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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자크 랑시에르(오른쪽)와 최정우씨(왼쪽)의 대담이 12월2일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있었다. |
자크 랑시에르를 접할 때 사람들은 개인의 지적 배경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는 사회에서 통용되던 언어를 새롭게 사유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끌어낸 그의 이론은 기존 사상적 영역을 넘나들고 개개인의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단순히 미와 예술에 대한 이론이나 학문이 아니다. 그는 “회화·연극 등 예술적 실천과 그 생산물들은 사실 ‘무엇이 감각되고 지각될 수 있는가’ 하는 사회적 분배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즉, 미학은 정치와 밀접하다.
2008년의 마지막 달, 한국을 방문한 독특한 철학자 랑시에르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번 대담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다. 한국 민주주의 현실에 대한 진단이나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언해달라고 부탁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담자로 나선 최정우씨는 “한국 상황에 기본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는 랑시에르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다분히 일반론적 언급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대담은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기본 논의를 최대한 잘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현실에 대한 사유와 판단은 ‘독자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최정우(최):당신은 합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안전한’ 관념을 비판하고 불화와 불일치를 민주주의와 정치의 근본 조건으로 강조한다. 당신이 비판하고 있는 합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자크 랑시에르(랑시에르): 소련 붕괴 이후의 민주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주주의를 국가 형태 자체와 동일시하려는 경향’이다. 즉, 국가의 형태나 정부의 체제나, 자유시장, 소비사회, 자유로운 개인의 삶 등과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이러한 것과 전혀 관계 없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인구 집단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특정한 국가의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민주주의란 단절과 틈을 가져오는 일종의 불일치 과정이다. 내가 민주주의에서 합의 대신 불화와 불일치를 강조하는 것은, 단지 민주주의가 다양한 의견의 갈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합의라는 관념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사회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똑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다. 곧, 합의에 의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일종의 ‘객관적 필연성’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민주주의란, 그리고 정치란 불화의 지점이며 그러한 불일치들이 발현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최:당신의 ‘미학’ 또는 ‘감성학’의 개념에 관심이 많다. 나는 당신이 ‘미학’의 개념을 새롭게 사유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을 높이 평가한다. 당신은 미학을 하나의 체제라 보는데, 이런 관점은 넓게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론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랑시에르:미학은 서양 근대에 출현한 새로운 예술철학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좀더 일반적인 층위에서 ‘감각이나 지각을 분배하는 하나의 정치적 체제’를 의미한다. 내가 생각하는 미학이란 무엇보다 이러한 ‘감각적인 것의 분배’와 관련 있다. 미학은 단순히 미와 예술에 대한 이론이나 학문이 아니다. 회화·연극 등 예술적 실천과 그 생산물은 사실 무엇이 감각되고 지각될 수 있는가 하는 사회적 분배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 미학은 볼 수 있는 것, 들을 수 있는 것 등의 감각적 경험을 분배하고 해석하는 하나의 체제로서 존재한다.
과거의 재현 중심 체제 안에서 중요했던 것은 예술의 창작과 예술의 감상 사이의 분리, 예술적 생산물과 그러한 예술에 대한 수용 사이의 분리였다. 내가 생각하는 미학은 또한 이러한 확정적인 분리와 이러한 분리가 만들어낸 예술의 자율성을 문제 삼는다. 미학이란 이러한 분리의 지점 위에 있는 이름이다. 이러한 미학적 체제 안에서 작가가 만드는 예술품과 그것을 수용하고 경험하는 관객 사이의 분리, 예술품을 여타의 다른 대상들과는 다른 자율적인 것으로 만드는 분리는 사라진다.
최:한국어 ‘미학’은 그 의미상 단순히 ‘미에 대한 학문’을 뜻하는데, 나를 포함한 많은 번역자들은 당신의 논의가 강조하고 있는 지점을 따라서, 이 ‘미학’이라는 번역어를 그 어원과 정치적 함의에 충실하게 ‘감성학’ 또는 ‘감성론’이라는 번역어로 치환하고자 노력한다. <미학 내에서의 불만>이라는 책에서 당신은 미학과 정치의 윤리적 전회를 다루기도 했다. 당신이 이 ‘미학’이라는 용어를 일종의 정치 범주로 사유하고자 시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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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자크 랑시에르(68)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였던 그는 1965년 출간된 <자본 읽기>의 공동저자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68혁명이후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면서 독자적인 사유의 길을 걷는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치철학·미학·역사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시각을 담은 일련의 저작을 출간했다. 한국에서 올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감성의 분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번역 출간되었다. 그의 주저인 <불화> <무지한 스승> 등은 번역 중이다. 이번 랑시에르의 방한은 도서출판b, 길, 궁리의 초청과 주한 프랑스문화원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
랑시에르:그렇다. 나는 미학을 ‘동일시’의 체제로 이해한다. 미학적 경험은 예술의 제작과는 다르다. 내가 미학을 하나의 체제로 다루면서 예술의 제작을 의미하는 포이에시스(poiesis)와 그에 대한 감각을 의미하는 아이스테시스(aisthesis) 사이의 분리와 차이에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감성적 경험은 예술작품의 영역을 넘어선다. 따라서 내게 미학의 문제는 철학적 논의로부터 예술 또는 예술적 경험을 분리시키거나 해방시키는 데 있지 않다.
