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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사상 이야기/함석헌

信天翁 함석헌의 윤리사상 고찰 /김영태

by 마리산인1324 2012. 2. 9.

[2011년 4월 30일 연세대(신촌) 용재관 304호실에서 있었던 2011년 함석헌학회 춘게 학술대회 발표논문.

전남대 명예교수 김영태님의 글]

 

<함석헌평화포럼> 2011/05/02 06:30

http://blog.ohmynews.com/hamsh01313/364332

 
信天翁 함석헌의 윤리사상 고찰

 

1. 들어가는 말


2. 함석헌의 윤리관
가. 사회분석
나. 새윤리관 확립의 필요성
다. 새윤리의 목표
라. 새윤리 사상- 민의 사상


3. 윤리- 종교의 삶

가. 진보하는 종교적 삶
나 퀘이커적 삶-평화를 위한 삶


4. 맺는 말

 


Ⅰ.들어가는 말

함석헌(1901-1989)의 사상은 한국 근현대사의 고난의 역사 한복판에 선 그의 혼의 용광로 속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통전되어 하나의 독특한 생명사상, 역사철학, 종교적 사회운동으로 꽃피어 난 것이다. 함석헌의 구성적 요소들의 중요한 계기와 문제의식을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기(1901-1922). 평북에서 낳고 자라면서, 오산학교시절 유영모와 이승훈을 통해 그의 청소년기에 흡수한 기독교적 섭리사관과 예언자 사상 및 예수의 갈릴리 신앙이 기본 배아를 이룬다. 인간의 삶과 역사적 삶이란 인격성과 책임성을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 제2이사야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고난의 종의노래’, 특히 일제식민통치하의 한민족의 고난의 현실문제에 대한 근원적 사색의 기간이었다. 소년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청장년기(1923-1945). 일본 동경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고(1928) 모교 오산학교에 역사교사로서 부임하였다. 일본유학기간동안, 일본 무교회 성서주의자 우찌무라의 순수 종교개혁신앙에 영향을 받았고, 사상적으론 H.G. 웰스의 세계문화사,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사상, 근대 이탈리아의 민중중심의 공화정치사상가 쥬세페 마찌니의 영향을 받았다. 청장년기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김교신의 『성서조선』에 연재하고 후에 단행본으로 출판된『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50) 즉,『뜻으로 본 한국 역사』(1961)이다.

 

창조적 활동기(1946-1984). 1947년 남하한다. 그 이후 약 40년 동안 함석헌은 해방정국과 제 1, 2, 3, 4, 5공화국 시대에 ‘조선의 들사람’으로서 창조적 활동을 펼친다. 몇 차례 옥살이를 하면서 그의 사상은 심화 확장된다. 특히 민족상잔의 6∙25전쟁을 거치면서 함석헌은 제도적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노장사상, 불교사상, 힌두교 바가바드기타 경전연구, 간디연구, 생물학자 가톨릭 신부 떼이야르 드 샤르뎅의 사상을 흡수 통전시킨다. 이 기간에 무교회와 결별하고 세계 퀘이커교인이 된다. 대표적 논설문으로서「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사상계. 1958.8),「5∙16을 어떻게 볼가?」(사상계, 1961.7), 「썩어지는 씨이라야 산다」(씨의소리, 1970.4)등이 있다. 그의 방대한 사색의 결과물은 전집 30권으로 엮어져 문자로 보존되었다.

말년의 정리기(1985-1989). 세계 퀘이커연맹에 의하여 두 번이나 노벨평화상 후보자로 추천된 바 있다. 장공 김재준 목사와 함께 재야민주세력의 두 기둥이 되어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하였다(1987. 1월).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승적 입장에서 제24회 서울 올림픽 평화대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담도암으로 투병 중 소천하였다.

함석헌의 사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연구되고 조명되어야 한다. 역사철학자로서, 종교사상가로서, 시민교육과 운동가로서, 시인과 우리말 선양자로서, 생명사상가로서, 언론인으로서의 면모 등이 대표적 관점이다. 그의 다양한 모습과 업적 중에서도 본고는 그의 윤리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2. 함석헌의 윤리관

가. 사회분석
함석헌은 ‘새 윤리’라는 그의 장문(長文)의 글(「새윤리」,『새나라 꿈틀거림』(함석헌 전집 3권), pp. 15~26. )에서 당시의 사회를 윤리가 무너진 사회로 규정한다.
윤리가 무너진 사회의 증거로서 당시 통용되던 유행어 ① 냉전, ② 38선, ③ 암매매, ④ 사창(私娼), ⑤ 후원회비(혹은 헌금) 등을 제시함으로써 사회를 해부하고 새 질서, 새 윤리의 대안을 모색한다.

