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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 40호 (2009년 9월 10일)

 

 

 

선과 하이데거의 현존재

[40호] 2009년 09월 10일 (목) 이승훈 leeshun@hanyang.ac.kr

1. 왜 하이데거인가?

나는 철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선불교(禪佛敎)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다. 특히 철학 가운데서도 하이데거의 철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고 이런 난해성은 그의 사유와 관계된다. 요컨대 그의 사유는 내가 읽은 바로는 사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유이고 사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사유이고 따라서 사유의 모험이고 모험의 사유이다. 이런 사유는 전통적 언어나 논리를 거부하고 초월한다는 점에서 난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하이데거에 매혹되는 것은 이런 사유의 새로움, 모험, 신비 때문이고 특히 그가 평생을 두고 질문한 존재의 문제는 평생을 두고 시를 써오면서 내가 싸운 자아의 문제와 통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존재하는 나는 과연 무엇인가? 최근엔 많이 달라졌지만 그동안 시를 쓰면서 나를 사로잡은 화두 역시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다음은 필자의 〈우리들의 밤〉 전문.

꿈이란 무엇이며/ 어둠이란 무엇이며/ 혁명이란 무엇인가/ 비 내리는 밤/ 비 내리는 밤이란 무엇인가/ 쓸쓸한 사람 곁에 누워 있는/ 비쩍 마른 나는 무엇이며/ 흘러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비 내리는 밤/ 문득 들리는 내 가슴의 / 시냇물 소리란 무엇이며/ 치욕이란 무엇이며/ 추위란 무엇이며/ 생활이란 무엇인가/―중략―/ 어둠 속에 잠시 타오르는/ 불빛 불빛 같은 것/ 그런 게/ 모두 무엇인가?

존재에 대한 물음은 나에 대한 물음이고 나에 대한 물음은 꿈, 어둠, 혁명, 비와 관련되고 흐름에 대한 물음을 낳는다. 흐름은 시간이므로 나에 대한 물음은 시간에 대한 물음이고 시간 속에서 내가 읽는 건 다시 감정, 치욕, 추위, 생활이고 모두 잠시 타오르는 불빛이다. 이 불빛은 무엇인가? 존재에 대한 물음은 ‘나는 있다’에서 ‘있다’ ‘있음’ ‘존재’에 대한 물음, 곧 나를 있게 한, 존재케 한 근거에 대한 물음이지만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에 대한 물음은 세상에 대한 물음이고 인간만이 이 세상에 대해 묻고 존재에 대해 묻는다.

 

어떻게 묻는가? 많은 철학자들은 존재에 대해 묻지 않고 존재하는 것, 이른바 존재자에 대해 묻고 그때 그들이 강조하는 것은 존재자들의 기원, 본질, 토대이다. 예컨대 플라톤에 의하면 존재자의 세계, 곧 현상을 지배하는 것은 순수 관념에 해당하는 이데아이다. 그러나 이런 이데아의 세계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자를 전제로 하는 본질 찾기이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의하면 플라톤 이래의 전통적인 서양 철학은 존재 망각의 철학이고 참된 존재론이 아니라 존재적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적(ontic) 사유는 존재하는 것들, 곧 존재자를 존재라는 원초적 사태와 무관하게 고찰하고 존재론적(ontological) 사유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초점을 둔다. 존재적 사유는 나와 존재자, 주체와 대상 사이에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주체/ 대상 사이에 틈이 생기고 따라서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인식, 통일적 인식에 실패한다. 서양 철학은 존재자를 지향하는 사유, 존재자의 근거, 원리 찾기이고 따라서 주체와 대상 사이에 틈이 생기고 하이데거와 선은 이 틈을 지향한다. 그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와 선적 인식은 이성, 사유, 지식을 매개로 하지 앉는 무매개적 사유, 곧 직관을 강조한다.

 

요컨대 존재적 사유는 주체가 세계와 거리를 두고 세계를 바라보는 사유이고 하이데거가 비판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유이다. 그는 세계와 거리를 두는 게 아니라 세계 속에서 세계를 보는 이른바 세계―내―존재를 강조한다. 이때 나는 주체가 아니고 세계는 대상이 아니다. 나는 세계의 부분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나는 오온(五蘊)이다. 내가 있는 게 아니라 색(色, 땅, 물, 불, 바람) 수(受, 감각) 상(想, 표상) 행(行, 의지) 식(識, 마음)이 있다. 요컨대 나는 물질이든 정신이든 세계와 독립된 주체, 자아, 나가 아니다.

