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사상연구회 월례발표회> 2007년5월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
- 신비주의적 관점을 중심으로
오강남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 종교학)
들어가는 말
제가 함석헌 선생님을 뵌 것은 몇 번에 지나지 않지만 제가 받은 강력한 인상으로 인해 이런 만남들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1963년 8월 대광 고등학교에서 시국 강연을 하실 때 수많은 청중에 끼어서 흰 두루마기를 입으신 함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으로 뵈었고, 그 후 대중 강연 때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특히 1978년 제가 캐나다 에드먼튼에 있는 알버타 대학에서 가르칠 때 친구 김영호 교수의 주선으로 함 선생님이 알버타 대학 강당에서 교민들을 위해 강연하시고, 그 날 밤 저의 집에 묵으시고, 다음날 교수회관에서 종교학과 교수들과 대화하시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김영호 교수, 황필호 교수와 함께 우이동 댁으로 찾아 뵈었을 때 동경 유학시절 겪으셨던 관동지진 때의 경험을 들려주신 것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몇 번의 행복한 만남에도 불구하고, 또 함 선생님의 글을 열심히 읽은 편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을 전문적으로나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작년 5월 이 모임에 참석했다가 박재순 교수님과 김성수 교수님이 저에게 이번 강연을 맡으시라고 강권하시는 바람에 전문가도 아닌 주제에 얼떨결에 수락하였다가 지난 1년 본격적으로 충분히 연구할 여유를 얻지도 못한 채 1년 내내 걱정만 하면서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이렇게 여러 전문 연구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비전문가로서 말씀드리는 것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그저 평소 제가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면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몇 가지 문제와 연관해서 함 선생님 사상의 종교사적 의의를 부각시켜보려고 합니다. 제가 발표를 한다기 보다 그저 말머리를 트고 여러분의 고견에서 많은 것을 배우려는 마음으로 몇 마디 말씀드리는 것이라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먼저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다석 류영모 선생님이나 심천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은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세계의 많은 종교학자들이나 사상사 전공인들이 일본의 니시다 기타로(西田畿多郞, 1870-1940)나 스즈끼 다이세츠(鈴木大拙, 1970-1966))에 대해 이야기하고 연구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류영모 선생님이나 함석헌 선생님에 대한 연구도 이에 못 미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몇 년 전 서울신대의 최인식 교수가 미국 종교학회에 참석했을 때 저는 그분에게 미국종교학회 연회에 함석헌 패널을 하나 만들어 함석헌 연구자들이 논문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최인식 교수의 노력도 불구하고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곧 그런 일이 성사되기 빕니다.
저는 이 논문에서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을 세계 종교사에서 면면히 흐르는 ‘신비주의’의 맥락에서 한번 구체적으로 짚어보고 그 의의를 되새겨 보고 싶습니다. 함 선생님이 스스로를 신비주의자로 의식하셨는지, 혹은 정말로 신비주의자이셨는지, 저로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천안에서 씨알농장을 경영할 때 거기 모인 사람들과 매일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30분씩 명상의 시간을 가졌고, 또 퀘이커 교도로서 적어도 매주 한 시간씩의 침묵 예배, 곧 명상을 실천한 분이었습니다. 또 훌륭한 종교라면 그 속에 ‘신비’가 있어야 함을 말씀하셨고, “나는 지금도 ‘그이’가 내 속에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 그의 사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그것이 세계 종교 전통의 심층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짧은 글에서 신비주의에 대해 약간 언급하고, 제가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네 가지 관점에서 함 선생님의 사상이 어떻게 신비주의 전통들과 맞닿아 있는가를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물론 이 네 가지 관점이란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완전히 독립된 항목들은 아니지만 편의상 그냥 네 가지 정도로 간추려 보는 것뿐입니다.