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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_ <7> 함석헌/교수신문

by 마리산인1324 2010. 9. 5.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1109

 

 

 

       
정신적 지진의 한복판에서 홀로 불타고 찢겨졌던 그를 보라!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_ <7> 함석헌
2010년 08월 31일 (화) 16:17:03 교수신문 editor@kyosu.net

‘근대 백년 논쟁의 사람들’ 일곱 번째 인물은 함석헌(1901.3.13~1989.2.4)이다. 철학 분야와 전체분야에서 각각 4표와 9표로 총 13표를 얻어 학자들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 김재현 경남대 교수(철학)는 “함석헌은 사상의 폭이 매우 넓을 뿐 아니라 평화주의자로서 근대국가를 비판적으로 성찰했다”고 평했다. 함석헌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철학자, 문인, 사상가로서 한국 현대사상의 원류를 제공했다.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와 박재순 씨알재단연구소장(신학)이 각각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 함석헌 사상이 가진 논쟁점을 짚어봤다. 두 학자는 이 시대, 함석헌 사상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1923년 오산 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귀국해 송산농사학원 원장에 취임했으나 계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광복 때까지 은둔했다. 광복 후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을 지내다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북한 당국에 투옥됐다. 1947년 월남해 퀘이커교도로서 성경강론을 했다. 1956년 <사상계>를 통해 사회비평적인 글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해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1989년 8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출처: 사단법인 함석헌 기념사업회

 
 

아마도 후세는 20세기 한국지성사를 긍정적으로 보자면 만남의 시대요, 부정적으로 보자면 혼란의 시대였다고 규정할 것이다. 또는 부정적으로 보자면 타자 속에서의 자기상실의 시대요 긍정적으로 보자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그렇게 낡은 자기를 상실하고 새로운 자기를 잉태한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이 양면적인 지성사적 의미는 아직 우리 자신에게 충분히 의식되지 않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은 육체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신의 영역에서도 처음에는 눈에 띄는 일이 아닌지라 자기 자신에게도 의식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 대다수는 여전히 20세기 이후의 한국지성사를 단순히 서양학문을 학습한 시대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민족들이 서양문명과 만난 뒤에 어떤 정신적 굴곡을 경험하고 그로부터 어떤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냈는지에 대해서는 탈식민주의다 상호문화철학이다 하면서 작은 것에도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도 바로 이 땅에서 일어난 동서양 문명의 만남과 충돌이 어떤 정신적 드라마를 연출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교수신문>이 설문조사한 근대 100년 한국지성사의 주요인물이라고 내건 경성제대-서울대 동문명부에 그들과 아무 상관없는 함석헌이 가장 많은 표를 얻었다는 것은 늦었지만 한국의 학계가 조금씩 사람을 알아볼 줄 알게 된 것이라 해야 할까.


지난 몇 백 년은 사상의 대륙에서 서양판과 동아시아판이 격렬히 충돌하면서 한편으론 지진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으론 산맥을 밀어올리기 시작한 시대다. 한 때 역사의 종말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한국의 ‘휴거소동’과 다름없는 유치한 발상일 뿐, 정치 경제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본격적인 대결이 이제 시작이듯 정신의 지평에서도 동아시아와 서양의 만남과 충돌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함석헌은 그런 정신의 지각변동이 가장 높이 밀어올린 봉우리이다. 이런 의미에서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세계사적 사건이다.

 

자기상실을 통해 얻은 자기정립


우리 시대를 뒤흔든 정신적 지진 가운데서 영리한 사람들이 사류에 편승해 그때그때마다 안전한 곳, 곧 지배적인 정신에 자기를 내맡길 때, 함석헌은 그 지진을 피하는 법을 찾지 못하고 그 한복판에서 불타고 찢겼다. 그 어리석음이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지혜로운 자로 만들었다. 자기분열 속에서 그는 평생에 걸쳐 자기가 누구인지 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동양도 서양도 아닌 자기, 기독교인도 유학자도 불교도도 아닌 자기는 누구인가. 그 물음에 대해 그는 자기가 아무도 아닌 까닭에 모두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것이 씨알의 자아의식이다. 인간이 하늘이요 가장 작은 내가 또한 전체라는 자각은 동학의 人乃天 이래 유영모를 거쳐 함석헌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한국의 정신적 저류를 형성했던 근본사상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를 또렷하게 말해준 사람은 함석헌이다. 씨알은 아무도 아니므로 모두이며, 아무 것도 아니므로 전체일 수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의 자기상실을 뒤집어 새로운 자아인식과 자기정립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이 주체성, 하지만 자기동일성 속에서 추구되는 홀로주체성의 아집이 아니라 타자성 속에서 자기를 비움으로써만 열리는 이 서로주체성의 개방이야말로 함석헌의 첫째가는 성취이다.