나에게 미학은 정치적 잠재성의 영역이다. 예술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거나 자율적인 실천이 아니다. 미학의 문제는 내게 언제나 정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미학에 대한 나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합의와 불화에 대한 논의에 기초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또한 내가 강조하는 개념이 바로 ‘감각적인 것의 분배’다. 이는 감각적 경험들, 곧 볼 수 있는 것, 말할 수 있는 것,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분배하는가 하는 문제, 곧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다. 여기에는 항상 불화와 긴장이 존재한다. 미학에 대한 사유란 내게 이러한 긴장들이 지닌 논리를 사유하고자 하는 시도를 의미한다.
최:그런 의미에서 미학에 대한 당신의 새로운 생각은 ‘정치적 전복’과 연결된다. ‘감각적인 것의 분배’는 당신의 이론적 작업 안에서 중심이 되고, 불가능성·이질성 등과 밀접하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미학의 개념을 근대 철학의 개념과 연결시키지만 당신은 ‘미학’을 ‘정치’와 마찬가지로 희랍적 어원에 관련해 분석하면서 그 의미에 대해 새롭게 사유하려 한다. 이런 작업이 당신의 이론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랑시에르:서양 철학은 언제나 그리스를 참고한다. 따라서 희랍적 개념들을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며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참고하는 이유는 로고스, 데모스, 통치 따위 개념을 그 어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그러한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거쳐온 분절에 관해 새롭게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정치란 로고스를 가진 자들의 통치, 곧 어떤 자격과 능력이 있는 자들의 통치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념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하고자 한다. 많은 논자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정치란 단순히 언어나 소통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이 없는 자들의 통치, 곧 평등 그 자체를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전제로 이해하는 정치적 사유를 말한다.
최:정치에 대한 당신의 접근 방식은,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알다시피 2008년 한국에서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러한 촛불집회에 비판적이었던 한 정치인은 이를 ‘천민민주주의’라는 신조어로 표현하기도 했다. 대의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그 정치인 스스로가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이 내게는 적잖이 충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느끼는 바나 몇 가지 첨언할 수 있는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랑시에르: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단순히 그 문제와 관련된 전문가들만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정체성을 지닌 전문가 집단이나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무개·모든 이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공공 건강의 문제, 곧 공적 영역의 문제다. 정치적 주체화는 이렇듯 특정한 이슈로부터 시작해 그것을 공공의 이슈로 만들어내는 과정 안에서 발생한다. 정치적 주체는 특정한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에 의해서 미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주체화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인민의 힘은 인민의 힘없음으로부터 출현하며, 이렇듯 몫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는 과정 속에 정치적 주체화의 과정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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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 대담자로 나선 최정우씨(위)는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불문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동시에 번역가이자 작곡가로 활동한다. 그는 이번 대담의 핵심 내용으로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꼽았다. |
최:내가 과거 당신의 저작을 처음으로 접했던 것은 당신이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이었을 때의 글 <비판의 개념>이었다. 최근 정치와 미학에 대한 당신의 논의는 그러한 과거에 비해 매우 새롭고 이질적인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당신의 이론적 여정에 일종의 이론적 ‘단절’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가?
랑시에르:알튀세르는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이데올로기론과 그에 따른 해방에 관한 담론에 중점을 두었다. 기본적으로 알튀세르는 지배가 무엇이고 착취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노동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교사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나에게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쓰고 사유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람시에게 중요한 것이 상이한 정체성들 간의 헤게모니 문제였다면, 정치에 대한 나의 사유 안에서는 노동자 운동과, 노동자가 지닌 정체성의 문제, 프롤레타리아적 정체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최:그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밤>은 당신의 이론적 여정 안에서도 일종의 전환점을 이루면서 매우 각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듯하다. 노동자의 문서고, 곧 그들이 직접 쓴 기록들에 천착하는 작업은 여전히 중요하고 신선한 문제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주노동자 문제가 사회적으로 부각된 지 오래이다.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주는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가?
랑시에르:자전적인 글 또는 대중·인민의 문화에 대한 글 등 이른바 노동자 문학 혹은 노동자들의 글쓰기는 그들만의 목소리가 표현되는 영역이다. 이러한 목소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내게 매우 중요했다. 합의에 기초한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구성원이 모두 똑같은 목소리와 똑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만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과 그들의 목소리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는 불화와 불일치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도 특히나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