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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죠르죠 아감벤 인터뷰 /멀티튜드

by 마리산인1324 2010. 10. 12.

<멀티튜드>에서 퍼왔습니다

http://multitude.co.kr/241

 

 

 

* 원   제 : “Das Leben, ein Kunstwerk ohne Autor. Der Ausnahmezustand, die Verwaltung der Unordnung und das private Leben. Ein Gespräch mit Giorgio Agamben,” interview with Ulrich Raulff in the Süddeutsche Zeitung. April 6, 2004.

* 영역본 : Interview with Giorgio Agamben―Life, A Work of Art Without an Author: The State of Exception,

          the Administration of Disorder and Private Life

* 출   처 : http://www.sueddeutsche.de

           German Law Journal No. 5 (1 May 2004) (http://www.germanlawjournal.com/article.php?id=437)

* 옮긴이 : sanggels@gmail.com


죠르죠 아감벤 인터뷰

―삶, 저자 없는 예술 작품 : 예외상태, 무질서의 관리와 사적인 삶


* 『독일법저널』 편집자 주 : 2004년 3월 4일, 로마에서 울리히 라울프Ulrich Raulff가 진행한 이 인터뷰는 애초 독일에서 2004년 4월 6일, 『남독일신문』(Süddeutsche Zeitung)에 수록되었다. 이 인터뷰의 번역본을 『독일법저널』German Law Journal에 싣는 것을 허락해 준 울리히 라울프와 죠르죠 아감벤에게 감사드린다. [영역본] 번역은 『독일법저널』의 공동 편집자인 Morag Goodwin(EUI, Florence)이 맡았다. 모든 각주는 편집자가 이번 출간을 위해 제공한 것이다.

 

* 옮긴이 주 : 아감벤과 라울프의 인터뷰가 어떤 언어로 진행되었는가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영역본을 토대로 초역을 한 후, 독일어 원판과 대조한 결과, 몇 가지 의심스런 바가 있어 독일어판을 기초로 전면 수정을 가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독일어판과 영역판에서 적절한 어휘나 용어, 문장의 흐름을 취사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각주는 『독일법저널』의 편집부가 붙인 것이며, 각주 번호 옆에 *가 붙은 것은 옮긴이의 것이다.


라울프 : 최근 독일에서도 당신의 최신작 『예외상태』가 출판되었습니다.1) 이 책은 언뜻 보기에도 칼 슈미트와 연결되어 있는 개념에 관한 법제사적인 분석입니다. 당신의 “호모 사케르” 기획2)에서 이 개념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아감벤 : 『예외상태』는 『호모 사케르』에서 시작된 일련의 계보학적 에세이의 일부이며, 이것은 또한 4부작 중 하나를 이룰 예정입니다. 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이 책은 두 가지 논점을 다룹니다. 첫째는 그 역사적 본성에 관한 것입니다. 즉, 예외상태Ausnahmezustand 또는 긴급사태/비상사태Dringlichkeitszustand가 오늘날 통치government의 패러다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통상적이지 않은 어떤 것etwas Außergerwöhliches/extraordinary이 예외로 간주되었으나 [제한된 기간 동안에만 유효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역사적 변천에 의해 예외는 통치governance의 규범적인항상적인/정상적인 형태가 되었다는 생각입니다.3) 저는 이 변천의 귀결이,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가 처한 상태에서 지닌 의미를 분명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두 번째는 철학적인 성격을 띠는 것인데요, 법과 법의 부재무법,4) 법과 아노미무법률상태5)의 기묘한 관계를 다룹니다. 예외상태는 법과 법의 부재 사이에서 감추어져 있으나 근본적인 관계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허void하고 텅 비어Leerstelle 있지만, 바로 이 텅 빈 공간이야말로 법체계legal system를 구성하는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라울프 : 이미 당신은 “호모 사케르” 기획의 제1권[『호모 사케르』]에서 예외상태의 패러다임이 강제수용소에 존재한다고, 혹은 수용소와 일치한다고 썼습니다.6) 지난해 당신이 이 개념을 미국 정부, 미국 정치에 적용했을 때, 예상대로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거셌습니다. 당신의 비판이 여전히 올바르다고 생각하십니까?7)

 

