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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스피노자, 욕망과 능력에 대하여

by 마리산인1324 2010. 10. 12.

mukungdong 에서 퍼왔습니다

http://blog.naver.com/mukungdong/20014700191

 

 

 

욕망과 능력에 대하여

 

 

1. 신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난 강의는 주로 '정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신의 능력에 관한 우리의 논의는 다소 불완전한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신체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번 강의를 통해 우리는 정신의 능력을 이해함에 있어 신체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스피노자의 주장을 확인한 바 있다.


서구 철학의 전통에서 신체는 영혼이나 정신에 비해 아주 낮게 평가되어왔다. 신체는 기껏해야 정신의 하수인에 불과했고, 심한 경우에는 정신의 이성적 작용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지목되었다. 스피노자의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 정신적 능력과 신체적 능력의 동등성 주장이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이러한 전통과 무관치 않다. 서구 철학의 전통 위에서 생각한다면 스피노자의 '심신평행론'이 '신체에 대한 강조'로 읽히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정신의 능력을 이해함에 있어 하나의 조건으로 신체의 능력에 대한 이해를 내세우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확실히 '이례적'이다. 스피노자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 채로 영혼이나 정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넌센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는 정신의 지배를 강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굳게 확신한다. 신체는 정신의 명령에 의해서만 운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며, 오직 정신의 의지나 사고력에 의존하여 여러 가지를 행한다. 왜냐하면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정신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경험적으로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신체의 이러저러한 활동이 신체의 지배자인 정신에서 생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EIIIP2주석)

 

스피노자는 오히려 '신체가 활발하지 못할 경우 정신이 사유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고 말한다. 가령 '신체가 잠이 들면, 정신도 신체와 함께 무의식 상태에 머물며 깨어 있을 때처럼 사고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신체가 이러저러한 대상의 이미지를 자기 안에 만들기에 적합한 정도에 따라 정신도 그런 대상을 고찰하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한다고 믿는다.' 인간들의 경험은 '혀만큼 억제하기 힘든 것도 없으며, 자신의 충동만큼 제어하기 힘든 것도 없음을 충분히 가르쳐주고 있다.'(EIIIP2주석) 스피노자는 자유의지니 자유로운 결단이니 하는 것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충분할 것이다.

 

이들은 젖먹이는 자유의지로 젖을 욕구한다고 믿으며, 성난 소년은 자유의지로 복수를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의지로 도망친다고 믿는다. 또 술주정뱅이는 ...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지껄인다고 믿는다.(EIIIP2주석)

 

이성만이 아니라 경험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바, '인간이 자기 행동을 의식한다고 해도,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그렇게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자유라고 믿는다'고 하겠다. 정신은 결코 신체의 '자발적 운동(spontaneous motion)'을 지배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정서(affectus)가 무엇보다도 신체의 능력과 관련해서 정의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행위]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affection)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에 대한 관념으로 이해한다.'(EIIID3)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정서들,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고 무언가에 대해 기뻐하거나 슬퍼하고 하는 모든 일들은 일차적으로 신체의 활동 능력과 관계한다. 신체의 능력에 저해되는 것에 대한 관념은 자신의 정신의 능력, 즉 사유 능력에도 저해되기 때문에(EIIP11), 우리의 정서가 정신으로 하여금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상상하도록 자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신체의 능력을 무시하고 정서에 대한 정신과 의지의 절대적 지배를 강조한 데카르트에 대해 스피노자가 불만을 표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정신이 정서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권을 소유할 수 있음을 제시하려 했던 그 유명한 데카르트를 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지성의 예리함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 나는 인간의 정서와 행동을 이해하기는커녕 그것을 저주하며 조소하는 사람들에게 반대한다.'(EIII 머리말) 정서에 대한 지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록 힘들더라도 훈련과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집 지키는 개와 사냥개의 예를 들어 설명하려고 한다. 집 지키는 개를 훈련을 통해 사냥개로 만들 수 있고, 사냥개를 훈련을 통해 토끼를 쫓지 않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도 적지 않게 이러한 견해에 기울고 있다.'(EV 머리말) 스피노자는 송과선에 대한 데카르트의 온갖 신비주의적인 설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분명하고 뚜렷한 것만을 지각하겠다고 말하고, 스콜라 학파의 명료하지 못함을 그렇게 자주 비난한 철학자인 그 사람[데카르트]이 그보다 더 은폐된[명료하지 못한] 주장을 펴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가 정신과 신체의 결합으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 나는 그가 그 결합을 근인(proximate cause)으로 설명하기를 바랐으나 그는 정신을 신체와 구분해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결합에 대해서 원인을 제시하지 못했고, 심지어 정신 자체에 대해서도 원인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전체 우주의 원인 즉 신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EV 머리말)


