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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아감벤의 잠재성 개념과 그것의 정치적 함의 /양창렬

by 마리산인1324 2010. 10. 12.

<자율평론> 19호(2007.1.5)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1060&p_no=1&key=p_no

 

 

아감벤의 잠재성 개념과 그것의 정치적 함의


 

양 창 렬 (파리 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이 글은 <진리, 자유> 2006년 여름호 (61호) pp.59-67 에도 실렸다. ■편집자주




 

아감벤의 잠재성론은 ‘할 수 있다는 동사의 의미, 다시 말해 우리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비롯된다. 아감벤은 이 물음에 할 수 있음, 곧 잠재성이란 결여와 비존재를 환대하는 근본적인 수동성이라고 답한다. 그는 이 개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영혼론』을 읽고, 하이데거의 1931년 세미나―Aristoteles; Metaphysik Theta 1-3: Vom Wesen und Wirklichkeit der Kraft―를 참조해서 만들었다. 아감벤의 잠재성 도식은 유아기, 몸짓, 언어 경험, 침묵, 열림, 예외 상태 등의 개념을 통해 그의 여러 저작에 두루 퍼져 있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철학 전반을 이해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이 글에서 아감벤의 잠재성 도식을 풀이하고 그것의 정치적 함의를 정리하고 논평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아감벤이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통해 자신의 잠재성 개념을 정리하고 있는 「잠재성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을 재구성하고, 그것을 여타의 정치 저작들과 연결시키도록 하겠다.


1. 무능력에서 능력으로 : 목적 없는 수단, 몸짓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의 시각 관련 구절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우리의 눈은 외부 대상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하지만 외부 대상들이 없으면 볼 것이 없으므로, 우리의 눈은 감각 작용을 하지 않는다. 혹은 우리가 어두운 방 안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 외부 대상들이 있다 해도 우리는 그것들을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이를 두고 감각 능력 자체가 사라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때 감각 능력은 단지 잠재태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한 편으로 ‘아, 어두워서 아무 것도 안 보이지만, 나의 감각 능력은 꾸준히 존재하지’라며 감각 능력 경험을 하게 되고, 다른 한 편으로, ‘아, 어둡구나’라고 말하며, 어둠을 밝음으로부터 식별해낼 수 있다. 이 둘은 모두 잠재성에 대한 경험인데, 왜냐하면 전자는 우리의 볼 수 있음 자체를 지각한 것이며, 후자는 어둠―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어둠은 디아파네스(투명함)의 잠재태이며, 밝음의 결여이다―에 대한 식별, 곧 잠재태에 대한 식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 과정을 현실태가 없는 가운데 벌어지는 무능력(볼 수 없음)에서 능력(잠재성)으로의 이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아감벤의 잠재성 해석은 하이데거에게 빚지고 있다. 1931년 세미나에서,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Θ권의 1-3장, 특히 1046a29-35 구절을 논평하면서, 힘의 곁에는 무력(im-potentia)도 있으며, 여기에서 접두사 im-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결여(sterēsis), 박탈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무력은 힘과 함께 가며, 역으로 힘, 능력(dunamis)은 결여에 노출되어 있고,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둠은 빛의 결여이고, 입을 다무는 것은 말하는 것의 결여이며, 침묵은 소리의 결여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말한‘결여에 노출됨’은 아감벤에 의해 ‘비존재를 환대하는 근본적인 수동성’의 잠재성으로 발전된다.


외부 대상의 부재나 밝음의 결여는 잠재성이 현실성으로 이행하지 않는 상황이기도 한데, 여기에서 목적이 사라진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우리는‘눈은 보라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이 말은 눈의 목적이 외부 대상을 보는 활동에 있으며, 외부 대상을 본 눈이 곧 우리의 시각 능력의 현실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목적론을 전제한다. 하지만 아감벤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목적론이 제거된 잠재성 및 사물 자체에 대한 경험이다. 어둠 속에서 외부 대상이 부재할 때, 우리의 눈은 목적 혹은 현실태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눈 자체, 즉 수단 자체로 향한다. 이제 우리는 아감벤의 중요 개념 하나를 발견한다. ‘목적 없는 수단.’