종래의 전쟁은 살과 살, 뼈와 뼈가 맞부딪혀 부스러지고 칼과 칼, 불과 불이 서로 섞이어 피를 흙에 반죽하는 뜨거운 것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달라져서 포화는 끝난 것 같은데 전쟁이 끝났다 할 수가 없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니 냉전이며 그 냉전은 전쟁 아닌 전쟁으로서 어디까지가 전쟁이고 어디까지가 평화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38선은 국경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 같으나 전 세계 어느 나라에나 그어져 있는 선이다. 그러나 38선은 지리적 경계선만이 아니고 사상적 경계선이다. 사상은 경계선을 그을 수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선을 그으려는 데에 모순이 있는 것이다. 사상은 어떤 무기를 가지고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암매매란 내어 놓고 매매하지 못하고 몰래한다는 말이다. 즉 정부가 묵인하는 가운데 이중적 경제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관리와 국민이 유착하여 눈가리고 아웅하는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눈가리고 아웅은 정치나 경제에만이 아니라 가장 거룩하다는 인격 관계에도 들어와 있다. 그것을 표시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사창(私娼)이라는 것이다.
본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으로 매매된다. 노동력이 매매되는 곳이 공장이요, 지식이 매매되는 곳이 학교요, 인격이 매매되는 곳이 교회요, 그리고 사랑이 매매되는 곳이 공창(公娼) 및 사창이다. 태고사회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로 성창(聖娼)이라는 것이 있었고, 후대에 와서 공창(公娼)이 있었으며 공창이 폐지됨에 따라 사창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부연 설명하고 있다.

 

후원회비는 학교에서 쓰는 말이고 헌금은 교회에서 사용하는 말로 본다. 학교에서의 후원회비 또는 사친회비, 교회에서 받는 헌금은 정말 자진해서 감사를 표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 요구금임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라고 한다. 오늘날 기성종교는 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분이며 교역자는 다 직업적 전도자인데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신앙을 소매한다면 교육자는 지식을 소매하는 격이기 때문에. 교육과 종교가 그렇게 돼서 튼튼한 국민도덕이 서 있을 리가 없으며 그것이 오늘 사회의 모순을 낳는 원인이라고 본다.

당시의 사회를 엿볼 수 있는 이상 다섯 가지의 유행어 중 냉전과 38선은 국제정치와 국내정치를 빗대어 지적하는 것이고, 암매매는 당시의 부조리한 경제생활을 꼬집는 것이며, 사창(私娼)은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것이며 후원회비 및 헌금은 교육계와 종교계의 비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함석헌은 사회와 세계를 보는 날카로운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사회의 구조적 악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명쾌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곧 새 질서, 새 정신, 새 윤리이다. 함석헌은 언제나 개혁 의지가 충일했으므로 ‘새~’,‘혁명’이라는 용어를 많이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 새 윤리 확립의 필요성
함석헌은 사회가 아무리 혼탁하고 어지럽더라도 그동안 인간사회를 붙들어 온 가장 크고 중요한 두 가지는 사유재산제와 일부일처제로 보았다. 첫 번째 것은 경제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성도덕 내지 성윤리에 관한 것이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많이 지적하는 가운데 새로운 경제윤리를, 후자와 관련해서는 그래도 일부일처제가 가장 바람직한 제도인만큼 이것을 근간으로 해서 성윤리의 재무장을 희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컨대 사유재산제의 극대화를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사실상 돈은 지상(至上)이 아니고 지하(至下)인데 임금도 왕관을 팔고 가고, 무사도 칼을 팔고 가고, 종교가도 법의를 팔고 갔다. 그리하여 돈은 온 세계를 통일한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오면서 주의할 것은 과거에 인간을 구속하던 모든 사회제도와 전통이 다 무너졌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양반∙상놈의 구별이 없어졌다. 가족제도가 깨져서 씨족 사이의 싸움이 없어졌다. 민족의 차별도 없어져간다. 도시∙농촌의 차이가 작아져간다. 돈만 있으면 어떤 학문도 기술도 예술도 빌려 쓸 수가 있다. 돈 앞에 종파도 없다. 돈이 없으면 교단은 유지해갈 수 없고, 돈을 모으기 위해 교단을 창설하고, 생활을 위해 이 종파에서 저 종파로 옮겨도 옛날처럼 무슨 제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재산을 위해서는 어제 대처승이 오늘 비구승이 되기도 하고, 돈을 많이 내면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어도 다 사함을 받는다. 예수께서 세상엔 두 임금이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든지 돈의 왕 맘몬을 섬기든지 하게 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대립을 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앞의 책, 46쪽)

