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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19

 

 

 

“씨알 사상은 생태계 구할 대안”
지난 7월19일부터 5일간 한·일 철학자 30여 명이 모여 한·일 철학포럼을 가졌다. 이 포럼의 핵심 주제였던 유영모·함석헌·다나카 쇼조·아라이 오스이의 사상을 들여다본다.
[100호] 2009년 08월 10일 (월) 14:17:55 오세훈 (씨알재단 기획위원장·꾸리찌바 지방자치연구

 

“남북한에 있는 쇠붙이란 쇠붙이는 다 모으자. 젓가락 하나, 연장통에 쓸데없이 담겨 있는 녹슨 돌쩌귀까지 전부 들고 나와, 그것들을 녹여 세상에서 가장 큰 삽을 만들자. 그리고, 대한해협 밑으로 그 삽을 밀어넣자. 일본 땅 밑 가운데께까지. 이 삽에 6000만이 매달리는 거다. 그럼 일본은 어떻게 되겠는가? 뒤집힐 것 아닌가.”

1980년대 초반, 전두환 철권통치 시절, 취한 청년 다수가 ‘삽 이야기’에 눈물 흘리며 박수쳤다. 당장이라도 벌 쐰 놈들처럼 전국 방방곡곡을 뛰어다니며 쇠붙이를 모을 태세였다. 지리산 규모의 거대한 그 ‘철산(鐵山)’을 생각하며 대취한 선동가도 흐뭇했다.

   
제1차 한·일 철학포럼(위)에서 한·일 철학자는 유영모·함석헌의 씨 사상이 종말론적 위기에 처한 지구를 살릴 수 있는지 진지하게 토론했다.
특히 일본을 염두에 둘 경우, ‘우리 민족’은 죽음을 불사하는 전투 단위로 돌변한다. ‘민족주의’는 그 어리석은 싸움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선무용 촉매제다. 한·일간 축구시합은 그래서 본질적으로 스포츠가 아니다. 선수들이나 관중이나 실제로 전쟁을 치르는 병사이다. 지면 통곡하고 이기면 환호한다. 이긴 것은 죽인 것이며, 진 것은 죽은 것이다.

오늘의 한·일 관계와 한·중·일 관계는 이웃하며 살아온 역사의 인과론적 관계이다. 침략과 피침,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를 공유하는 양국, 3국은 오늘도 각각의 이익을 위하여 사실상 총성 없는 싸움을 치열하게 수행 중이다. 한·일 축구 경기와 30년 전 한 청년의 술주정에 불과했던 ‘삽’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며 각각 당대 권력의 실리를 도모하는 것에 불과한, 이른바 ‘선린 외교’로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그 같은 문제의식이 동기가 되어 한·일 양국의 철학자 30여 명이 한·일 관계, 한·중·일 3국 관계, 그리고 앞으로 국제 관계가 새로운 질서로 거듭나는 세기의 초반에 모여서 제1회 한·일 철학포럼을 가졌다. 처음이다. 이 점 매우 소중하다. 본질을 궁구하는 철학자들이 정치와 경제 논리를 배제한 채, 세계 평화의 대전제가 되어버린 동북아 평화와 상생을 모색하는 기초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참여도는 참가자 모두가 스스로 놀라워할 정도였다. 이 포럼은 한·중·일 3국 포럼으로, 더 나아가 구미 철학자가 참여하는 글로벌 포럼으로 발전해나갈 것이다.

이 포럼의 핵심 주제는 유영모·함석헌·다나카 쇼조·아라이 오스이, 이 네 사람의 사상에 관한 것. 나는 실은 일본 두 사상가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다. 유영모는 말할 것도 없고, 함석헌의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오늘의 현실이긴 하다.

   
다나카 쇼조(위)는 평생 현대적 의미의 환경생태 윤리운동을 펼쳤다.
나는 지난 2년 가까이 씨알 사상 강좌를 수강하고 나서 유영모·함석헌의 사상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처한 ‘황당한 현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한·일 관계, 한·중·일 3국 관계, 더 나아가 미국 패권주의가 무너지는 새로운 국제 질서에 대해서도 보편적 가치를 갖는 사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 한·일 철학포럼은 참가자 모두 그 가치를 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넷의 사상을 단 몇 줄로 요약하는 행위는 마치 독도의 물 한 컵으로 태평양을 설명하려는 태도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이같은 상황이 빈발하기 때문에, 때로 그 한 컵의 물에 대해 관용이 베풀어지기도 한다. 일본 역사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두 분의 위대한 사상가를 한국에 소개하는 것은 이 지면이 처음이다.

