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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상 여행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4)

by 마리산인1324 2010. 1. 4.

<대자보> 2009/10/08 [21:44]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29483§ion=sc4

 

 

 

"교토시는 '코무덤', 사천시는 '耳塚(이총)' 통탄할 일"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4)
 
김영조

 

▲ 풍신수길의 잔학성을 드러내는 교토 풍신수길 신사 옆의 조선인 코무덤, 봉분 위에 돌비석을 올려놓은 만행으로 원혼들은 신음한다.     © 김영조




 

 

 

 

 

 

 

 

 

 

분명히 우리는 보았다. 일본 교토 코무덤 앞에 세워진 교토시의 설명판에 “귀무덤(코무덤)”이라고 쓰인 것을 말이다. 일본 안에서의 경과를 보면 “코무덤 ⇒ 귀무덤 ⇒ 귀무덤(코무덤)”이라고 바뀌어온 것이다. 원래는 “코무덤”이었지만 그것이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1603년~1867년) 유학자 하야시라잔(林羅山)이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한데서 귀무덤 왜곡이 시작되었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러던 것이 2009년 7월 현재는 교토시 스스로 "코무덤"을 써주고 있다.

하지만, 한국엔 아직 코무덤이 없다. 2009년 8월 15일 광복절 64돌 전후의 언론도 모두 귀무덤이라고 했다. 통한의 역사를 접어 둔 채 호칭문제를 비롯한 코무덤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재일교포들은 책을 펴고 학술토론회까지 열었다. 그 열의와 지대한 관심에 고개가 절로 수그러든다. 이분들은 “귀무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란 모임까지 갖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모임 이름부터 코무덤이 아니다. 하야시라잔이 잔인해서 바꾸자 한 귀무덤 명칭을 100%로 수용해주고 있으니 진정한 의미에서는 “코무덤 모임”은 아닌 것이다. 

“현재 사람들이 “귀무덤”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따지면 귀무덤이 아니고 코무덤이다. 풍신수길의 명령은 코를 베라는 것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수길.귀무덤.400년》이란 책 96쪽에서 일본인 나카오히로시(仲尾宏)교수는 분명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곱씹어 볼 말이다.

경남 사천시 선진리에는 한자로 “耳塚”(이총) 이라 쓴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죽은 조선과 명나라 군인의 시신을 묻은 거대한 봉분의 <조명군총:朝明軍塚>이 코끼리만 하다면 그 옆에 별로 시선을 끌지 못할 작은 크기의 “耳塚”이 있고 그 앞 표지판에는 그 누구도 주시하지 않을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전리품으로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낸 후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耳塚)이라 칭하였다. 1992년 4월 사천문화원과 삼중스님이 합심하여 이역만리에서 떠도는 원혼을 달래고자 이 총의 흙 일부를 항아리에 담아와서 제를 지내고 조명군총 옆에 안치하였다. 2007년 다시 뜻을 모아 사천군청의 후원으로 현재의 위치로 이전 안치하고 비를 세워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삼고자 한다.”  


▲ 1979년 교토시에서 세운 안내판, "耳塚" 곧 귀무덤으로 표기(위) / 2009년 7월 교토시에서 고쳐 세운 안내판 가로 안에 "鼻塚  표기 / 2009년 9월 현재 경남 사천 조명군총 옆에 잘못 세워진   "耳塚"  위령비(오른쪽)   ©김영조

표지판이란 그 기념비를 가장 잘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만일 이 기념비가 한일간의 문제인 경우에는 일본의 시각이 아닌 우리 조선인의 정신과 철학으로 써야 하는 것이다.

우선 이 표지판의 왜곡부분을 보자.