“지금까지의 일부일처제가 사회생활의 한 기둥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것 아니고는 인류는 오늘의 자리에 이르지 못했을 터이요, 또 앞으로도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되는 가정을 내놓고는 깨끗한 인격을 낳을 곳을 생각할 수 없다. 이성 편만으로 생각하면 장래에 인공수태도 생각할 수 있으나, 사람은 감정이 있는 물건, 모성애 없는 곳에 인격을 생각할 수 없는데, 결혼이 아니고는 모성애는 발휘될까 의문이다. 그러하니 특별한 예외, 하늘나라를 위해 스스로 독신되는 소수를 내놓고는 대다수의 사람은 결혼을 할 터인데, 한다면 일부일처 이외에 더 바른 길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인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을 해본 결과 가장 옳은 것으로 증명이 되어서 취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동서고금을 통해 일치한다. 그러나 한편 이 제도가 점점 깨져가는 것도 사실이다. 자유사상이 늘어갈수록 그렇다. 사실 오늘의 남녀도덕의 타락은 자본주의가 가장 큰 원인이다. 지난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나 앞으로 인간은 그 제도에 반항할 것이다. 성의 윤리화, 성화(聖化), 만일 그것이 아니 된다면 모든 문화는 공중누각이다. 정치∙학문∙교육∙종교∙전쟁, 모든 문화활동의 밑에 거의 영감과 그 세력을 다툴 만큼 들어 있는 성적 동기의 미묘한 것을 어느 심리학자, 어느 역사가가 밝힐 수 있을까. 정조(貞操)야말로 인격적 생명을 꿰뚫는 원리다. 처녀가 거룩한 영으로 설어서 낳은 아들이(결혼 아니 한다는 것 아니다) 만유의 구주라는 말은 옳은 말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돕는 짝이란 것이 사탄이다.” (앞의 책, 58~59 쪽)

사회를 지탱해 주는 이 두 골격은 여전히 필요하나 너무 낡았기 때문에 새 표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낡은 시대는 나를 기른 어머니요 새 시대는 잘 자라 조화된 몸으로 정신을 차려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새것이란 결코 밖에서는 못 오고 새 정신에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고민은 새 질서를 찾자는 고민, 곧 새 정신을 붙잡자는 고민이다. 중국의 경우 오랜 기간 동안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나왔지만 결국 유교라는 한 정신적 질서를 붙잡음으로써 그것이 등골뼈가 되었다. 서양 역시 희랍∙로마∙중세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수많은 사상들이 출현했지만 결국 그리스도교라는 정신적 체계로서 그 내림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전통을 예시하는 함석헌의 의도는 우리도 우리의 정신적 근간이 되는 윤리문화를 찾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함석헌은 메타윤리학적으로 ‘倫理’라는 어휘를 풀이해 줌으로써 진정한 윤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환기해 준다.

“윤(倫)은 차례란 말이다. 윤(倫) 자에 떳떳이라는 뜻(倫常), 무리라는 뜻(倫類, 倫伍), 같다는 뜻(倫比, 倫匹, 倫等), 법칙이라는 뜻(倫紀), 차례라는 뜻(倫次, 倫字) 등 여러 가지 뜻次, 으나 그 근본은 차례라는 데서 나온 것이다. 인격관계는 단순, 일양(一樣)의 것이 아니요, 복잡다양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관계를 바로하려면 일정한 차례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곧 윤리다. 윤리란 행위의 표준인데 표준이 되려면 복잡한 것 중에 차례가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윤이요, 그 차례라는 데서 다시 줄여서 규칙이란 뜻이 된다.”
(앞의 책, 34 쪽)

moral이라 ethic이라 하는 말이 풍속이니, 관습이니 하는 뜻을 표하는 말이지만, 도덕은 사실 이런 사회생활에서 말하지 않는 동안 불문율로 된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아직 다른 단체와의 교섭으로 인해 생기는 인격의 차등이 없기 때문에 공화(共和)의 사회다. 계급이 없고, 네 것 내 것의 구별이 없다. 그 사회가 그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전체다. 그것을 표상한 것이 부족신이다.” (앞의 책)

인륜이라 할 때는 그런 뜻으로 쓴다. 사람은 인격적인 입장에서 인간의 사회관계에 질서를 주고 윤리적 사회를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파악한다. 그것을 하지 않고는 보람 있는 행동을 할 수 없다.

문화란 다른 것 아니요, 우주의 윤리화, 곧 인격화다. 문화란 말은 문(文)으로 화(化)한단 말인데 문이란, 곧 위에서 말한 윤이다. 비단에 무늬를 놓듯이 자연에 인적인 무늬, 즉 문, 다시 말하면 윤, 곧 차례를 세운 것이 문화다.

윤리는 생명적∙유기적 통일이다.