2. 코나투스(conatus)

 

신체의 활동 능력의 증감과 관련되었다고 해서 정서가 신체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신체의 변용(affectio)'인 동시에 그 '변용에 대한 관념'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신체, 정서에 대한 모든 결정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진다.(EIIIP2sc)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을 환기해보자면 그것이 사유의 속성에서 고찰되느냐, 연장의 속성에서 고찰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앞서 신체의 능력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첫 번째의 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신체의 관념이므로 신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신의 가장 중요한 노력'(EIIIP7, P10)이라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어떻든 정서를 고찰하면서 '신체의 자발적 운동'을 강조하고 '자유의지'를 비판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피노자가 프로이트의 작업을 상당 부분 선취한 게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했다. 가령 모로(Moreau)는 이렇게 말했다. '선프로이트적(pr -freudienne) 심리학은 데카르트적 틀에서 설명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신분석학은 스피노자적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모로의 말처럼 우리가 스피노자의 사상이 어떻게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해도 그들의 핵심적인 생각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프로이트처럼 스피노자 역시 우리가 노력하고 의욕하며 욕구하는, '의식' 이전의 어떤 필연적 성향(la disposition n cessaire)이 우리의 본질에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어떤 것을 선(善)이라고 판단해서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며 의지하고 충동을 느끼며 욕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EIIIP9sc)고 주장하기도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러한 노력이 현실적으로 파악된 우리의 본질,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실적인 본질(actual essence)이다.(EIIIP7)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인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모든 양태들에 함께 해당된다.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존재 안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EIIIP6) 실존하는 양태들은 자신들을 실존하게 하는 원인에 의해서 실존하는 것이고, 그 실존을 배제하는, 다시 말해서 자신을 실존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을 자기 안에 가지고 있지 않다(그런 원인은 항상 외부적이다). 더구나 모든 실존 양태들은 신의 속성을 표현하는 양태로서 어떤 식으로든 신의 능력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들은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자기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코나투스(conatus)다.


단순체의 경우엔 지난 강의에서 말했던 것과 같은 관성의 원리 형태로 코나투스가 작동한다. 정지하고 있던 신체는 외부의 더 큰 원인에 의하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정지해 있으려 하며, 운동하고 있던 신체는 외부의 더 큰 원인에 의하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운동하려고 한다. 즉 단순체에서 코나투스는 자신의 상태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난다. 조성체의 경우에도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성체의 경우에는 운동과 정지의 일정한 비율, 그 관계가 유지되어야 자신의 실존이 유지되므로, 그 노력이 비율이나 관계에 맞추어질 뿐이다. 그리고 자기를 실존하게 한 원인이 더 큰 외적 원인의 개입 없이 실존을 해하는 원인이 될 수 없으므로, 양태의 이러한 실존 지속 노력은 '유한한(finite)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한(indefinite) 시간 동안 지속된다.'(EIIIP8, P9)


나는 지난 강의에서 우리 인식이 처해 있는 불리한 상황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을 '양태들의 바다'에 내던져져 있는 한 양태인 인간이 감당해야 할 운명처럼 묘사했던 것 같다. 다른 실존 양태들과 뒤섞여 실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상상의 지배를 가능케 하고 적합한 인식의 생성을 방해한다. 그런데 인식에서의 불리한 상황은 사실 신체의 실존이 처해 있는 불리한 상황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항상 다른 실존 양태들과 마주쳐야 하고, 그것들에 자신의 삶과 죽음을 내맡겨야 하는 유한 양태로서 인간 신체가 처해 있는 운명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유한하다'는 것! 그것은 확실히 자연계에 존재하는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를 승인하는 것과 같다. '자연 안에는 더 힘이 있고 더 강한 다른 것에 의해 극복되지 않는 어떤 개물도 주어져 있지 않다. 어떤 개물이 주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주어진 개물을 파괴할 수 있는 더 힘이 있는 것이 존재한다.'(EIV공리) 인간도 예외가 아니어서 '인간의 실존을 지속시키는 힘은 제한되어 있으며, 또한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해 무한히 압도된다.'(EIVP3) 그래서 '모든 죽음은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우발적인 것'이라고 했던가!


