 산다.”

 

민중의 자율적 활동을 통해 말씀이 실현되며, 말씀이 선악을 넘어선다는 함석헌의 주장은 분명 샤르댕에서 인류 단계에 나타나는 자유 정향진화론의 개념과 닮았다. 이런 점에서 샤르댕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관한 함석헌의 강조점은 도덕적 사회의 구현에 있는 것으로 즉 그것은 인격적 관계인 사랑의 실현이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말씀은 어디까지나 인격적으로 파악된 성령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도덕적 세계의 실현이 생명의 우주적 진화과정과 일치하고 그래서 실제로 실현가능하다는 점을 보장하기 위해서 샤르댕의 사상에 접속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나 민중과 말씀

「인간혁명」(61.8)에 따르면 함석헌은 그 시대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그 시대의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어떤 선지자가 있어 그의 말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민중 속에 떠도는 유언비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출현한다. 여기서 함석헌은 민중 속의 유언비어가 민중의 깊은 가슴 속에서 우러난 것으로 보며, 이는 곧 성령 즉 말씀의 표출로 간주된다.

 

함석헌에서 민중에 대한 이런 신뢰는 물론 자율적 활동 가운데 말씀이 실현된다는 그의 낙관적 역사관에 기초했다 하겠다. 또 이는 거슬러 올라가면 샤르댕의 창발적 진화론과 연결된다. 그런데 함석헌은 말씀은 민중의 가슴 깊은 데서 담겨있는 것이므로 민중에게 나타나는 표면적인 말은 오히려 비틀리고 꼬집는 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민중의 말은 유언비어로 규정되며, 이 속에 담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것에 대한 알아차림의 능력 곧 지혜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미 앞에서 그의 속죄론을 다루면서, 죄인 속에서 살아있는 성령에 대한 알아차림의 필요성을 말한 적 있는데, 민중에 대한 논의는 이런 죄인에 대한 논의와 같은 맥락에 있다 보겠다.

 

“민중은 전체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참고 견딘다.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디는 것이 민중이다. 그러므로 그 하는 말은 자연 풍자적일 수밖에 없고, 거꾸로 비꼬고 뒤집고 은어와 반어로 역설적으로 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그러니 만큼 참다 못해 말을 하는 때면 반드시 숨겨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틀리고 꼬집는 말이다. 수수께끼이다”

 

그런데 함석헌에 따르면 역사에서 도덕성의 실현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기계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를 이루는 자율적 민중의 활동을 통해 형성되는데, 여기서 역사의 필연성은 민중의 자주성이 고양되어 도덕적 실천이 자발적으로 일어남에 의해서만 확실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그의 사상에서 역사의 필연성과 민중의 자주적 실천 사이의 상관관계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이다. 필연성이라 함은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대로 ‘뒤에서 미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당기는 필연성’이다. 역사를 이루는 민중의 활동이 아무리 자율적이고 그래서 선 악이라는 가능성이 다 열려 있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앞에서 잡아당기는 그 힘 때문에 도덕적 사회는 실현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실현은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며, 민중의 내적 자주성의 고양이 일어나서 도덕을 자발적으로 실천함에 의해 확실하게 현실화된다. 그러므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나라는 이미 가까이 와있다‘는 것이다.

 

다. 혁명과 종교

역사의 필연성과 확실성, 성령의 앞에서 끌어당김과 민중의 자주적 실천 사이의 연관으로 함석헌의 사상에서 혁명과 종교는 일치하게 된다. 혁명이란 도덕적 사회를 현실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이런 실현은 제도적으로 확고히 되어야 하며, 이를 방해하는 부정의한 지배자들에 대한 척결을 요구한다.