 

윤리 또는 도덕이라 할 때는 반드시 자유의지를 가지는 개인을 생각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고 더구나 양심은 타고난 것이라 할 때 그럴 수 있다. 또 차례라, 규칙이라 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제도적인 것으로 알기 쉽다. 그러나 아니다. 논리는 개인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요, 제도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논리는 차라리 전체적인 현실이다. 개인의 건강이 4백조나 넘는 세포의 현실적인 조화, 통일에 있는 것 같이 사회의 논리도 전체의 산 통일에 있다. 카펜터의 말대로 전(全, whole)이 건(建, health)이요, 거룩(holy)이다.

어지러움이란 다른 것 아니요, 전체를 잃은 것이다. 한 시대가 혼란에 빠졌다는 것은 결코 개인행동의 타락이나 어떤 제도의 깨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리어 사회가 어지러워진 결과로 오는 것이다. 어지러움은 그보다도 전체의 산 통일이 깨지는 데서 온다. 통일이 깨지는 원인은 어떤 외적 세력의 침입이나 자체의 일부분의 전횡으로 온다. 현대는 인간사회 안에 물질이 침입함으로 말미암아 또는 힘을 지나치게 숭배함으로 말미암아 인간생활 전체의 조화를 잃은 데서 오는 어지러움의 시대다.

 

다. 새 윤리의 목표
선(善)이라면 성질상 불변하는 것이어야 모든 행동의 표준이 될 것인데, 그 자체가 변한다면 그것은 선 이외에 또 다른 표준이 있는 셈이기 때문에 선이 아니 된다. 선은 이른바 지상선(至上善)이어서 그 위가 다시 없고 그 자체가 곧 모든 사물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내용적으로 말하면 고정된 지상선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물론자는 도덕률을 부인하려 한다. 그러나 모르는 말이다. 지상선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떤 상대적인 내용에 붙어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때그때 어떤 내용물을 잡아 선이 되게 하는 그 자체는 선의 내용이 늘 변할수록 엄연히 있는 것이 증거된다.

"그리하여 지상선도 내용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즉 다른 것 아니요, ‘전’(全)이라는 것이다. 통일의 목표가 되는 것은 이 전이다. 그런데 전은 아무 내용이 없다. 내용을 초과한 것이 전체다. 전은 부분을 합한 것이 아니다. 부분의 합인 내용으로서의 전은 늘 변한다. 역사가 발달되어감에 따라 사회는 점점 커진다. 그러나 그 어느 때에나 전체란 것이 사람의 모든 도덕행위의 목표가 된 것은 변함이 없다. 어떤 때는 한 집이 전체일 때가 있었다. 그때는 집을 위하는 것이 선이었다. 또 어떤 때는 나라란 것이 전체일 때가 있었다. 그때는 나라를 위하는 것이 최고선이었다. 그 때문에 지상선을 표시하는 덕목은 달라졌다. 혹은 효라 했고 충이라 했다. 그러나 그 본질에서 말하면 언제나 그때에 아는 전체가 개개인의 행동을 규율한 점에서는 다를 것 없다."(앞의 책, 36~37쪽)

전(全)이기 때문에 또 공(公)이라 한다.
공의(公義)라, 공평(公平)이라 하지만 전체를 위한 것이 공의요, 전체의 입장에서 분배한 것이 공평이다. 공(公)의 반대는 사(私)인데 사는 나다. 부분이다. 부분이 아무리 커도 부분인 이상 공은 못 된다. 이런 의미에서 다수가결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란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잃지 않은 구십구수(九十九首)보다 잃은 한 마리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지경을 표시하여 거룩(聖)이라 하는데, 위에서 말한 것 같이 그것도 하나의 뜻이 된다. whole이 holy다. 완전한 전체가 하나로 있으면 그것이 깨끗한 것, 거룩한 것이요, 전체에서 떨어지면 더러운 것이다. 때는 몸에서 떠난 살이요, 속(俗)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인간이다. 그 밖에 정신적 가치라는 진∙선∙미하는 것도 다 같은 뜻이다. 전체가 참이요, 전체가 선이요, 전체가 미다.

라. 새 윤리의 세상: 民의 세상
새 윤리는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윤리다.
그 윤리를 향하는 주인은 누구냐 하면 사람, 민이다. 이제 단순한 인간, 사람, 민(民)의 세기가 온다. 근세 이래의 인류가 당한 모든 어려움은 민 하나를 낳자는 운동이었다. 민은 제가 제 노릇을 하는 사람이다. 제가 제 주인이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짓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짓지 않았다.” 앞날의 윤리는 민의 윤리, 자유의 윤리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평화의 윤리다. 데모크라시, 즉 민의 정치는 여론의 정치다. 여론은 민, 곧 많은 나의 말이다. 인격의 소리다. 옛날 사람이 말한 민심이라, 천심이라 한 것은 내적∙외적인 구속∙유혹을 받지 않는 양심의 소리가 곧 모든 역사의 결정을 짓는 권위라는 말이다.

