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2009/09/2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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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이 보낸 '코 감사장'…"소금에 절여 보내라" | ||||||||||||
[김영조의 문화기행] 일본 속의 한국문화 톺아보기-교토 <코무덤>편(2) | ||||||||||||
[번역] 받은 코의 수 1,551개 확실히 받았습니다. 1597년 9월13일 하야가와 나가마사 나베시마 가쓰시게 귀하
400여 년 전 정유재란(1597년) 때 조선 땅에서 저지른 풍신수길의 만행 중 “코 베기 명령”의 꼼짝없는 증거품이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베어진 코 영수증이다. 이렇게 영수증을 주고받으며 한 치의 오차 없이 조선 현지에서 수집된 코는 7명의 관리가 소금에 절여 일본의 풍신수길에게 보냈으며 이때 풍신수길은 소금에 절인 코를 손수 세어본 뒤 일일이 해당 부대장에게 감사장을 보냈다.
[번역] 8월 16일 보낸 보고서 봤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269개를 베어 그 코가 도착했소. 수고했소,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마시다나가모리 나쓰가마사이에, 이시다미쓰나리, 마에다겐이에게 잘 말해 두겠소. 1597년 9월 13일 풍신수길 시마쓰다다도요 귀하 수십 장의 코 영수증과 이에 대한 풍신수길의 감사장을 세상에 밝힌 사람은 ≪다시 쓰는 임진왜란사, 1996, 학민사≫를 쓴 조중화 씨이다. 그는 오사카성 천수각에 보관된 코 영수증을 비롯하여 야마구치현 문서보관소, 도쿄대학 사료편찬소, 가고시마현 역사자료센터 등 일본 땅 곳곳을 누비며 그들만이 비밀스럽게 보관하고 있는 자료들을 찾아내어 세상에 공개했다.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 전쟁에 참가한 병사뿐만 아니라 부녀자들 목숨까지 앗아서 코를 베어 간 전대미문의 잔학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교토의 코무덤을 지시한 인물은 누구일까? 그가 바로 풍신수길이란 자다. 그는 코만 베라 한 것이 아니다. "굶주린 일본군이 식량징발을 위해 산에 숨어 있던 조선인과 전투를 했는데 산에서 내려올 때는 눈과 코가 많이 나왔다“(御兵具衆 山より被参候 目鼻も数多い候。海南)" 위 글을 통해 심한 경우에는 눈알도 서슴없이 도려낸 것이 풍신수길 부대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글은 1597년 10월3일 시마쓰부대에 종군한 승려 멘고렌조보(面高連長坊)의 ≪高麗日記≫에 실린 글이다. 산으로 숨은 조선인들을 뒤쫓아 가서 숨겨놓은 식량을 내어놓으라며 선량한 사람을 죽여 코를 베고 눈알을 뽑은 것이다. 임진왜란의 명분이 명나라 정복이라면 정유재란은 한반도 남쪽 절반의 점령이 목적이었다고 일본역사는 말하고 있는데 이미 오랜 기간 전쟁에 따른 손실과 피로가 누적된 상태에서 정유재란의 선봉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은 대부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건너왔지만 좀처럼 작전 개시를 안 하고 8개월이나 시간을 보내고 있자 풍신수길은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1597년 6월 15일 야나가와시게노부를 부산에 급파해 “코베기 명령”을 내리게 된다. “전라도에 가서 식량을 확보하고 여러 성을 공격한 뒤 충청도로 들어가서 사병 1명당 한 되(升)씩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보내라” 이렇게 베어진 코는 풍신수길에게 전해졌는데 공식적인 기록에 의하면 코베기는 1597년 8월 15일부터 두 달간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특히 남원성 전투에서 베어진 코가 교토시 방광사 앞에 묻힌 것이며, 그 숫자는 3,276개라고 조중화 씨는 밝혔다.(베어진 코 숫자는 <3편> 참조) 또한, 이때 베어진 코는 일개 장수들이 자신들의 전쟁공로를 위해 다른 지역으로 빼돌릴 수 없는 것이며 교토시에 있는 것은 귀무덤이 아니라 명백한 코무덤임을 조중화 씨는 강조한다. 그러면서 특히 한국인들이 자꾸 완화된 표현인 <귀무덤>이라 부르고 있음을 질책하고 있다. 알려진 풍신수길의 잔학성 -소실 죽이기- 소금에 절여 보내온 코를 일일이 손수 세었다는 풍신수길의 잔학성은 어디가 끝일까? 잠시 풍신수길의 어린 시절부터 살펴보자. 그는 6살 때 하급무사 출신 아버지가 죽자 재혼해버린 어머니 손에 의해 2년 뒤 광명사란 절에 맡겨진다. 그러나 거친 성격으로 이 절에서 쫓겨나 의붓아버지와 함께 살지만 결국 15살에 가출하여 거리를 배회하다 당시 권력자인 오다노부나가 밑으로 들어가 권력에의 야욕을 불태운다. 