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聚辨軒>(2009-11-16 04:42)에서 퍼왔습니다
http://blog.aladin.co.kr/booktopia/3209338
인민이 파산한 시대에 목적없는 수단을 통해 삶-의-형태를 구성하기
『목적 없는 수단』 -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
(Mezzi senza fine: Note sulla pololtica,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6)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양창렬 옮김 / 난장 / 2009년 11월
1. 새로운 사유의 실험실로서의 『목적없는 수단』
아감벤의『목적 없는 수단』(Meaai senza fine: Note sulla pololtica, Torino: Bollati Boringhieri, 1996; 국역본, 김상운/양창렬 역,『목적 없는 수단』, 난장, 2009)은 미학에서 정치철학으로의 전회를 시도하는 그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실험실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저서이다. 이 책에는 모두 열 한 가지의 텍스트가 실려 있는데, 그것들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리고 해당 텍스트가 생겨난 상황에 따라서 여전히 열려 있는 실험실과 마찬가지며, 때로는 그 실험실의 원초적 중핵을 예고하고, 때로는 단편과 파편을 제시한다."(10) 그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이 책을,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각 텍스트들을, 그리고 그 텍스트들이 담아내고 있는 소재와 핵심적인 개념어들을 그의 사유의 모태로서 읽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이 책에는 그의 사유의 핵심적 주제인 '인간의 자연적 생명', '예외상태', '강제적 수용소', '난민', '스펙터클 (그리고) 언어활동', '(정치의 고유 영역으로서의 순수 수단의 영역인 몸짓의 영역' 등.
이 책을 읽기 위해 필요한 방법론적 전략은 무엇인가? 역자들은 이 책이 크게 두 가지 주제(정치철학적 실험/미학-정치적 실험)와 세 가지 내용(비오스, 조에, 예외상태, 강제수용소, 난민 등/삶-의-형태/스펙터클, 언어활동, 몸짓, 얼굴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독해하기 위해 1) 이론적 측면에서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실험과 기획을 2) 실천적 측면에서 이 저작이 어떠한 현실의 정세와의 관련성 속에서 씌어진 것인지를 독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 주장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면서, 아감벤의 이 책에 담긴 핵심적 내용을 숙지하고자 한다.
2. 삶-의-형태
아감벤은 우리가 "인민들이 파산한 이후에 이후에 살고 있다."(153)고 말한다. 이 파산의 경험은 독일인들에게는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스페인인들에게는 내전을, 그리고...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이 파산을 하나의 유산으로서의 과제로 인식한다. 그럼에도 문제는 그 과제를 해결할 <인민>이 부재한 상황(파국의 파국)임을 부정적으로 말한다. 어쩌면 현재의 상황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인민>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의할 필요성을 요청받는다.
아감벤은 인민은 "총체적이자 일체화된 정치체로서의 [대문자] 인민Popilo과, 가난하고 배제된 자들의 부분적이자 파편화된 다수로서의 [소수자] 인민popilo'이 있다고 보고, 우리가 인민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일한 주체가 아닌 이 대립하는 양극을 오고가는 변증법적 진동의 결과"(40)라고 본다. 따라서 그것은 <조에의 비오스화>, 즉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는 주권권력의 <예외상태>적인 정치적인 실천 전략의 실제적 산물로서 구성된 주체이다. 따라서 "인민이라는 개념은 그 안에 근본적인 생명정치적 균열을 이미 언제나 담고 있는데, 인민은 이미 언제나 포함되어 있는 전체에 속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전체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다."(42) 따라서 독일에서 이루어진 나치에 의한 유대인 몰살은 인민이 어떻게 근대성의 내부에서 예외상태적 형태로 창출될 수 밖에 없으며, 또 그것이 벌거벗은 생명의 존재로규정될 수밖에 없는지를 나타내는 상징적 주체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배제된 자들인 인민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인민을 분할하던 분열을 메워보려는 집요하고도 체계적인 시도에 불과하다."(44)