“민아, 민아, 네 걸음이 그렇게도 느리냐. 너를 서민이라 하고 하민(下民)이라, 우민(愚民)이라고 해서 업신여기고 학대했지. 지배자라는 그들이 너를 짜 먹고 너를 벗겨 입고 살면서도, 앉을 때는 너를 깔고 앉고, 길을 갈 땐 너를 타고 가고, 높은 데 오를 땐 네 머리를 밟고 올라가고, 놀 때는 너를 삼손처럼 모욕하며 즐겼지.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다음엔 무지막지한 것들이라고 욕하고 쓸어 구렁에 넣었지. 민아, 내가 네게 감탄하는 것은 네 힘줄은 질기고 네 마음은 그것보다 더 질겼구나. 네 생존력의 강함, 네 참을성의 무서움, 너는 마침내 왔구나. 누가 너를 이기겠느냐. 남을 괴롭게 하는 자 아래서 너는 고난을 받음으로 이겨오지 않았느냐. 네가 잘남으로 잘난 것이 아니고, 철저히 못남으로 너는 잘났구나. 너는 고난받음으로 주인됨을 배웠구나.

네가 세기의 그리스도 아니냐. 자신이 죽음으로 남을 살리는, 남을 위해 죽음으로 모든 사람 속에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너의 위대함은 네 스스로의 위대함이 아니요, 역사를 낳는 그이, 그 한 이의 위대함이다. 네 걸음이 더디다 한탄하겠느냐. 날은 속히 네 머리 위에 밝을 것이다.”
(앞의 책, 52~53쪽)

이와 같은 民에 대한 함석헌의 예찬은 제2이사야서에 나타난 고난받는 종(suffering servant)을 연상케 한다. 더 나아가 함석헌의 윤리사상은 환경, 자연, 우주에까지 확대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으로 윤리는 우주 윤리지, 인간에게만 한한 것이 아닐 것이다.… 마음대로 개척하고 정복할 것이라든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라든지, 더구나 적의나 있는듯이 하는 생각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우주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나와 하나를 이룬 한 인격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본래 사람은 우주와 하나였다. 옛적 사람은 온전한 한마음, 통일관념에서 살았다. 만유신론(萬有神論)이니, 서물숭배(庶物崇拜)니 하는 것은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의 정신이란 그러한 한마음 속에서 자라온 것이다.” (앞의 책, 54쪽)

Ⅲ.윤리-종교적 삶

가. 진보하는 종교적 삶
정치도 진보되어나가고 학문∙예술도 진보되어 나가겠지만, 그보다도 앞으로 진보할 것은 종교로 보고 이상적인 종교의 나라를 넋의 나라, 얼의 나라, 바람나라, 숨나라, 하늘나라, ‘푸뉴마’(pneuma)한 나라의 한 알 나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는 이 이상과는 반대였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날까지 인류를 이끌어온 것도 종교지만 또 못쓰게 만든 것도 종교다. 종교는 자라나는 인류에 그 순을 꺾고 줄기를 비꼬았고, 제 마음대로 걸어 보려는 그 걸음에, 발목에 고랑을 채우고, 목에 칼을 씌운 일이 많다. 그저 무지도 무섭지만 그릇된 종교 신념으로 비꼬이고 들뜬 마음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역사 위에 가장 고집스런 일을 한 것도 종교요, 가장 더러운 짓을 한 것도 종교요, 가장 끔찍한 꼴을 낸 것도 종교다. 종교는 제가 제 몸을 칼로 찢었고, 제 자식을 제 손으로 불에 던져 죽였고, 제 동무되는 사람의 염통을 따내어 점을 쳤다. 대낮에 남녀가 벌거벗고 춤을 추고 한데 붙어 음란을 하게 한 것도 종교요, 사람을 단으로 묶어 세워놓고 불을 사르고 껍데기를 벗겨 덮개를 한 것도 종교였다. 그뿐인가. 평시에는 백성을 속여 피를 빨고, 살을 긁고, 전쟁이 나면 부채질을 하고, 원시인∙바빌론∙이집트는 말할 것 없고 하나님의 사자가 세웠다고 자랑하는 가톨릭의 역사를 보면 그 지은 죄가 어느 야만, 어느 세속적 국가가 지은 것보다도 더 지독, 더 음험한 것 아닌가.” (앞의 책, 55쪽)


그런데 종교가 몹쓸게 된 것은 종교 그 자체가 아니라 종교를 가진자들의 이상심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모든 잔혹, 악독은 이상심리에서 나오는데, 그 이상심리를 일으키는 것은 종교적 자아분열이다. 오늘날도 종교적으로 열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몰상식한 일을 저지르는가 하는 것을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도덕, 사회주의, 세계평화 새 질서 운운하면서 종교에 의한 인격의 분열이라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일이다.”(앞의 책, 56쪽)

