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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함석헌이 생각한 자연과 자유(양명수)

by 마리산인1324 2010. 4. 9.

<씨알의 소리> 2004.7-8

 

《연구논문》

함석헌이 생각한 자연과 자유

     

양 명 수

 

 

함석헌 선생이 사용한 중요한 개념들은 반대 측면을 같이 생각해야 한다. ‘생각’이라는 개념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명제를 떠올리겠지만, 생각을 죄라고 말하는 구절도 같이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함석헌 선생이 중요하게 말한 ‘나’는 나를 세우는 문제와 나를 비우는 문제를 같이 생각해야 한다. 함 선생님의 글에 그 두 가지가 모두 나온다. ‘뜻’이라는 말도, 뜻이 생명이지만, 뜻이 없어도 사는 자연의 생명력도 같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라는 말은 전체가 하나이지만, ‘나’라는 개체가 바로 그 전체라는 생각도 같이 해야 한다. 내가 강화되면 전체는 ‘나들’임으로 하나 안의 여럿이 되기 때문에 결국 ‘하나’라는 말은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서 ‘여럿’이라는 말과 떨어질 수 없다. ‘함’을 강조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쉼’을 강조한다. 쉼을 강조하면, 뭘 하려고 하는 게 문제가 된다. 선한 ‘바탈’은 성(性)이지만 성은 생(生)이 아니다. 타고 났지만, 붙들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이 노장의 자연을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맹자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함 선생님이 사용한 중요한 개념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서로 모순되는 명제들.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한 것들. 그것은 함 선생님이 학문적인 글을 마음먹고 쓰지 않고 시대의 예언자로서 토해내는 말로 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지만, 동시에 삶의 진리란 것이 그렇게 역설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면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모순된 명제들의 의미를 추적하여 그 연관을 밝히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개념에서, ‘생각’이나 ‘나’나 ‘함’ ‘개체’ 같은 것은 인간주의적인 자유에 가까운 개념들이다. 그런가 하면 ‘생각나는 생각’이나 ‘전체’나 ‘쉼’ 또는 ‘숨’ 같은 것은 자연주의에 가까운 개념이다.

 

자연과 자유라는 개념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인문학의 기본 개념이고 함석헌에게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개념은 긴장을 이루고 있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 원래 사람은 자연을 극복하면서 자유를 찾으려고 했다. 서양의 근대는 그 점을 매우 극단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동양 전통 특히 함석헌 선생이 좋아한 노장 사상은 무위자연에서 궁극적인 자유를 찾는 경향이 짙다. 무위자연에서 자연은, 단순히 바깥의 산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위로서의 자연과 바깥 산천초목을 가리키는 자연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함 선생님의 글에 두 가지 의미의 자연이 모두 나타나는데, 그 둘을 우리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려고 한다. 뭘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고 저절로 되어 지기를 바라는 태도와, 바깥의 산천초목을 대하는 태도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인간의 본성을 보는 눈과 자연관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서양 문명에 대한 대안으로 생명 사상을 말할 때, 우리는 자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 그대로가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동서양의 인문주의자들이 심각하게 생각한 것이다. 자유를 찾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자연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자유라는 모험의 과정을 시작한 셈이다. 거리가 없이 자유는 없다. 거리란 공간보다 의식의 문제다. 인식으로서의 의식은 거리와 함께 생겼고, 거리는 무엇보다 자연과의 거리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자연과 떨어지면서 주체적 자유의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자기와의 거리, 남과의 거리는 모두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를 벗어나면서 생긴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자연과의 거리가 모든 거리의 시원이요, 인간 의식의 기원일 것이다.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에서 자유를 찾고자 했던 유학도 자연과 거리를 두는 쪽의 사상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 사상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요, 거리를 없애는 쪽으로 얘기가 전개되고 있다. 노장사상의 무위자연도 우리가 아는 대로, 인위적인 세계를 이룩하려고 했던 유학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인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인위 문명과 무위자연의 자연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삶의 양 기둥을 이루고 있었던 셈이다. 함석헌 선생은 유학보다는 노장사상 쪽으로 기울었으며, 오늘날 생명 사상에 기여하는 점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노력과 주체적인 투쟁을 강조할 때 자연보다는 유학의 사고방식을 끌어들이는 면도 보인다. 자연을 ‘스스로 그러함’ 보다는 ‘스스로 함’, ‘저절로 함’ 같은 말들로 풀어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유와 자연의 문제는 그처럼 함석헌 선생에게서는 유학과 노장 사상이 뒤섞여 있는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자유란 억압이 없고 거침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옳을 것이다. 억압을 밖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면 자유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물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얻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마음의 자유란 것이 있다. 대체로 인간이 도덕이라는 것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한 자유는 마음의 자유다. 정치적인 권리 의무를 넘어서 남에 대해 지켜야할 도리가 있다고 보고, 그것이 인간의 양심을 이룬다고 보았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 내면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할 때 자유를 얻는 것으로 생각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뭔가 걸리는 것이 있다. 걸리는 것이 있으니 자유롭지 못하다. 이 때 자유란 도덕 명령에 따라 행하는 데서 생긴다. 그런데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모두 남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일 때 진정 자유를 실현한 것이 된다. 남이 시켜서 억지로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자율로서의 자유를 찾는 것이 인문주의자들의 목표였다. 이처럼 도덕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 달리 자기 마음에서 얻는 자유다. 말하자면 억압과 걸림돌을 밖에서 찾지 않고 자기 내면에서 찾는다. 두 마음이 있으니, 자기 욕심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이기고 도덕 명령을 따라 행하는 마음을 통해 자유를 실현한다. 거기서 자유의 걸림돌은 외부에 있지 않고 자기 마음인 셈이다. 마음은 자유를 실현하기도 하고, 자유 실현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음을 강조하다 보면 종교의 영역에 가 닿는다. 도덕은 종교로 발전하게 되어 있다. 함석헌 선생이 문제의 해결을 늘 종교 차원으로 끌고 간 것도 그런 점과 무관치 않다. 자유의 모험은 도덕 차원에서 끝나지 않는다. 도덕 양심이란 것이 모호해서 어떤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요구와 규범 너머 곧 양심이 말하는 선악 너머의 세계로 넘어간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유는 마음을 비우는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자들은 나를 세워 남의 억압을 없애려 했고, 도덕적 주체성에서 인간됨을 찾으려고 한 인문주의자들은 내 마음을 세워 자율적 자유를 이루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종교는 내 마음을 비우는데서 궁극적 자유를 찾는다. 틸리히가 쓴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자유의 과정은 타율로부터 자율로 가고, 다시 자율에서 신률로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는 문제는, 갈라보는 모든 소유의 구도를 벗어나는 문제로 간다. 선악 너머의 세계를 넘보다가 너와 나 그리고 남자와 여자 등 모든 구분과 구별 너머의 세계를 지향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세계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유와 자연의 일치가 일어난다. 내 마음 안에 있던 선한 본성이 거침없이 나와서 이루어지는 자유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자연의 일부가 되는데서 생기는 자유가 있다. 나와 나 그리고 나와 남의 거리가 없어지고, 또한 나와 자연의 거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공자나 칸트 같은 인문주의자들은 전자의 자유까지를 넘볼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란 말에서 그 점을 잘 말했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의 변증론에서 의무가 없는 자유를 논하면서 그 점을 잘 말했다. 그러나 노장 사상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가 아닌 것까지 나아갔다. 인간 밖의 자연에서 인간이 배우고, 자연의 리듬으로 돌아가 얻는 자유를 말하는 점에서 인문주의자들과 다르다.

