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국보 제1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은 성형수술됐다. © 이무성 | |
일본이 자랑하는 보물은 무엇일까? 우리는 교토, 나라, 오사카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일본인의 자랑인 보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혹시 교토 광륭사(廣隆寺, 고류지)의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일본 광륭사 책자에도 어김없이 국보 제1호라고 자랑하고 있다. 또 많은 이들이 그에 감탄한다.
특히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 불상을 보고 크게 감동한 나머지 “고대 그리스 신(神)들의 조각과 로마 시대에 만든 수많은 조각품은 아직 완전히 인간적인 냄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불상은 지상에서 모든 시간적인 것의 속박을 초월해서 이루어 낸 인간 존재의 가장 맑고 원만하고 영원한 모습의 표상이다."라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가? 과연 그럴까? 오래전부터 이 불상을 보고 싶었으며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두루 섭렵한 야스퍼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직접 눈으로 확인 한 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광륭사를 찾았다.
광륭사 “목조미륵상”과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미륵상”이 닮았다?
2009년 7월 18일 아침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회원들과 서둘러 이 목조미륵보살반가상(木造彌勒菩薩半跏像,이하, 미륵상)이 있는 교토시 서부 우즈마사거리에 있는 광륭사를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광륭사로 들어가는 길은 그저 한적한 도시 변두리란 느낌이다. 절은 자동차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길옆에 붙어 있어 우리가 찾았던 다른 절들 곧 청수사, 금각사 등에 견주면 고즈넉한 산사 느낌은 전혀 없다. 또 동대사, 법륭사 등 규모가 큰 절에 비해 광륭사의 첫인상은 그저 소박한 절이라는 느낌뿐이었다. 국보 제1호를 소장하고 있는 절치고 명성에 걸맞지 않게 한적하기 그지없는 곳이다.
절의 정문인 남대문(南大門, 仁王門)으로 들어가자 바로 교토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강당(講堂)이 나오고, 강당 뒤쪽으로 들어가면 성덕태자를 모신 상궁왕원태자전(上宮王院太子殿)인 본당(本堂)이 있으며 그 뒤로 미륵상을 전시해 놓은 영보전(靈宝展)이 보인다. 7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하는 이곳은 역시 사진촬영은 못 한다.
덴표(天平)시대에서 가마쿠라(鎌倉)시대까지의 불상, 불화, 미술 공예품, 고문서 등이 다수 보관되어 있어 미술학도라면 한 번쯤 들어가 볼만하다는 영보전. 여기 있는 미륵상은 1951년 6월 9일 일본문화재위원회에서 국보로 지정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본의 국보는 1호, 2호. 3호 식으로 매기지 않기 때문에 광륭사 불상은 한국의 숭례문처럼 그저 조각품 중 맨 먼저 등록했다는 의미밖에 없다.
한국의 웬만한 마을에는 미륵이라 불리는 돌부처가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과거 우리에게 “미륵”은 친근한 존재였다. 그 까닭은 새로운 세상을 약속한 미륵신앙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향나무를 바닷가 개펄에 묻어두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이 있었다. 그것은 그때 자주 출몰하던 왜구의 침탈에 고통을 받던 민중들이 침향을 정성으로 준비하여 자신들을 구원해줄 미륵이 오기를 비손하는 뜻이었다. 묻은 향나무가 수백 년이 지나면 침향이 되고, 침향이 된 뒤에는 ‘서해에서 용이 솟아오르듯이’ 스스로 물 위로 떠오른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앙의 미륵보살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도솔천에 살며, 석가가 죽은 지 56억 7천만 년 뒤에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구한다는 보살. 반가 곧 오른발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얹고 생각하는 모습의 보살. 영보전에 들어가서 다른 불상은 아예 쳐다보지 않고 오로지 미륵상을 찾기에 바빴다. 여기에 온 목적이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지상에서 가장 순진무구한 불상, 그리스, 로마 조각상이 풋내나는 것이라면 광륭사 미륵상은 지상, 천상 최고의 조각품” 한마디로 이 이상 논하면 되레 불경죄로 벌을 받을 듯한 최고의 찬사를 받으며 한국에서 예까지 와 1,400년을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 불상을 보려고 한국인들은 불원천리 서울에서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전철 타고 버스 갈아타기를 수차례 끝에 불상과 마주한 것이 아닌가?