1. 풍신수길이 전리품으로 조선인의 귀와 코를 잘랐다.
→ 풍신수길은 분명히 코를 베라 명했다
2. 승전의 표시로 교토 토요쿠니 신사 앞에 묻고 이총이라 칭했다.
→ 에도시대 유학자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은 너무 잔인하다며 <귀무덤>으로 부르자고 해서 이때부터 이렇게 불리었으므로 초기에는 “코무덤”이었다.
3. 귀무덤이냐 코무덤이냐는 <잔학성>의 문제이기에 매우 중요한데도 귀든 코든 무슨 문제 냐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표지판의 시각은 현재 한국인이 갖는 <한일간의 역사인식 부족>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 표지판을 보면 이 글을 왜, 누구를 위해 썼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혹시 일본인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 것은 아닌지 모른다. 따라서 이 글은 아래와 같이 바뀌어야 한다.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은 정유재란 때 전장에서 싸우다 죽은 조선병사뿐만 아니라 생후 부녀자, 갓 태어난 아기까지 가차없이 죽여 그 코를 베게하였다. 그리하여 소금통에 절여 오사까로 보낸 뒤 교토까지는 육로로 베어진 코를 실어 나르며 자신의 전공 (戰功)을 자랑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는 교토시에 커다란 코무덤을 만들어 봉분 위에는 수십 톤 무게의 돌덩어리를 눌러 놓았다. 죄 없는 조선인의 영혼들은 지금도 먼 이역땅에서 쓸쓸히 귀향 할 날만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고 있다.
 
임진, 정유재란이 끝난 뒤 400여 년이 넘었다. 어떻게 하든 이 통한의 코무덤 주인공들의 귀국을 서둘러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못해 우선 안타까운 마음으로 코무덤의 흙 한 줌을 파다가 이곳에 묻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풍신수길의 잔학성이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토 코무덤을 반드시 이곳에 모시고 돌아와야 한다고 믿는다. 그 길만이 풍신수길이 죽어서도 공적을 자랑하려는 저의를 깨고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을 위로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이다. 영혼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이 코무덤 비석은 슬픔의 징표로만 잠시 세워두는 바이다. 삼가 숨진 영령들에게 깊이 가슴 조아리며 처절한 역사의 현장을 우리 후손들에게 보여야 하는 현실이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한다.

역사의 현장으로 사용하려면 무엇보다도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 명백한 “코무덤”을 한글도 아닌 “耳塚”이라 써 놓으면 이곳을 찾는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들은 어찌 그 슬픈 뜻을 이해할 것이며 어른인들 그 통한의 역사를 어찌 실감할 것이던가!

왜곡된 “귀무덤” 비석에 대해 사천시문화원 원장에게 전화로 질문을 해보았다. 하지만,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에도 “나는 전임자로부터 ‘이총’으로 넘겨받았기에 다른 이름으로 바꿀 아무런 이유가 없다.” “사실을 확인할 이유도 없으며, 그저 “이총”이면 된다.”라며 사천문화원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투로 전화를 끊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코무덤에 대한 국내 연구는 짧다. 가해자인 일본에는 수십 편의 논문과 책을 발표하고 있는 데 비해 국내의 코무덤 연구는 전무하다시피 하는데. 국내 학자 중에는 부산외대 김문길 교수가 유일하게 코무덤의 일부를 다룬 책≪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를 내고 있다. 

이 책은, <코무덤>을 다루고는 있지만 문제가 되고 있는 교토시의 코무덤이 아니라 일개 깃대잡이 병사가 베어진 코를 빼돌려 조성했다는 오카야마 코무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약간 다루는 교토시 무덤은 아쉽게도 “귀무덤”으로 인식하고 있다. 

일본에는 코무덤이라는 이름의 무덤이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물론 그런 무덤도 조선인과 관계가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 이번 글의 초점은 임진,정유재란의 원흉 풍신수길의 명령에 의해 자행된 <교토시> 소재 코무덤 이야기이며 이 무덤에 대한 "코베기 명령, 시기, 관리된 코영수증, 묻은 장소와 시기” 가 확실한 사료를 토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 코를 베어가면 풍신수길이 코 숫자를 확인했다     © 이무성

지금 교토 코무덤 속에서는 무지막지한 돌비석을 머리에 이고 있는 조선인의 원혼이 괴로워하고 있다. 분명히 귀가 아닌 코를 잘리고도 귀로 둔갑하여 한 번 더 억울한 원혼이 된 것이다. 이런 상태로 흙 일부를 모셔와 안치하고 비를 세운들, 그리고 무덤 앞에서 살풀이춤을 춘들 통한의 원혼이 모두 용서하고 편안히 잠들을 수 있을 것인가?

