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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세상 여행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1)

by 마리산인1324 2010. 1. 4.

<대자보> 2009/09/20 [17:26]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29276§ion=sc4§ion2=

 

 

 

'베어진 코 영수증' 들어보셨나요?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1)

 

김영조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지난여름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회원들과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 여행은 주로 여름과 겨울 두 차례 일본 땅 구석구석에 다니며 한반도와 관련된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이번부터는 답사한 곳을 기록하여 많은 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번 글은 그 첫 회로 일본 교토시의 ‘코무덤’을 찾아 지금 국내외에서 ‘귀무덤’으로 잘못 전해지고 이것이 다시 확대, 재생산되는 현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파헤치는 글을 올립니다. 각 꼭지마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회원들의 열띤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이윤옥· 김영조 두 사람이 자료, 문헌, 사진 등을 정리한 “쉬운 글쓰기”를 통해 여러분을 뵙고자 합니다. 많이 읽어주시고 고민도 즐거움도 모두 함께 누렸으면 합니다.  
 
* ‘톺아보기’는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살피다”의 토박이말입니다.  
 
[글쓴이]
* 이윤옥 (59yoon@hanmail.net)(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소장)
 
* 김영조 (pine0826@gmail.com)(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 이 글에 대해 궁금하신 점이나 참고될 만한 내용이 있으시면 언제라도 위 누리편지로 연락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글이 필요하신 분은 꼭 미리 알려주십시오.  



경주하면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이 알려졌듯이 일본의 교토하면 으레 단골로 소개되는 곳이 금각사, 용안사, 청수사 등의 절과 천만궁, 야사카신사 등의 신사 그리고 33간당(三十三間堂,산쥬산겐도)의 불상이나 철학의 거리 등은 관광객을 상대로 한 여행 책자라면 빠짐없이 소개되고 있다. 말도 안통하고 지리도 어두운 관광객들은 아예 여행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따라나서거나 나름대로 배낭여행을 한답시고 여러 책자를 사놓고 여행코스를 짜보기도 하지만 어느 경우나 유명하고 잘 알려진 책자에 소개된 곳 말고는 가 볼만한 곳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 정유재란 당시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고 무거운 돌덩어리를 봉분 위에 얹은 만행의 현장 교토 코무덤     © 김영조


교토는 794년부터 400년간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서울이었기에 많은 유물 유적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목조건축물인 33간당은 외국인에게 인기 있는 곳으로 항상 구경꾼들로 붐빈다. 1,001구의 목조 천수관음입상은 하나하나 세기도 어려울 정도로 저마다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각 모습이 정교하고 아름다워 불교미술을 감상하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호평 받는 곳이다.
 
그런데 그 가까운 곳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신으로 받드는 도요쿠니신사(豊國神社)가 있고, 그 신사에서 길을 건너면 놀이터 옆에 정유재란 또 하나의 비극, ‘코무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구경꾼들의 인기코스 33간당을 뒤로하고 코무덤을 찾아가는 날은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한여름 땡볕으로 등줄기에서는 땀이 비 오듯 했다. 어른 걸음으로 33간당에서 백발자국이나 될까 말까 한 곳이었지만 일행 중 한 명은 몹시 힘든 듯 발걸음이 뒤처졌다. 하지만, 우리는 가야만 했다. 우리가 찾아가는 코무덤이 바로 정유재란 때 우리 조상의 코를 베어다 묻어 원혼이 깃든 무덤이 아니던가? 놀이터 옆에 초라하게 자리 잡아 찾기도 어려운 코무덤. 그러나 코무덤은 들어가 참배할 수도 없게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로 붐비는 33간당과 지척의 거리에 있지만 이곳은 우리 일행 말고는 아무도 찾지 않아 그저 적막강산일 뿐이다.
 
