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사상연구회 월례발표회 2007년6월
함석헌: 국가주의를 극복해나가는 길
박노자 (Vladimir Tikhonov)
/오슬로대 (University of Oslo), 노르웨이
1. 한국적 근대의 최대의 미(未)해결 과제라면 아마도 주체적이면서도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개인의 만들기일 것이다. 1920년대초반부터 “개인”이나 “인격”은 빈번히 쓰이는 말들이었지만 실제로는 개인은 “민족”/”국가”라는 틀 안에서 갇히기도 하고 “여성”으로 성별화되어 “가족”이라는 이름의 전체에 복속되기도 하고, “아동”으로 분류돼 훈육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특정 종교의 “신자”로서 종교 집단의 테두리에 갇히기도 했다. 물론 “민족”을 명분으로 삼은 국가가 자본가 계급을 창출시키는 동시에 사회 전체의 병영화 (兵營化)를 주도하는 권위주의적 개발주의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는 무엇보다는 민족/국가라는 전체성이 개인의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까지도 지배하게 됐다. 오늘까지 와서도 권위주의적 개발주의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인물인 박정희가 “가장 인기가 높은 전직 대통령”으로 여러 여론조사에서 등장되어 보통 60-70% 안팎의 응답자로부터 조건부긴 해도 전반적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을 보면, 지난 시대의 내면적 주체성의 미(未)확립이 어떤 장기적 결과를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여실히 볼 수 있다. “원수를 사랑하라” 했던 예수를 신앙한다 하면서도 “군대는 우리 울타리””라고 늘 “군사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순복음교회의 조용기 목사를 추종하는 교인의 수가 약 60만 명이나 되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과연 이 60만 명 중에서 조 목사 설교문과 예수 가르침의 일치 여부에 대해 독립적 개인 판단을 시도해본 이들이 몇 명이 될까? 몰개성적인 “일체단결”은 일부 종교 집단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 전체의 하나의 “아비투스” (habitus: 관습)를 이룬다. 독도 관련의 일본과의 분쟁이든 월드컵이든 “국가”/”민족”을 명분으로 내세워 대중들의 자발적인 동원을 유도하는 “이벤트”들이 잘 보여주듯이, 국가 주도의 민족주의의 주술에 대해서는 한국 사회가 거의 면역성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억압적 근대의 광기 속에서는 함석헌 (1901-1989)이 – 매우 드물게 – 민족적 전체의 전제 (專制)에 대한 종교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인 견제, 즉 개체와 전체 사이의 “균형 잡기”를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시도해봤다. 그는, “민족” 내지 “국민”을 대신할 수 있는 “계급”과 같은 사회과학적 개념을 설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종교적 논리를 통해 “민족”의 상대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2. 함석헌이 “민족”이라는 이름의 인간 집단이 전근대 시대부터 이미 인류 역사의 주된 “단위”이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조선민족”과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파악해왔다는 의미에서는 분명히 “민족주의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민족의 영구성”에 대한 이와 같은 견해를 함석헌의 정치, 역사 인식이 형성됐던 시기인 1920-30년대의 (일부 좌파를 제외한) 다수의 식민지 지식인들이 공유했다. 함석헌을 최초로 “사회적 운동”으로 끌어들인 것은 그가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시절에 참여했던 전(全)민족적 3·1운동이었던 만큼, 그리고 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그의 고향 (서북 지역)의 지도 인물이 바로 그가 그 뒤에 공부했던 오산 학교의 설립자이었던 뛰어난 기독교적 민족주의자 이승훈 (李昇薰, 1864-1930)이었던 만큼, 그가 “민족주의자”로 성장돼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조선인이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 된 식민지 시대에는, 함석헌에게는 “민족”이란 무엇보다도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다른 식민지 지식인들처럼 그가 조선민족이 식민지 피지배 민족의 신세로 전락되게 된 “내인” (內因)을 찾는 데에 골몰했으며, “찬란했던” 고대 시절과 대조되는 오늘날 조선민족의 “쇠락”, “불명예”를 한탄했다. 고대 조선인들의 “기본적 성질인 인(仁)과 용(勇)”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뒤에, 30대 초반에 조선 역사의 “성서적” (聖書的) 해석의 작업에 착수한 한석헌은 오늘날의 조선인을 다음과 같이 비관했다:
“조선 사람의 근본성이 착하다고 하였지만, 오늘날 조선사회는 질투음해(嫉妬陰害)로 서로 쟁탈(爭奪)하는 수라장이 아닌가. 삼백년 정치가 붕당(朋黨)의 싸움으로 종시(終始)한 것은 차치하고, 소위 현대 데모크라시 문명을 배웠다는 신인개조한다는 교육계에도 왈 기호니 서북이니 하는 것이 있고 이천만의 여론을 지도하노라고 하는 언론계에도 나는 전라니 너는 황평이니 하는 것이 있다. 조선 사람은 강용(剛勇)하다 했지만 지금은 유약 이것이 조선사람의 대명사가 아닌가. 의분은 조선사람의 성질이라 했지만 지금은 구차가 그 천성같이 되지 않았나. 다른 사람의 잘 되는 것을 보면 기어 방해하려하고 내 지위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는 골육도 돌아볼 것 없고, 사회의 병폐는 날로 심해 갔건만도 참 의용적 정신에서 민족적으로 살길을 찾아보자는 노력을 위한 기관은 얻어 볼 수 없고 잔패(殘敗)민족의 표지(票紙)를 숨길 수 없이 얼굴에 붙쳤건만도, 일편참괴(一片慙愧)의 념도 강개(慷慨)의 지(志)도 발하는 것이 없이 스스로 신사인줄 알고 안연(晏然)하고, 권세를 주마 약속하면 오천년의 역사를 버리기 폐리(弊履)를 버리듯이 쉽게하고 이익이 있을만 하면 동족을 팔아먹기 단 일전에도 서슴지 않고 한다. 이를 보고 누가 인(仁)한 민족이라 하며 용감한 민족이라 할까”
일본의 침략·식민화가 함석헌으로서 일차적인 정치적 반대의 대상이었지만, 그가 보다 근본적으로는 “대(大)민족의 자격을 한 때에 가졌던 우리”의 “쇠락” (衰落)를 한탄하고, “민족의 위기”를 통감(痛感)했다. 상당수의 근대 계몽기, 일제 시기의 민족주의 사상가들처럼 1930년대의 함석헌도 “조선혼 (朝鮮魂) 타락의 원인”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상징되는 “모북사상” (慕北思想: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과 한 때에 고구려로 대표됐던 “모험진취 정신”의 쇠퇴, “잘못 받아들여진” 유교의 “현실주의, 출세주의, 숙명론”과 “고식(姑息)주의의 풍속” 등을 지목했다. “조선혼 (朝鮮魂)의 인(仁)”을 일차적으로 강조했던 함석헌과 달리 조선인들을 “뛰어난 무사(武士)이었던 대궁족(大弓族)의 후예”로 간주하여 고대 조선의 “무사 정신”을 늘 강조해온 안확 (安廓: 1886-1946)과 같은 당대의 대표적 민족주의 사학자도, “조선 시대의 문사(文士)의 발호 (跋扈)와 군사, 경제의 쇠퇴”, “유교적 교육의 공론(空論)주의”, “헌신 정신, 단합 정신의 결여”, “귀족 전횡” 등을 들어 조선민족의 궁극적 “쇠락”을 설명했다. 즉, “우리 민족 패인 (敗因)의 찾기”라는 형태의 식민지 피지배자로서의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은, 함석헌의 개인적 생각이라기보다는 그 당시로서 일부 공산주의자 내지 아나키스트를 제외한 다수의 조선 지성인들의 지적인 공동 분모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무사 정신의 쇠퇴”, “모화 (慕華) 사상”, “조선인의 이기주의” 등에 비판의 중점을 맞춘 “패인 찾기”는, 그 원형에 있어서는 근대 계몽기의 계몽주의자들이 내면화한 서양/일본의 유교/중국 비하 인식 등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계승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피식민자 (被植民者 – the colonized)로서의 “패인이 된 전통의 탓하기”와 식민자 (植民者) 오리엔탈리즘의 일정한 내면화라는 부분을 떠나서라도, “전근대”에 대한 배제가 근대적 앎의 출발점이 되는 것은 세계 사상사의 보편이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함석헌이 일명의 근대적 지식인으로 그 지적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애당초부터 그의 민족주의는 그 당시를 풍미했던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와는 그 본질을 달리했다.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는 “彼와 我의 투쟁” 중심의 약육강식이라는 과정을 통한 “민족사”의 전개를 설정했다면, 함석헌의 종교적 민족주의는 “민족사”의 과정을 “신의 아가페에 도달하는 여정, 종교적, 도덕적 “민족적 자아의 성장” 과정으로 해석했다. 함석헌의 “민족”은, 민족주의자들이 흔히 상상하곤 하는 “통일된 인격체”이긴 했지만, 이 인격체는 통상적인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의 “전사상” (戰士像)과 다른 “종교인상” (宗敎人像)이었다:
“민족의 성쇠도 국가의 흥망도 모든 문화도 다 이 하나님을 탐색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저술했던 당시인 1930년대 중반에 함석헌은 “하나의 인격체”로서의 “민족”의 발달 과정을 개인에 빗대어 “발생기” (원시시대), “성장기” (고대 및 중세), “단련기” (중세 이래 지금까지), “완성기”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나누어보고, “민족 분화”, “각 민족의 문화 완성”의 시기로 “성장기”를 주목했다. 그 뒤에, 1960년대 초반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역사>를 정리하면서 함석헌은 “민족 분화”의 시대인 “성장기” (“소년기” – 원시시대 및 고대)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언급을 했다:
“지구 위에 민족이 많다 하나 그 분화는 그리스도의 기원까지요 그 후에 볼 수가 없으며 인간이 가지는 생활과 문화가 내용에 있어서 이 시대에 이미 구비됐다. 동양에서도 이 시대말인 한대 (漢代)를 경계로 삼아가지고 전후의 역사를 갈라서 말하는 것이요, 서양에서도 로마를 그저 호수에 비하여 그 전의 모든 문명이 여기에서 집대성이 되었고, 그 후의 모든 문명이 또 여기에서 근원한다고 하는 것은 일반이 잘 아는 일이다”
고대에 있어서의 “민족 분화” – 함석헌은 고대의 종족적 집단 (ethnic group)과 근대적인 “민족”을 같은 존재로 파악했다 – 와 인류의 “종족적” 재편의 원인을, 함석헌은 18세기 중반 이후의 지리적 결정론의 전통대로 “지리”에서 찾으려 했다. 지리경정론이란, “지정학” (地政學)의 기초를 세운 독일의 지리학자 랏쩰 (Friedrich Ratzel: 1844-1904) 이후로는 1900-1910년대의 구미 지역의 “주류” 학계에서 한 때에 거의 통념화 (通念化)됐으며, 1930년대 일본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즉, 함석헌이 “대륙성”, “해양성”, “반도성(半島性)”, “기후와 토질”이 민족 형성과 그 역사에 미친 영향을 논했다는 것은, 적어도 1930년대 동아시아의 근대적 앎의 형태로 봐서는 거의 당연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섬사람은 섬적인 성질을 갖고 있으며, 대륙의 사람들은 대륙적인 것을 그 문화 위에 가지는” 등 “민족 분화”는 인류 존재의 지리적 조건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그런데 “성서적 사학자”인 그에게 “지리적 조건”은 “인류 역사의 무대”에 불과했으며, “인류 역사”라는 “극”의 ‘연출가”는 결국 다름이 아닌 “신의 섭리”이었다. 결국, 이 논리로 일관되면 “민족의 분화”도 “신의 섭리”에 의한 일로 이해돼야 됐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함석헌은 “민족”보다 더 근원적인 종족적 단위로 “인종”을 설정했다. 그의 인종론은 유럽 19세기 중반 이후의 인종주의가 이야기하는 피부색 기준의 인종 분류보다는 차라리 그 전의 “성서적 인종론”에 더 가까웠다. 예컨대 함석헌이 성경의 인류 창조론과 비교 언어학의 성과에 의해서 “인류의 주된 인종”들의 발전의 추이를 분석한 프리차르드 (James Cowles Prichard, 1786-1848)의 저서를 읽었는지의 여부를 필자로서 알 수 없지만, 그가 사용하는 “인종”의 개념은 차라리 프리차르드의 다분히 종교적인 “인종”의 용법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인종의 분화”를 머나먼 구석기부터 일어난 일로 파악했으며, <창세기>의 텍스트대로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함, 야벳을 “인류의 주유 세 인종”의 원조로 주장했다. 이처럼 인류의 태생 시기부터 나누어진 인간 집단인 만큼, “인종”들은 각자 그 고유의 특색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함석헌의 또 하나의 주장이었다. 요컨대 “셈의 후손”으로 인식되어지는 “아시아 인종”의 경우에는, 함석헌에 의해서 매우 “온화한” 것으로 묘사된다:
“아시아계에 속하는 인종은 대체로 그 성질이 온화하다. 싸움을 좋아하지 않고, 잔인을 싫어한다. 자기 주장을 그렇게 하지 않고, 서로 관용하는 편이 많고, 배타의 풍이 심하지 않다. 물론 아시아 사람 가운데도 정복시대의 몽고족과 같이 폭용 (暴勇)한 자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도 서구인이 생각하는 것같이 그렇게 폭용한 것이 아니요, 또 유럽 인종에서 보는 듯한 것에 비할 바 못된다. 아시아의 민족에는 로마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을 싸움을 붙여 서로 목을 찌르고 거꾸러지는 것을 그 신사와 숙녀가 보고 쾌재를 부르는 것 같은 것은 없고, 아시아의 역사에는 유럽의 종교 전쟁 시대에 보는 듯한 끔찍한 것은 없다. 동양인은 그 얼굴부터가 악의와 음흉을 가지지 않았다.”
이외에는 함석헌은 “동양인”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감정의 담백”, “[영적인] 깊이”, 그리고 “통일에 대한 존중”과 “자유에 대한 주장의 부재”, “서구적 개인의 부재”를 강조했다. 이와 반대로, “야벳의 후손”인 “유럽 인종”은, 함석헌에 의해서 “평온하지 못하고”, “성질이 활발하고”, “동양인처럼 감정을 누르는 대신에, 감정을 애써 표출하고”, “자기 주장, 자유, 개성, 민주주의를 좋아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즉, 함석헌이 생각했던 “아시아 인종”과 “유럽 인종”의 대조성은, “자연적이며 정적이며 복종적인 아시아”와 “인위성, 자연 정복에의 욕망이 강하고, 동적이고 자유, 민주주의적인 유럽”의 차이었다. 한편으로는, “함의 후손”인 “아프리카 인종”은 함석헌에 의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고 주로 야만시(野蠻視)됐다:
“저들 [아프리카인]에게 있어서 주되는 것은 정신도 아니요 인간도 아니요, 그저 자연뿐이다. 그 문화에서 종교의 볼 만한 것도 없고, 과학도 없고 그저 원시적이다. 본능적이다. 거기 있어서 사람은 자연의 위대에 압박되어 있다. 자연만으로는 어떻게 무력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프리카다”.