왜곡된 코무덤을 밝히려고 일본 구석구석을 함께 발로 뛴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의 지은이 고 조중화 씨의 부인 하선자 씨는 아직도 “귀무덤”인 현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남편이 평생을 바쳐 노력한 일이 물거품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는 임진·정유재란은 물론 일제강점기로 인해 무수히 많은 고통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온 겨레는 엄청난 고통 속에 신음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직전 왜에 조선통신사 부사로 다녀왔던 김성일이 일본에 전쟁준비 사실만 왜곡시키지 않았어도 통한의 전쟁은 막을수 있었을지 모른다. 전쟁 대비를 하지 않은 죄. 그 죄 탓에 무고한 양민들이 죽고 목이 잘리고 코를 베이게 된 전쟁의 후유증인 코무덤!

일본인조차도 잔인하니까 완화된 말인 <귀무덤>으로 부르자는 것을 우리 스스로 완화하다 못해 물러터진 <귀무덤>으로 부르는 것은 역사에 눈을 감는 행위다. 진실을 왜곡하고자 하는 일본에 힘을 실어 주는 짓이다. 이제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언론들은 코무덤의 진실을 밝혀주고 정부는 지방 문화원에 이 무덤과 비문을 맡기지 말고 직접 관리해야 한다.

과거의 굴절 되고 왜곡된 역사를 낱낱이 파헤치고 바로잡지 않은 민족은 역사라는 큰 무대 위에 서지 못하고 뒤안길로 스러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자라나는 후손들을 위해서도 교토시 코무덤은 절대 귀무덤으로 불려서는 안 되며 기록과 문헌이 증명하듯 코무덤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더 나아가 흙 한 줌 덜어다 이총<耳塚>이라는 비석 하나 만들어 놓은 것으로 이 문제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400년 아니라 4천 년이 흘렀더라도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국민으로 남기 위해서도 우리는 일본 교토시 표지판을 코무덤 곧 비총(鼻塚,하나즈카)으로 바로잡도록 요청해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국인에게 이러한 커다란 죄악을 저지른 풍신수길의 만행은 일본 정부 차원에서 사죄해야 옳으며 한국정부는 외로운 영혼들이 영구히 귀국하여 영면할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 이후 우리 입에서 더는 <귀무덤>이란 말은 영구히 거론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분명히 코무덤이다.

* 그동안 <통한의 코무덤> 1,2,3,4 편을 읽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어서, 제2부로 이어집니다. 제2부는,
“일본 국보 1호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성형수술하다"
목조미륵보살반가상 앞에서 감동하는 일은 이제 그만두라!“

로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참고문헌]
1.『다시쓰는 임진왜란사』조중화,학민사,1996
2.『바로잡은 임진왜란사』조중화, 삶과 꿈,1998
3.『秀吉,耳塚,四百年』 김홍규, 일본 웅산각, 1998
4.『남원과 정유재란』 최규진, 신영출판사, 1997
5.『간양록, 조선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강항, 김찬순 옮김, 2006
6.『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김문길, 혜안 1995
7. 『교토 다이부츠덴 앞의 무덤은 코무덤이요 귀무덤은 아니다』 호시노 박사 논문 <四溟大師와 護國佛敎의 理念>, 四溟大師硏究論叢刊行委員會 [編], 玉蓮禪院, 2000
8.『사명대사와 호국불교의 이념』 玉蓮禪院, 2000
9.『임진왜란 종군기』 케이넨 저, 신용태 역주. 경서원 1997
10.『太閤征韓秘錄』 松本愛重, 成歡社, 1894
11.『亂中雜錄』, 趙慶男. 民族文化推進會, 1977.  

*가는 방법
JR교토역 시영버스 100번, 206번, 208번 타고 산쥬산겐도(33간당)에서 내려
도요쿠니(풍신수길 신사)신사 쪽으로 50미터쯤 걸어가다 왼쪽 소공원 끝에 있다.

▲ 코무덤 가는 길     © 이무성

[글쓴이]
* 이윤옥 (
59yoon@hanmail.net)(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 김영조 (
sol119@empal.com)(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 이 글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나 참고될 만한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위 누리편지로 연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글이 필요하신 분은 꼭 미리 알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