 

그러나 함석헌은 혁명이 다만 이런 외면적인 것에 머무르게 된다면, 결국 그 목표인 도덕적 사회의 실현은 불가능할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속죄론처럼 다만 “죄악의 형태를 변하게 할 뿐이지, 그것을 없앨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여전히 불의를 저지르며 그런 한 새로운 형태의 불의가 제도화되고 새로운 지배자가 출현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이 진정한 혁명이 되려면 인간의 자아가 개조되어야 즉 역사의 주체로서 민중의 도덕적 자주성이 고양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자주성 고양은 혁명이 아니라 종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혁명은 반드시 종교를 매개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거꾸로 본다면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의 목적은 믿음을 통해 인간의 자주성을 고양시키는데 있다. 그러나 민중이 사회적으로 다양한 억압 하에 있을 때, 그는 절망 속에서 깊이 병들게 된다. 민중은 억압을 자신의 죄에 대한 처벌로 간주하면서, 억압을 인종(忍從)하고, 그것에 비례해서 억압의 강도는 커지고, 이로부터 죄의식은 더욱 깊어지는 악순환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절망 때문에 민중은 자신의 내면 깊이 잠재되어 있는 자주성에 대한 자각이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종교는 현실 도피적이거나 단순 위안의 차원으로 떨어지게 되며, 종교 본래의 역할 즉 믿음의 회복과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혁명이 요구된다. 혁명은 도덕적 사회에 대한 희망과 가능성을, 그리고 인간의 내면적 자주성에 대한 자각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는 혁명을 전제한다.

 

혁명과 종교의 문제는 타자의 죄와 자기의 죄 사이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혁명은 타자의 죄를 추궁하는 것이다. 그는 민중 앞에서 타자를 정죄(定罪)하면서 자기를 양심으로 세우는데 이를 통해 자기의 죄를 간과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양심으로 주장한다. 그는 이를 통해서 민중이 양심을 알아차릴 능력도 없는 존재로 격하시킬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자기기만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그 역시 자기 죄를 양심으로 믿어버리면서 그 자신을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죄가 어디 있나? 나쁜 놈을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죄는 그보다 더 깊이 숨는다. 어디인가? 나쁜 놈을 열심으로 찾아 공정한 처벌을 하여 천하 사람의 가슴을 .시원케 해주자는 이 의분에 불이 붙이 붙고 있는 이 나의 가슴 속에 숨는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혁명을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죄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자주성을 고양하는 것이며 그것은 죄인으로서 자신의 자기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혁명의 원리는 죽어서 삶이다. 죄의 전 책임을 내게 지워 그 나를 죽여 버리면 전체가 살아난다. 죽인다는 것은 나의 이 작은 나를 나 아니라 부정함이다. 그렇게 해서만, 내가 전체 나에 이를 수 있고 그 전체 나가 스스로 제 죄를 담당함으로써만 새 나로 혁신될 수 있다.”

 