아감벤 : 예외상태라는 개념의 그러한 [현대 미국정치에의] 적용에 관해 말하자면, 저는 [이미] 아우슈비츠에 관한 책8)에서 같은 비난9)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역사가가 아닙니다. 저는 패러다임을 좇아 연구합니다. 하나의 패러다임은 사례Beispiel, 역사적으로 특이한 현상의 모범Exempel과 같은 겁니다. 푸코의 경우 그것이 판옵티콘이었듯이,10) 제 경우에는 호모 사케르나 무젤만, 또는 예외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패러다임을 방대한 양의 현상들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합니다만, 또 다시 푸코와 비교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판옵티콘에서 ‘판옵티코니즘’이라는 고유한 사고방식을 발전시켰던 푸코와 유사하게 역사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11) 이러한 방법에 의한 분석은, 그러나 사회학적 연구와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12)

 

라울프 : 그렇지만 사람들은 당신의 대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미국의 정책과 나치의 정책을 동일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감벤 : 하지만 저는 오히려 관타나모 수감자들에 관해 말했습니다.13) 그리고 이들이 처한 상황은 법적으로 말하더라도, 실로 나치의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관타나모의 억류자들detainees은 전쟁포로의 지위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어떤 법적legal 지위도 갖고 전혀 있지 않습니다.14) 이들은 그저 노골적인raw 권력에 종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어떠한 법적 존재도 아닙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우선 국적을 완전히 박탈당했고,15) 다음으로 뉘렌베르크 법 후에도 남아 있었던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기게 되었으며,16) [최종적으로는] 법적 주체로서도 또한 말소되어 버렸습니다.

 

라울프 : 미국의 치안정책17)과의 연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관타나모의 사례는, 앞에서 당신이 서술했던, 법을 통한 통치governance에서 질서의 부재에 대한 [행정적] 관리administration를 통한 통치로의 이행이라는 틀에 속하는 문제일까요?

 

아감벤 : 이것은 운영-관리management를 통한, 행정-관리verwaltung를 통한 권력지배18)라는 모든 치안행위의 배후에 감춰져 있는 문제입니다. 1978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19) 미셸 푸코는 치안이 어떻게 18세기에 통치government의 패러다임으로 되는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케네, 튀르고를 비롯한 기타 중농주의 정책가들에게 치안은 기아와 대파국을 방지하는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치안이란 기아와 대파국이 일어날 수 있도록 내버려두고 이윤을 올리는 방향으로 그것이 귀결되도록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수단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푸코는 통치모델로서 치안안전, 훈육규율, 법을 대립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요소―법과 법의 부재무법―와 이것들에 대응하는 통치governance의 형식들―법을 통한 통치와 관리운영를 통한 통치20)―이 하나의 이중-구조 또는 하나의 체계의 일부를 이룬다는 점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 가를 이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칼 슈미트가 자주 인용했던 프랑스의 격언이 있습니다.21) Le Roi reigne mail il ne gouverne pas(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가 그것입니다.22) 이것이 이중-구조 ― 군림하다régner와 통치하다gouverner ― 의 문턱들경계영역termini입니다. 벤야민은 이 한 쌍의 범주에 이끌다-명령하다schalten와 통치하다-관리하다walten라는 한 쌍의 개념들을 끌어들입니다.23) 이러한 두 개의 역사적 분리-결합dissociation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맨 먼저 이러한 두 개의 구조적 상호관계를 꽉 움켜줘야만 합니다.

 

라울프 : 다시 묻겠는데요, [정말로][에 의한 지배]의 시대는 끝났나요? 우리는 지금 인류의 사이버네틱스에 의한 규제와 순수한 관리에 의한 행정법규명령(Schaltung)24)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가요?

