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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통치 권력과 벌거숭이 삶』/김태환

by 마리산인1324 2010. 10. 12.

<시냇가에 심은 나무>(2009.11.24. 08:30)에서 퍼왔습니다

http://cafe.daum.net/Jaemin/3O9Z/171?docid=dzIz|3O9Z|171|20091124083030&q=%BE%C6%B0%A8%BA%A5%20%BB%F3%C8%B2%B1%B8%BC%BA&srchid=CCBdzIz|3O9Z|171|20091124083030

 

 

 

예외성의 철학─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통치 권력과 벌거숭이 삶』

                                                                             

                                                                               _김태환

“저 우열(愚劣)하고 간악한 폐병장이 노파의 목숨이

사회 일반의 저울에 달아보아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이나 바퀴벌레의 목숨과 별로 다를 것이 없어.

아니, 그만 한 값어치조차 없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그 노파는 타인의 생명을 좀먹고 있어.”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1_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UN과 서방 동맹국들을 무시하고 일으킨 전쟁이라는 점에서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스스로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세계 질서의 틀을 깬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부시를 비롯한 미국 권력의 핵심 인사들이 과거와는 달리 노골적으로 미국이 국제 질서의 규제를 받지 않는 예외적 지위를 누린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아부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의 이라크 포로 학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고 미군의 제네바 협정 위반이 문제시되자 럼스펠드 미 국방 장관은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는 제네바 협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미국 권력자들은 이렇게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자국의 예외적 지위를 정당화해주는 구실로 삼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국제 질서를 파괴하면서 막강한 군사력으로 자국의 이익을 관철해가는 현실은 세계를 무력감과 불안,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하지만 부시는 자신의 호전적 정책을 통해 세계가 더 안전해지고 평화로워졌다고 주장한다. 이라크의 주권이 이라크 과도 정부에 이양되었음을 알리는 콘돌리자 라이스의 메모지를 전달받고 부시는 그 위에 “자유가 통치하게 하라Let freedom reign”고 썼다. 자유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부시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겠지만, 자유의 확산이 권력자의 전횡 가능성을 제한하고 법에 의한 지배 영역을 확대해나가는 노력의 결과라는 점을 생각하면, 근거 없는 의혹으로 전쟁을 개시하여 엄청난 권력 남용의 혐의를 받고 있는 부시가 자유 운운하는 것은 지독한 역설처럼 느껴진다.

법의 지배 혹은 법치주의는 인권 사상과 더불어 근대 국가의 핵심적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자유와 제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 권력을 적절하게 제한하고 통제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성문화된 법에 이미 정해진 범죄에 대해서만 처벌이 가능하다는 죄형 법정주의 속에도 동일한 정신이 담겨 있다. 이러한 법적 원리들은 모두 인간의 자율성과 평등을 추구한 근대 계몽주의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법치주의에는 또한 세계의 합리적 조정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인격적 지배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서의 법치주의는 예측 가능한 세계의 질서를 기반으로 성립한다. 법치주의의 이상은,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합리적인 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권력이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집행되는 것이다. 권력의 집행에서 권력자의 자의가 완전히 제거될 수 있을 정도로 법이 현실을 장악하고 통제할 때, 법의 지배는 완성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법은 일반적이고 현실은 개별적이다. 법은 추상적이고 현실은 구체적이다. 법치주의의 완전한 실현 여부는 결국,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남김없이 포섭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