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신비주의’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 일쑤입니다. ‘신비주의’라는 말의 애매성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똑 같은 말은 아니지만 신비주의라는 말 대신 ‘영성’이라는 말이라든가, 라이프니츠가 창안한 ‘영속철학(perennial philosophy)’이라는 말을 쓰는 이도 있지만 이런 말들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애매함이나 모호함을 덜기 위해 독일어에서는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정적인 뜻으로서의 신비주의를 ‘Mystismus’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영매, 육체이탈, 점성술, 마술, 천리안 등 초자연 현상이나 그리스도교 부흥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열광적 흥분, 신유체험 등과 같은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거나 거기에 관여하는 사람을 ‘Mystizist’라 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종교의 가장 깊은 면,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한 종교적 체험을 목표로 하는 신비주의는 ‘Mystik’이라 하고 이와 관계되거나 이런 일을 경험하는 사람을 ‘Mystiker’라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사상이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때 제가 말씀드리는 신비주의는 물론 후자에 속한 것입니다.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로 중세 이후 많이 쓰이던 ‘cognitio Dei experimentalis’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기’입니다. 하느님, 절대자, 궁극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 ‘안다’고 하는 것은 이론이나 추론이나 개념이나 논리나 교설이나 문자를 통하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권위 있는 말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영적 눈이 열림을 통해, 내 자신의 내면적 깨달음을 통해, 직접적으로,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종교에서 이런 신비주의적 요소가 없는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라 할 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신비주의’라는 말이 거슬린다고 생각하시면, 일단은 그것을 ‘심층 종교’나 ‘열린 종교’ 등으로 바꾸어 읽으셔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함석헌 사상의 비교사상사적 의의
1.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신앙에서 자라가라
“경전의 생명은 그 정신에 있으므로 늘 끊임없이 고쳐 해석하여야 한다.... 소위 정통주의라 하여 믿음의 살고 남은 껍질인 경전의 글귀를 그대로 지키려는 가엾은 것들은 사정없는 역사의 행진에 버림을 당할 것이다. 아니다, 역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가 스스로 역사를 버리는 것이다.”
“신앙은 생장기능(生長機能)을 가지고 있다. 이 생장은 육체적 생명에서도 그 특성의 하나이지만, 신앙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신앙에서 신앙으로 자라나 마침내 완전한 데 이르는 것이 산 신앙이다.”
종교적 진술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려는 “근본주의적 태도”는 종교의 더욱 깊은 뜻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이런 근본주의적 문자주의는 어느 종교에나 다 있는 일이지만 특히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의 종교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는 신비 체험의 네 가지 특징 중 하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음(ineffability)’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덕경? 1장 첫머리에 언급된 것처럼 “말로 표현한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 실재나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으므로 말의 표피적이고 문자적인 뜻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여러 신비 전통에서는 언제나 표피적인 의미와 심층적인 의미를 분간하고 표피적인 의미를 지나 심층적인 뜻을 간파하라고 가르칩니다. 가장 잘 알려진 예로 경전이나 의식 등 외부적인 것들은 결국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강조하는 선불교의 가르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특히 소개하고 싶은 것은 종교적 진술의 뜻을 좀 더 세분하여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하는 초기 그리스도교 영지주의(Gnosticism)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혹은 영지주의적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종교적 진술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차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1) 물리적(physical, hylic, 땅) 차원,
2) 심리적(psychological, psychic, 물) 차원,
3) 영적(spiritual, pneumatic, 공기=영) 차원,
4) 신비적(mystical, gnostic, 불) 차원입니다.