따라서 종교인들이 새롭게 태어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치∙경제∙학문∙예술로 하나되기 전에 먼저 신앙적으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의 종교를 가질 때 나라를 통일하기는 쉬운 것, 종교가 어떻게 국가 분열의 원인이 되는가를 역사가 잘 증거하고 있지 않나. 국민을 통일하는 종교가 되려면 그것은 인생을 통일하는, 인격을 통일하는, 자아를 통일하는 종교가 아니면 안 된다.” (앞의 책상, 56쪽)

아울러 종교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인들의 각성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바울은 ‘아아 나는 괴로운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죽을 몸에서 구원하랴’했지만 그것은 인류의 소리다. 영과 육의 대립, 이것이 인류 역사의 기조다. 이것을 모르고 애급∙바빌론의 문명을 알 수 없고, 이것을 생각지 않고 인도문화∙중국문화를 알 수 없다. 『사인(死人)의 서(書)』가 이것을 말하고, 조로아스터가 이것을 말하고, 『우파니샤드』,『바가바드 기타』,사서삼경이 이것을 가르친다. 모든 종교는 갈라진 심장을 고쳐 하나로 합하잔 노력이다." (앞의 책, 56쪽)

"신교자유(信敎自由)는 국법에 요구할 것이 아니고 종교에다 요구할 것이다. 모든 종교는 나밖에 다른 것은 다 이단이라 한다. 이런 생각이 종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속적인 면에서도 인류의 정력을 얼마나 쓸데없이 없애버리는지 모른다. 한 종교의 절대를 주장하는 것은 제국주의다. 한 종교에 이르는 것은 모든 종교로서만 될 일이다. 죽어 사는 십자가의 정신, 살신성인의 정신, 무위의 정신, 적멸의 정신은 제 믿는 신조에다 먼저 적용할 것이다. 하나되는 데 가장 앞서야 할 종교가 가장 떨어져서 반동적이다. 아마 인류는 옛날에 기른 양 중 가장 좋은 것을 잡아 바쳤던 것 같이 자기네가 이때껏 길러온 가장 아름다운 양심(모든 기성종교의 가장 양심적인 경건한 신자)을 눈물로 잡아 바치고야 하나님 앞에 대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 퀘이커적 삶: 평화를 위한 삶
퀘이커교는 영국과 미국 중심의 기독교 종파이지만 그것이 한국에까지 전해졌다. 장로교와 감리교가 우세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여타의 군소교파가 착근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의 대표적 지성인이라 할 수 있는 함석헌이 퀘이커교를 만나 그것을 깊이 이해하고 몸소 실천하였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함석헌 자신은 퀘이커교에 대하여 흥미를 갖게 된 것이 1947년부터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이전 일본에 있을 적에 퀘이커와 접촉한 사실이 있다. 그는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그 때부터 퀘이커를 다 알게 됐지요. 그 때 나는 우찌무라와 니도베와 함께 퀘이커 모임에 갔었는데 우찌무라는 무교회주의자가 되었고 니도베는 퀘이커가 되었어요. 함석헌, “퀘이커와 평화사상”,『함석헌 전집』3, 서울: 한길사, 1983, p. 168.

어떻든 함석헌은 1947년부터 퀘이커에 대해 관심을 갖고, 1960년부터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다가, 1962년 미국에 건너가 퀘이커교의 성인(成人) 교육 기관인 필라델피아의 펜들 힐(Pendle Hill)에서 7개월 동안 명상과 퀘이커에 대한 연구를 하는 등 퀘이커와 밀접한 관련을 가져오던 중 제 4차 세계 퀘이커대회가 개최된 1967년에는 정식으로 회원이 되었다. 회원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함석헌에게 비친 퀘이커의 매력은 브린튼이 지적한 세 가지, 즉 보편성, 단순성, 평화주의였을 것이다. 브린튼의 말을 직접 음미해보자.

퀘이커교가 마음을 끄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어느 정도 종교적 도덕적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보편성 때문이요, 또 그 평화주의 때문입니다. Howard H. Brinton, Friends for 300 Years ; 함석헌 역, “퀘이커 300년”,『함석헌 전집』15, 서울: 한길사, 1986, p. 94. 한국판 서문.


김경재도 브린튼과 흡사한 서술을 하고 있다.

