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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지오르지오 아감벤, '삶-의-형태'

by 마리산인1324 2010. 10. 12.

<시와 산문 그리고 시와 녹색>

http://cafe.daum.net/kpoetry/CU8V/706?docid=dC7C|CU8V|706|20050109232935&q=%BE%C6%B0%A8%BA%A5%20%BB%F3%C8%B2%B1%B8%BC%BA&srchid=CCBdC7C|CU8V|706|20050109232935

 

 

 

지오르지오 아감벤, 「삶-의-형태

양창렬(nomade02@hotmail.com) 옮김

* 이 글은 Giorgio Agamben, Moyen sans fins. Notes sur la politique, Payot, 1995, 2002, p. 13-23을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원래 ꡔ전미래Futur Antérieurꡕ, 15호(1993)에 실렸었다. 우리는 이 글의 영역본을 Paolo Virno & Michael Hardt (ed.), Radical Thought in Italy. A Potential Politics, The University of Minnesota, 1996, p. 151-158에서 구해 볼 수 있다. 중간에 삽입된 각주는 인용된 구절을 찾아볼 수 있게 본인이 영역자주에서 끌어다 넣은 것이다. 역주를 달기보다는 [ ]를 사용해서 문장의 가독성을 높이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forme-de-vie를 삶-의-형태라고 옮긴 이유는 아감벤이 결국은 삶이 그것의 형태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삶을 표현하기 위해 하이픈을 사용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 그리스인들은 우리가 [오늘날] 삶이라는 단어로 이해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단일한 용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의미론적으로나 형태론적으로 구분되는 두 용어를 가지고 있었다 : 모든 생명체들(동물, 인간 혹은 신)에 공통되는 살아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표현하는 조에(zoé), 한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하는 비오스(bios). 근대 언어에서는 이러한 대립이 어휘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형태가 생물학(biologie)이나 동물학(zoologie)에서처럼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더 이상 어떤 실질적인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용어―그것의 불명료함은 그것의 지시 대상의 신성화에 비례해서 증가된다―만이 셀 수 없는 삶의 형태들 각각으로 언제나 고립시켜 버릴 수 있는 공통된 전제를 적나라하게 지시한다. 반대로 삶-의-형태(forme-de-vie)라는 용어는 삶이 그것의 형태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삶을 의미한다. 헐벗은 삶처럼 그 삶의 무언가를 결코 고립시킬 수 없는 그런 삶 말이다.


2. 그것의 형태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삶이란 그것의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중요한] 삶, 살아가는 와중에 삶의 양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이다. 이 표현은 무슨 말인가? 그것은 그 안에서는 모든 살아가는 양식들, 행위들 그리고 과정들이 결코 단순한 사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무엇보다 삶의 가능성들이고, 항상 무엇보다 역량들인 그러한 삶, 인간적인 삶을 가리킨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행동과 모든 형태는 결코 특정한 생물학적 자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임의의 필요에 의해 할당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아무리 습관적이고, 반복된 것이고, 사회적으로 의무시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항상 가능성이라는 특성을 보존하는 바, 달리 말해, 그것들은 항상 살아가는 것 자체를 문제삼는다[쟁점으로 만든다]. 따라서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실패하기도 하는,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되찾기도 하는 그런 역량의 존재로서 인간은 항상 그 삶의 행복이 중요한 그런 삶 속에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그 존재의 삶이 치유할 수 없이 고통스럽게 행복에 할당되어 있는 그런 유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즉각적으로 삶-의-형태를 정치적 삶으로 구성한다. “Civitatem ... communitatem esse institutam propter vivere et bene vivere hominum inea [국가는 사는 것 그리고 인간이 잘 사는 것 그 자체를 위해 제도화된 공동체다.]”


3. 반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정치 권력은 항상 최종심에서는 삶의 형태들의 맥락으로부터 헐벗은 삶의 영역을 분리해내는 것에 기초한다. 로마법에서, 삶은 법률적인 개념이 아니라, 단순히 살아간다는 사실 혹은 개별적인 삶의 양식을 가리킬 뿐이다. “삶”이라는 용어가 법률적인 의미―그것은 삶이라는 용어를 진정으로 기술적인 용어(terminus technicus)로 변화시켰다―를 획득하게 되는 경우는 딱 한 번뿐이다. 그것은 vitae necisque potestas라는 표현에서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자식을 아버지(pater)가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J. 토마스가 보여준 바와 같이, 위 정식에서 que[그리고]는 선언적인(disjonctive)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며, nex[죽음], 즉 죽일 수 있는 권력의 필연적 귀결(파생명제)일 뿐이다.