아라이 오스이의 ‘母父神 사상’

아라이 오스이. 1846년에 무가(武家)에서 태어나 1922년까지 살다 간 일본의 종교가·교육사상가이다. 그는 종교가로서 10세 이전에 배운 유교와 20세 넘어 접한 기독교, 그리고 무사도를 조화롭게 통합해 하나의 사조를 만들었다. 아라이 오스이는 평생 특정 교단에 속하지 않았으며, 25세에 미국으로 떠나 약 30년 동안 ‘The Brotherhood of the New Life’라는 기독교계 커뮤니티에서 일했다. 이 공동체는 주로 토지 개척과 밭일, 목축을 하며 성경을 읽고 기도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아라이는 53세 되던 해에 귀국해, 독지가의 후원으로 겐와샤(謙和舍)라는 사숙을 세워 백년대계에 착수하고 실천한다. 그는 기독교와 유교가 모순되는 일 없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유교의 효애를 통하여 일본인의 마음을 육박함과 동시에, 유교의 발걸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하여 오히려 초월적인 완성에 이르렀다”라고 말한다. 그의 모부신(母父神) 사상은 “신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애정 깊고 세세한 배려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강력하고 의연한 책임감에 의해서 악을 규탄하면서 끝까지 지켜본다”라고 주장한다. “무슨 종교든, 무슨 학문이든 그 속에 사람이 살아야 할 진정한 길이 들어 있다면, 기독교도로 살게 된다. 거기에 반하는 경우는 모두 사교(邪敎)가 된다. 비록 기독교라는 표찰을 내걸더라도 사교가 된다. 기독교라는 표찰을 세상에 내보이면 내보일수록 더욱 더 사교가 되어버린다”라는 그의 경고는 오늘의 ‘예수 없는 예수교회’, 즉 사교로 가는 21세기 기독교에 대하여 적확하다.

그의 사상이 종교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이 다원 사회의 되바라진 시민 대중은 그를 이 시대에도 드물지 않은, 영성 깊은 성직자의 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말 것이다. 대니얼 콜 교수는 그의 사상의 핵심을 군비확산 반대, 전쟁 전폐, 평등사회론, 선민사상 비판, 토지겸병 반대, 사형 반대, 가부장제도 비판, 무소유의 기쁨 따위로 요약한다. 특기할 것은 ‘여격(女格)의 자유’를 강조하며 국가가 강조하는 현모양처론을 기만으로 보고, 남성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종교가로서 삶을 영위하는 동안 이상 사회의 정답을 그 영역에서 찾아 1차 세계대전 전후로 ‘미친 시대’를 정상으로 되돌려놓기 위하여 제자 교육에 삶을 통째로 바친 현자라 할 수 있으리라. 그가 펼친 이 사상이 1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절실하게 요구되는 핵심 과제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다나카 쇼조, 일본 ‘공공 철학의 아버지’

다나카 쇼조. 1841년 태어나서 1913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일본의 평화·인권·공공철학의 아버지”라고 말하면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오는 그의 조선과 관련된 ‘원조 망언’-예를 들면, 그가 1903년에 “조선이 오늘날과 같은 처지에 이른 것은 국민이 타락하여 항심(恒心)을 잃었기 때문이지, 결코 다른 강대국 때문이 아니다”라고 했던-을 들이대며 화를 낼 독자가 있을 것 같다.

“의사는 환자만 있으면 번창한다. 오늘날 경제인은 나쁜 일을 저지르면서 번창한다. 법률가는 어리석은 사람을 기만하면서 번창하고, 정치가도 뇌물로 번창하여 국가는 비관적인 형세를 이루고 있다. 비가 새는 부서진 집에서 농민과 노동자는 가난에 시달린다. 옷은 더러워 이가 들끓는다. 이것이 일본의 형세다. 그 위태로움은 조선보다 더하다. 조선의 오늘은 미래의 안전을 기약할 수 있지만, 오늘날 일본의 허세는 모든 것이 빌린 것일 따름이다.”

이 말도 같은 사람이 한 것이다. 1907년의 어록이니, 그의 세계관이 선하게 진화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그는 스물이 되기 전에 정계에 입문해 중의원을 여섯 번이나 연임한다. 오늘 우리가 약 100년 전 사망한 이웃 나라 정치인이자 사상가였던 그를 주목하는 것은 그의 삶과 글이 오늘 인류사회가 직면한 종말의 징후를 치유할 지혜와 방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중의원에 당선된 뒤 ‘아시오 광산 광독(鑛毒) 사건’과 만난다. 이 광산은 아시아 제1의 구리 광산이었다. 여기서 흘러나온 광독으로 인해 홍수가 날 때마다 주변의 강을 오염시키는 것을 알고 메이지 천황에게 바로잡아줄 것을 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의원직을 사퇴하고 여생을 이 폐광촌의 주민과 함께하다가 병사한다.