 

아감벤 : 얼핏 보기에 행정관리을 통한 통치, 운영-관리를 통한 통치가 실제로 우세를 차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법에 의한 지배는 퇴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무법無法을 운영-관리 또는 행정-관리에 의해 극복하는 시도의 성공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라울프 :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법체계 전체의 확장과 법 규제의 끔찍한 증대 또한 목격하고 있지 않나요? 일상적으로 보다 많은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고, 예를 들어 독일인들은, 일상적으로는 베를린[행정]보다는 카를스루에Karlsruhe[사법]에 의해 보다 강하게 통치되고 있다고 느낍니다.25)

 

아감벤 : 당신도 알고 있듯이, 그러한 체계를 구성하는 두 요소들은 서로 공존하지만, 두 요소는 각각의 극단으로 수렴되게끔 내몰리게 되며, 또한 그렇게 하면 할수록 둘은 최종적으로는 양극분해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노미무법률상태와 혼란무질서의 극한이 어떻게 법제화legislation와 완벽하게 공존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라울프 : 그러한 상태를 묘사한 당신의 방법에서 보면 저는, 지금까지 이상으로 보다 선명한 양극적 대립으로 나아가는 분열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다른 에세이에서, 정치적인 것의 고전적 영역이 보다 더 협소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다소 치명적이지만 쇠퇴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감벤 : 벤야민을 가지고 답변을 해 보겠습니다. 쇠퇴와 같은 것은 없다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시대는 항상 이미 몰락하고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죠. 당신이 공/사와 같은 정치적-철학적으로는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고전적 구별을 채용하더라도, 저는 그러한 구분에 얽매여 이러한 두 항 중의 어느 하나가 소실되었다고 비탄해하는 것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저는 둘의 뒤얽힘에 훨씬 흥미를 느낍니다. 제가 이해하고 싶은 것은 이 체계가 어떻게 기능작동하는가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체계가 늘 쌍극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체계는 늘 대립에 의해 작동합니다. 공과 사의 대립으로서가 아니라, 왕과 도시, 예외와 규칙, 군림과 통치 등으로서도 쌍극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진정한 관건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이원di-chotomies적이 아니라 ‘쌍극bi-polarities’적인 대립으로서,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긴장을 포함한 대립으로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두 개의 상이한 실체 사이에 명확한 분할선을 긋고, 분리할 수 없이, [양자]물리학에서의 그것과 유사하게, 영역을 지배하는 논리를 필요로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극성極性은 이 영역 각각의 지점에 현전하며, 거기에서 작동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당신은, 갑작스레 결정불가능성Ununterscheidbarkeit 또는 무차별성indifference의 영역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예외상태란 이러한 영역들 중 하나입니다.

 

라울프 : 사적인 것의 한계endpoint―와 이것에 수반된 현실―가 당신의 체계적인 검토라는 의미에서도 여전히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까? 거기에는 방어해야만 할 무엇인가가 있을까요?

 

아감벤 : 우선 무엇보다 명백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차이를 결정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태가 빈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전적 대립에서의 양 측면들이 그 현실성을 계속 상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한 관타나모의 억류시설이 이러한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바로 그 장소locus par excellence라는 것입니다. 특히 예외상태는 이러한 구별의 무력화neutralization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개념이 여전히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프라이버시사적인 것의 보호와 옹호에 전념하고, 또 이 영역 내부에 속하는 것과 속하지 않는 것을 정의하고자 하는 무수한 조직들과 활동들을 생각해 봐도 됩니다.

 

라울프 : 그렇다면, 이것은 당신의 작업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습니까?

 

아감벤 : 제가 앞에서 말했듯이, “호모 사케르” 기획은 총 4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지막이자 제게는 가장 흥미로운 책은 역사적 논의에 할애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삶의-형식들Lebens-formen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개념에 관해 생각하고 싶습니다. 제가 삶의-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관련된 형식으로부터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삶, 벌거벗은 삶과 같은 것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삶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프라이버시’사적26)라는 개념이 도입되어 기능합니다.

 

라울프 :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신은 분명히 푸코와 다시 연결되는 군요. 어쩌면 말년에 “함께 살기Vivre ensemble”라는 논제에 관해 강의를 했던 롤랑 바르트와도 연결되구요.27)

 

아감벤 :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푸코는 이런 생각을 했을 때 그리스와 로마로 역사적으로 퇴행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논제에 관해 생각할 때, 당신은 당신 발아래에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즉각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푸코의 이른바 고고학을 개입시키지 않는다면,28) 현재로의, 그리고 직접적인 것으로의 어떠한 접근방법도 갖고 있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 명확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하지만 고고학이 할 수 있는 것은, 고고학의 대상이 삶의-형식인 이상, 바꿔 말하면, 그것이 직접적인 삶의 경험인 이상, 간단하게는 말할 수 없습니다.