 

나는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세계 속에 존재하며 세계를 본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1927)에서 탐구한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이고 이런 탐구는 세계―내―존재의 시각에서 진행된다. 물론 이 책은 미완성으로 출판된다. 내가 이 책에 관심을 두는 것은 존재 찾기, 곧 ‘존재가 나를 통해 드러나는 방식’을 살피기 위해서이고 이런 방식이 선불교와 통하기 때문이다. 선(禪)이 강조하는 것도 진정한 나, 불성 찾기이고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도 진정한 나, 존재 찾기이다.

 

이 세계엔 나도 있고, 나무도 있고, 책상도 있고, 너도 있다. 이 세계엔 이런 존재자들이 있지만 있음,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나는 있다’에서 ‘나’는 존재자이고 ‘있다’는 존재이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존재자이다. 그렇다면 존재는 어디 있는가? 물론 하이데거는 이렇게 존재하는 인간은 존재자가 아니라 현존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인간도 존재자에 포함시키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있는 건 ‘나’이지 ‘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음, 존재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 있는 건 존재하는 나, ‘존재자’이지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가 없다면 우리는 존재를 알 수 없다. 다시 생각하자. 여기 나무가 있다. 있는 건 ‘나무’이지 ‘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음’ ‘존재’는 없다. 그러나 존재가 없다면 존재하는 것, 존재자도 없고 존재자를 존재자로 서게 하는 존재도 알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존재에 대한 질문은 대답이 불가능하고 이 불가능과 하나가 될 때, 그러니까 질문 자체가 대답이 될 때 우리는 존재와 만나고 선에서 말하는 진정한 나, 불성과 만난다. 그러나 불성은 마음이고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존재와 선불교에서 말하는 마음, 불성, 진아(眞我)를 비슷한 문맥에서 읽는다. 하이데거나 선이나 강조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순수한 경탄이고 이 경탄이 공(空)과 통한다.


2. 현존재와 중생

존재적 사유는 존재자(Seiende)를 대상으로 하고 존재론적 사유는 존재(Sein)을 대상으로 한다. 다시 생각하자. 과연 존재자는 무엇이고 존재는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다음처럼 말한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정하고 있는 바로 그것, 존재자가 각각 이미 그렇게 이해되는 바로 그것이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 ~~존재는 ~~존재자의 발견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나름의 고유한 제시의 양식을 요구한다.~존재는 있다는 사실과 그리 있음, 실재, 눈앞에 있음, 존립, 타당함, 지금 여기 있음, ‘주어져 있음’에 놓여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20-21.

존재는 존재자를 규정한다. 그러니까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것. 예컨대 ‘하늘은 푸르다’는 문장은 푸른 하늘(존재자)에 대해 말한다. 이때 ‘하늘이 푸르다’는 것(존재자)은 주어와 서술어의 형식으로 드러나고 ‘푸르다’는 서술어는 주어를 서술하고 규정한다. ‘푸르다’는 서술어는 ‘하얗다’, ‘붉다’ ‘흐리다’ ‘맑다’ 등 다양한 규정을 가능케 하는, 그러니까 다양한 존재자가 존재할 수 있는 지평에 해당한다. 요컨대 이상의 여러 서술어는 하늘을 이해할 수 있는 지평, 이른바 이해 지평에 속하고 따라서 열린 공간이 된다. ‘푸르다’는 서술어에 의해 ‘하늘’은 ‘푸른 하늘(존재자)’로 규정된다. 그렇다면 서술어가 존재인가?

 

다시 생각하자.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겅하는 바로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라? 바로 그것은 어디 있는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각각 이미 그렇게 이해되는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정의에 의하면 서술어 ‘푸르다’는 ‘푸른 하늘(존재자)’이 이미 푸른 하늘로 이해되는 이해 지평이고 이 지평에서 존재자는 존재자로 존재한다. 앞에서 나는 존재자는 눈에 보이지만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존재자는 있고 존재는 없다. 그러나 존재가 없다면 존재자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자를 존재자로 규정하는 바로 그것, 존재는 있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에서는 ‘그것이 존재를 준다’는 말로 변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의 전기 철학, 특히 ‘존재와 시간’을 대상으로 존재에 대해 살피는 중이다. 그가 말하는 바로 그것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 존재는 눈앞에 있음, 지금 여기 있음, 주어져 있음에 놓인다. 무슨 말인가? 예컨대 ‘나는 있다’는 문장을 살펴보자. 이 문장은 ‘하늘이 푸르다’처럼 주어와 서술어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서술어가 존재자를 규정하는 방식엔 미세한 차이가 있다. 후자는 ‘푸른 하늘(존재자)’을 규정하고 전자는 ‘있는 나(존재자)’를 규정한다. 물론 푸른 하늘도 있고 있는 나도 있다. 푸른 하늘은 서술어 ‘푸르다’가 규정하고 ‘있는 나’는 서술어 ‘있다’가 규정한다. 그러나 ‘있다’ ‘있음’ ‘존재’는 어디 있는가? 나는 있지만 나는 있음을 보는 게 아니라 ‘있는 나’를 보고(?) 있음, 존재는 이미 주어져 있다. 그러므로 존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평이고 열린 공간이고 주어져 있음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이외의 존재자이다. 그는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자를 현존재(Dasein)라고 부르고 다시 도구사물과 관찰사물로 구분한다. 소광희 교수는 도구 대상을 용재자(用材者), 관찰 대상을 전재자(前在者)로 번역하고 이 두 가지 존재자는 현존재의 태도와 관련된다. 예컨대 같은 ‘망치’라도 내가 도구로 사용하면 도구사물이 되고 단순한 관찰의 대상일 때는 관찰사물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존재다. 다음은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말.