아감벤은 『목적 없는 수단들Mezzi senza fine』에서 몸짓의 잠재성, 그리고 그것의 정치성에 주목한다. 서로 상대방의 언어를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해보자. 벙어리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레 손짓 발짓해가며 의사소통을 하려고 애쓴다. 보통의 경우, 손짓이나 자세, 얼굴의 표정들은 의사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의 경우, 몸짓이 말의 역할을 대체하게 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몸짓이 말로 표현하지 못한 의미를 단순히 지칭하거나, 의사소통이라는 목적 자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없는 순수한 소통 가능성 자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몸짓은 완전히 비언어적인 요소라고 할 수는 없고 오히려 언어와 더욱 밀접하게 관계있다. 아감벤은 「콤메렐, 혹은 몸짓에 대하여」에서, ‘몸짓에서 중요한 것은 전언어적 내용보다 이른바 언어의 다른 측면, 곧 인류의 언어 능력에 내재한 침묵, 언어에 말없이 머물기’라고 말한다. 몸짓을 통해 우리가 교환하는 것은 의미와 말이 아니라 소통 가능성 자체다. 몸짓은 왜 정치적일까? 왜냐하면, 우리는 언어, 나이, 성별, 국적, 피부색과 무관하게, 이러한 순수 소통 가능성에 기초하여 도래할 공동체를 구성할 것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어떠한 종류의 전제나 귀속 조건에도 기초할 수 없다.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도래하는 공동체’이다. 도래하는 공동체 하에서도 결국은 공통의 코드가 만들어지지 않겠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겠다. 하지만 ‘목적 없는 수단’을 ‘끝없는 중간’으로 읽을 수 있듯이, 몸짓과 소통 가능성 자체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끝없이 계속 되는 매개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공동체 내에서 우리는 코드(법이든 문법이든)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활용’할 뿐이다.


요약하자면, 무능력에서 능력으로 전화되는 가운데 경험하는 잠재성은 ‘목적론’을 비판하고, ‘순수 수단’을 강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 부재하는 것을 보이거나 보고, 나아가 언어 자체, 소통 가능성 자체를 교환하게 해준다.

 

2. 무능력의 능력 : 내용 없는 인간, 무위, 바틀비

‘무능력에서 능력으로’가 현실태가 주어지지 않아서 잠재성을 경험하는 것이었다면, 잠재성을 가진 주체가 스스로 현실화를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잠재성을 유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아감벤은 이 두 번째 경우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데, 왜냐하면, 바로 ...이지 않을 수 있음을 행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이나 인간 사유 활동에 고유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무능력의 능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지 않음의 가능성인 비잠재성이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잠재성은 단순히 무엇을 행하거나 변형시킬 수 있는 힘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완전한 상태인 현실태로 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 잠재성은 무엇일 수 있음인 동시에 무엇이지 않을 수 있음이기도 하다 : ‘잠재적인 것은 모두 현실적인 상태에 있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을 잠재성을 가진 것은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때문에 동일한 것이 있음과 있지 않음의 잠재성을 공유한다’(『형이상학』, Θ, 8, 1050b10-13). 다시 말해, 모든 존재는 그것의 잠재성과 동시에 그 대립물인 비잠재성을 갖는다(『형이상학』, Θ, 1, 1046a29-31). 잠재성과 비잠재성은 동일한 것의 두 측면이지만, 그 둘은 모두 ‘잠재성’이라고 불린다. 모든 잠재성은 (비)잠재성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예를 들어, 아이는 무언가를 배울 가능성(유적 잠재성)을 갖고 있으며, 그가 실제로 지식을 습득할 때, 그는 질적 변화를 겪는다. 반면, 이미 지식을 갖춘 자는 또 다른 지식을 습득한다고 해서 질적 변화를 겪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지식을 발휘하지 않을 수 있다. 시인은 시를 짓지 않을 수 있고, 건축가는 집을 짓지 않을 수 있다. 시인의 시란 시작 활동의 생산물(energeia)이며, 시작 능력(dunamis)의 현실태(energeia)이기도 하다. 따라서 시인이 시를 짓지 않을 수 있음은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하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비잠재성의 잠재성이 드러나는 사례다. 이 도식은 아감벤의 어떤 개념들에 적용되는가?