어떤 신체의 능력이 정의될 수 있다면, 혹은 어떤 신체의 능력이 정말로 발휘되어야 한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신체의 실존 능력! 코나투스란 이 능력을 유지하고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신체의 실존 능력은 어떻게 가름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한 신체가 다른 외부 신체와의 마주침에서 보여줄 수 있는 변용(affectio) 능력에 다름 아니다. 한 신체가 자신의 각 부분들이 맺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유지하면서 외부 신체와 합체할 수 있다면, 마주침이 초래할 수 있는 불행을 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실존 능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 전화시킬 수도 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신체들에 대해서 그러한 변용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느냐 이다.


가령 우리의 위는 음식물이라고 부르는 사물들에 대해서는 뛰어난 변용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독극물이라고 부르는 사물들까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변용 능력은 같은 인간이라고 해도 서로 다르다. 어떤 종족의 경우에는 우리가 독초라고 부르는 식물들에 관한 놀라운 소화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이 장난삼아 던진 돌멩이와 마주친 개구리가 생사를 넘나드는 것도 개구리의 신체적 변용 능력이 돌멩이의 질량과 속도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들뢰즈(Deleuze)는 백인들이 남미의 인디언들을 전멸시켰던 방법을 예로 든 적이 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다니는 길에 유행성 감기에 걸린 사람의 옷, 즉 진료소에서 수집한 옷을 두었고, 인디언들은 감기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파리처럼' 죽어갔다.


결국 조성체에서 작동하는 코나투스는 그 신체가 수많은 방식으로 변용되는 데 적합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신체에 좋은 변용이 일어나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것, 그 능력과 노력이 그 신체에게 부여된 현실적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3. 세 가지 기본 정서 -욕망, 기쁨, 슬픔

 

인간에게 그러한 노력은 '욕망'으로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한 주석에서 그러한 노력을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그 노력이 정신에만 관계될 때는 의지(Wii)라고 일컬어지지만,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할 때는 충동(Appeitite)이라고 일컬어진다.  ... 충동과 욕망(Desire)의 차이는 욕망이 그 충동을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과 관계된다는 사실에 있다. 즉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이다.'(EIIIP9sc) 실존 양태의 그러한 노력이 그것의 현실적 본질이라면 의지나 충동, 욕망, 본능 같은 것은 분명히 우리의 본질을 지칭하고 있는 용어들이다. 욕망이란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코나투스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지나 충동, 욕망, 본능 같은 것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으며, 스피노자는 그것들을 모두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묶고자 한다.

 

나는 인간의 충동과 욕망 사이에서 실제로 아무런 차이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환기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의 충동을 의식하든 하지 않든 충동은 동일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동어반복을 범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욕망을 충동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이 충동, 의지, 욕망 또는 본능의 명칭으로 표시하는 인간의 본성의 모든 노력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나는 욕망을 정의하고자 하였다.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EIII, 정서의 정의)

 

욕망은 스피노자가 말하는 세 가지 기본 정서들 중 첫 번째 것에 해당한다. 욕망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코나투스는 우리 신체의 실존/활동 능력이 유지되거나 증가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혹은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우리 신체의 실존/활동 능력이 증가하는지 감소하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 정신이 제 아무리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상상하고(EIIIP12),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저해하는 것을 가능한 배제하려고 해도(EIIIP13) 그 자체로 능력의 증감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능력의 증감을 확인해줄 수 있는 정서는 무엇인가? 스피노자는 그것이 '기쁨'과 '슬픔'이라고 말한다. 기쁨이란 우리 신체의 능력이 커졌을 때, 그것이 더 많은 실재성과 완전성을 갖게 되었을 때의 정서이며, 슬픔은 그 반대 경우의 정서이다.(EIIIP11sc) 우리가 어떤 외부 신체와 마주치고서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 신체의 능력이 증가되었음을 의미하고, 반대로 슬픔을 느꼈다면 우리 신체의 능력이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욕망, 기쁨, 슬픔 이 세 가지가 스피노자가 말하는 기본적인 정서들이다. '나는 이 세 가지 이외의 어떤 다른 기본적인 정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머지 정서는 이 세 가지 정서에서 생기기 때문이다.'(EIIIP11sc)