동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은 바로 이런 삶이다. 이는 곧 <벌거벗은 생명>을 주체로서 생산하는 주권권력(예외가 상례가 되는 상태를 통해서 작동하는 권력의 형태) 혹은 생명권력의 정치적, 실천적 전략을 통해서 작동하는 세계에서의 삶이다. 이 세계는 조에와 비오스의 구분에 의해서도, 단순히 조에의 비오스화에 의해서도 작동되지 않는다. 오히려 조에와 비오스의 식별불가능한 형태로 작동되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인민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주권권력이 매번 결정하는 예외상태, 즉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권력의 궁극적 토대로서 분명하게 다시금 소화되는 상태"(16)를 작동시킴으로써만 존재하는 세계이다. 따라서 예외상태의 범주에 들어가는 주체는, 즉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동시에 그 안에 포함시켜야 하는 궁극적인 주체는 항상 벌거벗은 생명"(16)으로서의 인민인 것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이러한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기획한다. 그것은 바로 <삶-의-형태>라는 개념을 통해서 제시된다. <삶-의-형태>라는 개념은 "그 형태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삶, 그것으로부터 벌거벗은 생명 같은 것을 고립시킬 수 없는 삶,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살아가는 와중에 무엇보다도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14~15)을 정의하기 위한 개념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삶의 가능성, 즉 <역량>"(15)이다. 바로 이 개념 안에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실험의 비전이 담겨있다.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실험의 비전의 지향점은 "정치적 삶, 즉 행복이라는 관념으로 정향되고 삶-의-형태 안에 응집되는 그런 삶"(19)인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삶-의-형태 같은 뭔가를 파악할 수 있는가? 즉, 살아가는 와중에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곧 역량의 삶이 가능한가?"(20)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를 <사유>라는 개념에 접합시킨다. <사유>는 "삶의 형태를 [삶을 그 형태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맥락으로, 즉 삶-의-형태로 구성하는 관계"(20)이다. 그것은 "삶과 인간 지성의 잠재적 성격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경험/실험이며, 사유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수용성에 의해 변용되는 동시에 각자의 사유 속에서 사유하기라는 순수한 역량을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20) 이것은 맑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요강』에서 말한 <일반지성>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지적 능력, 사유는 삶과 사회적 생산을 절합하는 여타의 다른 삶 중 하나의 삶의 형태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형태를 삶-의-형태로 구성해내는 통일의 역량이다."(23) 우리가 볼 때 사유 혹은 지적 역량은 벌거벗은 생명(인민)을 삶의 형태와 분리시키는 것과 맞서기 위한 하나의 전쟁기계일 수 있다. 따라서 아감벤이 볼 때 "사유는 삶-의-형태, 즉 그 형태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삶이며, 삶-의-형태는 벌거벗은 생명을 주권권력에게 붙들리도록 내버려두고, (거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치적 삶을 꿈꾸게 하는) 도래하는 정치의 길잡이 개념이자 단일한 중심이 되어야만 한다."(23)
3.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몸짓(의 정치)과 상황주의자의 죽음에 부치는 난외주석
제2부의 전체적인 주제는 미학이다. 하지만 정확히 미학-정치라고 하는 것이 옳다. 아감벤은 미학적인 것에 대한 관점에서조차 정치적인 것의 문제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그의 미학론은 충분히 정치적이다. 이런 그의 미학적 관점(미학-정치적 관점)이 가장 독특하게 드러난 텍스트가 아마도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과 <몸짓에 관한 노트>일 것이다.