아감벤은 자신의 처녀작인 『내용 없는 인간L'oumo senza contenuto』에서 예술가의 예술이란 스스로를 부정하는 부정,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무(無)와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순수 부정의 힘이 내용 없는 예술적 주체성, 내용 없는 인간인 예술가를 규정한다. 텅 빈, 새하얀 캔버스는 아마도 현실성으로 이행하지 않은 잠재성의 극단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적인 사유(『형이상학』, Λ, 9)의 아포리를 논하면서, 결국 최고의 사유는 사유 자체를 사유하는 것(hē noēsis noēseōs noēsis)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유가 무엇을 사유함으로써 사유의 대상에 종속되지 않고, 진정 아무 것도 사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유 능력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다. 잠재성인 사유가 마치 텅 빈 서판(tabula rasa)과 같을 때, 서판에 아무 것도 새겨지지 않고 서판 자체가 하나의 백지가 될 때, 그것은 궁극의 잠재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술이 이런저런 작품을 생산하는 활동이 아니라, 텅 빈 서판과도 같은 예술 그 자체가 되는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잠재성에 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위 구도는 ‘무위(inoperosità)’개념에서 더욱 분명하게 발전한다. 아감벤은 그의 저작 도처에서 무위의 불량배(voyau desœuvré)를 언급하는데, 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는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게을러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순수하게 잠재적인 존재로서, 비-존재, 비-행위할 수 있기 때문에 게으르다. 그는 비-존재를 환대하며, 그것의 근본적인 수동성은 이러한 환대 속에서 노출된다.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가 ‘무위를 하는 자’, 자신의 비잠재성을 행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는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바틀비다. 무위는 바틀비의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I would prefer not to ...)’라는 정식을 통해 하나의 저항 방식이 된다. 들뢰즈는 이 정식을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예와 아니오, 선호와 비선호의 비구분 지대로 해석한 바 있다.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네가 나를 떠나겠다는 것이냐, 말겠다는 것이냐’라고 물으면서 ... 이거나 ... 이거나(either/or)의 선택지로 몰아가지만, 바틀비는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고 말하면서 선호의 논리를 발명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 정식이 ‘...할 잠재성과 ...하지 않을 잠재성의 비구분지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바틀비의 정식은 동시에 A이면서 not-A인 상황, 혹은 A가 not-A보다 낫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데, 아감벤은 이것이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ou mallon(...보다 낫지 않다) 혹은 epokhē(중단)와 같다고 본다. 이것은 A와 not-A의 등가성을 말한다기보다, A나 not-A를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로부터 벗어난 잠재성의 존재 방식을 보여준다. 부연하자면, 아감벤이 이해한 바틀비의 정식, I would prefer not to는 ou mallon 속에서 존재=무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성의 존재 방식을 보는 것이며, A냐 not-A가 아니라, A 못지않게 not-A하며, 더욱이 ‘못지않게’자체를 선호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바틀비는 ...이거나 ...이거나라는 ‘구분 자체를 구분’하면서 그 경계 위에 있게 된다. 현실성 속에서는 언제나 A이거나 not-A이지만, 잠재성 속에서, 비차이적인 카오스의 세계 속에서만 그 둘은 동시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위 설명의 정치적 함의를 살펴보자. 사람들은 아감벤의 비잠재성론이나 바틀비론이 주체의 적극적인 저항 양식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이탈리아 60년대 노동자주의 운동의 노동 거부 전략과 비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감벤은 오히려 탈주체화―자기무화함으로써 개방되는 주체화―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이는 저항의 정치학이기 이전에, 주체가 잠재성 자체의 메신저가 될 것을 수용하고 감내하는 근본적 수동성의 정치학이다. 물론 아감벤에게 이 수동성은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의 수동성이다. 아감벤의 몸짓이나 언어 자체에 대한 경험 역시,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우리의 것이 아닌 경험들, 그러나 경험을 벗어나는 경험이기 때문에, 역으로 궁극적 한계를 구성하는 경험들이다. 아감벤은 이처럼 끊임없이 탈주체화에 대해 말하며, 우리의 현실성의 조건인 잠재성 자체에로 개방될 것을 주장한다. ‘나는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한다’라는 언표를 통해, 그 언표 행위의 주체는 의미작용의 담지자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잠재성의 메시지의 메신저가 된다. 따라서 바틀비의 정식은 바틀비 자신의 의견이나 의지가 담긴 주관적 언표가 아니다. 이는 마치 천사가 신의 말씀을 전혀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몸짓’ 속에서 교환되는 것은 나와 너의 주관적 의사가 아니라 소통 가능성(잠재성)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아감벤의 이론과 다른 잠재성을 사유할 수도 있다. 아감벤은 바틀비에 대한 자신의 글에 「바틀비, 혹은 우연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였다. 여기에서 우연은 필연이나 영원의 반대말이 아니라, 무엇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반대되는 무엇이 일어나는 상황을 의미한다. 잠재성의 세계는 이러한 절대적 우연성의 세계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아감벤은 잠재성 내에서 ‘존재[잠재성]’와 ‘무[비잠재성]’라는 이항 대립에 머물러 있다. 존재와 무의 동시성을 말함으로써 ‘역설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감벤의 전략이다. 그것은 물론 비존재의 잠재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이뤄진다. 반면, 우리는 잠재성의 세계가 A일 수 있음과 A일 수 없음의 세계가 아니라, A 못지않게 B, B 못지않게 C, C 못지않게 D ... 처럼 추이적으로(transitively) 이어지는 무한 가능성의 세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A일 수 있음과 없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로고스에 있어서 A라는 현실성에 대해 사후적인 것이므로, 언제나 현실성의 관점에서 역추적된 잠재성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감벤의 바틀비론에서 우리는 바틀비가 비잠재적인 잠재성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바틀비가 필사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발휘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아감벤은 비잠재성으로서의 무위를 실행하는 자의 ‘잠재성’에 대해 우리가 서로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 대해 그의 비잠재성은 커녕 잠재성조차 식별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아감벤처럼 ou mallon을 잠재성과 비잠재성의 두 항으로 환원하는 것과 달리 ou mallon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현실성에 의해 선험적으로(a priori) 규정되지 않는 무한한 잠재성에 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바로 그것이 오늘날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대안세계화 운동의 존재론적 기반일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는 언제나 이 세계의 곁에서 함께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현실성들을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무수한 가능성의 세계들을 지금 이곳에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3. 현실화되는 가운데 보존되는 (비)잠재성 : 주권의 역설, 헐벗은 삶