라. 새로운 종교 ; 대중 종교와 전체 사유

그런데 샤르댕은 생명 진화의 긴 역사 끝에서 현대에 이르러 생명진화는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하여 전 지구로 확산하기까지가 인류 진화의 확산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인류 진화는 이제 압축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압축기는 생물진화에서 항상 그렇듯이 새로운 생명이 발생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샤르댕은 이제 인간을 넘어선 새로운 생명의 출현이 기대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샤르댕이 말하는 새로운 생명은 결코 생물학적 의미는 아니다. 이미 인간의 출현으로 자연계는 생물계를 넘어서 정신계로 진입하였으므로,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정신적 존재를 의미한다. 두뇌의 발전 끝에 인류는 고도의 자기반성 능력을 획득했으며, 이를 통해서 인간은 고차적 사회화를 형성했고, 또한 자연을 지배하는 기계적 문명을 형성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사회화는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긴밀하게 전개되며, 기계문명은 자동화를 통해서 자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제 이런 발전의 끝에 새로운 형태의 사고가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샤르댕은 그것을 바로 전체의 사유이라고 한다. 그는 이런 전체의 사유를 현재의 인류의 자기반성적 사유로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몇몇 조짐은 밝혀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단적으로 전 지구상에 수많은 연구자들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각자는 이제 전체적으로 무엇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자기 분야를 연구하고 자기의 연구가 결국 전체를 근본적으로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모른 채 연구하는 가운데,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앞으로 나가고 있는 양상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사고, 즉 전체의 사고는 과거 인류가 가진 이성적 사유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일 것이라 기대된다. 과거에 이성은 전체를 포착할 수 없었으며 그러기에 이성은 계시와 대립했다. 이성에게서 계시는 불확실한 믿음에 불과했으며, 계시에게 이성은 동어반복에 불과했다. 이제 새로운 사고는 이성과 계시가 통일되는 그런 사유이다. 그것은 전체를 파악하는 이성이며 객관적으로 이해되는 계시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마도 영적인 사유에 가까울 것으로 짐작된다. 샤르댕은 이런 전체의 사유와 더불어서 인류의 발전에서 이제 이런 새로운 정신적 존재 말하자면 전체적 두뇌를 가진 존재가 출현하게 될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부터 발전은 이제 지구라는 혹성을 넘어서 진행되는데, 그것은 현 단계 이성으로는 짐작할 수도 없으며 다만 그 끝에 우주적 그리스도, 이 모든 생명진화의 알파이며 오메가인 점이 빛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샤르댕의 이런 예측은 함석헌의 도덕적 사회의 실현이라는 구상에 맞물리면서 그의 ‘새 종교론’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는 이미 55년 3월 「새 시대 종교론」을 통하여 그 구상의 일단을 피력했지만 그에게서 새 종교론의 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진 것은 아무래도 샤르댕의 영향이 본격화되는 6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미 이 시기는 함석헌의 사상이 또 한 번의 변화를(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이루고 있을 무렵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년간 돌진해온 사유는 그 관성의 힘으로 마침내 ‘새 종교론’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65.6)의 최종판이 출간된 이후 66년 1월 「대중과 종교」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른바 대중종교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면 그런 새 종교론의 내용과 거기서 전개된 그의 관심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55년의 「새 시대 종교론」에서 그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함을 제시했다. 영원불변의 절대 종교는 각 시대마다 출현하는 상대의 제도화된 종교 속에 드러나는데, 상대의 종교는 끊임없이 부정당하여서만 절대자의 진면목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모체에 이미 새로운 태아가 자라나듯이 오늘의 종교에도 다가오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가 자라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가 제시한 다가오는 시대에 대한 규정은 앞에서 샤르댕이 말했던 인류의 압축기에 대한 규정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는 특히 여기서 현대에서 전 세계가 하나의 긴밀한 생활권을 형성하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에 맞추어서 그는 새로운 종교의 특징을, 아직은 꿈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둥글고 무색이며 뚫려 비치는 종교로 규정했다. 여기서 둥글다는 것은 세계가 하나 된다는 의미이며, 무색이란 더욱 합리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뚫려 비친다는 것은 인류를 영적으로 살려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개념들은 대체로 그가 50-60년대 걸쳐 추구해 왔던 개념들과 일치한다. 특히 여기서 더 합리적이라는 의미는 지금까지의 인간 이성이 아니라 영적인 이성, 또는 계시와 이성의 합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사유는 샤르댕의 전체적 사유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66년의 「대중종교」에 이르러, 그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엄숙한 논조로 이제 대중, 또는 전체의 종교가 출현하게 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제 개인은 대중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시대라 하면서, 여기서 새로운 사유가 출현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체가 스스로 사유하는 종교, 전체가 스스로 찾아내는 종교라는 개념이다.

 

“낱 사람은 전체 사람에 대해 낯 곧 얼굴에 지나지 않는다...낱 사람이 전체 역사의 생각하는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이 이미 밝혀졌지만, ..그러나 생각하는 주체가 개인이 아니요 전체라는 사실”

 

“대중의 종교는 누가 줄 것이 아니다. 대중이 스스로 찾아낼 것이다. 대중이 곧 종교다. ..이제 전체 그 자체가 말할 것이다...”