첫째 차원은 종교와 별로 관계가 없는 일상적 차원입니다. 이른바 육이나 땅에 속한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데 따라 극히 표피적으로 이해하는 세상입니다. 이들이 종교에 관심을 갖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 둘째 차원으로 들어가는데, 이 단계에서는 예수의 죽음, 부활, 재림 등의 종교적 진술이나 이야기를 ‘문자적’인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런 문자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심리적 기쁨이나 안위를 얻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외적 비밀(the Outer Mysteries of Christianity)’에 접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가 영으로 세례를 받으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 등의 이야기가 전해주는 셋째 차원의 뜻, 곧 ‘은유적(allegorical)’ 혹은 ‘신화적(mythical)’ 혹은 영적 의미를 파악한 영적 사람이 됩니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내적 비밀(the Inner Mysteries of Christianity)에 접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 불로 세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하나 됨이라는 신비 체험에 이르고, 더 이상 문자적이나 은유적이나 영적인 차원의 뜻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함 선생님은 이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삶의 단계 혹은 의식의 단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생명에는 세 단계가 있다. 맨 밑은 물질이고 그 다음은 마음이고 맨 위에 영 혹은 정신이다. 우리의 생명은 육체에서 시작하여 영에까지 자라는 것이다. 육체에는 자유가 없다. 온전히 물질에 의존한다. 영은 순전히 자유하다.
“평화운동은 전체의식이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다 하는 자각이 모든 가치활동의 근원이 된다.... 그 의식이 없을 때 그것을 이루는 각 분자는 이기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배타적이 되므로 거기는 싸움이 일어나고야 만다.”
저는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크리스마스와 산타크로스 이야기를 즐겨 사용합니다. 어릴 때는 내가 착한 어린이가 되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벽난로 옆에 걸린 양말에 선물을 잔뜩 집어넣고 간다는 것을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산타 이야기는 그 아이에게 기쁨과 희망과 의미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일 년 내내 싼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위해 착한 아이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기 동네에 500집이 있는데, 싼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 많은 집에 한꺼번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갈 수 있는가, 우리 집 굴뚝은 특별히 좁은데 그 뚱뚱한 싼타 할아버지가 어떻게 굴뚝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가, 학교에서 배운 바에 의하면 지금 오스트랄리아에는 여름이라 눈이 없다는데 어떻게 썰매를 타고 갈 수 있을까 하는 등의 의심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자기 아빠 엄마가 양말에 선물을 넣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 크리스마스는 식구들끼리 서로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구나. 나도 엄마 아빠, 동생에게 선물을 해야지.”하는 단계로 올라갑니다. 싼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선 것입니다. 예전처럼 여전히 즐거운 마음으로 똑 같이 “징글벨, 징글벨”을 불러도 이제 자기가 싼타 할아버지에게서 선물을 받는다는 생각보다는 선물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 더욱 의미있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 더 나이가 들어 크리스마스와 싼타 이야기는 교회 교인 전부, 혹은 온 동네 사람들 전부가 다 같이 축제에 참여하여 서로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음으로 즐거움을 나누고 사회적 유대를 더욱 강화하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좀 더 장성하면, 사실 장성한다고 다 이런 단계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더욱 성숙된 안목을 갖게 되면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하느님이 땅으로 내려오시고 인간이 그를 영접한다는 천지합일의 신비적 의미를 해마다 경축하고 재연한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까지 알게 됩니다.
물론 이 예화에서 싼타 이야기의 문자적 의미, 윤리적 의미, 사회공동체적 의미, 신비적 의미 등 점진적으로 심화된 의미를 알아보게 되는 과정이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네 가지 발전단계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깊은 신앙이란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이를 초월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함 선생님의 기본 가르침이 이처럼 문자주의를 극복함으로 종교의 진수에 접하라는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함 선생님은 젊은 시절부터 성서를 읽되 문자적으로 읽기를 거부하고 성서에서 그 당시 조선인들에게 성서가 줄 수 있는 더 깊은 ‘뜻’을 찾아내려고 했습니다. 성서뿐만 아니라 그의 전 생애를 통해 동서고금의 종교 문헌을 섭렵하면서 그런 문헌의 문자 뒤에 담긴 뜻을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문자주의의 제한성을 넘어서 종교적 진술이나 예식을 “상징적으로” “은유적으로” 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문자주의를 극복할 때 우리의 신앙은 계속 자라나 “완전한 데” 이를 수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2. 참나를 찾으라
“하나님의 구체적인 모습이 민중이요 민중 속에 살아 있는 산 힘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다른 데선 만날 데가 없고, 우리 마음속에, 생각하는 데서만 만날 수가 있다.”