아감벤은 부르주아지들이 19세기에 자신의 몸짓을 잃어버렸다고 간주한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채로다시 몸짓에 붙들리는 운명에 처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지가 표명된 것이 바로 영화이다. 아감벤이 보기에 영화는 단순히 이미지에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몸짓>에 관련된다. 아감벤이 보기에 이미지는 "이율배반적인 극성에 의해 움직이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몸짓의 사물화이자 말소로, 다른 한편으로는 본디 그대로의 잠재력을 보존하는 것으로"(65~66) 구성된다. 이는 벤야민이 <보들레르에 관한 몇 가지 모티프>에서 전개된 '의지적 기억'과 '비의지적 기억' 간의 구별에 상응한다. 따라서 문제는 "모든 이미지에는 일종의 구속, 즉 사물을 마비시키는 힘이 작동하고 있는 바, 이 힘의 마법을 푸는 것"(66)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중심이 이미지가 아니라 몸짓이라고 한다면, 또 이미지 안에 내재한 어떤 구속을 풀어내는 것이 몸짓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영화의 본질을 윤리, 정치에 연결시키고자 하는 그의 기획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몸짓>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아감벤은 아리스토텔레스가『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제작하다>와 <행위하다>("행위의 유는 제작의 유와는 다르다. 제작은 제작 자체와는 다른 목적을 갖지만, 행위는 다른 목적을 가질 수 없다. 잘 행위한다는 것이 행위의 목적 자체이니까"(『니코마코스 윤리학』, 6, 1140b)를 구분한 것에 주목한다. 여기에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몸짓을 행동의 영역에 포함시켰지만 행위와도, 제작과도 구별한다."(67) 즉 그는 "제작이 목적의 관점에서는 수단이고, 행위가 수단 없는 목적이라고 한다면, 몸짓은 도덕을 마비시키는 목적과 수단 사이의 거짓된 양자택일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에, [목적과 수단 사이의 거짓된 양자택일을 깬다는] 이런 이유로 목적이 되지 않고서도 그 자체로 매개성의 범위를 벗어나는 수단을 제시하는 것이다."(69)
우리가 볼 때 아감벤에게 몸짓이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냐(목적) 혹은 저것이냐(수단) 환원되지 않으면서도, 목적이 되지 않는 수단 그 자체를 발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몸짓은 매개성을 전시하며, 수단을 그 자체로 보이게 만든다."(69) 아마도 이 문장은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사유의 근본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는데,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몸짓이 내재하는 정치성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그것은 <미학적 차원으로서의 춤>도 아니고, <목적에 종속된 수단의 차원으로서의 포르노 배우의 몸짓>도 아니며, 차라리 <몸짓의 차원으로서의 목적 없는 순수 수단이 전시하는 마임>이다. 그렇기에 "몸짓에 있어서 인간들끼리 서로 소통하는 곳은 그 자체가 목적인 목적의 영역이 아니라 목적 없는 순수한 매개성의 영역이다."(70) 즉 수단이 목적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수단이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드러나게 보이게 하는 것이다. 칸트가 판단의 영역으로서의 미학을 규정하기 위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을 규정한 것을 아감벤은 여여기서 "수단의 차원에서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몸짓의 역량"이다."(70~1)라는 표현으로 다시 취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몸짓은 "소통가능성의 소통이며, 말해야 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으며, 언어활동 속에서 파악되지 않는 몸짓이다. 왜냐하면 언어활동-안에-있음은 문장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71) 말과 같이 몸짓이 하나의 정치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초월성에 의거하지 않은 채, 몸짓 그 자체를 수단으로 존재하게 함으로써 일 때이다. 그렇기에 "정치는 순수 수단의 영역이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인간의 절대적이고 전면적인 몸짓성의 영역이다."(72)
몸짓의 문제에 대해 살펴봤으니, 이제 우리는 스펙터클에 대해서 보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감벤이 드보르의 사유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는데, 『목적 없는 수단』이 드보르를 위해 헌정되었다고 한 것을 봤을 때 빈말은 아닌 듯싶다. 아감벤은 "드보르의 책들이 저항 혹은 엑소더스를 위한 매뉴얼이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하고, 독특한 전략가의 저작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 전략가가 행동하는 장은 순수한 지성의 역량으로서의 잠재태"(83)임을 강조한다. 이에 기 드보르의 책은 "지성의 능력 또는 자유의 작전을 위한 전략론"을 위한 책이자, 그런 전략에 헌신하는 전략 행동가의 책이다. 때문에 아감벤이 드보르의 책에 주목하는 것은 단순한 이론적 차원에서가 아닌 실천적 차원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펙터클, 그것은 무엇인가? 