아아! 아무도 찾지 않는 잊혀진 무덤 위로 따가운 7월의 태양만이 쏟아질 뿐 근처는 그저 주택가로 꽃을 사서 바칠 수도, 음료수 하나 살 만한 가게조차 없다. 어찌 이곳의 원혼들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으리오? 후손된 우리가 과연 이렇게 코무덤을 방치해야 한단 말인가? 그저 가슴이 아려올 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코무덤 앞에 서서 비명횡사하신 조상을 위해 묵념을 올렸다. 그런데 코를 묻은 둥그런 봉분 위에는 무거운 돌 기념탑이 올려져있다. 진정한 사죄의 무덤이라면 감히 봉분 위에 무거운 돌덩어리를 눌러 놓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은 또 한 번 천근만근이다. 조선의 무덤은 물론이요, 일본 천황가의 무덤에도 봉분 위에 돌덩어리를 내리누르는 만행은 없지 않은가! 지난 2005년 10월 20일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북간대첩비’를 돌려받은 적이 있었다.
 
이 비는 정문부 장군이 3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병 2만 8천을 무찌른 전공비인데 지난 100년 동안 일본 군신을 받드는 야스쿠니 신사 뒤편에 방치돼 있다가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런데 야스쿠니 신사에 있는 동안 일본인들은 480킬로그램인 이 비에 무려 1톤의 머릿돌을 얹어놓았었다. 그런 그들이기에 이 슬픈 코무덤에도 비석이랍시고 돌덩어리를 눌러 놓았으니 만행은 또 다른 만행을 낳는가?
 
더욱이 우리를 슬프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쿄토시의 코무덤 안내판이다. 초등학생 책상만한 크기의 싸구려 철판에 흰색 페인트를 덧바른 판대기에는 ‘귀무덤’이라고 쓰고 가로 안에 ‘코무덤’이라고 써놓았다. 딴에는 친절히 한답시고 일본어 설명 밑에 한글로 번역을 해두었으나 코무덤이면 코무덤, 귀무덤이면 귀무덤이지 귀무덤하고 괄호 처리한 코무덤은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교토시는 귀무덤에 대해 궁색한 변명을 한다.
 
원래는 코무덤이라 불렀지만 너무 야만스럽다며 에도시대(1603년~1867년) 초기의 유학자 하야시라산(林羅山)이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해서 귀무덤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학자의 역사왜곡을 교토시가 용인해준 꼴이다. 그래도 양심에 걸렸는지 귀무덤하고 괄호치고 코무덤을 덧붙여 놓았다. 이런 식이라면 대체 이 무덤 속에 있는 것이 귀란 말인가? 코란 말인가?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하게 “이 무덤은 코무덤이다”를 외친 이가 있다. 그는 바로『다시 쓰는 임진왜란사』(1996, 학민사)를 쓴 고 조중화 씨이다. 역사학자도 아닌 평범한 약사 신분인 그가 평생을 바쳐 오사카성 천수각, 야마구치현 문서보관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등 일본 구석구석을 수소문 끝에 찾아다니며 밝혀낸 코무덤의 진실에 대하여 우리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는 정유재란 당시 풍신수길의 부하로부터 받은 ‘코 영수증’과 풍신수길이 해당 부대장에게 보낸 감사장을 결정적인 증거로 내놓는다. 
 

▲ 교토시청이 세운 안내 팻말에는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이라고 쓰 고 멋쩍은지 가로 안에 코무덤(鼻塚, 하나즈카)이라고 써놓았다.     © 김영조


수많은 문헌과 자료 속에는 풍신수길의 코베기 명령에서부터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날라다 묻은 기록까지 완벽한 증거품이 있다. 그 자료 속에는 어느 한 곳에도 귀라는 말은 없으며 코를 베었다는 기록뿐이다. 따라서 그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은 귀가 아니라 분명한 코라고 조중화 씨는 밝히고 있으며 일본 측 문헌에도 모두 코무덤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일어난다. 지난 8월 20일 자 중앙일보에는 <타국서 400년 조선의 넋, 이제 한 푸시라>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지난 13일 일본 교토의 이총(耳塚·귀무덤)에서 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이사장 한양원)가 그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제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또 14일 자 연합뉴스엔 <“만행 사과하고파”…‘귀무덤’ 지킨 日노인>이란 기사가 보인다. 기사는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을 받은 왜군들이 조선인 12만 6천여 명의 귀나 코를 전리품으로 베어와 묻어놓은 ‘귀무덤’(耳塚ㆍ이총ㆍ미미즈카)이다”라고 썼다.
 