“자기를 존경함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믿음이다....그것이 자기발견이다.”
영국 사상가로서 The Perennial Philosophy 라는 책을 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는 세계 여러 종교의 신비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공통점들을 열거하면서 힌두교에서 말하는 “tat tvam asi,” 곧 범아일여(梵我一如) 개념을 첫 번째 항목으로 들었습니다. 헉슬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세계 신비주의 전통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신이 내 속에 있다,” “가장 깊은 면에서 신과 나는 결국 하나다” 하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런 신관은 신의 내재(內在)만을 주장하고 신의 초월(超越)을 무시하거나 신과 나를 전혀 구별하지 않고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범신론(汎神論, pantheism)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비주의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입장은 나와 신을 구별하여 신의 초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의 내재성을 함께 수납하는 이른바 범재신론(汎在神論, panentheism)적 신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범재신론은 다른 모든 사물에서와 마찬가지로 “내 ‘속에’ 신적인 요소가 있다,” “나의 바탕은 신적인 것이다”, “나의 가장 밑 바탕은 신의 차원과 닿아 있다”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신의 초월과 동시에 내재를 함께 강조하는 ‘변증법적 유신론’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세계 신비전통에 나타나는 이런 유형의 신관 몇 개 만 예로 들어 봅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으로 “내 속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의 불성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 사상입니다. ‘장(garbha)’이라는 말은 ‘태반(matrix)’과 ‘태아(fetus)’라는 이중적인 뜻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모두 생래적으로 여래 곧 부처님의 ‘씨앗’과 그 씨앗을 싹트게 할 ‘바탕’을 내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이 잠재적 요소를 깨닫고 성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와 덧붙여 한마디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출생하자 말자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다는 말을 두고서도 여기의 ‘나(我)’란 ‘고타마 싯다르다’라는 역사적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불성, 혹은 ‘참나’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이 참나야 말로 천상천하에서 오로지 높임을 받아 마땅한 것이라 풀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이런 풀이가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을 때 그 ‘나’도 결국 역사적 예수를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보다 “아브라함 보다 먼저” 있었던 그리스도, 그의 바탕이 되는 신적 요소, 그의 참나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 봅니다.
물론 예수님도 직접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요14:10)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2:20)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신성의 내재라는 신비주의적 특색을 강조하는 저류가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런 신비적 흐름이 억눌리고 문자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득세하는 비극이 초래되기는 했지만 이런 사상은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 면면히 이어져 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중세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교 신비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8)도 “영혼 속에는 창조되지도 않았고 창조될 수도 없는 무엇이 있다”고 했고 그 외의 많은 신비주의 그리스도 사상가들이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씨앗, 그리스도의 탄생 등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특히 지금까지 기독교 신비 전통의 한 가닥을 이어가고 있는 퀘이커교에서는 우리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를 ‘신의 한 부분(that part of God)’ 혹은 ‘내적 빛(inner light)’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어느 종교보다도 신의 초월을 강조하는 이슬람교에서조차 신의 내재를 동시에 역설하는 수피(Sufi) 전통이 있습니다. 그들은 신이 내 “우리의 핏줄보다도 우리에게 가까운 분”이라는 쿠란의 말을 근거로 하여 신의 내재성과 ‘신에로의 몰입’을 주장합니다. “만물 안에 내재한 그 일자(一者)를 보라”고 가르칩니다.
동양 사상 중 특히 ‘우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사상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봅니다.