미륵상의 수명을 고려한 것인지 촉수 낮은 희미한 영보전 안 깊숙한 중앙에 미륵상은 은은한 미소로 참배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 극찬 된 얼굴인지라 찬찬히 올려다도 못 본 채 무릎 꿇어 하염없는 눈물만을 흘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마음의 눈물을 닦아야 했다.
광륭사 측에서는 참배객을 위해 미륵상 앞에 좁다란 다다미를 2미터쯤 깔아 놓고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게 해놓았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참배객 중 중년 여성은 소리내어 울기도 하였다. 아! 우리를 울리던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저 미륵님은 일본땅 눅진 곳에서 한국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미륵님의 얼굴을 찬찬히 살핀 뒤 뇌리에는 하나의 작은 의문점이 생기고 말았다. 이 미륵상이 한국 국보 제83호와 똑같다고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몸체나 닮았을까? 얼굴모습은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이 불상을 보고 간 많은 국내외 학자들, 연구가들, 사진가들…. 심지어는 언론까지도 가세해 모두 한결같이 “꼭 닮았다.”를 외쳤던 탓일까. 얼핏 보면 닮은 듯하지만 닮지 않은 구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영보전을 나온 것이 한 달 전 일이다.
▲ 일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왼쪽),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 많은 이가 두 미륵상이 닮았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볼 수 있을까? © 김영조 | |
교토에서 돌아와 나는 이 미륵상에 대한 국내의 반응을 조사해보았다. 이곳에 다녀간 한국의 누리꾼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한국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불과 “꼭 닮았다.”를 연호했으며 이 말들은 이곳저곳 누리집을 드나들며 확대, 재생산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일보사에서 나온 이 미륵상에 대한 ≪일본 속의 한민족사, 2008≫ 책에는 다음과 같은 찬사의 글이 있다.
“웃는다. 입만 웃는 것이 아니다. 얼굴 전체가 웃고 있다. 웃으려고 의식한 것이 아니다. 삼매(三昧)에 몰입하면서 느끼는 환희로 기쁨이 마음에 넘치면서 얼굴이 환하게 피어난 것이다. 조각한 것이 아니다. 적송 그 나무속에 들어앉아 삼매의 희열이 바깥으로 배어나면서 완성된 모습이다. 합장하고 가슴 두근거리며 바라다보아도 전혀 인위(人爲)를 감지할 수 없다. 전혀 구애됨이 없는 천연스러움이다. 순수 무구한 지락(至樂)의 형상을 저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도 그럴 일이다. 어느 누가 감히 이 미륵상을 두고 한국의 국보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감히 내가 언급할 정도가 안 된다. 이렇게 감동을 하고 있으니 어찌 그 누가 손사래를 칠 수 있으리오.
또 한편의 글을 보자. 이 글은 문화재 관련 기사를 쭉 써왔던 동아일보 이광표 기자의 글이다.