기원적으로 볼 때 삶은 이처럼 단순히 목숨을 위협하는 권력의 반대항으로서만 존재하는 권리 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아버지(pater)[가 자식을] 살리고 죽이는 권리에서 유효한 것은 주권 권력(imperium)에도 마찬가지로 유효하다. 주권 권력이 가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는 [그 권력의] 근본적인 중핵을 구성한다. 따라서 홉스적인 주권성의 정립에 있어서 자연 상태의 삶은 오로지 그 존재가 무조건적으로 목숨의 위협(만인의 만인에 대한 무제한적인 권리)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에 의해 정의되며, 정치적 삶―달리 말해 리바이어던의 보호 아래에서 굴러가는 삶―도 그와 똑같은 삶, 즉 이제는 단지 주권자의 손안에 그 목숨의 위협이 노출되어 있는 삶일 뿐이다. 국가 권력을 정의해주는 절대적이고 영속적인 역량이란 최종심에서 정치적 의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주권자(혹은 왕)가 가진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에 복속되는 한에서만 보존되고 보호될 수 있는 헐벗은 삶에 기초하는 것일 뿐이다. (바로 그런 것이 인간 삶을 지칭하는 데 쓰이곤 하는 sacer [신성한]라는 형용사가 본래 가진 의미이다.) 주권자가 매번 결정을 내리는 예외 상태는 정확히 말해 헐벗은 삶―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그것은 다양한 사회적 삶의 형태들에 결합된 채 머물러 있다―이 정치 권력의 궁극적인 토대로서 분명하게 다시금 소환되는 상태이다.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동시에 그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 궁극적인 주체는 항상 헐벗은 삶이다.


4. “억눌린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예외 상태가 규칙이 되었음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상응하는 역사 개념에 도달해야만 한다.” 이제는 50년도 더 지난 오래된 벤야민의 이러한 진단은 전혀 그 현실성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 권력이 긴급 상태 외에는 그 어떤 다른 형태의 정당화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도처에서 계속해서 긴급 상태에 호소하고 동시에 비밀리에 그러한 상태를 창출해내려는 수작을 부리기 때문이다 (이제는 긴급 상태라는 토대 위에서만 기능할 수 있을 뿐인 한 체제가 마찬가지로 그 어떤 대가를 치뤄서라도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고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아니 특히 그것은 그 동안 주권성의 은폐된 토대를 구성했던 헐벗은 삶이 도처에서 지배적인 삶의 형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예외 상태 속에서의 삶은 전 영역에 걸쳐 삶의 형태들을 삶-의-형태 안에 그것들이 응집되어 있던 것으로부터 분리해내는 헐벗은 삶이다. 인간과 시민에 대한 맑스적인 분할은 이렇게 주권성의 궁극적인 동시에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희끄무레한 담지자인 헐벗은 삶과 온통 이 헐벗은 삶에 기초한 법률-사회적인 정체성들(선거자, 피고용자, 저널리스트, 학생 그리고 에이즈 바이러스 보균자, 복창 도착자, 포르노 스타, 노인, 부모, 여성)로 추상적으로 재코드화된 다양한 삶의 형태들 간의 분할로 대체된다. 비천한 상태에 있는, 그것의 형태로부터 분리된 헐벗은 삶을 주권성 혹은 신성한 것이라는 상위의 원리로 간주해버린 것은 바타이유의 사유가 갖는 한계다. 그의 사유는 우리가 헐벗은 삶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없게끔 만들어 버렸다.