이러한 존재자, 즉 우리 자신이 각기 그것이며 여러 다른 것들 중 물음이라는 존재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존재자를 우리는 현존재라는 용어로 파악하기로 하자.
―하이데거, 위의 책, 22.

인간은 현존재이고 현존재는 지금 여기(Da) 있는 존재(Sein)로 인간만이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다른 존재자들은 그것을 모른다. 한편 현존재의 현(現)에는 나타난다는 뜻도 있다. 다자인(Dasein)도 그렇고 현존재도 그렇고 결국 현존재는 지금 여기 있는 존재이고 존재가 나타나야 할 존재, 혹은 존재를 나타내야 할 존재이다. 그러므로 Da(sein)이고 현(존재)이다. 자인은 다를 지향하고 존재는 현을 지향한다.

 

 다자인 속엔 자인이 은폐되고 현존재 속엔 존재가 은폐된 구조이다. 따라서 현존재가 할 일은 이렇게 숨어 있는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존재를 개시하는 일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는 물음이라는 존재 가능성을 가진 존재자이다. 이때 그가 말하는 물음은 존재에 대한 물음이고 현존재로서 인간에게 고유한 것은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자신의 존재에 의해서 자신에게 그의 존재가 열어 밝혀져 있다는 것’. 그러므로 그는 다시 다음처럼 말한다.

그의 본질은 그 존재자가 각기 자신의 존재를 자기의 것으로 존재해야 하는 거기에 있기에 현존재라는 칭호는 순전히 이 존재자를 칭하기 위한 순수한 존재 표현으로 선택된 것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그의 실존에서부터, 즉 그 자신으로 존재하거나 그 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거나 할 수 있는 그 자신의 한 가능성에서부터 이해한다.―이때의 주도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우리는 실존적 이해라고 이름한다.
―하이데거, 같은 책, 28-29.

현존재의 본질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고 이런 이해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와 통하고 요컨대 본래적(자신으로 존재함)이거나 비본래적(자신이 아닌 것으로 존재함)이거나 그 자신의 가능성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런 이해가 이른바 실존적 이해와 통한다. 그런 점에서 자신에 대한 이해는 존재 가능성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해는 가능성이다.

 

요컨대 현존재는 존재하면서 존재 자체를 문제로 삼는 존재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나는 존재하는가? 이런 물음들은 모두 존재, 있음에 대한 물음이지만 실존의 수준에선 ‘나는 무엇인가’ (본질)가 아니라 ‘나는 어떻게 사는가/ 살 것인가’(실존)가 핵심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는 묻는 존재자이며 동시에 물어지는 존재자이다. 말하자면 나는 물음의 주체이고 동시에 물음의 대상이다. 문제는 현존재가 실존성, 개별성을 강조한다는 것.

 

선불교가 강조하는 것 역시 이런 실존 의식이다. 내가 있음으로 세계가 있고 삶이 있고 삶이 있음으로 존재가 있고 깨달음이 있고 부처님이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존재와 만나는 것도 고독하고 중생이 부처와 만나는 것도 고독하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나 대신 누가 밥을 먹어 줄 수 없고 잠을 대신 자 줄 수 없고 나 대신 변을 보아 주는 사람도 없고 대신 죽어 주는 사람도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실존이고 현존재의 운명이다. 다음 공안은 성불(成佛)의 비대리성, 곧 실존성을 암시한다.

한 스님이 조주 선사에게 묻는다
“가장 절박한 것이 무엇입니까?”
선사가 대답한다.
“오줌 좀 눠야겠다. 소변은 하찮은 것이나 나 스스로가 하지 않으면 안된단 말이야.”