 

라울프 :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거의 모든 철학자는 선이나 올바름이라는 비전, 또는 철학적 삶의 비전과 같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의 경우 그것은 무엇입니까?

 

아감벤 :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든다는 관념은, 오늘날에 관해서 말하자면, 대개 푸코에게, 그리고 자기에의 배려라는 그의 관념에 귀속됩니다.29) 위대한 고대사가古代史家인 피에르 아도Pierre Hadot는 고대 철학자들에게 자기에의 배려란 삶을 예술작품으로 구축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정반대로 일종의 자기 상실dispossession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푸코를 논박했습니다.30) 아도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푸코에게는 이 두 가지가 서로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저자 개념에 대한 푸코의 비판을 기억해야만 하며, 저자성authorship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해체를 기억해야만 합니다.31)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삶, 좋고 아름다운 삶은 무엇인가 다른 어떤 것입니다. 즉 당신의 삶이 한 폭의 예술작품으로 될 때, 당신은 그것의 원인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당신이 자기 자신의 삶이나 자기 자신을 ‘고안된’ 어떤 것etwas Gedichtetes으로 느끼는 바로 그 지점에서, 그러나 주체는, 즉 저자는 더 이상 거기에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구축은 푸코가 ‘자기의 단념se deprendre de soi’으로 언급한 것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저자 없는 예술작품이라는 니체의 관념이기도 합니다.

 

라울프 : 과거 30여 년에 걸쳐 정치의 비-배타적인 형식nicht-exklusive Form을 주조해 내려고 시도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니체는 결정적인 참조점이었습니다. 당신에게는 왜 그렇지 않는 거죠?

 

아감벤 : 무슨 말을 하는 건지요! 제게도 니체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오히려, 영원회귀란 구류라는 죄, 학교에서 같은 문장을 수천 번 반복하여 필사하라고 통고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벤야민에게 아주 강한 공감을 느낍니다.

 

라울프 : 하지만 몬티나리Montinari 전후의 이탈리아에서의 문헌학은, 니체가,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가 그렇게 믿었던 정도만큼 강력한 저자가 아니라, 오히려 독해와 관념 ― 방금 전에 당신이 불렀듯이 저자 없는 예술작품 ― 에 관한 열려 있고 횡단되며 교차되는 저자라는 점을 엄밀하게 증명했습니다.

 

아감벤 :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주체의 현전을 잊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겠죠. 우리는 저자로부터 작품을 지켜야만 합니다.





1) * Giorgio Agamben, Stato di eccenzione, Torino : Bollati Boringhieri editore e.r.l., 2003.; State of Exception, trans., Kevin Attell, Chicago &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2) 예를 들어 Giorgio Agamben,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Daniel Heller-Roazen tran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8)[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박진우 옮김, 새물결, 2008.]을 보라. 호모 사케르란 고대 로마법에 따르면, 희생제의의 제물이 될 수는 없으나, 그를 살해하더라도 누구든 그 살해자에게 살인죄를 묻지 않게 되는 그런 인간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이 개념을 우리 시대의 주요한 정치적 난점 ― 나치즘에서 그 정점에 달했던 최악의 종류의 전체주의의 대두 ― 을 독해하기 위한 지렛대로 이용한다.


3) * 영역판에서는 government와 governance가 번갈아 쓰이고 있는데, 내용상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이는 독일어 원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독일어판에서는 regieren/Regierung가 쓰이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이 둘을 구별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government는 ‘통치’로 옮겼고, governance는 ‘통치governance’로 표기해 두었다.


4) * 독일어판의 ‘Gesetzlosigkeit’를 영역판에서는 ‘lawlessness’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우선 ‘법을 결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법-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법의 부재’를 뜻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동시에 ‘법에 준하지 않는다’를 뜻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outlaw, 즉 ‘법익피탈’(법률상의 은전과 보호를 빼앗김)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 글에서나 『호모 사케르』에서나, ‘호모 사케르’는 lawless와 outlaw라는 뜻을 동시에 품고 있다고 하겠다.