저는 우리 속에 있는 신적 요소, 혹은 내재적 하느님 사상을 학생들에게 더욱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물론 얼마간의 무리와 오해의 위험이 있음을 알면서도, 저 나름대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나를 나의 ‘몸’과 동일시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몸이 아프면 바로 ‘내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나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 몸이 하나가 아니고 몸은 ‘나’라고 하는 무엇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몸을 소유하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마음인가? 그러나 여기서도 역시 ‘나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의 소유자, 주인이 마음과 별도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나인가? 역시 마찬가지로 ‘나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영혼이 주인이 아니고 영혼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고 하는 더 근본적인 주인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아닌 그 근본 주인, 그 소유자, 그 바탕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참 나,’ 혹은 내 속에 있는 ‘신적 요소,’ ‘내 속의 하느님’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설명해 봅니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 제노아의 성 캐더린(St. Catherine of Genoa)의 말: “나의 나는 하느님이다. 내 하느님 자신 이외에 다른 나를 볼 수 없다.”(My Me is God, nor do I recognize any other Me except my God Himself.)고 한 것은 나의 진정한 나는 결국 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이런 이론적 설명이 완전히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설명과 함께 명상을 권장하기도 합니다. 깊은 명상 속에서 우리는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게 됩니다. 다시 가만히 보면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그 또 하나의 나를 관찰하는 또 다른 관찰자를 의식합니다.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이 없기에 이쯤에서 일단 이렇게 나의 몸이나 감정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고, 이 또 하나의 나는 일상적이고 일차적인 나와 다른 나가 아닌가, 이 나가 하느님의 일부이든가 아직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면 하나님에 가까운 나, 혹은 내 속에서 하느님과 맞닿은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해주기도 합니다. 함 선생님도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시간·공간을 다 잊어버리고 내 마음을 될수록 순수하게, 잡념을 없애고”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함석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씨알’이라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씨알’이라는 말이 때 묻지 않은 ‘맨사람,’ 근본을 잃지 않고 인위적인 것으로 덧씌워지지 않은 민중을 뜻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씨알의 알은 하늘에서 온 것이다. 하늘은 한 얼이다. 하늘에서 와서 우리 속에 있는 것이 알이다.”하는 말이나 “정말 있는 것은 ‘알’ 뿐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서는 하나님, 하늘, 뿌리로 알려져 있다.”고 한 말을 보면 적어도 씨알의 ‘알’은 우리 속에 공통적으로 내재한 신적 요소, 혹은 신과 인간이 맞닿아 있는 경지를 일컫는 말이라 이해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몇 가지 관점에서 볼 때 함석헌 선생님의 가르침은 근본적으로 세계 신비주의 전통 속에서도 가장 중요시되는 신인합일, 신인무애(無礙), 신과 만물의 융합, 라틴어로 ‘unio mystica’의 사상을 함의하고 있다고 하여 틀 릴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서 함 선생님의 이런 사상이 그리스도교적 표현으로 압축된 것 같아 인용합니다:
나는 역사적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은 그리스도다. 그 그리스도는 영원한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된다. 그는 예수에게만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내 속에도 있다. 그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와 나는 서로 다른 인격이 아니라 하나라는 체험에 들어갈 수 있다. 그 때에 비로소 그의 죽음은 나의 육체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은 내 영의 부활이 된다. 속죄는 이렇게 해서만 성립된다.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3. 우주공동체에서 평화를 체현하라
“평화주의가 이긴다.
인도주의가 이긴다.
사랑이 이긴다.
영원을 믿는 마음이 이긴다.“
세계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나와 하느님이 하나임을 말함과 동시에 나와 다른 이들, 다른 사물들과도 결국 일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습니다. “어떤 경우가 천박한 이해인가? 나는 답하노라. ‘하나의 사물을 다른 것들과 분리된 것으로 볼 때’ 라고. 그리고 어떤 경우가 이런 천박한 이해를 넘어서는 것인가? 나는 말할 수 있노라.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있음을 깨닫고 천박한 이해를 넘어섰을 때’ 라고.”