 

함석헌은 이런 사고가 단순한 대중심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한다. 대중심리란 그가 보기엔 개개인의 사유의 집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샤르댕이 세계의 연구자들이 긴밀한 네트워크를 이룬 모습에 새로운 정신적 존재라 이름 붙였던 것을 상기시킨다. 함석헌이나 샤르댕에게서 이런 전체는 곧 우주적 생명 그 자체이므로, 이 사유는 곧 성령 자체의 사유이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바로 새 종교이다.

 

이런 측면에서 함석헌은 이제 이런 전체의 사유는 일어나고 있고 그것은 구르는 눈덩이처럼 확산할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막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4. 퀘이커로의 전환

 

함석헌은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67년 퀘이커 태평양 연회의 초청을 받아 퀘이커 제4차 세계대회와 태평양 연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다. 물론 퀘이커에 대해 그는 해방직후부터 꾸준히 접촉하고 있었으나, 당시엔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다가 60년 개인적인 문제로 주일모임을 중단한 이후, “갈 곳이 없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에라도 의지해 보려하듯” 퀘이커 모임에 참석했으나, 생각을 고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았으며, 배울 특별한 것을 발견하지 못 했 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둑한 어스름 빛 밑에서 자꾸 내게 말을 걸어오는 형상”으로 그는 퀘이커와 접촉해왔으며 62년에는 퀘이커 수양관인 펜들힐에서 7개월 , 이어 영국 우두브룩 대학교에서 3개월 머물면서 퀘이커를 연구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67년 회원으로 가입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 분명하지 않다. 그는 우선 친우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말하지만, 이어서 브린튼( H. H. Brinton)의 ?퀘이커 300년?을 읽어가는 가운데, 퀘이커의 사상의 주요성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무엇보다도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즉 그 하나는 단체적 신비주의라는 것과 역사에 대한 퀘이커의 공세적 태도였다.

 

그런데 함석헌이 여기서 왜 퀘이커리즘의 사상에 감명을 받게 되었을까? 이런 것을 일컬어 사상적 변화라 규정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여기에 모호한 것이 많다. 우선 샤르댕의 사상들이 60년대 퀘이커들에게 교과서처럼 받아들여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함석헌은 사실 그전까지 샤르댕의 사상에 영향을 받을 때조차 샤르댕과 일정한 거리를 분명히 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또한 그는 퀘이커 친우로 고백한 훨씬 이후인 예를 들어 78.5 「역사속의 민족관」 같은 글에서도 여전히 샤르댕으로부터 유발된 생각들, 즉 전체의 시대와 대중종교라는 개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함석헌과 샤르댕, 샤르댕과 퀘이커, 퀘이커와 함석헌 사이의 복잡 미묘한 관계에서, 위에 제시된 함석헌의 말들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런 문제는 브린튼이 설명한 바 기독교에서 히브리 전통과 그리스 전통의 비교를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히브리적 전통에서 신은 말씀을 통해 계시된다. 이 말씀은 예언자를 통해 전달되는데, 그 내용은 주로 도덕적 명령이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며, 죄는 자유의지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데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 자유의지로써 하나님의 도덕적 명령을 행동에 옮겨야 한다. 역사에서 언젠가는 이런 도덕적 명령이 실현되는 때가 있으며, 이런 점에서 메시아적 기대로 가득 차 있다. 반면 그리스적 전통에서 하나님은 자연 속에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런 하나님의 현현은 지속적으로 실현된다. 이를 통해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가득한데, 인간은 무지하므로 이를 알지 못한다. 그는 무지에 의해서 악을 행하게 된다. 이 악으로 세상에 혼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가 이 세계 속의 하나님의 질서를 깨닫게 되면 그는 저절로 선을 행하게 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의지를 지닌 인간이다. 그러므로 이런 과정을 통해 세계는 완성에 이른다. 히브리적 전통에서 예언자들, 사회의 도덕적 개혁이 추구되었다. 반면 그리스적 전통에서는 명상가들, 그리고 자기의 완성의 노력이 경주되었다.