"함석헌이 퀘이커에 들어가게 된 까닭은 퀘이커 사상은 모든 인간 속에 하느님의 거룩한 빛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강조하는 점, 그리고 모든 허례허식과 신학적인 추상론을 배제하는 신앙과 삶의 단순성과 간결성, 평등, 박애사상과 평화사상 등이 그가 일생 추구해 왔던 신앙의 유형과 체질에 가장 알맞았기 때문이었다. 김경재, “함석헌의 종교사상과 역사관”,『씨알들의 믿음과 삶』, 서울: 나눔사, 1990, pp. 80~81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함석헌은 퀘이커로부터 어떤 사상을 영향 받았을까? 함석헌은 펜들 힐에 머물면서 브린튼의 『퀘이커 300년』(Friends for 300 Years, 1964)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을 공동체에 관한 이론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천재, 영웅, 이상, 로맨티시즘, 개인, 예언자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잘났어도, 아무리 못났어도 개인의 뒤에는 늘 전체가 있어서 그 하나하나의 행동과 사상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나만 아니라 넓게 말하면 오늘날 되어 있는 종교가 다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퀘이커들이 말하는 단체적 신비주의는 깊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Howard H. Brinton, Friends for 300 Years ; 함석헌 역, “퀘이커 300년,”『함석헌 전집』15, 서울: 한길사, 1986, p. 357, 역자의 말


함석헌은 동양의 신비주의와 서양의 신비주의(퀘이커 신비주의)의 명상법이 개인이냐 단체냐에 따라 상이하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퀘이커들은 하느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 명상을 한다고 그러지요. 그들의 명상은 동양 것과 다릅니다.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고 단체적인 명상이니까 2~3명에서부터 수백명에 이르기까지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인데, 현대적으로 볼 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개인주의가 아니니까. 동양의 명상은 옆 사람이 참석을 해도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이지요. 함석헌, “퀘이커와 평화사상”,『함석헌 전집』3, 서울: 한길사, 1983, p. 162.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함석헌이 공감했던 것은 단체적 신비주의 뿐만 아니라 윤리적 신비주의(ethical mysticism)였다. 윤리적 신비주의란 신비체험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그치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인 수평적인 윤리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현시되는 신비주의를 말한다.

함석헌이 윤리적 신비주의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œ실œ옮기려고 노력한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지만 그것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지대같지는 않다. 그러나 퀘이커교가 어디까지나 신비주의라는 것을 강조했으며, 그 신비주의는 타신비주의와는 다르게 상식주의가 가미된 것이라는 것을 다음짼대같이 환기하였다.

퀘이커는 신비주의와 상식주의를 둘 다 경험해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종교에서 문제되는 것의 하나는 신비주의입니다. 퀘이커 발생초기에 있어서는 신비주의가 상당히 강했다면 강했던 듯합니다. 함석헌, “예배모임의 뜻”, 함석헌 외(外),『현대의 선(禪)과 퀘이커 신앙』, 서울: 삼민사, 1985, p. 61.

함석헌은 퀘이커교의 신비주의적 성격에 매료되었으며, 그 다음으로는 평화사상에 공감하여 그것에 적극 가담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비주의가 이론적인 것이라면 평화사상은 실천적인 문제로서 함석헌은 이 양자를 불가분리의 관계로 설정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은 가톨릭과 개신교가 전쟁을 묵인하는 데 반해 퀘이커는 그것을 적극반대하고, 심지어 적국이라 할지라도 그 적국이 어려움에 직면할 경우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넋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따라서 함석헌이 평화를 위해 몸소 헌신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함석헌은 한국인의 심성을 계몽하기 위해 많은 글을 썼고 강연을 했으며 민주화를 위해 독재 군부에 맞서 싸웠다. 예컨대 함석헌의 씨알사상(민중사상)은 이미 퀘이커교에서 가르쳐 온 “모든 사람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것”(that of God in every man)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충분히 갖게 한다.

안병무는 함석헌의 평화사상을 네 가지로 특징짓고 있다.
첫째, 그의 평화 의식의 출발은 전체의식에 있으며; 둘째, 그의 평화사상은 종교적 신념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셋째, 한국의 평화는 곧 세계 평화에 직결된다고 보아서 평화사상의 한국적 이해를 도모하며; 넷째, 평화운동의 주역은 유약하고 무능하며 이름 없이 음지에서 고난받는 민중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안병무, “함석헌의 평화사상”, 『과학기술혁명과 한국사회 갈등』, 서울: 한길사, 1991, p. 5.

퀘이커 사상이 함석헌에게 매력으로 비치는 것 한 가지를 더 부연한다면 아마 그들의 관용성 내지는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일 것이다. 다음의 내용은 함석헌이 바라본 퀘이커 교도들에 대한 시각의 일면이다.