5. 푸코의 테제―그것에 따르면 오늘날의 쟁점은 삶이며 따라서 정치는 삶정치적인 것이 되었다―는 이런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변환의 의미를 깨닫는 방식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실 생명 윤리나 삶정치에 대한 작금의 토론들에서 의문시되지 않는 것, 즉 삶에 대한 생물학적 개념 자체가 의문시될 가치를 지닌 것이다. 래비노우가 대칭적으로 대립시킨 두 모델들―자기 자신의 삶을 연구와 끝없는 실험의 연구소로 만들어버린 백혈병에 걸린 과학자의 실험적 삶, 그리고 반대로 삶의 신성한 특성이라는 명목 하에 개인적인 윤리와 기술 과학 사이의 이율배반을 고조시키는 삶―은 사실 모르는 사이에 두 모델 모두 헐벗은 삶이라는 개념에 참여하게 된다. 오늘날 과학적 개념의 외양을 띈 채 나타나는 이 헐벗은 삶이라는 개념은 사실은 세속화된 정치적 개념이다. (엄밀하게 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삶이라는 개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 메다워(Medawar)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들이 가진 실제 의미에 대한 토론들은 생물학에서는 저차원적인 대화의 지표일 뿐이다. 이 단어들은 보다 주의 깊고 심화된 연구에 의해 밝혀질 수 있을 그런 어떤 본래적인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권력 체계 안에서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이데올로기가 가진, 사람들이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으나, 결정적인 기능이 있으며, 정치적 통제의 목적들에 과학적인 사이비-개념들이 점차적으로 더 많이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주권자가 특정한 정황 속에서 삶의 형태들에 작동시킬 수 있었던 헐벗은 삶의 채취 자체가 현재는 엄청나게 그리고 일상적으로 신체, 병, 건강에 대한 사이비-과학적인 표상들에 의해 실현되는 동시에, 삶과 개인의 상상력이라는 항상 보다 광범위한 영역들을 “의료화(médicalisation)”하는 것을 통해 실현되고 있다. 헐벗은 삶의 세속화된 형태이자, 그것[헐벗은 삶]과 말할 수 없음 및 투과할 수 없음이라는 성격을 공유하는 생물학적 삶은 문자 그대로 실제 삶의 형태들을 생존의 형태들로 구성해버린다. 그리고 생물학적 삶은 폭력, 외국인 신분, 병, 사고 속에서 갑작스럽게 현실화될 수 있는 불분명한 위협 마냥 그 생존의 형태들 속에 사유되지 않은 채로[신성 불가침의 것인양] 남아있게 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주권자이며, 그것은 주권자라는 이름으로 다소 의식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강자들의 얼빠진 가면 뒤에서 우리를 지켜본다.