드보르는 『스펙터클의 사회』(국역본, 1996, 현실문화연구)에서 그것을 "사회 전체로서, 사회의 부분으로서, 그리고 통일의 도구로서 나타나는 것"(명제 3, 10), "대상화된 세계관"(명제 5, 11), "현존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자 또한 기획"(명제 6, 11),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닌, 이미지들에 의해 매개된 사람들 간의 사회적 관계"(명제 4, 11), "오늘날 사회의 주요 생산물"(명제 15, 115), "분리된 것을 재결합하지만, 분리된 상태로 그대로 재결합하는 것"(명제 29, 23) 등으로 파편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가장 확실한 정의는 아마도 다음의 것이다. "스펙터클은 하나의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명제 34, 25) 이를 아감벤은 "그것은 언어활동이자 의사소통의 권력, 그도 아니면 인간의 언어적 본질인 바, 이 말은 자본주의가 생산적 활동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언어적, 소통적 본성 자체까지 전유할 만큼 확장되었다는 뜻이다."(아감벤, <최신의 스펙터클에서의 폭력과 희망>, 78~9; 이 책, p. 192~3에서 재인용) 아감벤은 이 개념의 계보를 맑스-벤야민-드보르의 선을 따라 위치시킨다. 맑스가 19세기의 만국박람회에서 자본주의의 상품물신성을 <판타스마고리아>라는 개념으로 간파했을 때 그것은 드보르의 스펙터클 개념을 예시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개념을 벤야민의 『페세젠 베르크』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감벤에게 스펙터클 개념은 양가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드보르가 정의하는 <상황>이라는 개념에 잘 나타나 있다. 상황이란 "집단적으로 통합된 환경을 조직하고 [주변의] 사건들로 자유롭게 유희함으로써 구체적이고 계획적으로 구축한 삶의 순간"이다(기 드보르, 정의, 『국제상황주의자』 1호; 이 책, 88에서 재인용). 그런데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상황주의자들에게,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는 "자신이 전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일어나는 곳에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것으로부터 발생하는 장소/공간적인"(88)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완전히 '내재적' 의미만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감벤은 여기서 <메시아적 전위>를 요청한다. 하지만 그때의 메시아는 초월적 권위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 내재적 역량을 구축한 존재이다. "결정적인 것은 세계를 거의 손대지 않은 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메시아적 전위이다."(89)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들뢰즈-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과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제시한 <도래할 인민>(혹은 민중)이라고 제시한 것이 아닐까?
스펙터클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시대에 드보르의 사유가 의미 있는 것은 스펙터클(또 그러한 만큼 드보르의 그 개념)이 부정성과 긍정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아감벤은 "스펙터클이 언어활동, 소통가능성 자체 그리고 인간의 언어적 본질이라는 것이 분명하고, 또 자본주의가 공통적인 것을 수용하여 그것의 극단화된 형태로 규정한 것이 스펙터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이며, 스펙터클에서는 우리으 고유한 언어적 본성이 뒤집혀진 채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의 폭력은 너무도 파괴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스펙터클은 긍정적 가능성 같은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우리는 바로 그것에 맞서 그 가능성을이용해야 한다."(93~4)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은 1989년 중국의 천안문이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도래할 정치>를 예시했던 하나의 정치적 사례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도래할 정치는 더 이상 새로운 혹은 옛 사회 주체들에 의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국가와 비-국가 사이의 투쟁이며, 임이의 독특성들과 국가조직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탈구/분리"(99)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때 국가는 "재현될 수도 없고 재현되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의 공동체, 하나의 공통의 삶으로 스스로를 현시하는 그 무엇"(100)에 직면했고, "재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며 그 재현할 수 없는 것이 귀속의 전제나 조건 없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이야말로 국가가 전혀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위협"(101)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여 드보르의 지적 유산은 그리 허무하거나 작은 것이 아니다. 또한 그의 죽음을 "드보르 자신이 그토록 정밀하게 기술한 세계 혹은 자신의 이론들이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식자들에게만 관심이 대상이 되었을 뿐 스펙터클의 사회의 증대하는 권력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는 사실을 참아낼 수 없었던, 한 명의 회한에 가득찬 인물이었다고 보는 편이 더 그럴 듯 할성 싶었다."(죠슈아 글랜, <한 상황주의자의 죽음>,『스펙터클의 사회』(국역본, 1996, 193)"고 해석한 것은 아직 우리에게는 무리일 성 싶다.
4. 결국 어떻게 정치를 사유할 것인가?