 

함 선생님이 궁극적으로 자유를 찾은 것은 노장 사상인 것 같다. 무위자연이 자유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과정이 있다. 앞에서 말한 몇 가지 과정이 함 선생의 사상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것 같다. 함 선생님의 글을 보면 자연과 자유라는 개념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을 지닌다. 그 말들 속에서 어떤 통일된 흐름을 찾고 배워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자유와 자연이 대립되었다가 다시 통일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정치적 자유로부터 종교적 자유로 가는 인류의 모험의 과정을 함석헌의 사상에서 찾아보려는 것이다.

 

1. 자연과 대립하는 자유 - 억압에 대한 저항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문주의 또는 인간주의자들은 인간의 주체성을 세우고 존엄성을 확보하고자 했으며, 그 점에서 함석헌 선생은 인문주의자의 측면이 있다.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 역사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거부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냥 자연스레 흘러가는 삶을 정지시켜서 다시 한번 되짚어 본다.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생각’이란 것도 그것이다. 생각해서 의미를 찾겠다는 것은 주체가 되겠다는 것이다. 끌려가지 않고 주도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찾는 자유의 기본이다. 함 선생님이 말하는 ‘스스로 함’이란 것도 누가 해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고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다는 뜻이요,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주재하겠다는 의미가 강한 것 같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민족 주체성을 가리키기도 하고, 스스로 함이 생명의 원리라면, 개인의 주체성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처럼 자유란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체는 우선은 자연스러운 것을 극복하면서 이루어진다.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거부란 자연을 극복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끝없이 그냥 흘러가는 자연에서 벗어나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생각이요, 의미요, 주체적 자유다. “자연에 묵은 해, 새해 없습니다. 끝없는 변천의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낡으니 새로우니 하는 것은 생각함으로써 의미에 사는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꺼질 수 없는 역사의 영원히 산 기록을 새길 만세 반석은 펀펀한 씨의 가슴밖에 될 곳이 없습니다” 여기서 함석헌 선생이 역사의 주체로 설정하는 씨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은 그냥 있고 그냥 살 뿐이요, 생각하지 않고 의미를 찾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씨은 자연이 아니다. 씨은 자연과 달리 또는 자연에서 떨어져 생각해야 하고 의미를 새겨야 한다.

 

사람 안에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와 있는 자연을 극복하고, 밖의 산천초목의 자연의 조화를 극복한다. 서양의 근대의 인간주의에서는 인간 속의 자연과 밖의 자연을 극복하는 것이 같이 발생했고, 맹자 같은 동양 인문주의자들 경우도 마찬가지다. 인문주의자인 함 선생의 경우도 그런 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 본능에는 근심,걱정도 비관,원망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해 선이 된다는 태도로 자연스럽게 당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사람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한다는 이 한 가지 때문에 에덴동산을 쫓겨났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자연의 큰 조화를 깨쳤단 말입니다. 깨쳤으면 어떻게 합니까? 불행은 불행이요 고통인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지만, 자연 보다는 한층 더 높은 정신적 생명에 올라간다는 데 그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습니다. 이리해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아졌습니다.”

 

함석헌에게서 본성 또는 바탈이란 말은 좋은 의미로 쓰인다. 그러나 본능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윗글에서 보듯이 본능이 자연이다. 다른 인문주의자들처럼 함석헌도 본능이란 말을 자연과 같은 뜻으로 쓴다. 사람 안에 들어와 있는 자연이다.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본능으로서의 자연, 그 자연을 일단 극복해야 한다. 생각이 그 일을 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요, 조화롭게 마냥 흘러가는 자연을 깨치는 것이다. 그래야 약자가 아무런 의미 없이 당하는 것을 벗어날 수 있다. 자연을 이겨서 자연보다 높은 세계로 가는 것을 인간의 몫으로 함석헌은 생각하고 있다. 사람은 생각해야 사람이고, 생각이란 자연을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위의 인용문에는 생각이 죄라는 암시도 있다. 뒤에 보듯이 생각은 생각을 극복해야 한다. 그것이 자연에서 벗어나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생각의 운명이다. 그것을 나중에 함 선생님은 ‘하는 생각’과 ‘나는 생각’으로 나누어서 말한다. 그러나 여하튼 생각이란 일단 자연을 극복하는 것이다. 함 선생님의 생명 사상은 그 인문주의적인 특성 때문에, 저항을 포기하고 현실을 수용하며 자연의 조화로 돌아가는 자연주의는 아니라는 말이다. 인문주의 또는 휴머니즘의 각도에서 볼 때 자연주의는 거의 운명론이다. 함석헌은 운명론을 가장 비겁한 것으로 본다. 스스로 하는 자유를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숙명관은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형성된 건전치 못한 분위기라고 본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선집 1권, 427). 운명이란 갇혀 버린 혼이다. 숙명관은 종살이하는 놈의 신앙이다(428). 그래서 그는 숙명관에서 섭리관으로 이전할 것을 얘기한다. 전혀 다르지만 180도 회전하기만 하면 된다(429). 섭리관과 숙명관은 어떻게 다를까? 그에게서 종교적 신앙과 숙명은 정반대로 본다. “통전적 도덕적인 뜻이 들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신앙으로 될 수 있고 숙명으로 될 수 있다”(429) “사명도 의미도 없이 하는 고난, 그것은 바위가 무너짐이요, 중생의 넘어짐이다”(453). 종교적인 차원을 모르는 사람은 섭리사관은 곧 숙명론이라고 볼지 모른다. 그러나 함석헌에게서는 섭리사관이야말로 숙명론을 벗어나는 길이다. 하나님이 하지만 사람이 한다. 숙명론을 벗어나는 것은 종살이를 벗어나는 것이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섭리사관 때문에 모든 사건에는 의미가 있다. 생각을 통해 그 의미를 발견하고 그냥 당하지 않고 일어선다. 섭리란 하나님의 일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람이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지만 내가 한다. 스스로 함이라는 생명의 자유 원리는 섭리관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해결의 열쇠는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생각을 통해 의미를 찾고 주체가 된다. 생각과 의미는 자연과 대치된다. 그것은 자유와 자연의 대치다. 자유란 자연을 극복하는 것이다. “마음은 자연이 아닙니다. 생명이 자기의 특별히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에게 특별히 넣어준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操卽存 舍卽失, 지키면 있고 버리면 없습니다. .. 그러므로 평안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짓는 것입니다. 만들지 않고는 없습니다..” 조즉존 사즉실은 이미 <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쓸 때 사용했던 명제다. 그런 생각의 기조가 해방 이후의 글에도 반복된다. 인간주의 시각에서 볼 때 자유란 저절로 되게 내버려 두는 무위자연이 아니라 사람이 마음먹고 뭔가를 해야 하는 인위의 문제다.