아감벤은 「잠재성에 대하여」의 말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의 한 구절(1047a24-26)을 언급한다. 그것은 보통 ‘잠재적(가능적)이라 말해진 것의 현실태가 실현될 때, 비잠재적인(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다면, 그 사물은 잠재적(가능적)이라고 말해진다’고 읽힌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의 예를 제시했다. 만일 한 존재가 앉을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고 앉을 수 있다면, 그 사물이 현실적으로 앉아있는 것에는 어떠한 비잠재성(불가능성)도 없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치 불가능성이 없을 때에 잠재성(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듯이 보인다. 아감벤은 위 구절 자체의 어려움에 직면하라고 말한면서, ‘비잠재적인(불가능한) 것이 전혀 없다면(ouden estai adunaton)’을 nothing is potential not to be로 읽는다. 이를 옮기면, ‘어떤 것도 비잠재적(...이지 않을 잠재성)이지 않다면’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아감벤은 위 문장의 전체적 의미가 '잠재적인 것은 오로지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이지 않을 잠재성을 옆에 둘 때에만 잠재적이게 된다’고 본다. 우리는 어떻게 ouden estai adunaton이 ‘비잠재적인 것이 전혀 없다면’에서 갑자기 ‘비잠재적인 것을 옆에 둔다면’으로 둔갑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위 구절에 대한 아감벤의 해석이 앞뒤 문맥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따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대신, 만일 우리가 문제되는 위 문구를 ‘비잠재적인 무(nothing)가 있다면’으로 읽는다면, 아감벤의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해하는 바에 따르면, 위 구절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태로 실현될 때, 비잠재적인 무가 있다면 그 사물은 (비)잠재적이라는 뜻이며, 다시 말해 비잠재적인 잠재성의 현실태는 무라는 말이 된다. 이를 통해 비잠재성 자체는 현실성으로 이행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보존한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비잠재성은 그 자체로 현시될 경우 그것의 현실성인 무와 구분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적용되는지 살펴보자.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잠재성과 비잠재성의 분리 불가능성―왜냐하면 있을 잠재성을 가진 것은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으며, 동일한 것이 있음과 있지 않음의 가능성을 공유하기 때문에―과 비잠재성의 현실화를 참조하여 주권의 역설 개념을 끌어낸다. 비잠재성이 ‘무’로 현실화될 때, 비잠재성으로서의 잠재성과 무로서의 현실성은 구분되지 않는다. 비잠재성은 현실태에 선행하는 무규정적이고 비실존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현실태로 환원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중지 속에서 잠재성의 본질을 드러낸다. 이것은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일반적인 방식에 대해 예외적인 상황이다.