   
다석 유영모(맨 오른쪽)의 사상을 ‘지구촌 사회를 구할 최후의 사상’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죽기 전까지 그는 재산 헌납을 실천한 것은 물론 “납세는 사람들의 행복을 사기 위하여 지불하는 비용이다. 타인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은 더없는 명예다.” “정부가 공금을 사용해서 육성한 산업을 일부 특권적 자본가에게 염가로 불하하는 것은 부정이다”라고 외쳤다. 세비 인상 반대운동에 앞장섰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세비 전액을 반납했다. “일당을 많지 않게 하는 것도 의원에게 덕의가 있으면 가능하다. 덕의 없이는 정치 사회에 오예(汚穢)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라며 덕의(德義)를 강조했다.

죽는 날까지 그가 펼쳤던 것은 현대적 의미의 환경생태 윤리운동이었다. “진정한 문명은 산을 황폐하지 않게 하며, 강을 황폐하지 않고, 마음을 파괴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한다”라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 가장 전향적인 생태운동가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 아닌가. 1896년 <조선잡기>에서 동학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을 “품행 방정하고, 공명정대하며, 종교를 통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하려 했던 인물”로 평가하며, 일본 군대가 이를 알지 못하고 동학을 유린한 것을 애석해했다는 것은 그가 민족과 민족주의를 넘어 인류 사회의 보편 가치를 추구한 큰 인물임을 갈파한다.

유영모. 오가와 하루히사 전 도쿄 대학 철학과 교수는 “여생을 유영모 연구에 바치겠다”라고 공언했다. <조선의 실학연구>로 일본에서 권위가 높은 철학자가 왜 그 같은 발언을 했을까. 그는 “현대 인간의 과제는 지구 생태계를 지키는 일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욕망이 너무나도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상사태 앞에서 유영모의 두 가지 요구-사고의 고결함과 검소한 생활-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지구 생태계는 그 두 가지 덕목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유영모의 사상에 대해서는 다각도의 연구가 진행 중이다. 토론에는 언제나 찬탄과 논란과 비아냥이 병존한다. 이는 서글픈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거인들의 사상과 이론은 예외 없이 그 과정을 거쳐 완성되지 않았는가. 시인 고은은 심지어 장편 시집 <만인보>의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라는 시에서 “…아흔한 살 살고 훌쩍 떠나서 정녕 그것이 사상이란 말인가 다석철학이란 말인가 여기저기 도토리나무 솎아베는 나무꾼만 못함이여 무슨 큰 뜻이 있는 듯하나 그저 부질없음이여”라고 고함치며 모욕한다. 하지만 오가와 교수가 주목하는 이 점에 대해서는 고은조차도 이견을 달지 못할 것이다.

인도는 석가, 중국은 공자, 한국은 다석


다석학회 회장 정양모 신부는 고은에게 “다석 유영모에 대해서 공부 좀 하라”고 충고한다. “‘생태계 보존과 유지’라는 의무를 전제하지 않았다면 안창호·이승훈·유영모에 대하여 깊은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유영모 사상은 인류 최대의 과제를 극복할 대안 사상과 닿아 있다”라고 주장하는 오가와 교수는 수년 전 초청되어 자기 조상들이 저지른 ‘36년의 광기’에 관해 강연하다가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가 일본 사람으로만이 아니라 지구촌 사회의 일원으로서, 진정한 휴머니스트로서 흘린 눈물이라고 생각한다. 유영모의 사상이 ‘우리 민족의 것’이 아니라, 지구촌 사회를 구할 최후의 사상으로 주목되는 것처럼 말이다.

정 신부는 씨알 사상 강좌에서 이렇게 강의를 끝맺었다. “흔히 한 나라의 문화를 거론할 때, 그 나라에서 어떤 인물이 나왔는지 살펴본다. 예로 인도는 석가를, 중국은 공자를, 그리스는 소크라테스를 치켜세운다. 이탈리아는 단테를, 영국은 셰익스피어를, 독일은 괴테를 자랑한다. 장차 우리 겨레가 다석을 뽐낼 때가 오리라 본다. 인생만사가 불완전하듯이 다석의 생애와 사상 역시 미정고임에 틀림없지만, 세상 어느 구석에서 그분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며 살다가신 분을 또 만날 수 있겠는가?” 오가와 교수의 “여생을 유영모 연구에 바치겠다”라는 선언과 다석 유영모에 관한 논문과 저서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정 신부의 다석론이 정확하고 온당한 것이었음이 입증되고 있다.