 

자유가 일차적으로 무위자연과 멀 수밖에 없는 것은, 주체나 의미라는 것이 억압에 대한 투쟁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무의미에 대한 저항에서 생긴다. 생각하여 의미를 찾으려는 자는 먼저, 무의미를 만드는 세력에 저항하게 된다. 무의미는 억압에서 생긴다.

 

무의미란, ‘살고 싶지 않음’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멀어지며 문명을 일구고 자유의 모험을 시작하는 순간에 원초적인 생명력을 상실할 위험을 안고 있다. 무의미의 가능성은 거리와 함께 생겼다는 말이다. 거리를 통해 의미를 찾고 의미를 통해 사람답게 살려고 하는 순간, 무의미의 가능성도 같이 생겨난다. 의미를 찾지 않고 그냥 사는 자연적 삶에서는 무의미도 없다. 사람은 이미 사람이지만 사람다워야 하는 당위를 안고 있는데, 그처럼 다움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 의미요 생각이요 주체성이요 자유의 문제다. 그런데 다움을 찾아 나서는 순간 생명 그 자체에서 멀어지고 살고 싶지 않음이 같이 붙어 다닌다. 꼭 그러라는 법은 없는데 그럴 가능성이 생긴다. 그런데 무의미의 가능성이 현실성이 되는 것은 그 거리 때문에 생긴 차이가 차별이 될 때다. 사람은 언제나 차이를 차별로 만든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뿌리 깊은 인간의 죄고, 그 죄를 통해 무의미에 빠진다. 차별로 억압하는 자나 억압당하는 자나 모두 무의미에 빠진다. 그러나 역시 차별받는 자 곧 억압당하는 자는 몸으로 무의미를 겪는다. 살고 싶지 않음을 몸으로 느낀다.

 

자연에서 벗어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고, 인간관계에서 무시하고 차별하는 억압이 발생할 때 사람은 살고 싶지 않은 무의미를 경험한다. 그러므로 무의미는 자연에서 벗어난 인간의 본질에 속한 문제이다. 억압은 처음부터 있었고, 살고 싶지 않은 무의미도 처음부터 있었다. 생명은 그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그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의미는 자연으로 돌아가서 생기기 전에,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에 대항해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저항’과 ‘의미’와 ‘자유’는 같은 궤도에 있는 개념들이다. “씨은 단연 자기와 남을 다 살리기 위해 거기 반항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의미에 삽니다. 살아도 의미, 죽어도 의미입니다. 의미가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우주 전체입니다” 생명은 못살게 구는 힘에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생명은 싸움입니다. 몸에서는 병과의 싸움이오, 정신에서는 악마와의 싸움이요, 생활의 역사에서는 정치와의 싸움입니다... 이 세 가지 싸움 속에 삶이 있고, 그 사는 모습이 곧 자유입니다.” 함 선생님은 자유가 싸움이라고 보고 있다. “생명이 생명인 한은 버팁니다. 싸웁니다... 다만 미워하는 마음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미움은 죽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억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말고, 뭔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삶이란 무위자연이기 이전에 뭔가를 함이다. 스스로 함은 ‘함’이다. 인위가 강조된다. 삶은 함이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선집 1권,451). “나는 나로서의 자유를 주장하려면 반드시 할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살았다 함은 결국 살 이유를 알았다 함이다... 까닭이 곧 힘이다. 하나님이 전능한 것은 그 까닭이 전적이기 때문이다.”(452) 할 일을 통해 살 까닭을 찾고, 자유를 찾는다. 어차피 억압이 있는 세상이라면 자유는 가만히 기다려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무위자연은 일단 너무 한가한 얘기로 들릴 수 있다. 역사는 자유를 향한 행진이다. 그런데 앞에 막힌 강을 건너뛰어야 자유가 있다.

 

자유는 생각을 통해 나를 세우고 저항하는 데서 생기며, 그것은 자연을 이기는 문제다. 지금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질서 뒤에는 억압이 있다. 무위자연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억압을 슬쩍 피하여 자유를 얻는 분위기가 있는데, 함석헌이 생각한 자유는 모순된 현실에 대한 실질적인 투쟁을 통해 형성된다.

 

2. 자연과 자유의 일치

 

그런데 함석헌이 생각한 자유는 저항을 통해 물리적 억압을 물리쳐 얻는 자유보다 더 나간다. 그 이상이었다. 거기서 자유는 다시 자연과 일치한다. 자연을 벗어났다가 다시 자연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 자유로서의 자연은 투쟁하는 힘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이다. 그런 점에서 함석헌의 사상에는 인위를 내세운 유학 등의 휴머니즘 사상과 무위자연을 말하는 노장 사상이 종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종합의 핵심에는 씨 사상이 있다. 고난 받는 민중인 씨에게서 저항 정신과 자연주의가 만난다.