“일본의 대표적 국보인 나라(奈良) 호류지(法隆寺) ‘백제관음상’과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목조(木造)반가사유상’. 이들 두 목조불상은 삼국시대 때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백제관음상은 이름에 ‘백제’가 들어있다는 점에서, 반가사유상은 얼굴과 전체적인 모습이 우리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국보83호)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지금으로선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우리 것이라는 뚜렷한 증거가 거의 없다. 물론 앞으로 결정적인 자료가 발견될 수는 있지만. 우선 호류지 백제관음상을 보자. 백제에서 만들어졌다는 물증이 거의 없다. ‘백제’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우리 쪽으로 해석한 경우다. 대표적 백제불상인 서산 마애삼존불 왼쪽 협시보살의 얼굴과 비슷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은 다르다. 유달리 길고 늘씬한 몸매에 길쭉한 얼굴은 백제풍이라 하기 어렵다. 오히려 중국 수(隋)나라 불상에 가까운 편" (중략)
이 기자는 강우방(불교미술사) 경주박물관장이 문제의 이 목조반가상을 우리 반가사유상의 모작으로 본다고 운을 떼었다. 모작이기에 삼국시대 양식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역시 모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목조불상이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영향을 받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삼국시대 불상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들 두 불상도 ‘백제 신라의 영향을 받은 일본 작품’으로 보아야 하며 학문세계에서 국수주의보다는 지적 엄격성이 우선돼야 함을 일깨워준다는 강우방 관장의 말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기자는 강우방 씨의 논거를 들어 자신도 백제 것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일본학자들이 흔히 말하는 “고대 한반도보다는 중국 영향이 크다.”라는 것을 그대로 따라주는 것일까? 한국의 불상들이 중국과 간다라 불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명백히 그것들과 다르다. 분명히 간다라 불상 다르고 중국, 한국, 일본 불상은 사람이 다르듯 특히 그 얼굴이 각각 다른 것이다.
우리는 보았다. 분명히 한국국보 금동상과 일본국보 미륵상의 서로 다른 얼굴을 말이다. 비록 광륭사 영보전 미륵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지만 뇌리 속에서 서로 다른 이 두 불상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던 우리는 한 자료를 접하곤 깜짝 놀랐다. 이거야말로 “아주 놀라운 소식”이었고,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우리가 보고 온 이 미륵상의 얼굴이 개조되었다는 이 자료에 우리는 갑자기 정신이 멍멍해졌다. 우리가 그렇게 감동하고 왔던 그 광륭사의 미륵상 얼굴이 명치시대에 성형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얼굴에 손을 대기 전에 원형의 본을 떠서 도쿄예술대학에 보존했다는 보도듣도 못한 소식을 접하는 순간 우리는 전율했고 한동안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얼굴로 개조된 광륭사 “미륵상”
명치시대라면 벌써 백여 년이 지났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감탄하는 미륵상의 얼굴이 성형수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를 극찬한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의 말이 금과옥조가 되었을 뿐이다.
“고치기 전에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는데 일본인의 얼굴로 고쳐서 더 일본인에게 사랑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국보의 가치를 손상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일본의 미술대학 교수 나가이신이치는 이렇게 미륵상의 성형에 대해 말했다.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일본인 얼굴로 개조되어 일본인에게 더욱 사랑받게 된 것이 무슨 문제냐는 식의 발언을 그는 서슴지 않는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경우는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게다.
▲ 나가이 신이치 교수가 일본인 얼굴로 개조됐다며 흡족해한 목보미륵보살반가상 얼굴 부분 © 김영조 | |
오늘도 교토 광륭사를 찾아가는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은 얼굴을 완전히 갈아치운 미륵상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할 것이다. 기가 막히다 못해 화가 치민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렇게 얼굴을 일본식으로 뜯어 고쳐놓고서도 “국보의 가치를 손상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라는 일본인의 문화의식 수준이다. 이 정도면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성형 사실을 대충 넘긴 국내 학자의 책
도쿄대학 출신인 황수영 씨의 《반가사유상》란 책 56쪽에 보면 반가사유상 수리 사실을 사진으로 확인해 놓았다. 그리고 “수리 전의 얼굴 모습 : “우리나라에 있는 금동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의 얼굴과 닮았다. / 수리 뒤의 얼굴 모습 : 표면 처리가 말끔해졌으나 얼굴 모습은 수리 전의 인상과 달라져 일본 불상의 얼굴 모습으로 바뀐 느낌이 든다.”라는 아주 간단한 설명이 전부다.
일본 학자 신이치의 “고치기 전에는 한국인의 얼굴이었는데 일본인의 얼굴로 고쳐서 더 일본인에게 사랑받게 된 것이다. ”라는 주장을 보면 얼굴이 대폭 성형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황수영 씨의 반가상 수리 설명은 “바뀐 느낌이 든다.”라며 어정쩡하게 넘어가고 있다.