 

종교적 당파 넘어 보편적 만남 지평 열어


물론 이 자기의식이 아무런 내용 없는 추상적 언명 속에서 제시될 수는 없으니, 세계관적인 차원에서 그는 다른 무엇보다 기독교와의 대결 및 세계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서로 충돌하는 신들의 세계 속에서 어떤 특정한 신의 종노릇도 거부함으로써 자기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는 유교적 고전 교육을 받고, 장로교 신자로 기독교에 입문했으나 일본유학시절 스승으로 모신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영향 아래 무교회주의자가 됐고, 감옥에서 老莊과 불경을 읽고 네 종교 내 종교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며, 간디의 손에 이끌려 『바가바드기타』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말년에는 퀘이커에 심취했으나 그것은 더 이상 교리적 구속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에 대해 수많은 글을 남겼는데, 그것은 세계사의 변방에서 탄생했던 원시 기독교가 어떻게 다시 세계사의 또 다른 변방에서 완성되는가를 보여주며 동시에 지양되는지를 보여준다. 함석헌의 스승이었던 우치무라가 교회를 버렸을 뿐 기독교를 버리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함석헌은 기독교적인 길을 끝까지 걸어 기독교를 넘어갔다. 그는 종교에서 아무 것도 고집하지 않음으로써 종교적 당파성을 넘어 참된 보편적 만남의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대개 철학의 보편성은 지배적 권력에 기초한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추구했던 아르케(arche)의 원뜻이 권력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함석헌이 추구한 보편성은 민중성에 뿌리박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종교와 철학이 추구했던 보편과 다르다. 우리는 이것을 특히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의의는 다른 무엇보다 한글로 씌어진 최초의 通史라는 데 있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맺은 가장 심오한 자기인식의 열매이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역사의 뜻을 묻는데 여기서 역사란 고난의 역사이다. 그러니까 그는 역사에서 패배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곧 민중의 입장에서 도대체 역사와 삶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철학은 처음으로 양반귀족의 철학도 시민의 철학도 아닌 민중의 철학으로 낮아졌다.


하지만 함석헌 사상의 주체성과 민중성이 아무리 독보적인 것이라도, 그의 사상의 현대성이 없었더라면 새로운 사상의 정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개 철학자의 지혜는 앞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반추하고 해석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나 함석헌은 옛길을 통해 앞길을 밝힌 참된 온고지신의 철학자였다. 그는 민족국가의 의미를 누구보다 명확히 인식한 사람이었으나 또한 민족국가의 수명이 다했음을 깨달은 세계주의자였다. 새로운 세계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닐 것이니, 그는 한반도의 통일이 과거 민족국가로의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개방하는 세계사적 사건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리고 남들이 과거의 진화과정을 두고 창조냐 진화냐 설왕설래할 때, 그는 앞으로 우리들 자신이 책임져야 할 진화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기술문명의 의미를 되묻고 인간과 자연 그리고 뭇 생명의 보편적 화해를 추구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미래적 전망에 입각해 그는 낡은 종교와 철학 그리고 윤리 도덕을 쇄신하려 했다. 나는 이런 철학자를 달리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가 학자들에게 무시돼 온 까닭 가운데 하나는 그의 글이 읽기 쉽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쉽고, 논어가 쉽듯이 그의 글도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민중의 친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 꾸밈없는 그의 글은 荊山의 璞玉이다. 그 보석을 갈고 다듬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일이다.

 

   
   
 
김상봉 전남대·철학

필자는 독일 마인츠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함석헌과 주체성의 문제」, 저서로는 『서로주체성의 이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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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신과 기독교 정신의 깊고 순수한 만남 … 구원에 관한 새로운 해석 제시했다
함석헌의 종교사상, 어떻게 볼 수 있나
2010년 08월 31일 (화) 16:21:55 박재순 씨알재단 연구소장·신학 editor@kyosu.net

한국 현대사는 동서문명의 만남과 민주화 과정으로 전개됐다. 조선왕조가 쇠퇴하고 몰락하면서 지배 권력과 이념이 약화됐을 때, 민중이 역사의 중심과 선봉에 서게 됐고, 서구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서구로부터 기독교 신앙, 과학사상, 민주정신을 받아들임으로써 오랜 역사 속에서 잠들어 있던 민중의 자각이 이뤄지고 민주화 운동이 줄기차게 펼쳐졌다.