“무의미한 원시적 아프리카”를 제외하면, “유의미한 세계사의 주인공”으로 “천적” (天的) 아시아와 “인적” (人的) 유럽만이 남는다. 이 둘 사이의 가치 평가를 함석헌이 어떻게 했는가? 함석헌이 세계사를 각종의 민족들이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역할을 맡으면서 고유의 특질이 허용하는 대로 인류 전체를 “신”이라는 궁극의 지점으로 이끌고 가는 우주적 과정으로 파악했다. 신의 섭리에 따르는 역할이 원칙상 모든 민족들에게 주어지기에, 원리원칙으로 본다면 함석헌의 종교적 세계사 시각은 배타적일 수는 없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영 (靈), 정신의 고장” 아시아는 “인류의 발원지”, “문명의 요람”임에도 본래부터 “보수성이 강한 인종” 이기 때문에 “역사가 만일 아시아인의 손에만 맡겨졌다면 보수 (保守), 고루 (固陋)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신에 유럽은 “인간 중심”적이며 “현실적”이며 “진취적”이다. 함석헌이 늘 존경하여 1962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 직접 찾아가기까지 한 미국의 종교 철학자 호킹 (William Hocking, 1873-1966)도, 인도와 같은 “동양” 문화의 “영적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일부 힌두교 철학의 “현실 실제성의 지나친 부정, 과도한 유식론 (唯識論)”이 “유럽과 같은 진취적인 자연의 탐험, 과학적 문명의 창조를 불가능하게 했으며 인도 문명의 소극성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보지 않았던가? 즉, 많은 서구, 미국의 기독교 철학자들처럼 함석헌이 현실적 의미의 인류 “진보”의 공로의 대부분을 유럽/기독교에 돌리는 것이다.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가 유럽의 “자원 공급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함석헌의 현실 인식이었는데, 그가 이 현실에 명시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것을 꺼리는 듯했다. 그에 의하면 “아프리카를 광명화” (문명화)시키는 것은 바로 “유럽의 사명”이었다던데, 그러한 의미에서는 그가 아프리카에 있어서의 유럽인들의 행위 (식민화 등)를 어느 정도 “이해해주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의 유일한 독립국가인 에티오피아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역시 비판적으로 언급한 함석헌은, 동시에 유럽의 식민주의에 나름의 비판적 의식을 가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남한에서 반(反)독재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던 1960-1970년대의 함석헌은 미국의 “흑백 문제” (인종 차별의 문제)를 언급했을 때에는 흑인들의 비극에 대한 백인 전체의 책임을 강조하기도 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검은 그리스도”라고 극구 칭송하기도 했다. 그러나 “흑인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한 반(反)차별, 평등주의 인식을 보이면서도 그 시기의 함석헌이 여전히 서구 역사를 “민주주의 발전의 역사”라고 기본적으로 긍정 위주로 파악했으며 미국의 “민주주의”를 “세계사 속의 민주주의 발전의 절정”이라고 평가했다.
함석헌의 인종론이나 “민족성” 담론 등을 오늘날의 사회과학의 입장에서 평한다는 것은 아마도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학자라기보다는 종교인이었던 함석헌은 “민족”과 같은 인간 집단들이 근대로의 전환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서>의 논리 그 자체는 종족적 집단들에 대해서는 형성, 변이과정보다 “기원”이나 “신의 섭리에 의해서 주어지는 역할”을 강조하기에, 함석헌도 “성서적 입장”에 서 있었던 만큼 그 논리를 벗어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의 종교적 논리는 아프리카나 이슬람 세계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유럽과 아시아를 “세계사의 중심”으로 설정하면서 둘의 관계에 대립보다 상호 보완성을 찾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그는 서구 우월주의자도 황인종 우월주의자도 아니었다. 그가 인식한 “세계사”는,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쌍두마차에 의해 이끌려가는 듯한 이미지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적 유럽과 여성적 아시아”라는 고전적인 오리엔탈리즘의 모델에 가까웠던 그의 논리는, 거의 위험스러울 정도로 “아시아의 고유의 보수성”을 강조해 일제시대에 유행했던 중국, 조선에 대한 “정체성” (停滯性)론을 연상시키기까지 한다. “동양의 인(仁)”을 부각시켰던 그는 주관적으로 선교사들에 의해서 전파된 기독교에 내재돼 있었던 서구 우월주의적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지만, “진취성”과 “진보”, “개인 사상”, “자기 주장”과 “자유”, “민주”를 유럽의 전유물로 만드는 그의 “동서양 이분법” 그 자체는 서구 우월주의의 주된 논리적 근거들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 호킹과 같은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 기독교 사상가로서 “동서양의 대립”보다 “동서양의 보완성”을 훨씬 더 강조했기에 위와 같은 “각 문명 고유 특질”의 논리는 극단으로 가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동서양의 특질”을 보는 그의 시각이 서구 19세기의 고전적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파생되는 “서양 대(對) 동양”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탈서구화” (脫西歐化)의 과제를 끝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온 한국 기독교 사상 전반의 문제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다.