예외는 법의 일반성 속에 포섭되지 않는 현실의 잔여물을 가리킨다. 예외는 법치주의와 그것이 가정하고 있는 합리주의에 균열을 일으킨다. 균열이 일으킨 틈새로 비합리적인 심연의 세계가 열린다. 그것은 자유의 확대를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포로를 감금하고 학대하는 부시와 같은 부조리한 인물을 만들어낸다. 미군은 이라크 내에 사형 제도를 폐지하고(권력을 이양받은 과도 정부에 의해 다시 부활되기는 했지만) 민주적인 법질서를 도입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엄청난 인명을 살상했고, 무법천지의 포로수용소들을 건설해야 했다. 그것은 미국이 전시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테러 집단이라는, 전례 없이 사악한 적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 통치 권력과 벌거숭이 삶Homo Sacer: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에서 다음과 같은 테제를 제시한다. “비상사태(예외적 상황)는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정치 구조로서 점점 더 전면에 부각되고 있고 결국 스스로 법칙이 되려는 경향을 보인다”(『호모 사케르』, p. 30).1) 이런 관점에서 12년 동안 비상 체제를 유지한 나치 치하의 독일은 이해할 수 없는 예외가 아니라 근대 국가의 범례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아감벤은 나치 의학자들의 생체 실험에 대한 논란을 서술하면서, 그러한 실험이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의학계의 관행에서 그리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그의 책은 미국에서 부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씌어졌으나, 그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테제는 현재 미국이 처한, 혹은 미국이 조성하고 있는 비상사태를 예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글에서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제시된 근대 국가와 권력에 대한 이론의 골자를 소개하고, 그것이 우리의 현실에 대해 갖는 함의를 밝혀보려고 한다. 아감벤은 이 책에서 근대 국가와 그 법질서의 합리적 외관 뒤에 감추어진 비합리성을 집요하게 탐구하며,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암흑면을 드러내려 한다. 푸코가 법의 형식 속에서 작동하는 억압적 권력의 기제를 밝혀내려 했다면, 아감벤은 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 어떤 예외적 상태에 주목하고, 그 속에서 권력의 본질을 포착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 국가의 합리적 법질서가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예외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외적인 것 속에 근대 국가와 권력, 법을 둘러싼 모든 문제가 들어 있다. 그것이 ‘호모 사케르’다.


2_호모 사케르


호모 사케르란 무엇인가. 그것은 로마법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직역하면 ‘성스러운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호모 사케르는 기독교의 성인(聖人)과는 큰 관련이 없다. 호모 사케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전해져오고 있다.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인민에 의해 고발당한 자를 성스럽다sacer고 한다. 그를 희생의 제물로 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인다면, 그 사람은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최초의 호민관 법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민투표를 통해 성스럽게 된 사람을 죽이면 살인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악하고 불결한 사람을 가리켜 성스럽다고 말하는 관습이 있다.” 이것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페스투스Sextus Pompeius Festus의 『단어의 의미에 관하여De verborum significatu』라는 책에 나온 호모 사케르에 관한 정의다(『호모 사케르』, p. 81에서 재인용). 호모 사케르는,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되지만 누구나 죽일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제물로 바칠 수 없다는 것과 누구나 죽일 수 있다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성스럽기 때문에 희생될 수 없다면, 신성 모독을 범하지 않고 호모 사케르를 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페스투스의 정의가 암시하듯이 불결하기 때문에 제물이 될 수 없다는 뜻이라 해도, 그런 불결한 존재를 누구나 죽여도 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규정이다. 호모 사케르에 관한 페스투스의 정의는 고대 로마에서조차 의미가 모호한 수수께끼였다. 현대의 해석가들 역시 이 구절이 내포하고 있는 명백한 모순에 대해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처럼 호모 사케르를 누구나 죽여도 된다는 구절에서 사형 제도의 초기 형태를 본 사람들은 왜 호모 사케르가 가능한 희생 제물의 목록에서 제외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고, 카를 케레니Karl Ker럑yi처럼 터부의 이론에 의지하여 호모 사케르를 이미 지하의 신들에게 바쳐진 존재, 혹은 저주받은 존재로 본 사람들은 왜 누구나 호모 사케르를 죽여도 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호모 사케르』, pp. 82~83 참조).