6. 정치적인 삶, 즉 행복이라는 관념에로 정향되고 삶-의-형태 안에 결집되는 그런 삶은 이러한 분열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부터만 그리고 일체의 주권성으로부터 되돌아갈 수 없는 엑소더스[탈출]를 하는 것으로부터만 사유될 수 있다. 비국가적인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형태를 갖는다. 오늘날 삶-의-형태 같은 뭔가를 파악할 수 있는가, 즉 삶에 있어, 살아가는 와중에,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곧 역량의 삶(vie de la puissance)을 파악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삶의 형태들을 [삶을 그것의 형태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맥락으로, 즉 삶-의-형태로 구성하는 관계를 사유라고 부른다. 우리는 한 기관이나 정신적 능력을 개인적으로 행사하는 것을 사유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유란 삶이 지닌 잠재적인 성격과 인간의 지성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경험, experimentum이다. 사유한다는 것은 단순히 이런 저런 사물이나 이런 저런 현동적인[현실태로 존재하는] 사유의 내용에 의해 변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수용성에 의해 변용되는 동시에 각각의 사유 속에서 사유하기라는 순수한 역량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유는 그것의 본성이 잠재태로 있는 존재이다... 사유가 현실태적으로 각각의 지식이 되었을 때에도... [사유는]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에서는 잠재태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사유는 사유 자체로 사유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ꡔ영혼론ꡕ, 429a-b)
단지 내가 항상 그저 현실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역량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단지 내가 체험하고 내가 이해한 것 속에서 매 번의 삶과 이해 자체가 있을 수 있다면, 달리 말해 이런 의미에서 사유가 있을 수 있다면, 삶의 형태는 그 자신의 사실성(factcité)과 사물성(chosalité)에 있어서 삶-의-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삶-의-형태에서는 헐벗은 삶같은 뭔가를 고립시키는 일은 전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7. 여기서 논하고 있는 사유의 경험이란 항상 공통된 역량의 경험이다. 공동체와 역량은 여지없이 완전히 서로 동화된다. 왜냐하면 각각의 역량에 공동체의 원리가 내재한다는 것은 모든 공동체가 가진 필연적으로 잠재적인 특성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항상 이미 현실태일 뿐인 존재들, 항상 이미 이런 저런 것, 이런 저런 정체성일 뿐인 존재들, 그것들에 완전히 그네들의 역량을 탕진해버린 존재들 사이에서는 어떤 공동체도 있을 수 없으며, 그저 일치나 사실적인 구분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안에 잠재적인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벤야민이 언어에 대해 이해한 것처럼) 모든 소통은 무엇보다 [이미 현실태적으로] 공통된 것의 소통이 아니라, [잠재적인] 소통가능성의 소통이다. 다른 한편으로, 유일한 하나의 존재만이 있었다면, 그 존재는 절대적으로 무능했을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신학자들은 신이 무로부터(ex nihilo), 다시 말해 절대적으로 아무런 역량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내가 역량 혹은 잠재력을 갖는] 곳에는, 항상 이미 다양체가 있다(마찬가지로 언어, 즉 말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곳에는 따라서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의 존재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 정치 철학은 사색, bios theoreticos[관조적인, 사변적인 삶]을 분리되고 고독한 활동(“혼자의 다른 혼자에 대한 망명”)으로 만들어버린 고전적 사유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 아니라, 아베로에스주의, 다시 말해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된 유일하게 가능한 지성의 사유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이 점에서 단테는 ꡔ제정론 De monarchiaꡕ에서 사유의 역량[사유 능력] 자체 안에 multitudo[다양함 혹은 다중이 될 수 있는 잠재성 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나, 다의성을 살리기 위해 따로 번역하지 않음]가 내재해있음을 주장했다 : “인간의 사유 능력은 한 인간이나 특수한 한 공동체에 의해, 통째로 그리고 동시적으로, 현실태적으로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인류에게 multitude―이것을 통해서 이 전체 [사유] 능력이 실현될 수 있다―가 있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인류의 과제는 첫째는 사유하기 위해서 그리고 결국에는 행동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가능한 지성의 전 능력을 실현하는 것이다.”(De mon. I, 3-4.)


8. 우리가 말하고 있는 확산된 지적 능력과 맑스가 말한 일반 지성(general intellect)은 이러한 경험의 전망 속에서만 그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그것들은 사유의 역량 그 자체에 내재하는 multitudo를 명명한다. 지적 능력, 사유는 삶과 사회적 생산을 절합하는 여타의 다른 삶들 중 하나의 삶의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형태들을 삶-의-형태로 구성해내는 단일한 역량이다. 각 영역 속에서 헐벗은 삶과 그것의 형태를 분리시키는 것만을 긍정할 수 있을 뿐인 국가의 주권성에 맞서, 지적 능력과 사유는 삶과 그것의 형태를 끊임없이 다시 묶어주고 [삶으로부터] 형태가 분리되는 것을 막아주는 역량이다. 생산 과정 안에 사회적 지식을 단순히 그리고 대량으로 집어넣는 것―그것은 현 단계 자본주의(스펙터클의 사회)를 특징짓는 것이다―과 적대적인 역량과 삶-의-형태로서의 지적 능력 사이의 차이는 이러한 [삶과 형태의] 응집력과 분할불가능성을 통해 체험된다. 사유는 삶-의-형태, 즉 그것의 형태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삶이며, 이러한 분할 불가능한 삶의 내밀함이 드러나는 도처에, 신체적인 과정들과 익숙한 삶의 양식들의 물질성 속에, 마찬가지로 이론 안에, 거기, 바로 거기에만 사유가 있다. 그리고 이 사유, 이 삶-의-형태는, 헐벗은 삶일랑 “인간”과 “시민”―이들은 임시적이나마 헐벗은 삶의 외양을 띄며, 그 헐벗은 삶을 그네들의 “권리들”로 제시한다―에게 내버려두고, 도래하는 정치의 길잡이 개념이자 단일한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