칼 슈미트가 말하는 제정 권력과 제정된 권력이라는 구분, 벤야민이 말하는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구분에 이 도식을 적용해보자. 전자를 잠재성, 후자를 현실성이라고 불러도 좋다. 만일 제정 권력이 비잠재성일 때, 즉 스스로의 작동을 중단하고 비존재에 개방될 때, 제정 권력(법정초적 폭력)과 제정된 권력(법보존적 폭력)이 구분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예외 상태이다. 예외 상태는 법적 질서에 선행하는 혼란이 아니라, 법의 중지로부터 초래된 상황이며, 이 속에서는 제정 권력과 제정된 권력이 구분불가능해진다. 벤야민이「역사 개념에 대하여」여덟 번째 테제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예외 상태가 규칙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제정 권력과 제정된 권력을 포괄하는 주권은 그 자체로 항상 예외 상태 속에서 작동하는 역설을 갖게 된다.


제정 권력과 제정된 권력의 구분 가능성을 두고 아감벤은 네그리와 대립한다. 아감벤에게 그 둘은 주권이 스스로를 정초하는 구분 불가능한 두 측면인 반면, 네그리에게 제정 권력은 제정된 권력으로 완전히 환원되거나 포획되지 않는 생산적인 힘으로 정의된다. 우리는 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잠재성을 변화의 원리인 ‘능력’으로 엄밀히 정의하기도 하고, 현실태에 대한 질료적 차원의 ‘잠재성’이나 ‘가능성’으로 폭넓게 정의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정 권력/제정된 권력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아감벤은 후자에 주목하고, 네그리는 전자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혹은 아감벤이 잠재성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관념에 주목하는 한 편, 네그리는 욕망의 멈출 수 없는, 점차 확장되는 스피노자적 윤리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네그리는 제정 권력을 다중의 생산적 능력에서 찾고, 주권을 제정된 권력의 층위에 한정시키는 반면, 아감벤은 제정 권력과 제정된 권력을 모두 주권의 질료이자 형상을 구성하는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네그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감벤의 주권론에는 주권을 넘어서는 주체의 자리가 부재하는 듯이 보인다.