그렇다면 호모 사케르를 제물로 바칠 수 없다는 규정과 호모 사케르를 죽이는 것이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규정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무엇일까? 아감벤에 따르면, 호모 사케르는 공동체의 법적, 종교적 질서로부터 추방된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희생 제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종교 질서에서의 배제), 그를 죽이는 행위가 살인죄를 구성하지도 않는다(법질서에서의 배제). 몸젠이 생각하듯이 희생 제의의 세속화된 형태가 사형이라고 한다면, 희생의 금지는 사형의 금지로도 해석된다. 바꾸어 말하면 호모 사케르를 법적인 절차에 따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해석은 희생 금지와 임의적 살해 가능성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사실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준다. 호모 사케르를 죽이는 것은 법의 집행도 아니고 법의 위반도 아니다. 살인할 수도 없고 사형시킬 수도 없다. 요컨대 호모 사케르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모든 종교적, 법적 의미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러한 폭력은 희생물의 봉헌도, 살인도, 판결의 집행도, 신성 모독도 아니다”(『호모 사케르』, p. 92).

이와 마찬가지로 호모 사케르의 죽음 역시 아무런 종교적, 도덕적, 법적 의미도 없는 죽음이다. 그것은 곧 문명화 이전의 죽음, 자연 상태에서의 죽음과 유사하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나 호모 사케르가 아니었을까?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것이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의 삶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호모 사케르는 문명화된 세계에서 추방되어 자연 상태로 내동댕이쳐진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호모 사케르가 된다는 것은 법적으로 구속되고 보호받는 삶에서 아무런 보호도, 구속도 없는 자연적 삶, 즉 ‘벌거숭이 삶la nuda vita’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감벤은 추방을 통해 ‘벌거숭이 삶’이 만들어진다고 말한다(『호모 사케르』, p. 92 참조).2)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호모 사케르의 삶, 즉 벌거숭이 삶이 자연 상태의 삶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벌거숭이 삶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법질서를 관장하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은 문명화된 세계 속에서의 자연 상태, 문명화된 세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자연 상태다. 문명의 한복판에 예외로서 존재하는 자연. 법이 자신의 효력을 스스로 거두어들임으로써 조성된 인공적 자연 상태. 법은 호모 사케르에게 등을 돌림으로써 자신의 위력을 극대화시킨다. 이 때문에 호모 사케르는 법질서에서 배제되어 있지만 바로 그 사실을 통해 법질서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에 따라 법질서에서 배제됨으로써 법질서 속에 갇혀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끌어안는 배제’의 의미다. 아감벤은 예외적 관계에 대하여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법의 특별한 ‘힘’은 이렇게 자신의 외부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무언가를 오직 배제만을 통해서 끌어안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관계를 우리는 예외 관계라고 부른다”(『호모 사케르』, p. 28). 법과 호모 사케르의 관계는 바로 이러한 예외 관계다. 예외자로서의 호모 사케르는 법의 영토와 무법 지대, 문명과 자연, 공동체의 안과 바깥 사이의 미결정 영역을 떠돈다.3)

이러한 해석을 통해 우리는 고대 로마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에서 유래한 호모 사케르라는 인물에게서 그리 낯설지 않은 우리 시대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의 호모 사케르는 누구인가? 나치 치하의 유대인들, 법적 지위가 없는 난민, 불법 체류자들, 중국 문화혁명기의 지식 분자들, 관타나모 미군 기지에 억류된 테러 용의자들,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의 이라크 포로들.