이른바 요시소사(尿是小事) 공안. 소변은 하찮은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찮은 일도 누가 대신 해 줄 수 없다. 물론 스님이 묻는 ‘가장 절박한 것’은 소변이 아니라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자아, 자기의 절박함을 해결할 방법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아는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조주 선사는 소변 이야기를 한다. 이 공안이 암시하는 것은 성불이나 해탈은 누구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철저한 고독 속에서 스스로 노력해서 깨닫는다는 것. 깨달음은 자신의 마음공부에 달리고 모든 인간에겐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말이 나온다. 모든 중생에게는 성불할 수 있는 성품이 있다는 말. 현존재는 현(존재)이고 따라서 현존재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존재를 이해하고 이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자라면 중생은 중생(불성)이고 따라서 중생은 자신 속에 숨어 있는 불성을 이해하고 깨닫는 자이다. 그러나 불성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불성이 마음이고 마음은 존재처럼 어디에도 없으며 동시에 어디나 있다. 현존재가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선불교가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일체유심조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 그러므로 현존재와 중생은 목표는 같고 방법만 다르다.

3. 세계―내―존재

앞에서도 말했듯이 존재하는 것, 존재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고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사물들이고 이 사물들은 다시 도구사물과 관찰사물로 양분된다. 인간을 특히 현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존재자로서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과 사물은 함께 세계에 존재하지만 그 존재 양상이 다르다. 말하자면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와 사물들은 그 존재 양상이 다르고 따라서 세계―내―존재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요구된다. 하이데거는 다음처럼 말한다.

현존재의 이러한 존재 규정들이 이제는 선험적으로 우리가 세계―내―존재라고 이름하고 있는 존재 구성틀에 근거하여 고찰되고 이해되어야 한다. 현존재 분석의 올바른 단초는 이 구성틀의 해석에 달렸다. 세계―내―존재라는 합성된 표현이 이미 그 형태에서 일종의 통일적 현상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전체 현상을 선행적으로 확고히 견지하면서 그 현상적 실상을 추적한다면 다음의 세 가지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 앞의 책, 80.

세계―내―존재는 현존재를 구성하는 틀이고 이 틀을 제대로 분석할 때 현존재의 의미가 밝혀진다. 물론 현존재의 의미는 자신의 존재와 관계를 맺는 존재자, 실존성, 각기 자신이 바로 그것인 그런 존재자로 요약된다. 이런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구성틀에 의해 분석되어야 하고 그것은 세 방향을 취한다. 첫째는 세계의 개념. 여기서는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를 탐색하고 세계성의 이념을 규정한다. 둘째는 세계―내―존재의 개념. 곧 세계―내―존재로 존재하는 존재자. 곧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대답. 셋째는 내―존재의 개념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세계는 존재론적 실존론적 개념으로 하이데거는 환경세계, 곧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생활세계를 강조하고 이런 세계는 도구사물로 현시된다. 둘째로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로서 남들과 함께 사는 공동 존재이다. 이때 현존재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나의 현존재와 같은 구조을 가진 타인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 세계에 살고 있는 나와 타인, 곧 세인(世人, das Man)이다. 영역본에서는 세인을 그들(they)로 번역하는바 이는 평균적 일상성 속에 안주하는 혹은 퇴락하는 나와 타인을 나와 관계없는 사물로 간주하는 입장을 보여준다(M. Heidegger, Being And Time, trans. by J. Macquarrie & E. Robinson, Harper & Row, New York, 1962, 114).

 

셋째로 내―존재에 대한 고찰은 현존재의 현, Dasein의 Da, 곧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만나고 발견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양상에 대한 탐구로 요약된다. 현존재의 존재 개시, 열어 보임, 비은폐, 밝힘은 동시에 세계의 밝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현존재가 세계 속에 있고 세계가 현존재이기 때문에 현존재가 밝히는 존재는 세계의 빛이 된다. 그런 점에서 다자인이라는 단어의 언어적 구조는 우리, 현존재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반영한다.

 

첫째로 다자인은 da(거기)와 sein(있다)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현존재는 ‘거기에 있음’을 뜻한다. 하이데거가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은 우리가 다른 존재자들과 달리 자신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거기, 곧 세계 속에 거주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둘째로 현존재는 존재 이해 능력을 지닌다는 점에서 존재를 선험적으로 이해하고 자신의 존재를 노정하기 위해 노력한다.