풍신수길은 24살에 결혼하여 부인 외에 데리고 논 여자가 200명이 넘었다고 루이스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서 말하고 있다. 포르투칼 출신 예수회 선교사인 그는 1563년 일본에 도착한 이후 1597년 나가사키에서 사망할 때까지 34년간 일본 전국시대의 정치적 격변기를 몸소 경험한 인물로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을 계획하고 치르는 전 과정을 직접 지켜본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풍신수길은 교토와 사카이에 사는 반반한 처녀와 과부를 끌어와 놀다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곁에 두고 살았는데 어느 날 이 중 한 여자가 몸이 안 좋아 친정으로 보내졌다. 여자는 자유의 몸이 된 줄 알고 병이 낫자 중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를 안 풍신수길은 질투와 복수심으로 이 여자와 남편을 잡아다가 허리 아래를 흙속에 생매장하여 굶어 죽게 한 뒤 목을 자르고 그것도 모자라 아이와 유모, 친정어머니를 불태워 죽였다고 밝혔다. 그뿐만이 아니다. 풍신수길의 잔학성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28세의 조카 히데츠구를 죽이는 장면은 가히 망나니가 날뛰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53살에 얻은 아들이 3살 만에 죽자 풍신수길은 다시는 자식이 안 태어날 것으로 단정하고 성급히 조카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지명하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풍신수길이 57살 되던 해 소실 몸에서 다시 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조카에게 심복들과 함께 할복자살을 하도록 명했다. 이어 조카며느리를 포함한 히데츠구 일가와 처첩 4남 1녀의 자식 등 39명을 히데츠구의 목이 내걸린 무덤 앞으로 끌고 가 5시간 동안 처참하게 죽인 뒤 “반역을 꾀한 짐승무덤 <惡逆畜生塚>”이라는 팻말을 내거는 등 차마 인간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른다. 이러한 인간말종 풍신수길을 두고 교토 코무덤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가증스러운 글이 쓰여 있다. “1597년 풍신수길은 일본 장병에 명하여 다시 조선을 정벌하였다. (중략) 장병이 적의 목을 베어야 하나 바닷길이 너무 멀어 조선군의 코를 베어 풍신수길에게 보냈다. 풍신수길은 이들을 원수라 생각지 않고 오히려 가엾다는 마음을 깊이 하여 친한 사람에게 하듯 공양을 하고 그들을 위하여 무덤을 만들고 코무덤이라고 이름 지었다.”1597년 9월 28일 (조중화씨 번역)
이 글은 풍신수길의 어용학자인 상국사(相國寺) 주지 쇼다이에 의해 쓰인 것으로 풍신수길을 “자비심이 넘치는 인자스런 장군”으로 왜곡한다. 또 조선인의 코를 벤 것이 풍신수길의 명령이 아니라 일본군 병사의 자발적인 충성심에서 벌어진 양 거짓표현하고 있다. 풍신수길의 잔인성으로 볼 때 코무덤이야말로 일본 열도를 통일한 장군의 “영원한 힘의 과시”로 남기고 싶은 그릇된 욕망일 뿐 결코 비명횡사한 조선인을 안타까이 여기고 한 짓이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풍신수길 심복조차도 “코무덤”이라 밝힌 무덤이 어째서 “귀무덤”이 되었는가? 명백히 상국사 주지 쇼다이는 “코무덤”이라 밝혀두었는데 이것이 “귀무덤”이 된 까닭은 풍신수길 뒤에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막부의 23살 브레인 하야시라잔이 “코무덤은 잔인하다. 귀무덤으로 완화해서 부르자!”라고 한데서부터 “귀무덤”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한 교토시 표지판만 잘 살펴봐도 본래 이 무덤이 귀무덤인지 코무덤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귀면 어떻고 코면 어떠냐는 식의 태도를 우리가 여기서 불식시켜야 하는 이유는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코를 묻었는데 귀를 묻었다고 왜곡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둘은 잔학성의 상징인 코베기를 완화된 표현으로 귀베기로 왜곡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역사의 왜곡은 정유재란의 코베기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으며 이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이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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