3.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비록 “평화적”, “정신적”, “종교적”이지만, 함석헌도 그 근저에서 근대적 민족주의라는 사상적 배경을 깔고 있었던 사상가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어떻게 해서 군사주의적 국가주의라는 관제 (官制) 민족주의의 하나의 변종과 치열하게 맞서게 됐던가? 장준하선생을 포함한 그토록 많은 민족주의적 기독교 지성인과 달리 그가 처음부터 박정희의 군사 정변과 “군인 정치”에 맞서게 된 사상적인 근원이 무엇이며, 그가 매우 일관되게 1960-70년대의 병영국가 공고화 과정에서 “딴 소리”를 내온 배경이 무엇인가? 개화기와 일제시기의 사회진화론적인 사조에 결정적 영향을 받아 나폴레옹이나 이광수가 그린 “성웅 (聖雄) 이순신”을 숭배한 박정희가 권력을 잡은 뒤인 1963년에, “같이살기 운동”이라는 일종의 풀뿌리 생명 공동체 운동을 벌이려 했던 함석헌이 “생존경쟁을 원리로 삼는 국가주의의 가는 길이 곧 멸망의 길이요, 사랑으로써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가능케 하는 같이삶의 길이야말로 새 길이다”라는 예언자적 판단을 내려 박정희의 사회진화론적 국가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은, 과연 어디에서 나온 힘에 의해서 가능했을까? 지금까지도 양심적 병역 거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 (安息敎)에 속하지 않는 기독교 사상가로서 선구적으로 – 그리고 지금까지 거의 유일하게 - 병역거부를 주장하여 1957년3월에 병역을 거부하여 1년4개월 감옥에서 복역하게 된 제자 홍명순 (洪命淳)을 키울 수 있는 힘, 군인을 “나쁜 직업”이라고 이야기하고 군대의 “궁극적 폐지”를 바랄 수 있는 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일차적으로는, 스승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 1861-1930)처럼 “무교회주의자” 함석헌도 “protestantism”을 원시 교회의 “진실된 정신의 회복”으로 보면서 근본적으로 “개인 자유의 존중”으로 간주했다. 외부적 자유라고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 일제시기의 한참인 1930년에, 젊은 무교회주의자 함석헌은 자신이 믿는 “종교” 내지 “신앙”을 다음과 같이 “내부적 자유의 공간”으로 묘사했다:
“신앙에 들어가는 지도를 하는 것은 옳으나, 신앙은 이러할 것이라고 외적으로 규정하고 간섭하는 것은 근본에서부터 잘못된 일이다. 신앙이란 나라는 사람 – 나, 온 세상에서 오직 하나밖에 없는 나, 하나님이 다른 아흔 아홉 마리를 두고 찾아다니는 나, 독특한 개성과 가치를 가지는 나 라는 사람, 그 나와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다른 종교는 몰라도 적어도 기독교는 개인적인 종교다. (…) 신교는 교권을 부정하고, 교회의 조직에서 개인을 해방시켜 신앙의 자유를 주었다”
물론 위에서 고백된 젊은 날의 함석헌의 개인주의는 엄정하게 이야기하면 “종교적 인격주의 (personalism)”이지 세속적 의미에서의 개인주의와 상당한 거리를 보인다. 함석헌 자신은 “프로테스탄트 정신”과 “소위 개인주의”/“이기심이나 [개인] 독립”의 차이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구원이 궁극적으로 전체적이다”는 것을 언급하기도 하고, “성서 중심주의”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독교적 인격주의자이었던 그에게는 북유럽 여러 국가에서의 신교의 국교화는 진정한 의미의 개성적 종교의 배신이었고, 종교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는 “국민”은 “괴물”이었다. “국민의 시대”인 현대는, 그에게는 “위대한 혼”이 더 이상 나지 않는, “위대한 혼에 목마른” 시대이었다. 인간을 “종족적 존재”로 파악해도, 인간의 종교를 “개성적인” 것으로 파악한 것은 함석헌이었기에, 그에게는 “종교를 삼켜버린 괴물”인 근대적인 “국민”을 권위주의적 방법으로 위로부터 만들려 했던 박정희는 거의 절대적인 반대자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철저한 종교 사상가로서의 함석헌에게서의 민족의 “도구성”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이 사상가로서 커갔던 1920-30년대에, 식민모국 일본에서는 극우파의 이념가들은 물론 비교적으로 “온건한” 관념주의 철학가들도 (자기 자신의) 특정 국가를 이상화, 절대화하는 길로 이미 들어섰다. 그 당시의 경도 (京都) 학파의 지도자 격인 니시다 기타로 (西田 幾多郎; 1870-1945) 같으면, “일본의 독자적인 국체의 요체”로서 “내재적인 것이 곧 절대적인 것이 되고, 절대적인 것이 곧 내재적인 것이 되는” 신속 (神俗) 합일을 보고 소위 “황실”을 “과거와 미래를 포함하는 세속적 현재 속에서의 절대적 존재”로 인식하는 등 “일본 민족”만큼은 보편이 아닌 “특수”, 역사 전개의 어떤 “도구”라기보다는 그 전개의 “목적” (절대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합일의 장소 場所)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했다. 