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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프랑스 철학 거장’ 자크 랑시에르에게 듣다(한겨레20081202)

by 마리산인1324 2010. 8. 5.

<한겨레신문> 2008-12-02 오후 06:44:54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5246.html

 

 

자크 랑시에르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새 정치의 희망”
‘프랑스 철학 거장’ 자크 랑시에르에게 듣다
한겨레 이세영 기자 
» 자크 랑시에르(68)
대담자 진태원 고려대 교수
 

지난주 한국을 찾은 자크 랑시에르(68) 파리8대학 명예교수는 정치와 평등, 민주주의에 관한 독창적 사유로 주목받는 프랑스 철학계의 거목이다. 그는 1일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철학)와의 대담에서 “진정한 정치는 사회에서 주변화되고 배제됐던 사람들이 새로운 통치 주체로 참여하는 과정”이라며 “경제위기로 삶의 불안이 심화하는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삶의 불안정화에 맞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운동이야말로 한계에 직면한 조직 노동운동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의 희망”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대담은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진정한 정치는 배제된 사람들이 통치주체로 참여하는 것
촛불 참가자들 생명 이슈 정치적으로 만든 진정한 ‘인민’

 

진태원(이하 진)=지구상의 모든 정부가 민주정부를 표방하면서, 민주주의는 어느 순간 진부한 것이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사람들은 대의제와 인권을 민주주의의 핵심요소로 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민주주의는 인민이 가진 권력 자체다. 그것은 (국회의원처럼) 인민의 대표를 자임하는 자들이나, 사회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은 집단들이 행사하는 권력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대의제를 통해 인민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기성의 시스템을 넘어서려는 힘이며, 배제되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정치적 주체가 돼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상치 못했던 시간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주체들이 공적인 문제들을 결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진=최근 한국에도 출간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란 책에서 당신은 ‘치안’과 ‘정치’를 엄격히 구분한다. 그 차이는 어떤 것인가.

 

랑시에르=사실 그 개념들은 정치에 대한 기존의 관념들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임시방편으로 사용했던 것들이다. 사람들은 보통 정치를 ‘국가가 사회를 경영·관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나는 이것을 정치가 아닌 치안이라고 본다. 치안은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고정된 자리와 정체성을 배분하는 작업이다. 이런 치안의 논리를 문제삼고, 여기에 새로운 집단성을 개입시키는 활동이 정치다. 말하자면 정치는 부·지식·가문 같은 자산의 크기에 따라 사회를 분할하는 치안 논리에 맞서, 어느 누구나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고, 그 능력을 가지고 통치과정에 참여하게 만드는 활동이다.

 

» 자크 랑시에르 파리8대학 명예교수와 진태원 고대교수의 좌담. 김경호기자
진=당신의 사상에서는 데모스(demos), 인민(people)이란 개념이 중요하다. 지난여름 한국에서는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졌다. 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당신이 얘기하는 인민인가.

 

랑시에르=내가 말하는 인민이란 주민의 총합이 아니라, 어떤 사건을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고 투쟁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생각하듯 정치적인 것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란 정치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문제조차 정치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집단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건강처럼 비정치적인 것으로 보이는 문제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온 한국인들은 진정한 의미의 인민이었다.

 

진=수입 철회 조처가 없었음에도, 대통령이 나서 사과한 뒤 촛불시위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시위가 가라앉자 정부는 주동자를 구속했고 사과 자체를 부정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촛불시위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불평한다.

 

랑시에르=운동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려면 처음 내걸었던 요구가 충족됐는지, 또 사회적 세력관계가 운동을 통해 변화했는지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2006년 프랑스에서는 정부의 최초 고용계약제(CPE)에 반대하는 시위가 장기간 지속됐다. 정부가 결국 정책안을 철회했지만, 과연 이 시위가 성공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문제는 정부가 양보한 뒤 거리의 정치공간은 닫혔고, 운동은 무장해제됐다는 점이다. 요구안의 즉각적 성취를 넘어, 사회의 독점적 합의체제에 얼마나 균열을 일으켰는지가 중요하다.

 

진=세계적 경제위기는 전체 노동자의 50%를 넘어선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당신의 민주주의론이 비정규직 노동을 포함한 사회문제를 새롭게 사고하는 데 실마리가 될 수 있을까.

 

랑시에르=비정규직 노동은 한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보호 시스템이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 없이 노동자의 신분은 전반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있다.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역할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런데 조직 노동운동처럼 동질적 계급 이해에 기반한 운동은 쇠퇴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네그리같은 학자는 ‘비물질노동’이란 개념을 통해 정규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않은 서비스·비정규직 노동자 집단의 존재에 주목하기도 한다. 민주주의의 확장이란 차원에서도 지금의 시스템에서 일정한 권력 지분을 갖고 있는 전통 노동운동보다, 주변화되고 배제된 이 노동자들을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하는 일을 고민해야 한다.

 

진=이 과정에서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랑시에르=주어진 정체성에서 벗어나는 ‘탈정체화’를 정치의 출발로 규정한다면,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사실상 없다. 지식인들은 주어진 자리를 분배하는 데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인/비지식인, 전문가/비전문가, 전공자/비전공자의 구분과 차별을 깨뜨리는 것이다.

 

정리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