3_주권과 호모 사케르


‘벌거숭이 삶의 생산’은 누구에 의한 것인가? 누가 추방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가? 아감벤의 말을 정확히 인용해보자. “성스럽다는 것, 다시 말해 죽여도 되지만 희생의 제물로 바칠 수 없다는 것은 본래 주권에 의해 추방당한 삶의 속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벌거숭이 삶의 생산은 주권의 원초적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호모 사케르』, p. 92). 아감벤에게서 주권 혹은 주권자는 호모 사케르와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주권에 속하는 것은 살인죄를 저지르거나 희생 제의를 벌이지 않으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영역이고, 성스러운 것, 다시 말해 죽일 수 있으나 희생의 제물로 바칠 수 없는 것은 이 영역 속에 갇힌 삶이다”(『호모 사케르』, p. 92. 강조는 아감벤의 것임). 주권자와 호모 사케르는 이런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주권자에게 그의 백성은 모두 호모 사케르이고, 호모 사케르로 낙인찍혀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사람에게는 모든 타인이 주권자다(『호모 사케르』, pp. 97~100 참조).4)

아감벤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주권에 대한 카를 슈미트의 정의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주권자는 비상사태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법을 비롯한 기존 법률의 효력을 유예시킬 수 있다. 이 논의에서 특이한 점은 카를 슈미트가 비상사태(즉 예외적 상황)를 선포할 수 있는 권력을 단순히 주권자의 여러 권능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그 속에서 주권의 본질을 발견한 데 있다.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특정한 상황을 법질서 바깥으로 밀어낸다. 이와 함께 호모 사케르의 추방에서와 똑같은 현상이 발생한다. 예외적 상황은 법으로부터 버려짐으로써(gebannt, abbandonato), 법의 마력Bann 속에 붙들리게 된다. “규범은 예외로부터 물러남으로써 예외에 적용된다. 그러니까 비상사태는 질서에 앞서 존재하는 혼돈이 아니라 질서의 해제(解除)로부터 발생하는 상황이다”(『호모 사케르』, p. 27. 강조는 아감벤의 것임). 요컨대 주권은 배제함으로써 끌어안는 예외 관계를 창출하는 권능이다.

주권자는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문제되는 상황을 법질서 바깥으로 밀어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함께 법질서의 예외로 만든다. 그리하여 주권자는 호모 사케르의 공간과 동일한 성격의 공간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호모 사케르가 법과 사실, 질서와 혼돈, 문명과 자연 사이의 불확정적 영역에 존재하듯이, 주권자도 법 외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법 안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주권자의 예외적 권력도 궁극적으로 법에 의해 인정된 권능이기 때문이다. 주권자는 합법적으로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법에 대한 예외자가 될 수 있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에 있는 동시에 내부에 있다. [……]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합법적 권력을 가지고 있는 주권자는 자기 자신을 합법적으로 법 외부에 세운다”(『호모 사케르』, p. 31).

근대 국가에서 국가 원수에게 헌법의 유예를 허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헌법 자체다. 주권의 역설은 곧 법의 역설이기도 하다. “법은 자기 바깥에 있다”(『호모 사케르』, p. 31). 또는 법은 자기 자신을 부정한다. 이러한 법과 주권의 구조는 자기 자신의 꼬리를 먹는 뱀, 안과 밖의 구별이 사라지는 뫼비우스 띠의 구조와 정확히 일치한다. 아감벤이 ‘주권의 역설’이라고 부른 이러한 모순 구조는 근대법에 특유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주권을 가진 국민은 당연히 헌법을 고칠 수도 있다. 국민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조항을 삭제할 수 있을까? 하지만 국민에게 주권과 모든 권력이 부여되는 것은 바로 이 헌법이 가지는 효력 때문이 아닌가? 헌법이 위에 있는가? 아니면 주권을 가진 국민이 위에 있는가? 이렇게 풀리지 않는 역설은 모세가 신으로부터 받은 십계명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주권이 비상사태 선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라는 카를 슈미트의 테제는 이제 아감벤에게서 다음과 같이 변주된다. 주권은 누가 호모 사케르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이다. 다시 말해서 보호받아야 할 보편적 삶과 그렇지 않은 예외적 삶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바로 주권이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이러한 문제를 순수한 형태로 드러내준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고리대금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노파 알료나 이바노브나가 벌레만도 못한 존재이며, 그 여자를 죽이는 것이 범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지만 위대한 인물로 숭배되는 나폴레옹을 생각한다면, 그런 하찮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범죄 행위가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부조리하다. 아감벤 식으로 말하면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노파는 호모 사케르였던 것이다. 그러나 노파를 도끼로 쳐 죽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결국 살인범으로 체포되고 유형길에 오르게 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가 숭배하던 영웅 나폴레옹과는 달리 호모 사케르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권자가 아니었고, 이 때문에 살인범이 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예외적 영역으로 진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살인범이 되지 않고 이 세상에 해로운 존재를 제거할 수 있을까’라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물음은 주권과 호모 사케르의 관계에 관한 아감벤의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준다.