   
씨알 사상을 꽃피운 함석헌 선생.
함석헌. 나는 대학 1학년 시절, 함석헌 전집 26권을 눈이 아프도록 열심히 읽었다. 그 독서의 충격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30년이 지나 다시 공부하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지리산을 떠올렸다. 지리산에 올랐던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이 좁은 반도 조국에 어떻게 이렇게 대륙적인 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대장관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채 ‘조선판 중화주의자’가 되어 가슴 벅찼던 스무 살 청년은 이제 50을 넘었다. 나는 그동안 이 전집의 독후감을 ‘함석헌 충격’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 ‘충격’ 이후, 30년이 지나서 다시 만난 함석헌은 내게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의 모든 봉우리, 계곡, 천, 능선, 평전, 폭포, 반달곰, 살쾡이, 새, 나비, 뱀, 나무, 버섯, 칡, 질경이, 운해, 춘하추동의 천변만화…. 함석헌은 영락없이 지리산이다. 그는 마침내 씨알 세상의 ‘국사(國師)’가 된 것이다.

“崇古한 山의 Esprit는
모두 이 山頂에
集約되어 있고 象徵되어 있다.
-하여
神은 거기에 내려오고
사람은 거기 오른다.”

신석정의 시 ‘지리산’의 초두이다. ‘21세기의 신’은 종말론적 위기에 처해 있는 지구 생태계를 구할 사상이다. 씨알사상이 “(말세의) 신으로 거기에 내려올” 가능성에 대해서 한·일 양국 철학자들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토론했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다 가면, 지혜로워진다”라는 지리산의 전설이 실화(實話)가 되기를 염원하듯 ‘지리산’을 오르는 이들의 숫자가 날로 늘어간다. 지리산 자락은 일본으로, 유럽으로 광역화하고 있다. 그 까닭을 함석헌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 한 편으로 말하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닐 듯하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랴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방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나는 함석헌의 전부가 이 시 한 편에 충분히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반의 반의 백분의 일이라도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상이라면 고결하고 감동적이고 희망적이지 않겠는가.

이 시대에 유영모·함석헌의 씨알 사상을 특히 일본의 지성사회에서 주목하게 된 데는 교토포럼 공공철학연구소 대표 김태창 박사의 공로가 크다. 김 박사는, 지난 20년 동안 중국 철학자들과 철학포럼을 진행해왔는데, 들인 공에 비하여 성과가 미미했다고 말했다. 이에 유영모와 함석헌을 소개받은 일본 학자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고, 관련 학회지에 집중적으로 게재되고 있다. 그 결실이 제1회 한·일 철학포럼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2008년 서울대학교에서 열렸던 세계철학자대회에서 이미 일본·중국은 물론 유럽 철학자들에게 소개되어 그들을 놀라게 한 바 있다.

“씨알사상은 우주와 인간,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한계가 무엇이냐는 문제가 무엇보다도 절실하게 다가오는 현대인에게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고, 따라서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개념이이다.” 이는 한국 철학자들이 지난 3월 세운 ‘씨알학회’(회장 이규성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의 창립 선언문의 일부이다. 씨알학회는 유영모·함석헌을 포함해 나철 서일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최제우 최시형 최남선 백남운 박현채 강일순 박중빈 한용운 탄허 숭산 신남철 박종홍 김교신 문익환 이용도 김재준 장일순 등의 사상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계획이다.

유영모·함석헌을 포함해 씨알사상과 관련된 논문과 저서 목록은 씨알재단(www.crlife.org)의 홈페이지를 참고하기 바란다. 유영모 관련 단행본은 <다석 유영모>(박재순 지음·현암사 펴냄) <다석 유영모의 한국적 기독교> <제소리>(다석 강의록), 함석헌 관련 단행본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 <겨레의 큰 스승 함석헌> <너 자신을 혁명하라> <생명 평화 씨알>이 있다.

아라이 오스이는 ‘아라이 오스이 저작집 편집회’ 편(工藤正三, 대니얼 콜 편)<新井奧邃著作集>(전 10권, 春風社, 2000~2006년), 아라이 오스이 선생님 기념회 감수 <알려지지 않은 생명의 사상가 아라이 오스이를 읽다(知られざるいのちの思想家 新井奧邃を讀みとく)>(春風社, 2000년), 다나카 쇼조(田中正造)와 관련해서는 安在邦夫う편 <田中正造選集>(전 7권, 岩波書店, 1989)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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