물론 이런 사상을 가장 극명하고 조직적으로 개진하는 사상체계는 중국 불교의 화엄종(華嚴宗)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화엄에서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라는 기본 원칙을 강조합니다. 보편적 원리로서의 이(理)와 개별적 사물로서의 사(事)가 아무 거침이 없이 서로 융통한다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생각을 기초로 하여, 이제 모든 사물 자체가 상즉·상입(相卽相入)한다는 것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고치면 모든 사물은 상호연관, 상호의존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나와 하느님만이 하나가 아니라 나와 너, 나와 만물이, 만물과 만물이 궁극적 차원에서는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유기체적(organic), 통전적(holistic) 세계관입니다.
함 선생님은 “내 속에 참 나가 있다,” “이 육체와 거기 붙은 모든 감각·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참 나는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는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나와 일체가 하나임을 알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나는 나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과 같이 있다. 그 남들과 관련 없이 나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와 남이 하나인 것을 믿어야 한다. 나·남이 떨어져 있는 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상대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나·남이 없어져야 새로 난 ‘나’다. 그러므로 남이 없이, 그것이 곧 나다 하고 믿어야 한다. 다른 사람만 아니라, 모든 생물, 무생물까지도 다 티끌까지도 다 나임을 믿어야 한다.”
저는 이런 유기체적이고 통전적인 세계관을 설명하기 위해 학생들에게 자기 뺨을 만져보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부모님을 발견하고 조부모님, 증조부모님, 나아가 수없이 많은 조상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했던 공기, 물, 비, 구름, 햇빛, 음식, 음식 만드는데 필요한 도구, 도구를 만든 사람들, 그들이 농사짓는데 필요했던 토양, 씨앗, 시간과 공간 등등 이런 모든 것이 지금 내 뺨에 함께 존재하는 것을 느껴보라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온통 나 아닌 것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나’라는 개인은 이 모든 것과 상즉상입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셈입니다. 저는 이렇게 온 우주가 서로 연관되었음을 깨닫는 것이 바로 ‘우주 공동체’를 새로이 발견하는 일이라 주장합니다.
이렇게 나와 너, 만물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실제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반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계 여러 신비주의 전통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단순히 논리 정연한 이론적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일견 복잡하기 그지없이 보이는 교설들도 사실은 이른바 ‘구원론적 의도(soteriological intent)’를 가진 것입니다. 헉슬리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신비주의자들은 이론적이면서도 동시에 실제적”입니다.
이런 통전적, 유기적 세계관에서 어떤 실제적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저는 만물의 일체감에서 세계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자비(compassion)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이런 아픔을 줄이려는 노력으로 평화로운 세상의 구현을 위해 힘쓰게 된다는 점을 특히 부각하고자 합니다.
함 선생님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평화운동이 감상적이거나 윤리적 차원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라고 보는 더욱 근본적인 우주관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평화운동은 전체의식 없이는 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다 하는 자각이 모든 가치 활동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그 의식이 없을 때 그것을 이루는 각 분자는 이기주의에 떨어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배타적이 되므로 거기는 싸움이 일어나고야 만다.” 고 한 말이나 “사랑은 하나 됨이다. 둘이면서 하나 됨이다. 둘이면서 둘인 줄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면서 하나인 줄을 모를이만큼 하나여야 할 것이다.”고 한 그의 말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 됨으로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남이 아플 때 나도 아파하는 일종의 보살 정신입니다. 틱낫한 스님이 제창한 참여불교(Engaged Buddhism) 운동처럼 올바른 세계관에 입각한 사회참여의 정신입니다. 함 선생님은 제가 보기 ‘행동하는’ 신비주의를 몸소 보이주고 실천하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4. 종교 상호간의 보완과 조화를 중시하라
“우리의 생각이 좁아서는 안 되겠지요. 우주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다원적이기 때문에 나와 달라도 하나로 되어야지요. 사람 얼굴도 똑같은 것은 없지 않아요? 생명이 본래 그런 건데, 종교와 사상에서만은 왜 나와 똑 같아야 된다고 하느냐 말이야요. 생각이 좁아서 그렇지요. 다양한 생명이 자라나야겠는데....”