그런가 하면 2007년 10월 1일 자 연합뉴스 기사엔 <임진왜란 귀무덤 400년 만에 안장>이란 제목으로 경남 사천시 조명군총(朝明軍塚) 옆에서 “이총(耳塚. 귀무덤) 안치 위령비 제막식과 함께 위령제를 갖고 이곳에 안장된 귀무덤 희생자 12만 6천 명의 넋을 달랬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행사는 코무덤에서 채취한 흙을 작은 항아리에 담아 가져오는 형식으로 1990년 한국에 돌아온 것인데 17년 만에야 제대로 안치하고 위령비를 세운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코무덤이 아니고 귀무덤이다. 이 자리에는 일본 쪽에서 무덤의 환송을 도와 온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 스님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일본 쪽 기사를 보면 가키누마 스님은 이제 다 되었다는 뜻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코무덤이 아닌 귀무덤이어야 하며, 일본 쪽 가키누마 스님은 뭐가 다 되었다고 했는지 밝히지 않고 두루뭉실 넘어간 한국에 문제가 있음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의 이런 보도 자세가 오늘날 한국인들로 하여금 코무덤이 아닌 ‘귀무덤’이란 인식을 심어준 것이 아닌가?
 
▲ 코무덤 길 건너편에는 임진왜란의 원흉 풍신수길을 받드는 풍국신사(豊國神社)가 있다.     © 김영조

한 시인은 ‘코무덤’이란 제목의 시에서 “코무덤 귀무덤 그게 그 말인데...”라는 말을 썼다. 그게 그 말이라는 의식이야말로 일본인의 역사왜곡을 두둔해주는 의식이 아니고 무엇이랴! 조중화 씨가 생전에 애타게 부르짖었던 코무덤이 아무 보람도 없이 귀무덤으로 바뀌어 버렸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아직도 만행을 저지른 이들이 제대로 된 반성 없이 귀무덤으로 둔갑시켜버렸는데 억울한 조상의 원혼을 달래주지도 못하면서 일본인들의 추악한 모습을 따라해야 하는가? 정말 안타깝고 답답한 노릇이다.
 
그렇다면 무슨 해결책이 없는 것일까? 우선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해보자. 한국인들이 코무덤을 자주 드나들고 교토여행을 안내하는 여행사들이 부지런히 코무덤을 안내해야만 한다. 그러나 국내 굴지의 여행 상품을 눈 씻고 봐도 코무덤 코스는 없다. 그저 놀이동산이나 거대한 건물, 그리고 대형 쇼핑몰들의 순례이다. 물론 그들 기업이 사업상 성공을 목표로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오늘은 64돌을 맞는 광복절이다. 그러나 해방을 맞은 지 벌써 64돌이건만 일본에 의한 그리고 일본을 무심코 따라하는 한국인들에 의한 역사왜곡은 진행형이다. 우리가 적어도 정유재란 때 억울하게 죽고 코를 빼앗긴 선조의 후손이라면 최소한 코무덤을 계단이 부서질 만큼 드나들어 일본인들이 절대 역사왜곡을 하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당시의 만행을 뉘우치고 코무덤을 한국으로 돌려주도록 해야 하며, 사당을 지어 원혼을 달래는 일에 나서게 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귀무덤이 아닌 코무덤으로 반드시 부르도록 해야 하며 마음으로라도 코무덤에 꽃을 바쳐야 할 것이다.  
 

 <2편 '풍신수길이 보낸 코 감사장'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