첫째, 씨이 말하는 무위자연은 소유의 구도에서 가진 자들에 대한 저항이며, 인위 문명의 구도에서 민중을 위해 뭘 하겠다고 권세를 잡은 세도가들에 대한 저항이다. 그 때 무위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에 대한 저항이다. 씨이 무위를 말할 때, 그것은 억압의 근원적 구도를 부수려는 저항이다. 그 때 자연은, 모든 것을 그대로 놔두어서 선한 바탈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놔두는 구도다. 자연이란 무위를 가리키며, 그것은 민중을 위해 뭘 한다고 하는 자들에 대한 비판이다.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자연 보호라지만 자연이 뭔지 아십니까? 이것은 씨보고 하는 말 아닙니다. 새삼 씨의 지도자라 학자라 봉사자라 하며 나서는 사람들보고 하는 말입니다. 자연 중의 자연은 자유하는 인간 바탈입니다. 그것이 정말 자연, 스스로 그런, 첨부터 그런, 영원히 그럴 진리 자체입니다. 약이 사실은(자연에 대하여는) 병입니다. 제도도 병입니다.” 자연이란 자유를 가리키고 그 자유는 인간의 바탈 곧 본성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본래 모습대로 놔두면 저절로 자유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그러한 자연이란 산천초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지 않고 놔두면 스스로 자유를 이루어낼 인간의 본성을 가리킨다. 자연 곧 ‘스스로 그러함’을 함석헌 선생은 ‘스스로 함’으로 푼다. 인간 안의 자연을 보기 때문이다. 그처럼 자연을 바깥의 사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유를 자연과 다른 것으로 보는 시각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 인간중심의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제 다시 자연을 말하는 것은, 결국 자연이 외부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을 포함하고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자연은 일단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 하는 말로서 그런 저항의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자연에서 벗어난 자유로부터 그냥 자연으로 넘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함 선생의 사상에도 저항적 자유로서의 자연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노장 사상에 그런 면이 들어 있다. 민중을 위해 뭘 하겠다고 나선 지도자들을 향해서 자연을 말한다. 자연이란 무위를 가리킨다. 뭘 한다고 나서서 설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때 자연은 바깥의 생명체들이 아니라, 씨이 타고난 인간의 성품 곧 난대로의 모습이다. 지도자들이 인간 세상을 위한다고 새삼스럽고 부산하게 나서지 않아도 그들이 구제하고자하는 씨들이 스스로하게 되어있고, 저절로 하게 되어 있다. ‘스스로 함’은 외부 간섭을 배제하는 의미에서 외부적 자유와 통하고, ‘저절로 함’은 내부에서 애써 무얼 하려고 하지 않은 채 바탈이 행위를 낳는다는 점에서 내면의 자유까지를 의미한다.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무위자연을 외부의 억압 세력에 대한 저항 언어로 사용할 때는 주로 스스로 함이란 말이 더 잘 통하는 것 같다.

 

그런데, 위정자들에 대한 저항은 단순히 특정한 위정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위를 거부하는 무위자연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인간이 만든 제도라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매우 깊은 사상적 바탕을 깔고 있고 또 매우 래디칼 하다고도 할 수 있다. 단순히 억압하는 자에 대한 물리적 저항이 아니라, 억압을 만드는 근본적인 구도에 대한 저항으로 간다. 그것은 이상적인 제도와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찾는 쪽으로 가기보다는 인위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에, 제도와 국가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나라와 국가를 구분해서, 나라를 자연스런 공동체로 보고 국가를 ‘어느 때 어떤 특정인들이 생각해서 만들어내 전체 위에 씌워온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정치 시스템에는 무슨 함정이 있는데, 그럼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본래의 모습 곧 자연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힘 있는 사람들이 공연히 불가피한 것처럼 만들어 오랜 세월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산물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처럼 인위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에 무위자연은 모든 인간에게 통하는 보편적인 자유의 원리가 된다. 다시 말해서 위정자들 뿐 아니라 씨 자신을 향해서도 무위자연을 요구해야 한다. 그럴 때 무위자연은 누구를 향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 자신의 내면의 문제가 된다. 인위는, 사람이 자연을 벗어나면서 자유를 실현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자유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요, 그러므로 뭔가 해야 하는 ‘함’의 문제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다움이란 일차로 인위와 연결된다. 무위자연이 위정자들의 인위에 대해 맞서는 말일 때 외부의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서 자유와 연결된다면, 씨에게도 요구되는 말일 수 있고, 그 때에는 내면의 자유를 실현하는 문제가 된다. 한층 성숙한 자유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유가 자연으로 가는 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유를 내면에서 찾으며 진행되는 것이다. 업신여기는 힘은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도 있다. 그러므로 내면의 자유가 있는 곳에 참 자유가 있다. 눈을 안으로 돌리면 자유를 위한 투쟁의 장은 내 마음이다. “문명은 인간을 짐승에서 해방했다. 그러나 외양의 짐승은 찢겨 산으로 갔으나, 속의 짐승은 사람 제 가슴속에 숨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이 밖의 짐승 쫓기를 사랑으로 못하고 미움으로, 두려워함으로 했기 때문에, 쫓겨난 그 승냥이 호랑이가 다 유령으로 되어 인간 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나무숲보다도 더 짙고, 더 숨기 좋은 것은 사람의 가슴의 숲이기 때문이다.” 밖의 자연에서 벗어난 문명은 자유의 과정이지만, 그 자연이 아직 맘속에 자유의 걸림돌로 남아 있다. 마음은 자유의 실현 주체도 되고 걸림돌도 된다. 밖에서 무얼 요란하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나하나 잘 지키는 것이 큰일이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일찍이 ‘나’의 문제에 집중했다. 가장 큰 죄는 나를 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것과 같다. “자기를 버린 것이 죄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죄다. 나를 버린 것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요, 뜻을 찾지 않은 것이 생명을 찾지 않은 것이다.” 나에 집중하는 것은 주체적 개인을 세우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함 선생은 그런 서구적 주체보다도 전체로서의 나를 말한다. 내가 우주요 전체다. 나를 찾는 것은 우주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서 문제가 풀리면 세상의 문제가 풀리는 것이요, 밖에서 큰일을 하지 않아도 나하나 잘 지키는 것도 큰일이다.

 

이처럼 나에 집중하는 것은, 외부적인 억압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 자유를 누릴 가능성을 가져다준다. 다시 말하면 자유를 정치적인 권리 의무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 둔다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의 자유 투쟁은 진정한 자유를 위한 어떤 환경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자체가 곧 참 자유는 아니다. 그것은 제도의 개선을 가져오지만, 무위자연에서 얻는 자유는 제도가 건드릴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유가 펼쳐진다. 참다운 자유를 위해서는 제도 개선을 위한 투쟁보다 먼 길, 또는 그 옆에 나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길을 가야한다.