5) * ‘아노미, anomy’는 보통 ‘법률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데, 말할 것도 없이 이 ‘아노미’는 어원상 ‘a-nomos’, 즉 ‘법-이전/법-아님’을 의미하며(예를 들어 에밀 뒤르켐의 『사회분업론』과 칼 슈미트의 『대지의 노모스』를 대비하여 참조할 것), ‘법의 부재’와 동의어이다.(이 ‘a-nomos’는 ‘a-nomisma’, 즉 ‘화폐-이전/화폐-아님’과 대비하여 이해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6) * Giorgio Agamben, Homo Sacer : le pouvoir souverain et la vie nue, tr. par Mariléne Raiola, Seuil, 1995, pp. 129 이하.


7) * 이것은 아감벤이 NYU의 초대를 받아 미국에 입국할 때, 지문과 얼굴사진을 찍는 새로운 입국통제에 반발하여 이에 항의하고, 강의를 취소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점에 관해서는 Giorgio Agamben, “Non au tatouage biopolitique,” Le Monde, 12 Javier 2004 [http://www.philosophie.org/giorgio.html ; 영역판, “No to Bio-Political Tattooing”, http://www.ratical.org/ratville/CAH/totalControl.pdf]를 볼 것.


8) Giorgio Agamben, Quel che resta di Auschwitz : l'archivio e il testimone: homo sacer III. (『아우슈비츠의 남은 것』), Torino : Bollati Boringhieri, 1998. ; Ce qui reste d'Auschwitz: l'archive et le temoin: Homo Sacer III. trans., Pierre AlferiParis: Payot & Rivages, 1999. .; Remnants of Auschwitz: The Witness and the Archive, trans., Daniel Heller-Roazen, 1999.(Zone Books 2002 재간행).


9) * 영역판에서는 ‘remonstrance’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사전적으로는 ‘간언, 타이름, 충고’를 뜻한다. 독일어판에는 ‘Vorhaltungen’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책하다, 비난하다, 책망하다’ 등을 뜻한다. 간언과 비난이라는 두 말의 틈을 생각할 때 이 용어는 상당히 흥미롭다.


10) 예를 들어 Michel Foucault, The Foucault Reader 217 (Pantheon 1984)을 보라. “벤담의 유토피아가 물질적 형태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고해성사 제도에서였습니다. 1830년대에 판옵티콘은 대부분의 감옥 프로젝트의 건축적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훈육의 지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한 방식이었습니다.” 판옵티콘은 여러 층으로 나뉜 건물들로 둘러싸인 채 중앙에 탑이 하나 있으며, 가운데에는 커다란 뜰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11) Id. at 212. “... 그리고, 근대사회의 보편적 법치주의juridicism가 권력의 실행에 대해 한계를 정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보편적으로 확산된 판옵티콘주의는, 광대한 동시에 세밀한 기계가 법의 이면underside에서 작동하는 것을 가능케 했으며...”


12) * 조금은 당혹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이 말은, 잘 음미해 둘 필요가 있다. ‘사회학적 연구’와 혼동되는 것을 거부하려는 이 말은 뒤르켐을 의식한 언급으로, 역사가든 철학자든 사회학자에 대한 경계를 늦춰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이다.


13) * 그렇지만 ≪르몽드≫에 게재된 그의 주장이 관타나모 문제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위의 인터뷰 참조.


14) 2004년 4월 20일, 미국대법원은 관타나모 억류자들의 법적 지위와 사법적 접근[법적 접견]judicial access을 결정하기 위한 소송에서 격론을 벌였다. 예를 들어 Rasul v. Bush, No. 03-334 (D.C. Cir filed 2 Sept. 2003), cert. granted 124 S.Ct. 534 (2003)를 보라.


15) * 원문은 denaturalisieren이 아니라 denationalisieren이며, 후자는 최근 들어 자주 사용되고 있다.


16) 1934년에 시행된 뉘른베르크 법The Nuremberg Laws에서의 시민권에 관한 법을 포함한 나치의 「자유에 관한 당총회」는 “‘독일인의 혈통을 갖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에 관해서는 Ingo Müller, Hitler’s Justice 96-97 (Deborah Lucas Schneider tran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1)을 참조.