 

이처럼 그리스적 전통과 히브리적 전통을 구분해 볼 때 대체로 개신교는 히브리 전통에 가까우며, 반면 카톨릭은 그리스 전통에 가깝다. 그런데 함석헌은 일찍부터 개신교적 전통에서 성장해왔다. 반면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샤르댕은 카톨릭에 지반을 둔 전형적인 그리스적 전통의 사상가였다. 역사에 대한 관심 때문에 함석헌이 샤르댕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개신교적 전통 하에 있었으므로, 여기에 두 사상의 착종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샤르댕에서 로고스는 함석헌에게서는 말씀으로 번역되었으며, 샤르댕의 사상이 자연 진화론을 전면화 했다면, 그에 반해 함석헌은 도덕적 사회의 실현을 지향했다. 물론 샤르댕의 진화론이 수용되면서 그는 도덕의 진화로서 역사를 전개했다. 또한 샤르댕의 진화론은 그에게 도덕적 사회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수용된 샤르댕의 사상, 혹은 60년대까지 함석헌의 사상에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는 이 문제점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으나 그의 고백 속에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 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 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못 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히 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자기비판 속에서 자유주의 , 개인주의, 어리석고 교만함에 대해 언급했다. 왜 갑자기 이런 비판이 등장했던 것일까?

 

가. 이성의 한계

이 사태의 핵심은 계시의 문제로 돌아간다. 샤르댕도 그렇지만 함석헌 역시 궁극적으로 종교적 진리는 계시에 의한 것으로 보지만, 이 계시는 매우 추상적인 원리이다. 즉 생명이나 말씀(사랑의 도덕)인데, 그것들은 하나이다.

 

이처럼 계시의 내용이 추상적인 한, 이 하나인 추상으로부터 모든 존재자들을, 모든 인간의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진화나 발전이라는 역사 개념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범신론적 사고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샤르댕을 따라 함석헌은 시간적 성장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현상들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이처럼 역사 개념에 의존하는 한, 그 한계는 곧바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역사적 설명이라는 것이 제대로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제시되는 역사는 그것이 자연의 진화사이든, 역사의 발전이든 항상 실증적 과학자들의 공격 앞에서 무기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문제되는 것은 생명이니 말씀이니 하는 추상적 원리가 과연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게시에 의한 진리는 무엇보다도 직접적 확실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게시는 그러한 확실성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직접적 계시로 이해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이성의 활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한 것이라 밖에는 이해될 수 없는데, 사실 샤르댕이 가설추리에 의존한 것이라면, 함석헌의 경우는 성서해석을 통해 주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 한다면, 인간이성이 자기를 신의 계시로 과장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일어나면서 인간 이성의 절대에 대한 참람(僭濫)함으로 규정될 소지가 발생하게 된다.

 

더 결정적인 문제는 민중성의 문제이다. 사실 함석헌은 민중은 자주성을 가지며, 역사는 민중의 자율적 활동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하면서 민중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민중은 그 스스로에게 내재하는 성령을 깨닫지 못한다. 성령이야 이미 그 속에 잠재되어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알아채려 주어야 하며, 바로 이런 알아차림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예언자이다. 결국 이런 입장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선지자적 예언자적 존재가 요청된다.

따라서 함석헌이 5-60년대에 믿음을 통해 인간의 자주성을 고양시켜 도덕적 사회를 실현하겠다는 종교 프로그램은 어떻게 본다면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혁명 프로그램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들이 이성이 실현되는 사회를 요구했다면 함석헌은 사랑이 실현되는 사회를 요구했을 뿐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이며 개인주의자이며, 어리석고 교만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아마도 그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의 생각 속에 담겨진 내부의 문제점을 그렇게 일찍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 죄가 없었더라도 언젠가 그 이성적 사회개혁 프로그램은 신앙에 기초한 기독교 사상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나. 퀘이커리즘

이성의 참람함에 대한 자각은 그렇다고 그를 다시 전통적인 죄의식의 교리로 복귀시키지 않았고 그 대신 그에게 다가갔던 것이 바로 퀘이커리즘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해한 퀘이커리즘은 어떤 면에서 그의 사상적 문제점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었을까?