앞에서 말한 우주공동체에서의 평화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특히 종교다원주의적 자세에 대해 별도로 언급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으로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자기만 옳다고 하는 독선적 주장이 별로 없습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궁극적 실재가 인간의 이성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나 문자로 표현된 것에 절대적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예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 사상은 궁극 실재에 대한 우리 인간의 견해(見解)는 그 타당성이 전혀 없다, ‘비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상 체계입니다. 모든 견해가 이럴 진데 나의 견해만 예외적으로 절대로 옳다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함께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사물을 더욱 깊은, 더욱 높은, 더욱 넓은, 더욱 많은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어느 특정 관점에서 본 한 가지 의견을 절대적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궁극 실재가 무한히 크면서 동시에 무한히 작다고 하는 ‘역설’의 논리가 무리 없이 수용됩니다.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조삼모사(朝三暮四)’ 이야기 중 원숭이 훈련사의 경우처럼 양쪽을 다 보는 ‘양행(兩行)’의 태도를 보입니다. 똑 같은 커피 잔이 위에서 보면 둥글지만 앞에서 보면 네모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를 요즘말로 바꾸면 시각주의(perspectival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어느 시각,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함 선생님처럼 “글쎄요”의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의 시각, 하나의 관점을 절대화할 수 없고 다원적인 시각의 상대적 타당성을 인정할 뿐입니다.
이런 태도를 다종교(多宗敎) 현상에 적용하면 자연스럽게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 종교의 가르침만을 절대적 진리라 주장하는 배타적 태도를 견지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비주의와 종교 다원주의적 태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 혹은 나무와 그 열매와 같은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 선생님이 세계 신비주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한다는 말은 함 선생님은 세계 종교들을 다룰 때 다원주의를 견지할 수밖에 없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 문제를 길게 논의하는 대신 함 선생님의 말씀 하나를 인용하고 그칩니다: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우리 교회에 오셔요’, ‘이것 아니고는 구원 없습니다’ 식의 전도가 없고, 있다면 그저 밭고랑에 입 다물고 일하는 농부처럼 잘됐거나 못됐거나,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안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좋지 않습니까?”
나가는 말
20세기 가장 위대한 가톨릭 신학자로 알려진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21세기 그리스도교가 신비주의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신비주의적 차원으로 심화되지 않으면 망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어찌 그리스도교뿐이겠습니까? 저는 모든 종교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는 결국 신비주의적 차원이라 확신합니다.
물론 지금까지 이런 신비주의적 차원에 접한 종교인들은 그 숫자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거의 모든 종교의 신도들이 문자주의적, 교리 중심적, 기복주의적, 자기중심적, 배타주의적 종교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것이 참된 종교가 이를 수 있는 구경의 경지가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 이런 비극적 사태가 개선되므로 더욱 많은 이들이 종교의 신비주의적 차원에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 1929-2003)는 최근에 펴낸 그의 책에서 라는 책에서 신비주의 체험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몇몇 사람에서만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도 보편적으로 가능한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며, 이른바 ‘신비주의의 민주화(democratization of mysticism)’를 주창했습니다. 저도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는 이번 이 논문을 쓰기 위해 함석헌 선생님의 글을 다시 읽으면서 다시 한 번 함 선생님의 신비주의적 사상이 바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이끌 수 있는 사상이며, 함석헌 선생님이야 말로 이런 ‘신비주의의 민주화’에 앞장서신 분이었구나 하는 확신을 더욱 공고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바로 함석헌 선생님의 비교사상사적 의의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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