역설적이게도,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나폴레옹은 유럽 전역에 근대 국가 시스템과 법치주의 원리를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여기서도 예외적인 것과 규범 사이의 밀접한 관계가 드러난다.


4_생명의 존엄성: 보편과 예외의 변증법


위에서 본 것처럼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가 영위하는 ‘벌거숭이 삶의 생산’을 ‘주권의 원초적 업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주권과 호모 사케르, 주권과 벌거숭이 삶 사이의 공모 관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근대 국가에서다. 어둠에 싸여 있는 고대 로마의 초창기에서 유래한 호모 사케르가 근대에 이르러 다시 현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근대 국가에서 벌거숭이 삶이 정치적, 법적 권리의 주체이자 권력이 작동하는 대상 혹은 목적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아감벤이 말하는 근대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호모 사케르』의 「서문」에서 설명하는 ‘조에脅碧??‘비오스菽鄭’의 구별에 관해 살펴보아야 한다. 이 두 고전 희랍어 단어는 모두 ‘vita(vie, life, Leben)’로 번역되지만,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조에’는 생물학적인 의미의 삶, 즉 생명이고, ‘비오스’는 사회, 정치, 문화의 맥락 속에서 규정되는 삶의 형식과 양식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에서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삶은 오직 ‘비오스’뿐이었으며, 이 점은 중세에도 변함이 없었다. 인간의 정치적, 법적 권리는 그가 속한 사회적 신분에 대해 부여되는 것이었다. 단순히 태어났기 때문에 권리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태어났기 때문에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어떤 신분으로서의 삶이냐 하는 것만이 문제였고, 사회적 규정성과 무관한,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생물학적 삶, 조에, 벌거숭이 삶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근대는 ‘조에’에 대한 ‘비오스’의 우위를 부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인간이 단순히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권리를 가진다는 사상,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조에’ 즉 생물학적 차원의 벌거숭이 삶 자체를 정치적, 법적 권리의 궁극적 근거로 만들었다. 근대의 보편주의적 정신은 권리 주체로서의 인간을 생물학적 소여로 환원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유일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1789년의 프랑스 인권 선언에 대한 아감벤의 해석이다. 아감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인권 선언은 자연 상태의 삶이 법적, 정치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근원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구체제에서 정치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고, 단지 피조물의 목숨으로서 신에게 귀속될 뿐이었던 ‘벌거숭이 삶,’ 또한 고대 세계에서도 조에라는 개념 하에 정치적인 비오스와 뚜렷이 구별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연 상태의 벌거숭이 삶이 국가 구조에서 일급의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고 국가와 주권의 합법성을 지탱하는 현세적 토대를 이루게 된다”(『호모 사케르』, p. 156). 이제 인간의 생명은 가장 귀중한 가치가 되었고 국가가 부양해야 할 최고의 목표가 되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존엄하고 신성한 것이라는 근대적 관념은 누구나 임의로 죽일 수 있는 ‘성스러운 생명(호모 사케르)’에 대한 어두운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러나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가 근대 민주주의의 존엄한 생명과 단짝을 이루는, 마치 그것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단언한다. 그는 만인의 타고난 자유와 권리를 확인한 프랑스 인권 선언과 가스실에서 유대인들을 해충처럼 박멸하고자 한 나치의 ‘최종 해결책’을, 푸코가 말한 근대의 생명 정치라는 큰 틀 속에서 함께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권 선언에 나타난 조에의 정치화가 전 국민의 생명을 관리하려는 나치 국가의 출현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태어나며 법 안에서 평등하다는 근대 인권 선언의 보편주의는 차별과 배제를 예외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팸플릿으로 유명했던 시에예스도 참정권의 문제와 관련하여 여성, 아이들, 외국인들, 기타 사회에 대한 기여가 전혀 없는 사람들을 배제하는 께름칙한 단서를 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외는 없을 수 없다. 신분이나 종교에 따른 공식적 차별이 철폐된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는 예외의 형태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예외적 영역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주권자, 즉 국가 권력이다.