 

셋째로 현존재의 이런 의미는 그의 후기 철학에 오면 달라진다. 후기 철학에서 그는 ‘거기 있음’에서 ‘거기(Da)’가 ‘우리’를 지시하고 우리가 있는 것은 존재를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의 관리자’ ‘존재의 목자’이고 우리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투명한 것’, 혹은 ‘열린 공간’이 된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현과 존재의 관계, 곧 다와 자인의 관계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가 하면 신상희는 터―있음과 현존재 혹은 현존을 구분하면서 다음처럼 말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Dasein이라는 용어는 ‘존재가 개방되어 있는 열린 영역에, 즉 존재 개방성의 터전에 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앞으로 Dasein이라는 용어가 하이데거의 고유한 의미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터―있음’이라고 번역하고 이런 의미와는 무관하게 전통적인 서양철학의 맥락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현존재’ 혹은 ‘현존’이라고 번역한다(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들어가는 말’, 《이정표 1》, 신상희 옮김, 한길사, 135 각주).

 

이런 번역은 Dasein의 구조를 Da-sein으로 표현하는 하이데거 후기 사유를 반영하고 이때는 다와 자인은 종속 관계가 아니라 이른바 공속의 관계이고 우리식으로 쉽게 표현하면 병치 관계, 등가 관계이고 병치는 병치 은유가 그렇듯이 두 항목이 의미론적으로 유사성을 띤다. 그러니까 다(현)와 자인(존재)은 개별성,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공통점을 띤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다르고 현―존재가 다르다. 그러나 나는 현존재와 현―존재를 모두 크게는 현존재에 포함시키고 그후 다와 자인의 관계, 그러니까 언어적 구조 읽기에 의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터―있음 역시 존재 개방성의 터에 있다는 뜻이지만 트인 상태로 있음, 막지 않고 터 있음을 뜻할 수도 있고 공간이 아니라 예정(-할 터)을 강조하면 개방가능성으로 있음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터―있음이라는 번역은 존재가 개방되어 있는 영역에 있음, 존재 개방성의 터전에 있음을 뜻하지만 그런 개방성, 그러니까 현존재가 존재를 개방하는 양식은 좀 더 세분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4. 현존재와 은현동시(隱現同詩)

요컨대 이런 다양한 읽기에서 내가 강조하는 것은 현존재는 거기, 세계, 우리 속에 있지만 한편 다(Da), 곧 현 속에 있다는 것. 그러므로 다(자인)와 현(존재)의 구조를 강조하자. 이런 표현은 다자인 속에 자인이 있고, 현존재 속에 존재가 있다는 것. 말하자면 나는 세계, 우리 속에 있지만 이런 있음의 의미는 자인의 실현이고 존재의 실현이라는 것.

 

그러나 일상 세계에선 이런 존재가 은폐되고 따라서 진정한 나, 곧 존재와의 만남은 쉽지 않다. 한편 이런 읽기는 중생 속에 불성이 있다는 선불교적 관점과 유사하다. 따라서 현(존재)은 중생(불성)과 유사한 구조이고 앞으로 나는 현(존재)이 암시하는 존재 숨김과 드러냄, 중생(불성)이 암시하는 불성 은닉과 드러냄, 요컨대 숨김/드러냄, 은폐/비은폐, 현존재/ 존재의 관계를 은현동시(隱現同時) 여시묘각(如是妙覺)이라는 대정 스님의 게송을 중심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스님이 서른일곱 살에 지은 게송은 다음과 같다.

道在何處 見聞是道 도는 어디 있는가 보고 듣는 것이 그대로 도이더라
了然卽成 何處更求 알고 보니 그대로 이미 갖추어져 있더라 어디서 다시 도를 구하랴
隱現同時 如是妙覺 숨음과 나타남이 때가 같아 이것이 바로 묘한 깨달음
誰人我聞 吾答一笑 누가 나에게 도를 묻는다면 한번 웃음으로 답하리

숨음과 나타남이 때가 같다는 말은 숨으며 동시에 나타나고 나타나며 동시에 숨는 현상. 이런 현상은 언어를 초월하고 우리들의 표상 작용을 초월하는 이른바 깨달음의 세계이다. 현존재와 존재의 관계가 그렇다. 그러니까 현(존재)의 구조에서 처음 존재는 현존재 속에 숨고 현존재는 이렇게 자신 속에 숨어 있는 존재를 찾고 만나고 드러내고 존재와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존재하는 존재는 터―있음이 암시하듯이 존재가 개방되어 있는 영역에 있고 이런 열린 영역은 하이데거가 강조하듯이 존재가 뒤로 물러나며 스스로를 나타내는 영역, 곧 존재는 나타나며 동시에 숨고 숨으며 동시에 나타나는 영역이고 나는 이런 영역이 은현동시(隱現同時)의 세계, 그러니까 묘각(妙覺)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입장이다.

 

하이데거는 존재 개방성의 터전에 있음, 열려 있음을 환히 트인 터(Lichtung), 환한 밝힘으로 부르며 언어사적으로는 프랑스어(clairiere, 숲 속의 빈터)를 차용한 번역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숲 속의 빈터는 무슨 의미인가? 다음은 하이데거의 말.