아감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라고 묻기보다는 차라리 "정치를 어떻게 정치를 사유할 것인가?"라고 묻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이는 <국가의 종언>과 <역사의 종언>을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을 요청한다. 이는 "역사를 고유화하는 것이 여전히 국가적 형태의 모습을 띨 수는 없다. 이런 고유화는 여전히 사유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는 국가적이지도, 법적이지도 않은 인간의 삶과 정치에 그 장을 열어놓고 있어야만 한다."(123)는 문제설정으로 되돌아간다. 이와 같은 문제설정은 <예외상태>적인 정치적 전략을 통해 주권권력을 작동시키는 탈근대적인 생명권력으로서의 주권권력이 지배하는 현재적 세계를 어떻게 전복시킬 수 있을가 하는 문제에 잇닿아있다. 물론 이는 "결국 어떻게 정치를 사유할 것인가?"라는 문제설정과도 그 공통의 지점들을 공유한다.
이는 <행복한 삶>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제시된다. 이는 벤야민의 <신학-정치적 단편>에서 모티프를 얻었고, 앞서 제시되었던 <삶-의-형태>라는 개념과도 근본적으로 잇닿아있다. 아감벤이 볼 때 "<행복한 삶>이라는 것은 충족한 삶, 절대적으로 세속적인 삶이며, 삶 자체의 고유한 역량을 완성하고, 그것의 고유한 소통가능성을 완성하는 데 도달한 삶이다."(125) 하지만 그것이 구성되는, 보다 정확히 말해 그러한 정치적 경험이 구성되는 내재성의 평면은 정확히 현재의 스펙터클한 세계 그 자체이다. 그것은 현재의 세계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차라리 그 세계는 "스펙터클의 부정성, 긍정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이자, 인간이 자신의 언어적 본질 자체를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 시대"(126)의 세계이다. 이러한 경험은 "말한다는 사실 그 자체와 관련되며, 사유의 물질 혹은 사유의 역량과 관련된 실험으로 구축되어야만 하며, 순수한 매개성으로서의 언어활동-안에-있음, 인간들의 환원불가능한 조건으로서의 수단-안에-있음이 (정치적으로) 문제"(127)가 된다. 결국 "정치란 매개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 수단 자체를 그대로 눈에 보이게 만드는 것"(127~8)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을 사용하는 데 있어 어떤 중요한 지점들을 설정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고유한 것과 비고유한 것이 차이나지 않는 지점, 다시 말해서 고유화와 탈고유화라는 용어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고 오로지 사용 같은 용어로만 포착될 수 있는 무언가를 공통적인 것 혹은 평등적인 것이라고 부른다면, 이제 중요한 정치적 문제는, 어떻게 공통적인 것을 사용할 것인가?"(128)이다. 이와 같은 문제설정 위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언어활동이라는 사건을 경험하는 장소, 양태, 의미를 공통적인 것의 자유로운 사용으로서, 그리고 이와 동시에 순수한 수단의 영역으로서 분절하는 데 성공해야만 정치사상의 새로운 범주들은 우리가 직면한 정치적 문제를 표현해줄 수 있게 될 것이다."(129)
이 책만을 놓고 본다면 아감벤에게 있어서의 <정치>는 예외상태에서 작동하는 생명권력으로서의 주권권력이 생산해내는 주체로서의 <벌거벗은 생명>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목적 없는 수단>을 통해서 삶-의-형태를 구성해내는 잠재성(역량)의 영역에서 발생한다. 즉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따르고자 한다면, 순수한 매개성의 영역으로서의 <목적 없는 수단>의 영역(<삶-의-형태>)을 구성해내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로 여기에서 <정치>가 구성될 것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 <성스러운 삶>으로서의 <벌거벗은 생명의 삶>이 아니라 <세속스러운 삶> 그 자체를 향유하는 것이며, 스펙터클의 부정성과 긍정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에서 후자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해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초월적인 주권권력에 의거하지 않은 채로 오직 존재자들의 자기 자신들의 잠재성(역량)에만 의거해서 구성되는, 즉 <목적 없는 수단>에 의해서 구성되는 순수 내재성의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성되는 지점도 우리들이 발딛고 선 바로, 지금, 여기의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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