17) * 영역판에서는 ‘Sicherheit’를 관례대로 ‘security’로 옮기고 있다. 보통 이를 ‘안전’이나 ‘안보’로 옮기는 경우가 많은데,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의 제목을 『안전, 영토, 인구』로 번역하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그러나 ‘Sicherheit’나 ‘Sicherheitpolitik’는 ‘치안’ 또는 ‘치안정책’으로 옮기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18) * 여기에서는 ‘Herschaft’를 ‘Regierung’과의 차이를 감안하여 ‘권력지배’로 옮겼다. 영역판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19) * 독일어판에서는 1978년이라고 되어 있으나, 영역판은 1968년이라고 되어 있다. 내용상 이것은 Michel Foucault, Naissance de la biopolitique: Cours au Collége de France, 1978-1979, Seuil, 2004를 가리키기에 전자가 올바르다.


20) * 독일어판에서는 ‘Herrschaftformen’, 즉 ‘지배의 형태들’로 되어 있으나, 맥락상 영역판에서 표기한 ‘governance’가 올바르다.


21) * 예를 들어,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이나 『헌법론』을 보라. 슈미트는 『헌법론』에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를 인용한 후에, 이어서 “<통치하다gouverner>라는 것을 지우면 <군림하다régner>에 도대체 무엇이 남는가라며 독일의 위대한 헌법학자 막스 폰 제이텔이 제기했던 것에 대해, 힘(Macht/potestas)과 권위(Autorität/auctoritas)를 구별하여 정치적 힘에 대한 권위의 독자적 의미를 의식함으로써 대답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22) * 용어에 관해 한 마디 하자. 이 프랑스의 격언을 독일어에서는 Der König herrscht, aber er regiert nicht라고 표기하고 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의 간극(밑줄에 주의)이 일으키는 바에 주의할 것.


23) *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를 볼 것. schalten은 어의상 전철(轉轍)에 의한 변환, 전환을 의미하며, 비유적으로는 ‘흐름에 저항하여 조작하다 혹은 이끌다’를 의미한다. 또한 walten은 보다 직접적으로 ‘관리지배하다, 통치하다’ 혹은 ‘뜻대로 조치하다, 우위에 있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전자는 비유적 용어이며, 후자는 첫 번째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schalten und walten처럼 이중구조가 접속하면, 그것은 ‘뜻대로 행동하다․처신하다’를 의미한다.


24) * 여기에서 계속 ‘행정법규명령’으로 옮긴 Schaltung은 영역판에서 decree로 표기되어 있다.


25) 카를스루에Karlsruhe는 독일연방헌법재판소Bundesverfassungsgericht(BVerfG)와 독일연방대법원Bundesgerichtshof (BGH)이 있는 곳이다. 카를스루에의 법적-정치적 의미에 관해서는 Gerhard Casper, The “Karlsruhe Republic” – Keynote Address at the State Ceremony Celebrating the 50th Anniversary of the Federal Constitutional Court, 2 German Law Journal No. 18 (01 December 2001)을 보라(at http://www.germanlawjournal.com/article.php?id=111)


26) * 여기에서 말하는 ‘프라이버시’는 타자의 동반이나 관찰, 또는 감시가 없는 상태를 가리키며, 나아가 은거나 은둔의 장을 함의한다.


27) * Roland Barthes, Comment vivre ensemble: cours et séminaires au Collége de France, 1976-1977, Seuil/IMEX, 2002.


28) 예를 들어 Michel Foucault, L’Archéologie du savoir, Gallimard, 1969; Archeology of Knowledge (Pantheon 1982)을 보라.


29) * Michel Foucault, Le Souci de soi, Gallimard, 1984.


30) 예를 들어 Pierre Hadot, What is Ancient Philosophy (Michael Chase trans., Belknap 2004); Philosophy as a Way of Life: Spiritual Exercises from Socrates to Foucault (Pierre Hadot and Arnold Davidson eds., Michael Chase trans., Blackwell 1995)을 보라.


31) * Michel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Bulletin de la Société française de Philosophie, 63, no. 3, 1969.[장진영 옮김, 「저자란 무엇인가?」, 김현 편, 『미셸 푸코의 문학비평』, 문학과지성사, 1989년, 238~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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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영역본을 기초로 한국어로 나름 정리와 해설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는 http://blog.aladdin.co.kr/apouge/2290260 을 보라.
* 여기에서 나는 '조르조'가 아니라 '죠르죠'로 옮겼다. 발음상 '지오르지오'가 문제가 있다면, 발음상 '조르조'가 아니라 '죠르죠'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