코나투스가 작동하는 방향은 단순하다. 능력의 확장(실재성과 완전성의 증대)은 기쁨을 주는 신체와의 만남에서 생기고, 능력의 감소는 슬픔은 주는 신체와의 만남에서 생기므로 기쁨을 주는 신체와 만남을 자주 갖고 슬픔을 주는 신체는 피하면 된다. 그러나 그 방향이 단순하다고 해서 상황조차 단순한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신체의 출발점은 여러 번 강조하지만 매우 불리한 상황 속에 있다. 우리 자신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신체가 기쁨을 주는 신체인지 슬픔을 주는 신체인지 여부를 미리 알 수가 없다. 사색은 문제를 단순화시켜주기는 했지만 상황을 벗어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다른 신체와의 만남에서 얻어지는 기쁨과 슬픔은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약한 양태일수록 그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운'이다. 능력의 증대와 감소는 내게 다가오는 외부 신체와의 우발적인 마주침에 달려 있다. 이 때의 변용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기쁨에 대한 최초의 정의가 시도되는 {에티카} 제3부 정리11의 주석이 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수동(정념, passion)'으로 정의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과연 우리 능력의 증감을 외부 양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가?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다시 한 번 {에티카}의 구성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스피노자는 정서에 대한 논의를 마친 뒤 곧바로 인간의 예속적 상황(제4부)에 대해 논의한다. 그리고는 점차 자유에 관한 논의로 발전시킨다(제5부). 우리를 예속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스피노자는 {에티카} 제3부의 뒷 쪽에서 기쁨의 전혀 다른 생성 방식에 주목했다. '수동적인 기쁨과 욕망 이외에 우리가 능동인 한에서 우리에게 관계하는 기쁨과 욕망의 다른 정서가 존재한다.'(EIIIP58) 운에 의해 얻어지는 수동적 기쁨은 우리와 대상의 조화를 의미하며 우리 신체의 변용 역량의 증대를 의미하지만, 우리는 그 기쁨을 주는 대상에 대해서 적합한 관념을 갖지 못한다. 능력의 증대와 그것에서 얻어지는 기쁨은 우리 자신의 행위(작용) 능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기쁨은 결과적으로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그 원인인 기쁨은 우리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이므로, 우리는 그 원인에 대한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된다. 수동적 기쁨이 우연한 행위 능력의 증대로 파생된 것이라면, 능동적 기쁨은 우리 자신 행위 능력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생성된 것이다. 수동적 기쁨이 운에 의해 설명된다면, 능동적 기쁨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의해 설명되는 것이다.


우발적인 만남을 '당하는 것'보다는 적합한 만남을 찾아다니는 것이 안전한 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변용을 가할 외부 사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신이라면 몰라도 유한 양태인 인간이 수동의 운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인간은 수동/정념에 의해 설명되는 부분을 최소화하고, 능동/행위에 의해 설명되는 부분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4. 예속에서 자유로 나가는 길

 

스피노자 철학에서 기쁨과 슬픔, 능동과 수동, 자유인과 노예는 모두 질적인 위계를 나타내는 범주들이다. 니체에게서도 그렇듯이 스피노자에게 있어 강함의 문제와 지배의 문제는 다른 것이다. 아무리 후자가 지배적인 상황이라도 해도 강한 것은 전자이다.