민중의 자각과 민족의 독립을 추구한 안창호와 이승훈이 주도한 신민회, 오산학교, 삼일독립운동의 정신과 역사를 이은 함석헌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대사를 살았다. 현대사의 중심을 살았던 함석헌은 동양, 한국의 정신문화적 주체성을 가지고 서구의 정신문화, 기독교, 이성철학, 민주정신을 깊이 받아들였다. 유불도와 기독교를 회통한 유영모의 심오한 정신과 철학을 계승한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 속에서 동서정신문화의 창조적 만남과 융합이 이뤄졌고, 민주정신이 확립됐다. 함석헌은 제국주의와 민족국가주의를 극복한 민주정신과 세계평화정신을 씨알 철학으로 다듬어냈다.


함석헌의 심오하고 방대한 정신과 사상의 세계는 그의 주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기틀이 잡혔다. 30대 초반의 함석헌이 이 책을 구상하면서 ‘루비콘 강을 건넜다’, ‘아무도 밟아보지 못한’(前人未踏) 세계로 들어간다고 스스로 말했을 만큼 이 책은 혁신적이고 모험적인 사유와 인문학적 상상력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함석헌은 고난을 통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는‘예수의 십자가’, 구원의 원리를 한민족의 고난의 역사에 적용했다. 한민족의 고난과 예수의 십자가 고난을 동일시함으로써 예수(의 십자가)는 성서와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한국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됐고 한국 역사는 영적 깊이와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게 됐다. 고난 받는 한민족이 예수의 자리에 섬으로써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세계의 구원과 평화를 가져올 주체가 됐다.

 

예수의 구원 원리 한민족에 적용


이 책에서 제기된 신학적 문제는 한국인이 예수와 기독교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한 가지 문제로 압축된다. 함석헌은 예수를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첫째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 함석헌에게 예수는 단순히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예수는 우리의 삶과 역사 속에 살아 있어야 할 주체이며, 우리는 예수의 생명과 정신, 뜻과 일을 이어서 우리의 삶을 완성할 책임을 가진 주체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십자가를 짐으로써 구원을 이뤄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인 속죄론 즉, 예수의 피로 죄를 씻어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에 대한 전면 도전이고 새로운 해석이다. 그는 예수와 하나 되는 체험에 이를 때만 속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인간은 예수와 신의 뜻과 생명을 따라 사는 존재이며 민족, 인류 그리고 우주 생명 전체의 님인 하나님을 대표해서 사는 존재이다. 함석헌의 속죄론은 개인의 주체의 자리에서 보면 自贖的 속죄론이고 전체의 자리에서 보면 代贖的 속죄론이다.


둘째 함석헌은 동양정신과 문화 즉, 유불도와 한국정신의 바탕에서 예수를 받아들였다. 함석헌에게서 예수와 한국인, 한국정신과 기독교 정신이 깊고 순수한 형태로 만났다. 함석헌의 민족사와 예수의 민족사가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그리고 종교와 경전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생동하는 주체로서 서로 합류하고 소통한 것이다. ‘큰 하나’를 지향하는 한국의 ‘한’ 정신에 비춰 예수는 ‘한[큰 전체] 생명의 님’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수가 자기를 부정하고 고난 받고 죽은 ‘십자가’는 우리가 죽고 ‘새로 나는’ 자리면서 ‘함 없이 하는’ ‘빔’과 ‘없음’의 자리였다. 뭇 사람들을 하늘나라로 이끈 십자가의 길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이끄는 中道였다. 또한 한국정신과 동양경전은 서구정신문화, 기독교, 이성철학, 민주정신에 비춰 새롭게 해석됐다. 원만하고 포용적인 한국정신이 진취적이고 비판적인 예언자정신과 결합됐다.

 

동서고금의 정신과 사상 회통하고 종합


일본제국의 식민통치 속에서 민중과 함께 고난을 겪었던 함석헌은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식민지배 속에서 민중과 함께 세계평화의 길을 열었던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을 재발견하고 계승했다. 함석헌은 한국의 주류 기독교로부터 이단으로 취급받고 외면당했지만 누구보다 예수에게 충실하고 예수와 가깝게 산 인물이었다.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와 2천 년 서구 기독교 정신사를 거슬러 민중 예수를 발견하고 그 예수를 오늘 우리의 삶과 역사, 정신과 문화 속에 살아 있게 했다. 이로써 함석헌은 기독교의 교리적 근본주의를 깨트렸고, 교회의 막힌 벽을 허물었으며, 신과 역사 앞에서 인간의 영적 자각을 촉구했고, 지배 권력과 이념에서 벗어나 민중사관을 확립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민중의 고난을 함께 겪으면서 민중의 마음과 자리에서 그리고 예수의 관점에서 봤기 때문에 함석헌은 지배 권력과 지식인 엘리트의 독단에서 벗어나 인생과 사회와 역사를 크고 깊게 볼 수 있었다. 그에 따르면 세계역사는 전쟁과 폭력이 지배한 민족국가 문명시대에서 상생 평화의 원리가 이끄는 세계평화 문명시대로 바뀌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래 세계는 하나로 되는 길목에 들어섰다. 함석헌은 외세와 민족분단과 군사독재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 민주화와 비폭력 평화 운동을 펼쳤고, 국가와 민족의 벽을 넘어서 세계평화의 사명과 비전을 제시했다.