니시다는 선불교를, 함석헌은 기독교를 각각 종교로 받드는 등 둘 다 “종교 철학가”이었지만, 니시다의 선불교적 세계사 이해와 달리 함석헌의 기독교적 세계사 이해 체계에서는 어떤 민족에게도 “목적”으로서의 위치는커녕 “영원한 주역”으로서의 위치까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1930년에 쓴 한 글에서는, 함석헌이 유대 민족의 ‘선민 (選民) 되기’의 의미를 “메시아 낳기”, 즉 기독교적 문명의 모태가 된다는 것으로 규정하고, 기독교를 배태시킬 “사명”을 다한 유대민족은 “썩은 담처럼 무너졌다”고 표현했다. “민족” 기 자체보다 “우주의 구원사 (救援史)”에의 그 “민족”의 “기여”는 함석헌으로서 의미 있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는, 그리스 민족의 “의미”는 기독교 보급의 터전이 된 지중해의 통일된 그리스어 문화권의 “준비”이었고, 로마 민족의 “의미”는 <성서> 보급의 안정된 기반을 끝내 제공해준 지중해 중심의 세계 제국의 건설이었고, 유럽 문명의 “의미”는 역시 기독교의 세계적 전파나 종교 개혁의 단행 등에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에의 “기여”는 개인이 오로지 “민족”을 통해 할 수 있다지만, 함석헌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궁극적인 시점은 “전(全)아담의 자손이 다같이 하나님의 슬하에 돌아와 서로 손을 잡는 것”이었다. 사실, 이와 같은 의미에서는 함석헌은 결국 그 명분상으로 “세계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충실한 크리스천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신 중심의, <성서> 중심의 충실한 “민족 상대화”는 우리에게 특별한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한국의 근, 현대 기독교가 서양/미국 “문명”이나 자민족의 절대화 논리에 그만큼 포섭돼 대조가 되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한 안창호 (1878-1938) 같으면, 1919년에 상해의 한 한인 교회에서 요한복음1장3절을 주제로 삼아 “사랑”에 대해 설교했을 때에는,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과의 일체화”로서의 사랑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일차적으로 “자기의 몸 대신에 대한의 국가를 본위 삼아 일하는” 사람, 민족을 위해 “금전과 생명을 희생하는” 사람을 참된 사랑의 실천가로 이야기했다. 안창호에게는 “도덕력” (道德力)이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것보다 “민족의 힘 기르기”의 첩경, 즉 수단에 더 가까웠지만, 함석헌은 – “민족의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으면서도 – “민족”을 무엇보다 세계의 도덕적 진화에 공헌하는 “도구적 존재”로 파악했다.
“민족”은 함석헌에게 불가피한 “역사의 도구”가 됐지만, 그 도구를 종교인으로서의 함석헌이 “순선” (純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보는 역사의 비극성은, “현실에서 민족은 세계적 도덕을 깨친다, 인류로서 찬미할 도덕이 민족에서는 죄가 되고, 인생으로서 배척할 죄악이 민족에서는 찬양할 미덕이 된다”는 데에 있었다. “민족심” (애국심, 애족심)에서 인간의 결점들이 다 발동된다는 것을, 일제 군국주의 광기의 시대를 겪어본 함석헌이야말로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 예컨대 마르크스에게는 자본주의란 사회주의로 진입하기 위한 고통스럽지만 필수 불가피한 단계이었듯이 – 그에게는 “민족”이란 ‘사해동포주의’, 즉 진정한 종교의 영역에 진입하기 위한 필수적인 교두보, 준비 단계이었다. 이스라엘민족이란, 애국심과 단결력이 가장 강한 민족 사이에서 결국 “민족”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사해동포적인 기독교’가 탄생됐듯이, “민족”이 “세계’를 준비한다는 것은 함석헌의 논리이었으며, “민족의 역사란 신이 우리에게 지우는 짐”이라는 것은 그의 결론이었다. 그는 “민족” 내지 “인종”을 중심으로 한 패러다임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원칙에 충실한 종교인으로서 이를 어느 정도 “하위 배치”시키는 데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4. 함석헌에게는 “하나님을 향해 전개되어가는” 세계사는 민족들의 역사, 즉 국가들의 역사이었지만, 특히 1950년대 후반 이후의 그에게는 “국가”란 모순, 갈등으로 이해됐다. “비주류 종교인”으로서의 함석헌은, 민초들을 오로지 통제와 순치의 대상으로만 다루고 관제 (官制) 국가주의를 하달시켜도 민의를 수렴할 줄 모르는 외삽적 (外揷的) 성격의 독재 국가, 그리고 이 국가를 “반공의 기지”로 삼아 유착 관계에 들어갔던 “주류” 기독교계와는 늘 길항적인 관계에 있어왔다. 그가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명문 (名文)에서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 찬성, 전적 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서는 혁명 아니다. (…)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해도 참이 아니다”라는 명구 (名句)를 남겨 박정희의 정변에 대해서 거의 즉각적으로 정확한 판단을 내린 유일하다 싶은 국내 지성인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부국강병”에 대한 집착을 근·현대 1세기 동안 거의 끝내 버리지 못해온 후발주자 한국에서, 그것도 부국강병에의 열망이 국시 (國是)이자 거의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이 내면화한 이데올로기가 된 시점에서, 함석헌이 국가주의를 “평화의 정말 방해자”라고 규정하고, “국가 지상주의”, “정부지상주의”, “국가주의라는 큰 우상”을 “깨뜨려야 하는” 대상으로 설정했다. 