먼저 기쁨에서 생겨난 욕망이 슬픔에서 생겨난 욕망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기쁨에서 생기는 욕망의 힘은 인간의 능력과 동시에 외적 원인의 힘에 의해 정의되지만, 슬픔에서 생기는 욕망의 힘은 오직 인간의 능력에 의해서만 정의되기 때문'이다(EIVP18). 좀 더 쉽게 풀이하자면 기쁨은 내 신체와 다른 신체가 만나서 능력의 확장을 경험했을 때 생기는 것이므로 확장된 부분만큼 다른 신체와의 합체 효과를 갖는 것이지만, 슬픔은 합체에 실패했으며 부분적으로 내 신체의 관계가 파괴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내 능력, 그것도 감소된 내 능력만으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능동은 수동보다 강하다. 일단 우리는 모든 변용을 자기 원인으로 설명하는 신적인 존재―신은 능동적인 변용만을 갖는다―가 아니므로, 우리 신체의 변용 능력이 수동적인 부분과 능동적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다. 능동적인 능력(puissance d'agir)과 수동적인 능력(puissance de ptir)의 대립! 그러나 수동적이라는 말과 능력(puissance)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들뢰즈가 잘 지적한 것처럼 좀 더 깊은 수준에서 보자면 '수동적 변용들은 (우리의 능력보다는) 우리의 무능력을 내포하고 있다.' 수동적 변용은 표면적으로는 우리 능력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구나 수동적 변용은 우리 자신이 그것의 원인을 알고 있지 못하므로 적합한 관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적합한 관념은 어떤 적극적인 것도 갖고 있지 않다.'(EIVP1) 부적합함에 대한 기준조차 거기에는 없다. 오직 적합한 관념만이 그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EIIP43) 우리들은 적합한 관념을 가질수록 운이 아니라 우리들의 능력 안에 있게 된다.(EVP3보충)


이러한 위계가 인간적 실존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자유인과 노예의 구분이다. 자유인이 능동적 변용의 최대치를 나타낸다면 노예는 수동적 변용이 최대치를 나타낸다. '노예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이 전혀 모르는 것을 행하지만, 자유인은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에게도 따르지 않고 그가 인생에서 가장 중대하다고 아는 것, 그러므로 자기가 가장 욕망하는 것만을 행한다.'(EIVP66) 적합한 관념이 적합함과 부적함의 기준을 제 안에 가지고 있듯이, 자유인은 자신의 행위의 참됨과 그릇됨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예는 그런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자유인이라면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수치스럽고 창피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좀 특정한 것으로 모아졌다. 어떻게 우리 자신을 능동적인 신체로 만들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예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로 변할 수 있는가? 이 과제가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의 과제가 된다. 윤리학은 좋은 만남과 나쁜 만남을 구별해주고 올바른 삶의 기술을 가르쳐주며, 정치학은 좋은 만남을 안정적으로 조직화하고 자유인들을 생산할 집합적 신체를 구성하는 기술을 가르쳐준다. (윤리학과 정치학은 제5강과 제7강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윤리학과 정치학(특히 정치학)의 실천적 장에 들어서기 전에 사색을 통해서 노예에서 자유인으로의 변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능동과 수동, 자유인과 노예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질적인 위계가 있다. 그것들 사이에는 축적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놓여 있지 않다. 그것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의 표현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처럼 보인다. '수동/정념을 합한다고 능동/행위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그러한 변신을 자극하고 유도하는 방법들을 담고 있다. 들뢰즈는 우리가 능동과 수동의 구분이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수동적 기쁨이 갖는 의미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수동/정념이 우리의 행위(능동) 능력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기쁨을 계속해서 파생시키는 경우, 다시 말해서 기쁜 수동/정념의 경우에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행위 능력에 다가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슬픔 수동/정념은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산출한 원인들은 물론이고 그 능력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게 만드는 반면 기쁜 수동/정념은 그 원인에 대한 사유를 자극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실존을 함께 정립하려고 하며, 기쁨을 주는 신체와 공동의 신체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려 할 것이다. 기쁨의 정서는 관계의 해체보다는 합체를 유도한다. '기쁨의 정서들은 확실히 발판(springboard)과도 같다.' 따라서 그것이 수동/정념인 경우라도 그 기쁨의 최대치를 맛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쁨의 정서들은 우리와 결합하는 신체와의 공통적인 무언가를 생각하도록 만든다. 스피노자가 제2종 인식이라고 불렀던 '공통 개념'이 여기서 그 의미를 갖는다. 공통 개념은 우리가 생성할 수 있는 최초의 적합한 관념이다.(cf. 보편 관념과 구분. 그러나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할 것이 있음.) 기쁜 정념의 잦은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공통 개념을 형성하도록 자극한다. 물론 이것은 기쁜 정념들의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변증법이 아니다. cf. 마슈레의 비판). 그것은 일종의 도약을 위해 필요한 발판이 되는 것이다. 조금의 경험으로도 곧바로 도약할 수 있으며, 많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도약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떻든 우리가 공통 개념을 형성하기만 하면 이제 변용은 더 이상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것이 된다. 정서는 더 이상 정념(수동)이 아니다. 이제 그것은 적합한 관념이다. 기쁨은 능동적인 것으로 생성된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공통 개념에서 주의할 것이 있다. 공통 개념은 막연한 추상의 결과물이 아니다. 들뢰즈가 그것을 수학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이라고 말했던 것도 무슨 공통 집합을 찾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이 마주치게 되는 하나 하나의 신체에서 그것이 규정된다. 운동이나 정지, 심지어 신조차도 추상적으로 고찰되어서는 의미가 없다. 점차 공통 개념이 더 일반적인 것으로 이행할 때 그것은 항상 신체적 능력의 확장과 나란히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제2종 지식에도 어떤 한계가 있다. 그것이 적합한 관념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본질보다는 실존을 이루는 관계에 대한 관념이며, 우리 신체와 외부 신체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된 특질들에 대한 관념일 뿐이다. 그것이 적합한 이유는 외부 신체의 부분으로 있는 만큼 우리 신체의 부분으로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 개념은 우리 신체만의 '특이한(singular)' 본질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마치 기쁜 수동/정념들을 아무리 많이 쌓아도 기쁜 능동/행위가 될 수 없듯이, 아무리 확대된 공통 개념이라 해도, 우리 본질의 관념을 구성하지는 않는다. '본질에 의해 설명된다고 해도 그 자체로 본질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제3종 지식인 직관지만이 본질을 구성한다. 사실 제3종 지식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그리 충분치 않다(그것이 무엇인지는 스피노자만이 알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제2종 지식과의 몇가지 차이점을 생각해 봄으로써 그것을 대략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제3종 지식은 본질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실존들의 관계를 생각하는 공통 개념과는 다르다. 그리고 공통 개념에서의 일치가 항상 '더'와 '덜'이라는 상대적인 문제에 빠져있다면 제3종 지식에서 다루는 본질은 이미 절대적인 일치를 이루고 있다. 실존들의 관계는 추상적 수준에서는 일치하는 것이지만 구체적 수준에서 그것의 일치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본질들은 곧바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므로 절대적인 일치를 보장받는다.