 

그런데 밖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는 마음의 자유는 결국 나를 비우는 문제로 간다. 외부의 물리적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나를 세워야 하지만, 내면에서 내가 나를 업신여기는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를 비워야 한다. 나보다 먼저 있는 우주와 역사의 큰 뜻에서 벗어나 내 뜻을 세우면 나는 나를 업신여기게 된다. 함석헌 선생은 나를 찾는 것을 언제나 뜻을 찾는 것과 연결시키는데, 함석헌 선생이 말하는 나는 그처럼 큰 뜻에 속한 나다.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나보다 뜻이 먼저고 나는 그 뜻을 따라야 한다. 그러려면 내 뜻을 버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뜻의 생산자 역할을 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하려고 했던 서구의 근대적 주체와 다르다. 내가 하지 않고 나보다 먼저인 큰 뜻이 저대로 하게 해야 한다. 또는 하나님이 하시게 해야 한다. 무위란, 신학적으로 보면 내가 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게 하는 차원이다. 꼭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간디가 진리가 하나님이라고 했듯이, 진리가 제 힘으로 하게 하면 된다. 그 때 나의 공적은 없고, 그 때 자유를 얻는다. 말하자면 저절로 하는 자유다.

 

이처럼 나에 집중해서 정신적 자유를 찾는 일은 결국 나를 비우는 쪽으로 간다. “사람이 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모든 일에 나 하나가 들어가면 다 썩어버립니다.” 앞에서는 나를 버리는 것이 죄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다시 나를 버려야 한다. “자아란 넘칠 줄 모르는 무한의 구렁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나를 찾는 길이다. 뜻을 찾는 나는 세워야 하지만, 찾은 뜻 앞에서 나를 버려야 한다. 또는 전체 앞에서 나를 잊어야 한다. 뜻과 전체는 내 안에 있으므로 나에 집중해야 하지만, 뜻과 전체가 나보다 먼저이므로 뜻에 거스르는 나는 버려야 한다. 그처럼 나를 버림으로 얻는 자유는 ‘생각하는 생각’ 이상의 힘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요, 종교의 영역이다. 함석헌이 자유를 말할 때 꼭 종교를 말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우주적인 생명에 있어서도 자유 자재하는 데 이르자는 것이 생물적인 데 있어서나 정신적인 데 있어서나 다 같이 근본 되는 바탈이기는 하지마는...정말 자유하는 일은 이 소위 인간의 정신이라는 것보다는 도무지 다른 방식의, 말하자면 초정신적인 것에 의하여서야 될 것이다.”

 

여기서 함석헌 선생의 무위자연은 소유의 구도를 넘어서고, 갈라봄의 구도를 넘어서는 데로 간다. 외부적 투쟁을 통한 자유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요, 종교적인 차원이다. 여기서는 나와 너, 옳고 그름, 우리나라와 남의 나라, 선과 악 같은 모든 사라진다. “본래 열린 하늘인데 제각기 마음을 닫고 보니 어둠뿐입니다... 세계를 하나로 오고가는 큰 바닷물인데, 우리 집 마당 도랑에 들어오면 더럽습니다. 본래 하나인 것을 갈라가지고 서로 닫고는 너,나하기 때문에 고움,미움,슬픔,선,악이 생겼습니다.” 전체가 하나다. 전체나 하나라는 말은 함석헌 선생이 즐겨 쓰는 말인데, 이것은 갈라봄의 소유 구도를 넘어 있는 차원을 가리킨다. 물론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리고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분명히 가려야 싸울 수 있다. 억압하는 집단과 억압을 당하는 집단은 분명히 다르다.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옳고 그름의 판단과, 나와 너의 구분은 중요하다. 부르주아와 프로레타리아트는 다르다. 갈라봄과 거리가 없으면 외부적 억압에 대한 투쟁이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비판적 이성이라는 것이 자유를 위해 중요하다. 그러나 내면의 자유는 나를 비우는 문제로 간다. 그래서 갈라봄의 구도를 넘어서고,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차원 너머로 간다. 판단을 흐리멍덩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라, 좀더 높은 자유의 차원에서 해방을 주도한다는 말이다. “누가 알고 누가 모른단 말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단 말입니까? 안다는 건 갈라놓음이요, 한다는 것은 무너뜨림이요, 이긴다는 것은 죽임입니다. 시비 초월함이 앎이요, 되고 못되고 보지 않음이 이룸이요, 지고 이김 없음이 큼이요, 죽고 삶 안 보임이 생명입니다.”

 

물론 자유는 싸움이요, 악에 대해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것은 큰 일요, 무얼 해야 하는 것이지, 무위자연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가 투쟁이 되고, 인위적으로 무얼 해야 하는 것이 된 까닭은, 누가 인위적으로 무얼 만들어서 세상에 뒤집어 씌웠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억압 구조는 언제부터라고도 할 것 없이 인간성의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권력에의 의지가 있고, 그래서 거리를 통해 지배하고 소유하고 싶어 한다. 자유를 위한 거리는 또 다른 면에서 보면 권력과 소유를 위한 거리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위한 투쟁도 자칫하면 자기 욕심이 되고 소유의 구도에 빠진다. 자기를 비운 사람만 제대로 투쟁할 수 있다. “싸우는 것은 큰마음을 가지고야 할 수 있습니다. 하늘 마음입니다.” “사람으로 살았으면 마땅히 생사를 잊고 선악을 초월한 자리에서 권력관계를 떠나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야 살았습니다. 싸우기만 한다면 곧 누구를 죽이고 누구에게 죽는 일인 것만 같이 생각하기 때문에 비겁해지지 않으면 사나워집니다. 사납다는 것은 보다 더 심한 비겁뿐입니다. 비겁하면 자유 없고 자유 없으면 사람 아닙니다.”(같은 곳,96) 이 자유는 투쟁 이상이다. 투쟁하느라고 생긴 갈라봄의 구도를 너머의 자유다. 더 높은 자유 차원이다. 아무리 밖의 억압에 용감하게 대항해서 자유를 위해 투쟁해도 내면이 공허하면 그 싸움이 결국 욕심으로 가는데, 그런 것을 막는 역할도 한다. 말하자면 알찬 싸움이 되게 하는 것이다. 알이 차 있지 않은 싸움은 어떤 정신의 빛도 주지 못하는 이권 다툼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지 않은가.