정부가 “계몽”과 “근대화”를 이끄는 “절대선” (絶對善)으로 인식돼온 토양에서는, 함석헌처럼 정부를 “필요악”으로 규정하여, “대국” 대신에 “나라가 작아도 민중이 잘 사는” 북구와 같은 “평화로운 소국”, “작은 정부”를 이상적인 현실적 국가 형태로 내세운 것은, 한국 현대 지성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함석헌은 분명히 “전쟁”과 “군사화된 국가”에 정반대되는 “평화”와 “민중”의 사상적 옹호자이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그에게는 “해방신학”과 같은 동시대 외국 일부의 급진적인 종교적 사조에서와 같은 “계급성”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가 만든 “씨알”의 개념은, 사회과학적 의미의 “피착취 계급”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면서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상당히 애매하기도 한다. “씨알”은 “난 대로 있는 사람”, “맨 사람”이며, “사람의 짓(人爲)에 사는 것이 아니고 제 스스로 하는(自然) 움직임에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접점”을 구하려 했던 종교 사상가로서의 함석헌에게는, “씨알”은 하나님에게 근접되는 “영원한 생명의 가능성”, 물질에 대한 “정신”으로 느껴졌다. 결국, 그에게는 역사란 “생명”으로서의 “씨알”과 “반(反)생명”으로서의 “권력”의 영구적인 “싸움”으로 이해됐다. 이와 같은 일종의 “인민주의적” (populist), 민중주의적 “피해 대중 대(對) 권력”의 역사, 사회의 개념화는, 자본주의적 계급 분화가 아직 초보적 수준에 있었던 1960-70년대에는 상당한 시의성 (時宜性)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명시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노동자 계급의 “피고용자”로서의 계급적인 자아 의식과, 함석헌의 매우 포괄적이며 다소 추상적인 “씨알 의식”은 과연 어느 정도의 상호호환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었는가? 함석헌은, 유신 독재에 맞서서 반대하는 주체로서는, “근로자의 권익”을 언급하면서도 근본적으로 그 계급적 성분이 불분명한 “우리 모두”를 내세운다: “우리는 정치인, 비정치인을 초월해 국민이 하나 되어 나라를 건지고 새 역사를 이룩하자는 새 운동을 일으킴으로 해를 보내는 송년사를 삼았다”그는 “군대”와 군사주의적 “국가”를 부정적으로 파악했지만, 그 내부적인 계급적 모순성이 호도된 “국민”이라든가 “나라”의 개념을 계속 즐겨 썼다. 그는 북구의 “작고 평화로운 국가”들을 선호하기도 했지만, 북구의 사민주의적 사회가 계급 투쟁에 기반을 둔 그 세력이 동등해진 노동계급과 자산계급 사이의 일종의 “타협”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즉 그 출현의 전제 조건이 노동자의 계급적 조직화와 계급적 투쟁의 가능성이 됐다는 사실을 거의 인식하지 않은 듯했다. 이와 같은 계급적 차원에 대한 도외시의 분위기는, 1950-70년대의 한국 지성사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했는데, 함석헌은 “무(無)계급적 사고”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종교가 일찌감치 권력화되어 부정한 국가와의 부당한 “동거 관계”에 들어간 이 땅에서는, 함석헌은 분명히 몇 안되는 “참된 종교인”이었다. 진실된 종교적 양심으로 그는 국가의 물리적, 이념적 폭력에 대한 “밑”의 저항을 지지했다. 그런데, 근대 폭력 국가에 맞서는 근대 종교인으로서는, 그는 “민족”이라는 근대적 관념을 역시 그 사고의 중심에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국민”이라는 근대의 주민 통합적인 개념의 ‘전체성’은, 결국 “씨알”이라는 함석헌 자신의 독특한 “인민주의적” 관념의 전체성으로 이어졌다. 압축적 성장 시기의 임금 인상과 지가 (地價) 상승, 신분 상승의 가능성 증폭으로 그 위치가 튼튼해진 중산계층과 여전히 빈곤 속에서 허덕이었던 노동계급 사이에 골이 깊어져 갔던 시절에, 함석헌은 여전히 각 계급, 계층의 개별성을 크게 고려하지 않고 “권력”과 “전체 우리 모두”의 대결의 구도로 사유하고 있었던 듯했다. 군부 독재 권력의 존재가 중산계층 (학생, 지식인) 일부를 급진화시켜 “민주화 투쟁”을 촉발시켰을 때에, “우리 대 (對) 독재”의 구도가 어느 정도의 시대적 정당성을 지니고 있었겠지만, 중산계급 출신의 과거의 “민주화 인사”들이 “국민 정부”나 “참여 정부”의 요인 (要人)이 되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실행할 때에는, 과연 구체적인 계급성이 결여되는 종교적 “인민주의”는 여전히 저항의 이데올로기의 위치를 계속 점할 수 있을 것인가? 한반도의 위대한 종교 사상가 함석헌의 반(反)국가주의, 반(反)군사주의, “씨알” 사상이 계속 살아숨쉬는 “대듦”, 저항의 유효한 이념으로 남자면, 이 사상이 사회과학적 현실 읽기 방법, 계급성이 있는 투쟁 전략과 “교배” (交配)돼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함석헌의 “정신 혁명”과 현실적인 변혁 투쟁 사이의 연결거리가 현저화될 것이다.