황수영 씨 책에서 달랑 1쪽을 할애한 “미륵상” 사진에 대한 의문을 짚어보자,
1) 언제 찍은 사진인가? 2) 어디서 입수한 사진인가? 3) 일본인 누가 수리했는가? 4) 사진에 보면 목 밑부분 약간의 손상 빼고는 육안으로 볼 때 얼굴 수리를 한 이유를 모르겠는데 왜 수리를 하게 되었는가? 5) 만일 손상되어 수리했을 때 원형대로 복원했는지 왜 문제 삼지 않았는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전문가의 설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은 심히 유감이다.
얼굴은 이미 갈아치운 지 100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 미륵상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가진 한국인들도 거의 없다. 그를 반증하듯 오늘도 인터넷에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형언할 수 없는 얼굴의 미륵상”이라고 표현한 글들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일본인의 모습으로 바꿔놓은 미륵상 앞에서 감탄하는 것은 바보들의 합창일 뿐이다.
이런 일을 하고도 광륭사가 책자나 누리집에도 알리지 않은 채 버젓이 입장 수입을 챙기는 현실 또한 지적해야 한다. 일본은 광개토대왕비문과 칠지도 위변조 사건을 비롯하여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2000년 구석기시대 날조극 등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대망신을 당했다. 역시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일본 국보 1호 미륵상 얼굴을 뜯어고치고 현재까지도 “광륭사” 측이 입을 싹 씻는 점은 가히 충격적이다. 이 미륵상을 보고 간 수많은 한국인! 그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륵상은 고대 한반도 장인이 만든 얼굴이 아니다. 일본인에게 사랑받으려고 개조된 인형의 모습이다.
“수리 전의 얼굴모습은 한국인 모습이었다.”라고 신이치 교수는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투박하지만 순박한 모습의 미륵상이 한국인의 얼굴이다. 날렵한 일본인의 얼굴로 뜯어고쳐 놓은 지금의 미륵상은 인공이 가미된 미륵상이요, 세기적 보물에 손을 댄 파렴치한의 소행이다. 문화유산은 어떠한 경우든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야 하며 손상 시에는 가능한 한 원형복구가 이뤄져야 함은 상식이다.
그리고 복원을 하더라도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복원되었다는 것을 밝혀야 하는 것 역시 상식이다. 대영제국 박물관이 소장한 수많은 나라의 문화재를 함부로 뜯어고치고도 입을 싹 씻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일본인의 국보의식의 한계를 엿보게 해준다.
광륭사는 미륵상 얼굴을 뜯어고친 것이 두려운 듯 주소나 전화번호도 없이 야스퍼스가 극찬한 글과 일본 국보 제1호란 것만 강조하는 이상한 안내 책자를 팔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누리집에도 소상한 내용을 싣지 않고 있다.
어떠한 경위로 고대 한반도인이 만든 찬란한 작품이 일본 땅에 안치된 것인지 조사하여 그 고향으로 되돌려주지는 못할망정 작품에 함부로 손을 대고 뜯어고치고도 숨기는 <광륭사>와 이러한 사실을 안 학자들, 전문가들, 언론들, 문화재 관계자들은 지금이라도 그 경위를 한국에 소상히 밝혀야 할 것이다.
▲ 광륭사 안내책자 표지(왼쪽), 목조미륵보살반가상(가운데), 성형개조극에 놀아나 미륵상을 극찬한 야스퍼스의 글(안내책자에서) © 김영조 | | 그래서 인공적으로 바뀐 훼손된 불상 앞에서 흘리는 눈물을 거두게 하고 진정으로 불쌍한 미륵상을 위한 눈물을 흘리게 해야만 한다.
*다음주 <2편>으로 이어집니다. 2편에서는 구체적인 <얼굴성형수술>에 대한 사실을 밝힙니다. 많은 응원 바랍니다. 【글쓴이】 *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59yoon@hanmail.net) *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sol119@empal.com) * 이 글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나 참고될 만한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위 누리편지로 연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글이 필요하신 분은 꼭 미리 알려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