 

여하튼 어떤 사람들이 일부러 인위적인 제도를 만들고 억압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유는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 일부러 또는 일삼아 투쟁을 도모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인위에 대한 투쟁은 인위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위에 대한 투쟁으로서의 인위는 무위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함석헌 선생에게서 자유는 억압하는 인위 이전에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것을 보려면 투쟁하는 자도 마음을 비워야 한다. 억압하는 자에 대한 미움에서 투쟁력이 생길지 모르지만, 또는 갈라보는 고도의 비판 이성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 의식이 생길지 모르지만, 원래 자유는 마음을 비우는 데 있다. 억압에 맞서서 나를 세우느라고 갖게 된 그 갈라봄의 구도 곧 소유의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그 길은 투쟁적 자유 옆에 나 있는 새로운 길이고, 투쟁적 자유 밑에 있는 근원적 자유다. 그것은 인위가 아니라 자연이다. 무위자연은 그처럼 억압하는 인위에 대한 인위적 투쟁 너머에 펼쳐져 있는 본래적 자유다. 정의 너머의 신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유를 위해 잊었던 오래된 자유가 자연에 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거기입니다. 거기 알기 위해 물을 필요도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 이르기 위해 무슨 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 거기 선 자리에, 있는 그 모양 속에 있습니다. 거기 너와 나와 우리는 있습니다. 거기 도둑놈 없습니다. 어떤 문명의 기술을 가지고도 거기 못 들어옵니다. 거기 여우도 없고 사냥개도 없습니다...그러므로 자연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자유입니다.” 완전한 자유는, 미움도 없고 무슨 일을 할 필요도 없는 그곳에 있다. 자연이란 자유를 위해 그런 의미가 있다. 거기에 이르는 것은, 무슨 일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선 자리에서 자기를 비워야 한다. 그러면 뭘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하는 세계가 펼쳐진다. “그저 이름할 것 없이 믿는 것이 자연, 곧 저절로 함입니다” 자연은 자유를 위한 과정의 최후의 보루요, 그런 믿음에 근거해서 투쟁적 자유는 자기 길을 간다. 뭐든지 저절로 되는 일은 없지만, 저절로 하게 되는 경지는 있다. 함인데 저절로 함이다. 저절로 함으로서의 자연은 투쟁적 자유를 포함하고 있는 근원적 자유다.

 

‘생각’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도 그런 자연관과 연결되어 있다. 생각은 생각을 극복해야 한다. 자연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기 위해 생각했지만, 이제 다시 자연에 돌아가는 생각이 필요하다. 그것을 가리켜 함석헌 선생은 ‘생각나는 생각’이라고 한다. 72년의 글 “생각하는 씨이라야 삽니다”에서 그는 ‘생각하는 생각’과 ‘생각나는 생각’을 나눈다. 생각나는 생각이란 ‘속에서 주시는 ‘그이’의 생각을 받은’ 생각이요, ‘우주적인 생각’이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를 도는 정신이 지금 이 순간에 나라는 정거장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데카르트의 생각(코기토)이 아니요, 그렇다고 헤겔의 정신(가이스트)도 아니다. 인문주의자들이 주체를 만들기 위해 자연을 벗어나며 내세운 생각이 아니다. 그리고 함석헌 선생이 58년에 쓴 글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말한 ‘생각’과도 다르다. 모든 것이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아는 것, 생각하는 것이 사람의 전부가 아닙니다.,, 하여간 역사는 인간의 일이면서도 인간만의 일, 지식만으로 되는 일, 생각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인간 이상이 결정합니다.” 물론 그에게서 생각이란 처음부터 우주의 ‘뜻’ 또는 역사의 ‘뜻’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데카르트의 생각과 다르고 훨씬 종교적이지만, 그래도 앞에서 보았듯이 생각으로 자연의 조화를 깨는 면이 있고, 그 때문에 우리는 투쟁적 자유를 생각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함석헌 선생에게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면이 중요해지면서 생각은 생각나는 생각에 더 비중이 주어지는 것 같다. 그것을 그는 ‘생각 아닌 생각’이라고 부른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에서 말하는 ‘생각’이라는 개념을 “생각하는 씨이라야 산다”에서 조금 수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어떤 측면이 새롭게 강조되면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 70년대 이후 새롭게 강조되는 측면이란 자연이다.

 