우리의 본질이 사실상 사실상 우리의 능력이라면, 신은 우리의 본질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표현한다. 신은 무수히 많은 특이한 본질들로 자신의 능력을 표현한다. 각각의 특이한 본질들은 단일한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므로 이미 내적으로 일치되어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서로를 파괴할 어떤 외부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본질들의 세계는 절대적 일치의 세계이면서 영원한 세계이다. (cf. 불멸성에 대한 오해. 1) 영혼의 단순성에서 불멸성 도출 2) 지속을 무한히 연장시킴으로써 3) 신체가 지속하는 한에서는 그것을 경험할 수 없는 것으로.)


보셰리니(E.G. Boscherini)의 지적처럼 '자연(신)의 부분으로서 우리는 자연이 우주 안에서 무한한 사유 역능으로 표현하고, 무한한 행위 역능으로 표현했던 것을 우리 자신의 수준에서 반복'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신을 깨닫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또한 신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이 된다. 우리의 본질이 영원하다는 것은 바로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측면에서, 즉 '신 안에는 각각의 인간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sub specie aeternitatis)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EVP22)는 측면에서다. 우리가 죽은 후에는 당연히 우리 신체를 구성했던 외연적(extensive) 부분들이 그 본질을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본질은 다른 외연적 부분들이 그것을 표현하는 관계를 구성했을 때 다시 표현될 것이며, 실존 여부와는 상관없이 신 안에서 항상 존재할 것이다. 우리가 살았을 때에도 그것은 우리에 의해서 표현되고 (3종 지식에 의해) 인식될 수 있기 때문에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물론 얼마나 자주 경험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제2종 지식에서도 기쁨이 생겨났다. 제3종 지식에서도 기쁨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기쁨이다. 사실상 그것은 기쁨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2종 지식에서 생겨나는 기쁨은 '능력의 상대적 증가'에서 오는 것이지만, 제3종 지식에서 생겨나는 기쁨은 '증가'를 말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적이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지복(beatitude)이라고 불렀다. 절대적 기쁨! 그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사랑(인식과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신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cf. Deleuze -순수 강렬도로서의 지복)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EV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