숲 속의 트인 곳(Waldlichtung)은 옛 언어로는 밀림이라고 하던 우거진 숲(der dichte Wald)과의 구별 속에서 경험된다. 형용사 licht(환한)는 leicht (홀가분한, 가벼운)와 같은 낱말이다. Etwas lichten(어떤 것을 환히 밝히고 환히 트이게 하다)은 ‘어떤 곳을 홀가분하게 하다’ ‘어떤 것을 자유롭게 하다, 비워두다, 열어놓다’를 의미한다. 예컨대 ‘나무를 베어내어 숲 속의 어떤 곳을 탁 트이게 하다’를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생기는 환히 트인 곳이 환히 트인 터이다. 빛은 환히 트인 터의 열린 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 환히 트인 터에서 밝음을 어둠과 놀이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이 환히 트인 터를 창조하는 일은 아예 없으며, 오히려 전자인 빛이 후자인 터를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환히 트인 터, 즉 열린 장은 밝음과 어둠에 대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울림과 울림의 사라짐에 대해서도, 그리고 소리의 울려 퍼짐과 소리의 사라짐에 대해서도 자유롭다. 환히 트인 터는 현존하는 모든 것과 부재하는 모든 것을 위한 열린 장이다.


―하이데거, 〈철학의 종말과 사유의 과제〉 《사유의 사태로》, 문동규 신상희 옮김, 길, 2008, 158-159.

숲 속의 빈터는 터―있음, 곧 환히 열린 장의 알레고리다. 현존재가 도달한 다, 현의 영역은 그냥 빈터가 아니라 숲 속의 빈터다. 이 터가 강조하는 것은 빛이 터를 창조하지 않고 이 터가 빛을 만들고 이 터에는 밝음과 어둠의 놀이가 있고 밝음과 어둠에서 자유롭고 소리와 소리의 사라짐에서도 자유롭다는 것.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먼저 숲 속의 빈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

 

이런 터는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 그런 점에서 유/무의 대립을 초월하는 공(空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 공의 세계 속에서 소리(유)는 소리의 소멸(무)로 이동한다. 요컨대 숲 속의 빈터는 유/무를 초월하는 공의 세계이고 그런 점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세계이고 이런 공 속에 다시 유/무가 있고 공은 이런 대립을 초월한다.

 

종이에 그린 동그라미, 원상(圓相), 공(空)을 생각하자. 이런 공의 세계는 유와 무의 경계를 초월하고 원이 뒤로 물러가며 앞으로 나오고 거꾸로 앞으로 나오며 뒤로 물러가고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하다. 숲 속의 빈터 역시 그렇다. 이런 터는 있으며(색) 동시에 없고(공) 없으며 동시에 있다. 이른바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의 세계이고 한편 터가 빛을 만들지만 터와 빛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그런 점에서 터(유)가 빛(무)을 만들고 터 자체는 이런 유/무의 대립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이 터, 공의 세계는 유/무를 초월하는 공이고 결국 현존/부재를 초월하는 공 혹은 현존/부재를 위한 열린 장이다.

 

이런 터, 공의 세계에선 숨음과 나타남이 동시에 존재(?)한다. 숲에 빈터가 생기는 것은 숲의 일부가 소멸하는 것, 숨는 것, 따라서 은(隱)의 세계이고 이렇게 숲의 일부가 사라지며 동시에 빈터가 나타난다(現). 따라서 인과 현은 동시에 있고 이런 현에 의해 빛이 생기고 밝음이 어둠과 논다.

 

그러니까 은현동시 속에 은은 소멸하며 현이 되고 이 현 속엔 다시 밝음/어둠, 소리/소리 소멸 같은 은현동시의 세계가 있다. 요약하면 이 터는 숨음―나타남의 동시적 구조이고 다시 현(은현)의 구조, 곧 나타남 속에 나타남―숨음이 있는 구조이다.

5. 선시와 은현동시

요컨대 숲 속의 빈터는 은현동시의 구조로서 숲의 일부가 은폐되고 숨고 뒤로 물러가면서(은) 빈터가 나타난다(현). 그러나 은과 현의 경계는 모호하고 그런 점에서 은현동시이고 은이 현을 뱉고 현이 은을 삼킨다. 숲의 일부(현)가 사라지면서(은) 빈터가 나타나고(현) 이런 나타남 속엔 은현이 동시에 있다. 요컨대 은현동시의 영역은 숨음(은)과 나타남(현)의 경계가 해체되는 영역이다. 선시(禪詩)가 보여주는 세계가 그렇다. 다음은 고려 말 스님 태고보우(太古普愚)의 선시.