“자연은 산 것입니다. 살아 있는 전체입니다. 그는 우리 어머니요, 우리 스승입니다. 이 생명을 내 놓고는 말씀을 들을 길도 없고, 우리 깨달은 것을 닦아볼 터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보호 정도 가지고는 보호가 되지 않습니다. 배워야 합니다. 생각하는 인간은 생각 때문에 교만해졌지만, 우리 생각한 것도, 안 것도, 만들어본 것도 다 자연에서 배우고 얻지 않은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그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 생각한 것은 분명하지만 분명하니만큼 작습니다. 자연의 하는 것은 흐리멍덩,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그것은 영원을 단위로 두고 하기 때문이요, 다 같이 하여 일시동인 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함석헌은 인간이 하는 생각의 본질을 잘 짚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생각하는 생각에 대한 비판이다. 생각은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자연을 파악해서 인간이 세상을 손에 쥐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런 식으로 사람을 주체로 만들었다. 인위적인 문명으로 자연을 지배하면서 사람은 자연스런 권력 관계를 청산하려고 했다.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자유의 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면서 사람은 교만해졌다. 생각은 쪼개서 보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분명한 지식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주무를 수 있는 것이 많아져서 결국 인간을 권력자로 만들었다. 앎에의 의지는 권력 의지와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앎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의 문명과 함께 발생한 인위와 생각에 대한 비판이다. 이제 다시 자연에게서 배우고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 것은,,. 알 수 없는 전체의 뜻으로 된 것입니다.... 생명에는 나와 남이 없습니다. 나, 너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자연에는 나너 없습니다. 그저 하나입니다. 사람이 생각하게 된 것은 자연을 반항하고 업신여기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것을 더 깊이 알아 더 깊고 큰 무한한 자연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기왕에 생각으로 자연에서 벗어났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은 자연에서 벗어나는 것이지만, 결국 자연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참 자유는 갈라 봄을 넘어 하나가 되는 세계에 있고, 그것은 자연에 이르는 생각으로 가능하다. 생각은 갈라봄으로 시작되지만, 생각하고 생각하면 갈라봄이 없는 자연에 이르러 나와 너나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이 하나가 되는 자유를 얻는다. 다시 한번 생각하기 또는 생각하고 생각하기는 이미 생각 아닌 생각이다. 나는 생각이지, 하는 생각이 아니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은 나는 생각이 하는 생각 끝에 도달하는 것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나는 생각을 말하면서도 인간의 생각하는 힘에 그만큼 기대를 걸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제대로 생각해서 제대로 자연을 알면 생각은 자신을 넘어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것이요, 자연의 리듬을 타는 무위자연의 원리에서 참 자유를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신학은 버려도 과학은 버리지 못하겠다고 했다. 인류가 갈라보는 생각으로 시작한 과학은 결국 종교적인 믿음의 세계에 도달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종교에서 하는 얘기가 단순히 특정한 사람들의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앎의 세계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과학이 과학 이상의 세계로 가리라고 믿었고, 그런 식으로 과학과 종교는 종합이 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과학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그가 일찍이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두 가지로 남는데, 하나는 뒤로 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속에 남는 것이라고 했다. 뒤로 남는 것이란 흔히 역사라고 하는 것이고, 속으로 남는 것은 정신의 진보를 의미한다. 역사가 흘러가면서 남는 것이 쌓인다면, 인간의 문명도 지식이 쌓이다보면 종교의 세계까지 보일 것이다. 믿음이 아닌 앎의 세계 말이다. 그것은 극단적인 인위 문명을 낳은 생각이 다시 한번 생각한 것이요, 과학이 과학을 넘어선 것이다. 자연을 분해했던 과학이 이제 자연계 전체의 흐름에서 어떤 뜻을 발견하고, 사람에게 그 뜻을 알려 주리라고 함 선생은 믿었던 것이다. 그것은 서양의 근대 과학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가 “평화는 성자들의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 요구하는 과학적 사실이다”라고 할 때 과학이 의미하는 것도 그런 것이다. 평화가 과학적 사실이라는 표현은, 그래야 현실적으로도 인류가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인류가 살 수 있는지 조금만 크게 보면 뻔히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종교적 신념인 평화나 비폭력은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전체 생명의 요구다. 그리 보면 종교나 도덕도 자연의 요구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양심도 자연이라고 본다. 인간의 정신사는 길게 보면 자연사 속에 속하는 것이다. 칸트 식의 정언 명령은 짧은 호흡에서 통하고, 길게 보면 결국 살려는 생명의 요구에 합치한 것이 도덕적인 것이 된다. 그런 것을 아는 생각과 과학은 결국 ‘무한한 자연에 이르는 생각’이요, 자연을 분해하고 정복했던 근대적 사유가 아니다. 함석헌 선생은 생각의 힘을 중시하고 어떤 면에서 근대 과학의 중요성도 인식했지만, 결국 무위자연의 세계에서 자유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셋째, 투쟁하는 자유 너머의 내면의 자유를 자연에서 찾는 태도는, 현대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다. 서구 근대 문명이야말로 극단의 인위 문명이다. 자연에 사람이 손을 대서 인위적인 소재를 만들고, 생명체의 탄생을 조절하고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데까지 갔다. 거기서 풍요를 얻고 자유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인위가 아무리 발달해도 끝내 자연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자연의 의미가 좀더 분명해진다. 자연이란, 자유롭고자 하는 씨 내면의 바탈일 뿐 아니라 바깥의 자연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함석헌 선생의 무위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생태주의나 자연주의 쪽으로도 길을 열어 놓는다.

 

70년대 이후 함석헌 선생은 부쩍 서양의 기술과학 문명을 비판한다. 그는 76년 대담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최근까지 오면서 문명은 발전이라고 하는 건 인정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아주 그렇지 않아. 이제는 아주 근본적으로 서양적인 문명 잘못됐다, 동양의 특색은 역시 자연에서 떨어져나가지 않는 데 있소. 문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자연의 대 조화 그것을 무시하고는 안 된다는 것이 지키지 않으면 아니 되는 대 계명이오.”(씨의 소리, 씨의 사상, 전집 388) 앞에서 보았듯이, 함 선생님은 한편에서는 자연의 조화를 깨는 생각을 통해 자연보다 한 단계 높은 정신적 자유를 이룩한다는 점을 중시했다. 그것은 서구 근대 문명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긍정이 들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란 것이 자연에서 벗어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극단화한 것이 서구 근대 문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70년 대 이후 힌두이즘이나 노장 사상의 무위자연을 바탕으로 그는 분명하게 서양 문명에서 돌아섰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는 자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채 삶을 일구어온 동양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사는 것이 궁극적 자유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점은 서양의 근대 사상은 물론이고 서양 문명의 한 축을 형성한 기독교와 좀 거리가 먼 얘기다.

 

그는 서구의 기술 공업 문명이 똥이라고 하면서 말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깝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몰라도 역사는 그것을 보여주고, 역사는 또 그것을 몰라도 자연이 그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무엇입니까? 나의 보다 더 크고 보다 더 깊은 의식의 표현입니다. 자연이 보여주는 대 조화, 초지혜의 입장에서 보면 이 문명은 선고받은 문명입니다.” “이 문명 거의 전부가 사람의 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이 거짓입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을 따라 하는 모택동의 인민공사와 문화 혁명도 비난한다. 여기서 자연과 문명은 날카롭게 되어 있고 특히 서구 근대 문명에 대한 비판이 날카롭다. 현대 자연과학의 특징은 자연을 죽은 것으로 보는데 있다. 자연을 상대하려고 하지 않고 대상으로 사물화 한다. 그런 자연 과학에 바탕을 둔 현대 문명을 비판하면서, 미신이라고 여겨졌던 원시종교에서 중요한 가치를 찾는다. “정말 무서운 사실은 자연은 산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들은 천만년 넘는 세월 그 자연을 믿으며 싸우며 살아오는 동안에 체험에 의하여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란 것을, 생명체 중에서도 엄청난 생명체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신화요 전설이요, 원시적 종교입니다. 발달 못했으니만큼 소박, 유치한 것이 있지만, 소박하니만큼 불멸의 빛이 있고, 유치하니만큼 호소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 시험적인 효과에 놀란 나머지 천만년 이루 헬 수 없는 마음들이 눈물과 피와 애탐과 기도로 얻은 종합적인 그 지혜와 믿음을, 그 스케일이 너무 커서 그런 줄은 모르고, 한마디로 미신이라고 제쳐 놓게 됐습니다. 물질주의, 공업주의, 기계만능주의는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현대 문명은 갈라서 보는 데 기초를 두고 있고, 그래서 스케일이 작다. 과거의 원시 종교는 살아 있는 자연을 통째로 섬길 줄 알고 자연과 교통하면서 삶의 지혜를 구했다. 그것은 뒤떨어진 것이기 보다는 스케일이 큰 것이다.