 

퀘이커리즘의 바탕은 성령에 대한 직접적 체험 곧 ‘하나됨’에 있다. 이것이 성령에 대한 체험인 한, 그 체험은 말씀의 형태로 나타나며, 인간에 대한 어떤 도덕적 명령의 형식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리즘에서 계시는 샤르댕에게서처럼 신의 형상에 의한 계시와는 구별된다 하겠다. 퀘이커리즘은 말씀의 신학, 히브리적 전통에 서있으며, 샤르댕은 형상의 신학, 그리스적 전통에 서있다.

 

이런 직접적 체험은 인간에게 ‘속의 빛’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속의 빛을 통한 체험은 역사적으로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퀘이커리즘에서 이 속의 빛은 한편으로는 인식의 능력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의 능력이다. 그것은 마치 순수의지로서 자신이 받은 도덕적 명령을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수행하여 이런 수행 자체에서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퀘이커리즘에서 문제는 도덕적 명령을 의지하는 행위의 동기이며, 실제 그런 결과가 수행되었는가는 이차적인 문제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도덕적 사회의 현실적 실현 가능성과 같은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여기서 퀘이커리즘에서 이 속의 빛을 통한 계시가 어떤 추상적 원리나 도덕적 원리, 예를 들어 생명이나 사랑을 계시받기 보다는 구체적인 행위지침에 대해 계시를 얻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그것은 계시가 주어지는 구체적 현실에 적합한 예언이다. 그러므로 그 계시는 새로운 해석이나 현실에 적합한 변용 없이 직접적으로 수행가능하게 된다. 퀘이커리즘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강력한 도덕적 실천주의이며, 이런 점에서 브린튼은 이를 정적주의적인 신비주의와 구분하여 윤리적 신비주의라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신비적 체험을 통한 계시는 기독교 초기 예를 들어 바울에게서도 강조된 바 있으나, 브린튼에 의하면 기독교가 제도화되면서 이런 전통은 억압되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모든 이단도 직접 체험이라는 것을 통해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에 의한 계시만이 유일한 계시로 간주되었는데, 퀘이커리즘은 이런 면에서 본래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한다고 설명된다. 그렇다면 직접 체험으로 주어진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보증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바로 이런 점에서 퀘이커리즘에서 가장 결정적인 생각으로 단체적 신비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것은 퀘이커의 예배방식에서 유래했는데, 그 예배방식은 침묵과 집단이 특징이다. 침묵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해서 생겨난 형식이지만 집단의 예배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성령은 개인의 속의 빛을 통해 자기를 계시할 수도 있지만 집단 속에 또는 집단 사이에 자기를 계시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보다 주요한 것은 후자라는 점에서 집단 예배가 출현했다.

 

그러므로 마치 개개의 불꽃이 모이면 더 큰 불꽃이 타오르는 것처럼, 집단의 예배를 통해 성령은 더욱 크게 나타나며, 또 거꾸로 마치 산꼭대기에 오르면 서로 다른 길로 올라온 사람들이 서로 만나듯이 성령과 하나가 되면 우리의 이웃과도 하나가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집단 속에 집단 사이에 성령이 계시한다는 생각을 브린튼은 단체적 신비주의라 규정한다. 이것은 무교회주의자들이 말한 바 물질적 교회와 달리 ‘성령의 교회’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는데, 이는 카톨릭에서 교회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한다. 즉 이것을 통해 아직 속의 빛이 약한 사람조차 속의 빛이 강한 타인의 도움으로 함께 성령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린튼이 말하는 이 단체적 신비주의는 물론 속의 빛을 통해 계시되는 말씀이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 예언이라는 점에서 가능한 개념이며, 이와 같은 단체적 신비주의라는 개념이 있으므로, 개인이 직접적 체험을 통해 얻는 계시가 타인에게 주어진 계시와 비교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장 완전한 계시를 얻은 예수의 계시 즉 성서와 비교되면서, 그 올바름이 확증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퀘이커리즘은 모임을 같이 하는 친우들에 대해서 매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실제로 그 친밀함은 당연히 매우 높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 한계는 극복되는가?