그들은 아주 넓은 마음으로 누구나 용납한다. 퀘이커교 안에는 별별 사람이 다 있다. 기본 신앙의 극단적인 보수주의로부터 유니테리언, 불교도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다 있다. Howard H. Brinton, Friends for 300 Years ; 함석헌 역, “퀘이커 300년”,『함석헌 전집』15, 서울: 한길사, 1986, p. 354, 역자의 말

퀘이커교가 정작 이런 것이라면 퀘이커교는 최근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배타주의나 포괄주의와 차별성을 갖게 되며, 어떤 특정 교의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열려 있는 점은 현대 철학에서 각광을 받고 있는 과정 철학(process philosophy)이나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의 선구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종교의 역사를 3기로 보는 함석헌의 종교사관에 비추어 볼 때 퀘이커는 분명히 제3기에 속하는 현대적 종교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제1기는 맹목적 의지의 종교시대, 제2기는 감정의 종교시대, 제3기는 이지(理智)의 종교시대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퀘이커교를 최종적 현대 종교로 보고 거기에 만족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Pendle Hill의 명상”에 나타난 그의 고백은 퀘이커를 넘어서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나는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내 임이 다섯입니다. 고유종교, 유교, 불교, 장로교, 또 무교회교,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내 영혼의 주인일 수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같이 있는 퀘이커도 내 영혼의 주는 아닙니다. 함석헌, “펜들 힐의 명상”,『함석헌 전집』3, 서울: 한길사, 1983, p. 318.

함석헌이 ‘새 종교론’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퀘이커를 넘어섰거나 극복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소 막연하긴 하지만 그가 기대하는 ‘새 종교’의 세 가지 요건은 첫째, 하나 되는 종교; 둘째, 합리적인 종교; 셋째, 뚫려 비치는 종교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 비추어 함석헌의 종교사상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장로교에서 시작하여 무교회 신앙으로, 무교회 신앙에서 퀘이커 신앙으로 무한히 뻗어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함석헌에게는 정녕 퀘이커도 마지막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퀘이커에서 다른 그 무엇을 지향하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아무튼 함석헌에게서는 종교적 천재성이 엿보인다. 김경재는 종교 사상가로서의 함석헌의 위대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개신교 역사 100년 만에 함석헌이라는 정신의 최고봉에 도달한 종교사상가를 한국 근대사는 배출하였다. 그는 한국 개신교 100년이 낳은 최고의 종교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동양 종교사상을 한 몸 안에 융섭한 위대한 혼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고 궁금해 할 온 세계 종교학자들과 사상가들이 연구해 볼 하나의 진주와 같다. 왜냐하면 함석헌이라는 한 큰 마음 안에서 동과 서가 만나고,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고, 노장의 자연주의와 성서적 자연주의가 만나고, 종교적 신비주의와 합리적 과학주의가 만나고 있는데 단순한 병존이나 갈등이나 천박한 습합(習合)이 아니라 인류 미래 종교의 어떤 방향을 암시하는 실증적 범례를 만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김경재, “함석헌의 종교 사상”, 『씨의 소리』100호(1989. 4), p. 58.

이처럼 함석헌은 인간혼의 깊이와 인간 내면성의 영성결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이 김경재의 주장이다. 함석헌을 신비주의자가 아니라고 갑작스럽게 국면 전환을 하고 있는 김경재의 주장이 궁금하다.

4.맺는 말

 

함석헌의 일생은 종교적인 일생이었다. 물론 그의 종교생활의 근간은 프로테스탄트(장로교, 무교회신앙, 퀘이커신앙)였지만 동양의 노장사상, 유교, 불교, 힌두교 등이 가미되어 동∙서양 사상이 그의 사상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여느 배타적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종교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종교다원주의가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함석헌은 이에 앞서 이미 종교다원주의적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종교적 삶은 제의적, 신화적, 초월적인 것 등 聖의 영역에만 역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세속적 민중들의 삶과 국내적∙국제적으로 정의, 생명, 평화를 온통 지향하고 있는 윤리적 삶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삶에 있어서 종교와 윤리, 성(聖)과 속(俗)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개인윤리, 사회윤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였으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환경과 생태문제, 인권의 문제, 국가의 윤리, 세계의 윤리, 심지어 우주의 윤리까지를 운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폭넓은 윤리 사상은 요즘 국내외 윤리학자들이 다루고 있는 모든 문제를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그는 단지 종교사상가에 머물지 않고 윤리학자였으며 미래를 보는 선견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그는 국제 퀘이커 사회에서 성자로 추앙되고 세계의 철학자들이 주목하는 현대 한국이 낳은 철학자인 것이다.(2011.4.30, 김영태
, 끝)

김영태 교수는
종교윤리 전공하였으며 종교분야 연구자임. 전남대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재직(1981~2010), 현재 함석헌학회 이사이며, 한국윤리학회 회장을 맡고 있음. 그 동안 한국종교문화학회 공동대표, 종교문화연구소장 등을 지내면서 윤리학 연구 및 종교간 대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쳐왔음.

그의 저서로는 「John Hick의 종교철학」, 「퀘이커 신비주의에 관한 연구」, 「미국 실용주의의 종교관」, 「칸트의 도덕종교론에 대한 신학적 고찰」 등이 있음. /함석헌평화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