소가 늙어 어떻게 먹일지 알 수 없기에 牛老不知東西牧
고삐 놓아두고 무생가 한 가락 한가히 부르다가 放下繩頭閑唱無生歌一曲
머리 돌리면 먼 산에는 저녁해 붉은데 回首遠山夕陽紅
늦봄 산중에는 가는 곳마다 바람에 꽃이 지네 春盡山中處處落花風

태고 선사의 〈식목수(息牧?)〉 2절이다(김달진 역). 식목수는 소 먹이기를 그만둔 노인이라는 뜻. 불교에서 소는 흔히 마음을 상징하고 수행 과정을 소를 찾는 과정에 비유한 십우도(十牛圖)가 있다.

 

이 시의 1절에서 노래하는 것은 지난해엔 소를 먹이며 언덕에 앉아 있었고 올해엔 소를 놓아두고 언덕에 누워 있다는 것. 십우도에 의하면 이 단계는 소를 기르는 6단계(牧牛)와 소를 잊는 7단계(到家忘牛). 소를 기를 때는 언덕에 앉아 있고 소를 놓아버릴 때, 그러니까 소를 잊을 때는 언덕에 누워 있다.

 

앉아 있는 것은 살펴보는 것, 누워 있는 것은 자아 해방이다. 소를 잊을 때, 그러니까 마음을 잊을 때가 해방이다. 언덕에 앉았을 때는 보슬비가 내리고 누워 있을 때는 푸른 버들 밑이 서늘하다. 그러니까 소, 곧 마음을 잊은 세계는 푸르고 서늘한 세계이다.

 

그리고 인용한 2절에서 스님은 소가 늙어 기를 방법을 모르게 되고 따라서 고삐를 놓아두고 무생가, 곧 불생불멸의 세계를 노래한다. 소가 늙었다는 것은 마음도 소멸하는 단계. 소를 잊는 것과 소가 늙은 것은 의미가 다르다. 전자는 마음을 버린다는 뜻이고 후자는 버리는 행위도 없는 경지. 전자는 마음을 버리지만 후자는 마음을 버린다는 마음도 없는 경지를 뜻한다. 왜냐하면 이 때는 마음(소)이 저절로 늙어 소멸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런 경지는 십우도에 나오는 8단계, 곧 인우구망(人牛俱忘)의 단계를 암시할 수도 있다. 이 단계는 사람, 곧 자아도 잊고 소(마음)도 잊는 단계. 따라서 채찍과 고삐도 비고 사람도 소도 비어 있는 경지를 이른다. 1절에서는 소를 놓아두고 언덕에 누워 있다.

 

그러나 2절에서는 소가 늙어 어떻게 먹일지 알 수 없어 고삐를 놓아두고 무생가를 부른다. 소를 놓아두고 언덕에 누워 있는 것은 집으로 돌아와 소를 잊는 7단계, 곧 도가망우(到家忘牛)의 단계이고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잊고 사람만 존재하는 단계로 부르기도 한다.

 

7단계에서 소를 잊는 것은 소와 사람이 완전히 하나로 합일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로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8단계는 소뿐만 아니라 사람도 완전히 잊어버린 경지이다.

 

그림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원상(圓相)만 나타난다. 이 단계는 버린다/버리지 않는다의 2항 대립 체계를 초월하는 절대무의 경지로 1단계부터 7단계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부정한다. 따라서 8단계로 가는 것은 크나큰 죽음이고 결정적인 비연속적 연속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7단계에서 성취한 참된 자신은 다시 무화되어 절대가 되어야 한다. 도달한 경지마저 무화하는 단계(우에다 시즈데루, 〈자기의 현상학〉, 《십우도》, 장순용 엮음, 세계사, 1991, 302-305 ).

 

문제는 2절 후반에 나오는 두 행이다.

 

스님은 절대무의 세계에서 무생가, 곧 불생불멸의 세계를 노래하다가 머리를 돌려 먼 산을 바라본다.
머리 돌리면 먼 산에는 저녁해 붉은데
늦봄 산중에는 가는 곳마다 바람에 꽃이 지네

 

원래 내가 이 선시를 인용한 것은 하이데거의 현존재, 곧 터―있음, 존재가 개방되어 있는 영역에 있다는 말이 대정 스님의 선어(禪語) 은현동시의 세계, 따라서 묘각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사유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나는 은현동시의 구조가 아니라 십우도를 전제로 태고보우의 선시를 해석했고 이런 해석 역시 은현동시의 세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불교가 지향하는 세계는 십우도의 8단계, 소도 잊고 사람도 잊는 단계, 공의 세계이고 이 세계가 깨달음, 곧 텅 빈 경지이다. 9단계는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세계이고 10단계는 이타행(利他行)의 세계이다.