이와 같은 퀘이커리즘은 인간의 자주성의 개념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함석헌의 50-60년대 사상과 동일한 맥락에 있다. 더구나 아주 강력한 말씀의 계시, 도덕적 실천주의라는 점에서 또한 함석헌의 사상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런 일치 속에서도 차이는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자주성이 재해석되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자율성과 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이성의 역할보다는 오히려 계시의 역할이 퀘이커리즘에서 강조되었다. 그것은 내적 확실성 속에서 체험되는 직접적 체험이다.

 

이처럼 직접적 체험이 강조되는 ‘속의 빛’이라는 개념이 형성되면서, 이제 지금까지 함석헌 사상의 뼈대가 되었던 자주성 개념이 씨알의 개념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가 67년 퀘이커리즘으로 전환한 이후에 70년 초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런 씨알의 개념은 속의 빛을 통해 성령의 말씀에 대해 경청하는 것이므로, 그가 스스로 진단하듯이 이성의 참람함에 대한 충분한 경계가 되며,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상적 대안으로서 퀘이커리즘으로 기울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직접 체험이 강조되면서 이제 그의 사상에서 결정적으로 역사적 사유가 사라진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사유는 역사적 발전론인데 65년 「뜻으로 본 한국역사」 4판이 발행된 이후 다시 그는 역사적 연구를 하지 않으며 그의 많은 표현들 속에서도 이런 역사적 발전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이제 그는 ‘하나됨’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 전에 속죄를 하나됨으로 규정한 바 있으나, 이제 이는 직접 체험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하나됨이며 동시에 이웃과 하나됨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그런데 앞에서 인용되었던 자기고백에서 그는 이런 직접적 계시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단체적 신비주의라는 개념에 주목하라 한다. 그는 단체적 신비주의라는 개념을 통해서 친우들의 주요성, 나아가서 성령의 교회라는 개념에 다시 도달하게 된다. 이제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단지 무의식적으로 역사를 끌고 가는 존재가 아니라, 역사를 스스로 자각적으로 추진하는 동지들로서 파악되었다. 이제 민중은 나의 옆에 있는 너이며 함께 역사를 끌고 가는 우리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퀘이커리즘에서 단체적 신비주의라는 개념에 주목하라 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고투 끝에 얻은 결론이라 하겠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런 오랜 우회를 통해서 마침내 그의 사상의 근간이 되는 씨알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결정적으로 역사를 함께 이루는 동지로서의 씨알이다. 전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씨알은 자율성, 자주성, 직접적 체험, 그리고 동지라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물론 거기에 사회적으로 권력과 소유가 결여된 ‘맨사람’이라는 의미와 종교적으로 표면적으로 보면 끊임없이 죄를 지어가는 죄인이라는 의미도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5. 결론

 

오랜 고투 끝에 그에게서 씨알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 샤르댕의 영향이 완전히 청산된 것은 아니며, 따라서 어떻게 보면 그의 사상은 서로 대립된 것들이 혼재되어 있다 하겠다. 브린튼은 퀘이커리즘에 사실은 모순적 내용이 들어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는 모순이 있다는 것이야 말로 발효하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함석헌의 사상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다. 필자는 여기서 함석헌의 동양사상으로부터의 영향, 그리고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와 같은 사회사상의 영향에 대해 간과했는데(이것들을 제치고 과연 함석헌의 사상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을지 문제이다). 이를 제쳐놓고서라도 그의 사상은 개신교에서 카톨릭까지, 퀘이커리즘에서 샤르댕에까지 걸쳐있고 그 속에 서로 대립된 개념들이 부딪히며 발효하고 있다. 여기에 동양사상과 비폭력주의의 영향까지 감안한다면 그의 사상은 한마디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장독과 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마어마한 소용돌이 속에 얼마나 엄청난 창조의 힘이 감추어져 있을지 필자와 같은 고루한 편벽된 학자로서는 헤아릴 수 없다.

 

 

함석헌의 대중종교의 개념(이병창).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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