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09-04-03 오후 08:52:38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47920.html
검열된 ‘함석헌의 외침’ 21년 만에 되찾다 | |
강연 등 빠진 글 보완…30권으로 새로 내 독재정권·권력 나팔수 언론에 내린 일갈 ‘한민족 고난=인류해방 거름’ 가르침 등 “기독교 틀 넘은 새 정신·사상적 아이콘” | |
한승동 기자 | |
<함석헌 저작집 1~30> 함석헌 지음/한길사·각권 1만4000원~2만원, 독립 발췌본 1만원
“저 신문쟁이들을 몰아내라…. 그놈들 우리 울음 울어 달라고 내세웠더니 도리어 우리 입 틀어막고, 우리 눈에 독약 넣고, 우리 팔다리에 마취약 놓아버렸다. 그놈들 소리한댔자 사냥꾼의 개처럼 짖고, 행동한댔자 개의 꼬리 치듯이 할 뿐이다. 쫓아내라. 돌로 부수란 말 아니다. 해가 올라오면 도깨비는 도망가는 법이다. 우리가 울어야 한다. 우리가 울면 우리 소리에 깰 것이다. 힘도 우리 것이요 지혜도 우리 것이다. 그것은 참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열린 ‘함석헌 선생 탄신 108돌(서거 20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작가 박태순씨는 1970년 4월에 창간된 <씨알의 소리>에 실린 함석헌의 이 글을 하필 인용했다. “개처럼 짖고, 행동”하는 것들이 날뛰는 세상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바뀐 게 없지 않으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어디 신문뿐이랴.
한길사가 <함석헌 저작집> 30권을 새로 냈다. 1988년에 낸 20권짜리 <함석헌 전집>을 21년 만에 대폭 보완하고 편집과 디자인도 크게 바꿨다. 지난 5년간 공들여 새로 찾아낸 시 72편과 강연문 26편, 편지 39편, 에세이 11편, 동양고전풀이 17편, 인물론 9편, 대담 6편, 간디 명상집 번역물 등을 추가했다. “거의 70년에 걸쳐 쓴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확인하고 고칠 것 고치고 주를 달았다. 예전의 수록글 중에서 검열 때문에 잘려나간 부분, 완전히 누락된 것들도 찾아 넣고 찾아보기 쉽게 색인도 만들었다. 그런 작업에만 1년이 걸렸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자국 근현대 사상가들의 재해석·재평가 작업을 꾸준히 벌이면서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이 부러웠다”며 “우리는 함 선생님 얘기를 하면서도 실은 제대로 읽지도 알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틀에 함 선생님을 가둬선 절대 안 된다”며 특히 젊은 세대가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적·사상적 아이콘” 함석헌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했다.
<씨알의 소리> 창간 2년 뒤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그 잡지는 폐간과 복간을 오갔으며 주인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에도 ‘미네르바’와 ‘촛불’ 들이 숱하게 잡혀갔다. |
그 몇년 전인 1968년 <사상계> 5월호에서 함석헌은 “5·16은 혁명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고 외친다. 그는 5·16 쿠데타를 한마디로 “강간”이라고 했다. 1958년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 뒤 광대무변으로 발전해가는 함석헌 사상의 동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글이다. 그 글에서 그는 “6·25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소련이)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며 “우리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왜 분단당했나? 그것은 우리가 일본 식민지배를 당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우리가 “꼬부린 새우”, 곧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왜 약소민족이 됐나? 씨알이 힘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것은 나라 바깥 이리·호랑이들한테 꼬리치며 퍼주기를 일삼으면서 제 나라 백성을 “사정없이 악착스럽고 더럽게 짜먹었”던 양반 등 사대주의 “정치업자놈들” 때문이었다. “잘못은 애당초 전주 이씨(이성계)에서 시작됐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식, 그리고 나당연합과 고구려 멸망까지 간다.
“나는 6, 7년 이래 중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 안에 광영 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가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용이었다. …드디어 나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유행식 ‘영휘 있는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참담한 사실 이것을 희망과 자부심에 작약하는 젊은 혼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생각할 때 ‘나는 왜 역사교사가 되었던고’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시대인 1934년 <성서조선>에 실린 이 글은 그의 고뇌의 원형을 보여준다. 민족혼을 고취시킬 ‘영광의 역사’를 가르치기엔 조선역사는 너무 보잘것없고 고통스러웠다. 나중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 그리고 다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거듭나는 그의 대표저서를 특징짓는 ‘고난의 역사’관은 거기서 출발했다.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고난, 특히 영광 없는 한민족의 고난이야말로 진정한 해방, 전 인류적 거듭남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읽어낸 함석헌의 놀라운 사고전환은 참담한 고뇌의 소산이었다. 고난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고 따지고 보면 세계역사가 모두 고난의 역사였다. 김경재 한신대 교수는 토머스 베리의 지질학적 개념을 빌려 지금까지 6500만년 간 이어지고 있는 신생대 대신 세계가 하나로 되는 인간과 자연 합일의 새 역사시대인 생태대(Ecozoic era)로의 인류진화 개념으로 함석헌 사상의 확장을 설명한다. 다윈과 베르그송, 샤르댕, 웰스 등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넘어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세계주의, 생태주의로 사유영역을 끝없이 밀고 간 함석헌 사상의 출발점은 비참한 민족현실이었다.
분단이 상징하는 그 비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함석헌 입장에서 본 한국현대사’를 볼 수 없게 된 건 유감스럽지만, 저작집 30권은 함석헌 사상이 그가 타계할 때까지 어떻게 태동하고 변해갔는지, 그 다이너미즘을 날것 그대로, 훨씬 더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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