 

그러나 절대 공의 세계는 아무것도 없는 세계가 아니다. 공은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의 세계이고 따라서 공―불공의 세계이고 공과 유 역시 불이(不二)의 관계로 존재(?)한다. 공(空)과 상(相)의 관계 역시 그렇다. 상은 헛것이고 마음의 산물이기 때문에 공이고 공이 또한 상이다.

 

요컨대 텅 빈 원상으로 제시되는 공을 다시 생각하자. 이 공은 공이며 유이고 텅 비었으며 동시에 가득차고 안과 밖의 경계가 모호하고 시작과 끝의 관계도 모호하다. 대정 스님 어법에 따르면 은현이 동시에 있다. 공의 안과 밖은 은과 현의 관계에 있지만 은은 현하며 밖으로 나가지만 안에 그대로 머물고, 따라서 머물며 나가고 나가며 머문다. 그런 점에서 은은 뒤로 물러서며 앞으로 나가고 이렇게 생성하는 현 역시 밖에 머물며 안으로 사라진다. 위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그렇다. 한마디로 이 두 행의 시가 암시하는 것은 은현동시의 세계다.

 

첫째로 스님은 산 속에 있으며 머리 돌려 먼 산을 바라본다. 먼 산과 나 사이엔 거리가 있고 내가 있는 산과 나 사이엔 거리가 없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산과 자아 사이엔 거리가 있고 동시에 없다. 거리가 있는 먼 산은 물러가는 세계, 숨는 세게, 은(隱)의 세계이고 그가 걸어가는 산 속의 세계는 드러나는 세계, 나타나는 세계, 현(現)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산은 물러가며 나타나는 은현동시의 영역에 있다. 

 

둘째로 스님은 은의 세계(먼 산) 밖에 있고 현의 세계(산중) 안에 있다. 스님은 과연 어디 있는가? 물러가는 세계 밖은 어디고 나타나는 세계 안은 어딘가? 물러가는 세계 밖엔 나타나는 세계가 있고 나타나는 세계 안엔 숨는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은과 현은 불이(不二)의 관계에 있고 은현은 동시에 있다.

 

셋째로 물러가는 은의 세계(먼 산)에는 저녁 해가 붉고 나타나는 현의 세계(산중)에는 꽃이 진다. 저녁 해이긴 하지만 붉은 해는 생명을 상징하고 지는 꽃은 죽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물러감(은)은 생명을 내포하고 드러남(현)은 죽음을 내포한다. 그런 점에서 은은 죽어가며 살고 현은 살며 죽어간다. 공즉시색이고 색즉시공이다.

 

넷째로 물러가는 먼 산(은)에 있는 붉은 저녁 해는 꽃이 피는 이미지이고 나타나는 산 속(현)엔 바람에 꽃이 진다. 따라서 은 속에 꽃이 피고 현 속에 꽃이 지고 나의 있음(산중)은 낙화, 죽음과 관계되고 나의 없음(먼 산)은 개화 (해), 생명과 관계된다.

 

요컨대 무는 생명과 관계되고 유는 죽음과 관계된다. 그리고 이런 유/무를 안에 거느리며 동시에 초월하는 세계가 공이고 이것이 십우도의 8단계에 나오는 원상의 의미이고 대정 스님의 은현동시 묘각의 세계이고 의식한 건 아니지만 하이데거가 은연중에 목표로 한 것이 그렇다.

 

물론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것은 은현동시의 세계, 존재 자체, 존재의 빛, 존재 개방성의 터, 환히 열린 장이 아니라 현존재가 실존의 양식을 통해 존재로 나가는 과정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와 시간》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 사유는 존재자에서 존재로 가는 길을 강조하고 후기 사유는 존재 자체에서 존재자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다자인과 다, 현존재와 현의 관계를 선의 시각, 특히 은현동시 개념을 중심으로 살폈다. ■
 

 

이승훈 / 1942년 춘천 출생. 한양대 국문과와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이상시연구》로 박사 학위 받음. 시집에 《사물A》 《당신의 방》 《비누》 《이것은 시가 아니다》 등, 시론집에 《시론》 《모더니즘시론》 《포스트모더니즘시론》 《해체시론》 《한국모더니즘시사》 《한국현대시론사》 《라캉 거꾸로 읽기》 등, 기타 《선과 기호학》 《아방가르드는 없다》 등 저서 60여 권.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시와 시학상, 이상시문학상, 김삿갓문학상, 백남학술상 등 수상.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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