주권이 예외 상태를 통해 만들어내는 주체는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주권은 ‘추방’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헐벗은 삶을 사는 성스러운 인간을 만들어내며, 이들은 집중수용소에 존재한다. 네그리에게 다중들의 산노동(living labor)과 생성 능력이 제정 권력을 이룬다고 한다면, 아감벤의 성스러운 인간은 제정 권력과 제정된 권력의 복합체인 주권으로부터 추방되어 주권의 외부이자 동시에 내부인 역설적 공간, 집중수용소에서 마치 산송장처럼 존재한다. 이 음울한 어조는 『호모 사케르』의 후속작인 『예외 상태Stato d'eccezione』에서 다소 긍정적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주권에 포함적으로 배제된 채 내부의 외부에서 살고 있는 성스러운 인간은 주권의 부산물이긴 하지만, 역으로 그것의 역설적 지위 덕분에 제정 권력과 제정된 권력,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순환 고리 자체를 끊을 수 있게 된다. 아감벤이 네그리의 제정 권력에 대해 그것이 여전히 법정초적 폭력이므로 법과 폭력의 밀착 관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권의 대립항인 제정 권력의 잠재성을 말할 것이 아니라, 헐벗은 인간들에게서 발견되는 주권과 무관한 비잠재성(무능력), ‘무위’나 ‘신적이고 혁명적인 폭력[총파업]’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이 말하는 것처럼 주권과 성스러운 인간이 상이한 논리에 근거하는 것일까? 우리가 이 글에서 설명한 모든 것들은 아감벤이 말하는 무위나 비잠재성의 능력이 적용되지 않지만 실효적인 주권과 정확히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성스러운 인간의 현실태적 ‘무능력’과 아감벤의 윤리학이 제시하는 비잠재성의 무위를 우리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비잠재성의 능력을 발휘하는 주권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위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의미 없이 효력 있는’ 주권적 추방의 구조에 대한 아감벤의 대안을 살펴보아야 한다. 주권은 스스로 제정한 법질서의 작동을 중지시키며, 이 때 기존의 법은 의미 없는 것이 되며, 주권은 완전히 비잠재적인 것이 된다. 이 예외 상태 속에서 삶은 어떤 모양새가 될까? 보통 법은 이러저러한 일에 대해 규제 및 처벌을 한다. 그런데 그러한 법이 의미를 상실한다면, 주권에게 제정 권력과 제정된 권력이 구별되지 않듯이, 이제 헐벗은 인간들에게도 법과 삶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비)잠재적인 예외 상태에서 법이 텅 빈 형식이 되면,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스스로 법을 따른다는 말이다. 카프카의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열려있는 성 문, 그것을 지키는 문지기, 문이 열려 있으나 들어가지 못하는 시골 사람은 이 상황을 잘 보여준다. 성 안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규제도 없다. 법은 시골 사람이 성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없다에 대한 어떤 규정도 하지 않는 그야말로 순수 형식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문지기가 있음으로 해서 마치 그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법 아닌 법이 효력을 발휘한다. 왜? 시골 사람은 성 문을 막는 문지기의 역할을 모방하여, 성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명령을 자기입법하기 때문이다. 법 자체는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았건만, 시골 사람은 자기 규제에 들어가게 되니, 이것이야말로 ‘부재하는 원인에 의한 효과’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의 통제 사회가 무수히 설치되는 감시 카메라가 아니라 각자의 자기 규제적 시선―이것이야말로 편재하는 시선이 아닌가!―으로 이뤄지는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상황에 답하기 위해 아감벤은 이제 벤야민의 「역사 개념에 대하여」여덟 번째 테제를 또 다시 끌어온다. 우리의 과제는 ‘실질적인 예외 상태를 도래시키는’것이다. 그것은 비잠재적인 잠재적 예외 상태를 ‘현실화,’‘실질화’ 시키는 것이다. 잠재적 예외 상태는 비잠재성을 무로서 현실화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 예외 상태는 비잠재성을 보통의 잠재성이 현실화되는 것처럼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열려진 문을 닫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보통 법(성의 문)은 닫혀 있고, 안과 바깥의 경계를 확실히 하면서, 규제와 처벌을 하는 것이 곧 그것의 현실화이기 때문이다. 의미 없으나 효력 있는 법 앞에서 그것을 그대로 수긍하거나―‘성 문을 통과하면 안 되지’― 거부하는―‘성에 안 들어가고 말지’― 것이 아니라, 수긍도 거부도 하지 않고―‘나는 들어가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법이 스스로 소진하여 문이 닫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신적인 혁명적 폭력이다. 성이 문을 닫고, 법이 완결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됨으로써, 잠재적인 예외 상태가 실질적인 예외 상태가 된다면, 이제는 법이 나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이 곧 법이 되는 상황(법으로 완전히 변형된 삶)이 도래할 것이다. 완전한 역사적 단절(최후의 심판) 이후에 도달되는 것으로서 거기에서는 더 이상 현실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잠재성-현실성 회로를 넘어서는 메시아적인 잠재성만이 있을 뿐이다. 아감벤의 잠재성론은 여기에서야 완성된다.

* 원고를 읽고 논평해준 서정연 님과 김상운 님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