아감벤이 지적한 대로 보편주의와 예외의 논리 사이의 애매한 타협은 프랑스 인권 선언의 제목에서 이미 나타난다. 그것은 단순한 ‘인권 선언’이 아니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의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인간과 시민은 같은가 다른가? 전자가 후자에 포함되는가? 혹은 그 반대인가?(『호모 사케르』, p. 135 참조) 이러한 모호성은 인권 선언을 출발점으로 생겨난 근대 국가가 인간의 국가가 아니라 시민권을 가진 자들의 국가, 즉 국민(민족)의 국가였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민족 국가의 시스템 속에서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인권은 국적이 부여하는 시민권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 한 어떤 근거도, 어떤 실체도 없다”(『호모 사케르』, p. 135). 중세 때 귀족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행세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인간의 타고난 권리’를 잘 보장해주는 나라의 국적이 거의 신분적 특권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근대 국가의 국민이 가지는 권리는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신념으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그것은 암암리에 국민이 아닌 사람들의 배제를 전제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는 애매한 표현은 바로 이러한 역설을 감추고 있다. 오늘날 서유럽 국가들에서 불법 이민이나 난민의 문제를 둘러싸고 좌파와 우파(혹은 극우파) 사이에 벌어지는 논란은 인권 개념의 보편성과 시민권 개념의 특수성 사이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이상에서 논의된 문제는 결국 다음의 물음으로 귀착된다. 어떻게 국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신성하고 존엄한 생명에서 버려져도 상관없는 호모 사케르를 골라낼 것인가? 국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신성하고 존엄한 생명은 무엇이고, 버려져도 상관없는 호모 사케르는 무엇인가? 이것이 아감벤이 이야기하는 생명 정치의 핵심적인 문제다. “근대 생명 정치의 본질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안과 밖을 연결하고 분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있다. [……] 인권 선언에 의해 정치화된 조에 속에서 신성한 생명(호모 사케르의 의미에서─인용자)을 걸러내기 위한 경계선과 연결 지점들이 새로 정해져야 한다”(『호모 사케르』, p. 140).

생명 정치는 나치즘에서 극도로 위험한 모습을 드러냈다. 근대에 이르러 벌거숭이 삶 자체가 인간의 보편적 권리의 근거가 되었기 때문에, 나치즘 역시 차별의 근거를 벌거숭이 삶 자체에서 찾아야 했다. 나치즘은 일반 국민과 호모 사케르를 분리하는 경계선을 순수하게 몸, 벌거숭이 삶, 조에의 차원으로 끌어왔던 것이다. 나치에게 우생학이 그 무엇보다도 더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 민족의 생명에 해롭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했다. 안락사에 대한 히틀러의 관심 또한 ‘벌거숭이 삶’의 차원에서 호모 사케르를 분리한다는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히틀러의 안락사 프로그램은 불치의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60,000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되었는데, 그것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여부에 관한 결정이 국가 권력에 의해 내려진다는 점에서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안락사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아감벤에 따르면 나치의 안락사 프로그램은 “통치 권력이 벌거숭이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연습”(『호모 사케르』, p. 151)이었다.