 

사실 원시 종교는 함석헌 선생이 중요시하는 뜻의 종교는 아니다. 자연의 순환과 같이 돌아가는 자연종교라고 할 수 있다. 억압이 있는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 없는 자연으로 바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억압의 현실이 무언지 생각하고 비판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함 선생님이 뜻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억압의 현실이 자연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점도 날카로운 비판 의식이 없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 들어온 여러 가지 모양의 억압들을 파헤치는 작업이 있지 않으면, 억압에 대항하고 자유를 찾는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기 어렵다. 그런 것은 생각하는 생각이 하는 작업이다. 서구의 과학적 사고방식 곧 사회 과학이 그런 작업을 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위적 억압에 대해서는 인위적 저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 종교를 다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자연과의 교통에서 오는 감수성이 현대 문명을 강하게 비판하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사상을 형성하는 것이, 인위의 극단으로 간 현대 문명에 대한 가장 강한 저항의 성격을 뜬다는 것이다. 함 선생님의 후기에 보인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도 여전히 정치적인 해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현대의 기술 과학 문명을 주도하며 이득을 누리는 나라들, 그리고 그런 문명 안에서 국가를 인도한다고 하는 정치인들 곧 테크노크라시들에 대한 비판이 포함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가장 큰 억압 구조는 한 국가 내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무장한 현대 문명 전체라고 할 때, 자연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이 시대의 가장 근본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글을 맺으며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서는 서로 반대되는 ‘나’와 ‘전체’가 소통하고, ‘생각하는 생각’과 ‘생각나는 생각’이 소통하고, ‘본능’과 ‘바탈’이 소통하고, ‘인위’와 ‘무위’가 소통하고, ‘스스로 함’과 ‘저절로 함’이 소통한다. 그래서 자연과 자유는 긴장관계를 이루면서 종합된다.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함 선생님이 말하는 자연에 저항적 자유의 성격에 들어 있다는 말이다. 원래 자연에는 저항이 없기 때문에 자유와 긴장을 이룰 수밖에 없다. 함 선생님은 결국은 자연에서 자유를 찾았고 그래서 자유를 위한 정신사는 결국 자연사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그의 무위자연 사상은 현실의 억압에 대한 저항 정신에서 나왔기 때문에 자유와 긴장관계를 이루는 개념이 된다. 자유와 자연은 긴장을 유지하면서 그 긴장을 넘어 자연으로 통합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외부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으면서 동시에 저항을 넘어 원초적인 생명력으로 조화로운 자연의 일부가 되는 데까지 간다. 그처럼 자유와 자연이 긴장을 이루면서 또한 자연에서 통합되는 것은, 그의 사상이 씨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유를 말한 것도 씨들의 해방의 길을 찾은 것이고, 자연을 말한 것도 씨들에게서 찾은 생명의 원리다. 그래서 그의 무위자연은 정치적 해방의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다.

 

무위자연은 가진 것이 넉넉하고 외부적 억압이 없는 지배층의 풍류의 원리가 아니라, 씨의 삶에서 발견하는 생명의 원리가 될 때, 자유의 완성으로서의 자연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물리적 억압에 대한 저항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러나 내면으로 돌아가서 자아를 비움으로 자아를 찾는 작업이 된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자신을 억압하는 외부 세력까지 품게 된다. 그리하여 내면으로 들어간 것은 주관적이고 정적주의적인 탈 세상으로 가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세상의 악에 투쟁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면의 자유와 신체적 자유가 연결되고, 자기를 비우는 것과 저항이 연결된다.

 

함석헌 선생의 인간관 때문에라도 자유와 자연은 긴장을 이루면서 자연에 통합된다. ‘누구나’와 ‘어떤 특정한 사람들’이 긴장을 이룬다. 사람은 누구나 그 바탈이 선하다. 그의 무위자연은 인간의 바탈에 대한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바탈이 선하기 때문에 그냥 놔두면 저절로 선을 행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함 선생님의 희망은 인간에 대한 희망이다. “영혼은 물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희는 인간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고 ‘오래된 물듬(구염)’을 말하고, 불교에서는 오래 배어 습관화된 악 곧 ‘훈습’(薰習)을 말하며, 기독교에서는 원죄를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칸트도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부패와 악을 말한다. 너무나 부패해서 그 본성이 악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지경이다. 사람은 누구나 약하고 악하다.

 

함 선생님도 그런 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죄의 문제는 심각한 문제다. 사람은 누구나 그 바탈이 선하지만, 누구나 남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그가 갈라봄을 넘어서서 나를 죽이는 쪽의 자유를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은 그 바탈이 누구나 선하지만, 철저하게 부패했다. 그러므로 쉽사리 저절로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자유를 말하기 어렵다. 그가 씨에게 희망을 걸고 있고, 그가 말하는 씨은 억눌리고 억압받는 민중이지만, 동시에 사람이 다 씨이라고 말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씨이 딴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다 씨입니다. 그러나 가지는 지위가 있고 소유가 있을 때 이미 씨이 아닙니다. 그 가진 것으로 인해 제 속에 있는 알갱이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씨을 맨 사람이라 하는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물론 그는 말한다. “현실 역사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은 씨입니다. 씨은 맨 밑바닥에 있어서 역사의 모든 죄악을 다 지고 있습니다. 대신 진다는 생각도 없이 그저 전체에 봉사하는 것을 제 타고난 이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들 바닥의 사람들과 같이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닥의 사람들도 소유에서 자기 정체를 찾는 자라면 씨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닥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난하면 씨이다. 그처럼 씨은 주로 가난한 자를 가리키지만 한편 마음이 가난한 자를 가리킨다. 그래서 누구나 역사의 주인공일 수 있다. 인위적으로 제도를 만들어 뒤집어씌운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 곧 지배층이고, 그래서 생긴 ‘어떤 특정한 사람들’ 곧 눌린 층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걸지만, 그러나 눌린 씨들에게도 권력 의지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래도 씨은 억지로 당한 무소유를 통해 무욕을 품고 있다. 바닥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 선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기를 누르는 사람들까지 품을 수 있는 품이 있다.

 

이 모든 과정이 자유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자연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함 선생님에게 주체적 자유의 동기가 아주 강해서 결국 자연으로 가게 된다고 할 수도 있고, 동양적인 무위자연이 아주 강해서 자유를 부추긴다고 할 수도 있다.

 

(이화여대 신학대학원교수)

 

☆ 윗 글은 지난 6월 씨사상연구회 월례발표회 논문임.(편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