 함석헌은 서구중심의 문화적 우월주의를 극복하고 동서를 아우르는 민주적이고 세계평화적인 사상과 정신을 제시했다. 그는 참으로 동서고금의 정신과 사상을 회통하고 종합한 큰 사상가이다. 서구 근대철학과 민주정신이 고난 받는 민중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고난 받는 민중의 심정 속에서 정화되고 순화돼 함석헌의 정신과 사상 속에 합류됐다. 동서고금의 서로 다른 정신과 사상이 보물을 품은 큰 광맥처럼,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과 정신의 거대한 화산맥처럼 그의 글 속에 묻혀 있다.

 

   
   
 
박재순 씨알재단 연구소장·신학

필자는 한신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동아시아와 함석헌의 평화사상」, 「함석헌의 문학관」, 저서로는 『씨알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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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1110

 

 

[함석헌 연구의 쟁점은] 종교·철학에 편중 돼...본격 연구 이제 시작
2010년 08월 31일 (화) 16:19:29 교수신문 editor@kyosu.net

함석헌 사상의 방대함만큼 그의 연구를 정리하는 작업은 쉽지 않다. 다만 함석헌에 대한 전기적 접근은 김성수의 『함석헌 평전』(2001)과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의 <교수신문>(2002.6.18~2005.6.21) 연재가 있다. 지금까지 그에 관한 연구는 종교와 철학 쪽에 집중돼 이뤄져왔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황필호 강남대 명예교수 등이 1980년대 함석헌의 종교 사상에 주목해 연구를 이끌었다. 함석헌의 종교 사상이 던진 논쟁점은 교회의 성격과 제도문제, 가톨릭 성직자의 독신주의 문제, 신의 본질 문제, 천당과 지옥의 존재유무 문제 등으로 정리된다. 특히 1957년 <사상계>를 통해 전개된 윤형중 신부와의 논쟁은 한국 종교계뿐 아니라 지성계에도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신의 질을 놓고도 함석헌은 기존의 성직자들과 다른 인식을 제시했다.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사상계>, 1956)를 통해 ‘신은 곧 민중=씨알’이란 자신의 주관을 천명한다. 당시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신이 실존한다는 실재론에 근거해 있었던 것과 달리 인식론에 근거해 신을 바라봤던 것이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을 해석하는 연구자들의 입장은 다양하다. 씨알재단(이사장 김원호)은 씨알 사상을 대중화, 보편화 시킨 함석헌 사상과 함께 씨알 사상 창시자인 다석 유영모를 함께 연구하고 있다.


함석헌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출발선을 넘은 상태다. 지금까지 함석헌 연구는 사실상 답보 상태였다. 198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갈등을 해결할 대안으로 마르크시즘이 팽배하면서 동·서양 사상과 기독교사상, 톨스토이, 토인비 등을 망라하는 함석헌 사상은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오히려 마오쩌둥에 대한 함석헌의 비판만이 부각되기도 했다.


최근 종교와 철학 쪽에 집중됐던 기존의 함석헌 연구를 탈피하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지난 4월 창립된 함석헌학회(회장 이만열 숙명여대)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함석헌의 정치철학, 사회사상, 환경 등으로 연구의 폭을 넓히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황보윤식 함석헌학회 총무는 “한국 현대사상의 원류에는 함석헌 사상이 있다. 그러나 아직 학계의 집중적인 연구는 부족한 상태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 김대식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등 함석헌 사상은 젊은 연구자들을 통해 끊임없이 재해석 중이다. 급격한 시대 변화 속에서도 함석헌 사상이 여전히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는 현실은 그의 사상적 사례가 국내 학계에 미친 영향을 짐작케 한다. 이제 막 함석헌 연구의 닻을 올린 학계의 어깨가 무겁다.

 

우주영 기자 realcosmos@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