“인물 평가하기”, - <부산일보>, 2005년2월23일:
강인철,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 중심, 2006, 40쪽.
조광, “1930년대 함석헌의 역사인식과 한국사 이해”, - <한국사상사학>, 제21집, 2003년12월, 507-547쪽.
함석헌, “조선 사람”,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성서조선>, 67호, 1934년8월).
함석헌, “고려의 다하지 못한 책임: 3”, “수난의 오백년, 1-7”, “생활에 나타난 고민상”,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성서조선>, 73-82호, 1935년2-11월)
안확, “조선사의 개관”, - <조선>, 176호, 1932년6월 (<자산안확국학논저집>, 여강출판사, 1993, 제4권, 152-163쪽에서 영인됐음).
고미숙,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6, 20-86, 445-453쪽. “유교”, “지나” (支那), “무기력한 수구적 조선의 관료”에 대한 대척점 (對蹠點)으로서 1920-30년대의 많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이 일제의 권력도 친근하게 여겼던 김옥균을 영웅시(英雄視)하여 낭만화시켰다: 공임순, <식민지의 적자들>, 푸른역사, 2005, 275-289쪽.
양현혜, “함석헌과 우치무라 간조의 ‘두 개의 J’”, - 씨알 사상연구회 엮음, <씨알, 생명, 평화>, 한길사, 2007, 371-395쪽.
함석헌, “세계사의 윤곽”,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성서조선>, 64호, 1934년5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세계사> (<함석헌전집>, 한길사, 1983, 권9), 104쪽.
조광, 위의 글, 533-536쪽. 1920년대에 접어들어 랏쩰이나 셈플 (Ellen Semple: 1863-1932)과 같은 정통 지리결정론이 구미 학계에서 본격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Richard Peet, “”, - < >, Vol. 75, No. 3, 1985, pp. 309-333). 그런데 식민지나 해방 직후 시절의 함석헌으로서 외국 학계의 이와 같은 지리결정론 비판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접근성이 보다 나은 구미지역의 대중적 서적에서는 1960-70년대까지 지리결정론이 거의 “진리”로 취급되곤 했다.
위의 책, 118쪽.
James C. Prichard, <Research into the Physical History of Man>, Un-ty of Chicago Press, (1813) 1973.
김용준, <내가 본 함석헌>, 아카넷, 2006, 48-49쪽.
Leroy S. Rouner, “Hocking and India”,- <PhilosophyEastandWest>,Vol.16,No.½,1966,pp.59-66.
위의 책, 116-126쪽.
“미국 문명과 흑백 문제”, - <함석헌전집>, 권5, 209-214쪽.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 - <함석헌전집>, 권14, 22-23쪽.
“씨알의 설움”, - <함석헌전집>, 권4, 73쪽.
정지석, “개혁적 반전 평화주의 사상”, -씨알 사상연구회 엮음, <씨알, 생명, 평화>, 263-283쪽.
“프로테스탄트의 정신”, - <함석헌전집>, 권9, 182-185쪽.
위의 책, 186-188쪽.
사이토 스미에 (齋藤純枝) 등 지음, 이수정 옮김, <일본 근대 철학사>, 생각의 나무, 2001, 212-215쪽.
“민족 위에 나타난 신의 섭리”, - <함석헌전집>, 제9권, 235-261쪽.
장이욱, 주요한, <나의 사랑 한반도야: 도산 안창호의 말과 얼, 그리고 삶>, 흥사단 출판부, 1987, 70-73, 172-175쪽.
<함석헌전집>, 제9권, 127쪽
위의 책, 128쪽.
<함석헌전집>, 제17권, 125-136쪽.
<함석헌전집>, 제4권, 39-41, 77-80, 355-357쪽.
위의 책, 340-379쪽.
“역시 씨알밖에 없습니다”, - <함석헌전집>, 제8권, 56-68쪽.
“잊을 것 못 잊을 것”, - <함석헌전집>, 제8권, 173-180.
Gøsta Esping-Andersen, <Politics against Markets: The Social Democratic Road to Power>, PrincetonUn-tyPress,1985,pp.4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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