오늘날 안락사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허용되지 않고 있다. 환자 자신의 요청에 따른 경우라도 안락사를 시행한 의사는 살인죄를 범하는 셈이 된다. 다시 말하면 개인에게는 자기 자신을 호모 사케르로 규정할 수 있는 권리조차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안락사 금지의 원칙은 안락사 프로그램을 스스로 실행한 나치 국가의 이념과 정반대된다. 하지만 현대 국가와 나치 독일은 모두 호모 사케르에 대한 결정권을 개인이 아니라 국가에 독점적으로 귀속시키려 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5_글을 맺으며─합리성의 한계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인권 선언과 나치 수용소, 법치주의와 자의적 지배,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절대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은밀하게 서로를 지탱하고 보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의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구축한 법의 보편적 지배 체제는 ‘예외성’이라는 구멍을 통해 정반대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아감벤은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위선적인 신뢰에서 벗어나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그것이 얼마나 많은 예외들, 비상사태들, 수용소들과 공존하고 있는지, 혹은 그것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인권 국가’ 미국에 의해 자행된 이라크 포로에 대한 고문과 학대, 살해는 이러한 아감벤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어준다. 인권에 대한 미국의 이중적인 잣대에 분노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미국의 태도는 비상사태에 대한 결정권을 독점하려는 주권자, 즉 최고 권력의 경향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유럽 의회는 미국을 향해 관타나모 기지에 억류되어 인권 유린의 대상이 되고 있는 테러 용의자들에게 정당한 법적 권리를 보장하라는, 아무런 법적 구속력 없는 결의문을 통과시킬 수 있었을 뿐이다. 법의 효력을 유예시키고 예외의 영역을 확장하려는 주권자의 경향은 법적으로 제한되어야 한다. 그러나 법에 의한 제한은 주권이 법을 유예시킬 수 있는 권능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의 부제 ‘통치 권력과 벌거숭이 삶’은 어떤 절대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져 있는 힘없는 생명을 연상시킨다. “비상사태(예외적 상황)는 우리 시대의 근본적인 정치 구조로서 점점 더 전면에 부각되고 있고 결국 스스로 법칙이 되려는 경향을 보인다”라는 그의 테제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호모 사케르며, 실제로 호모 사케르가 될 것이라는 암울하고 비관적인 전망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는 심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근대 법질서의 범례라고까지 주장한다.

많은 논자들은 아감벤의 주장이 모호한 논거에 의존하고 있고 결정론적이며 지나친 비관주의에 침윤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나치라는 ‘절대 악’과 서구 민주주의 체제 사이에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듯한 태도는 특히 나치 문제에 민감한 독일에서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단순히 나치의 죄악이 그러한 비교를 통해 경감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감벤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아감벤이 제기하는 주장의 핵심은 근대 사회에서 법질서의 구조, 법과 권력의 구조가 예외성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기보다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라는 것이다. 마치 뵈비우스 띠처럼 법은 법의 바깥과 연결되어 있다. 비상사태(예외적 상황)는 법과 무법, 문명과 자연, 삶과 죽음, 어느 한 편으로 확정될 수 없는 미결정성의 영역에 속하며 합리적인 파악 가능성에서 벗어난다. 예컨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떠도는 뇌사 상태의 인간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명제를 보라: 뇌사가 진정한 죽음의 기준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뇌사 상태에 빠진 환자들이 예외 없이 며칠 안에 죽었다는 것이다(『호모 사케르』, pp. 171~72 참조).

그는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부조리가 단순한 우연이나 예외가 아니라 법질서의 예외성이라는 역설적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인식시켜준다.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의 철학은 이성과 합리성의 한계에 주목해온,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양한 철학적 조류들과 맥을 함께하고 있다.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년 로마에서 출생. 베로나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마르틴 하이데거의 세미나에 참여한 바 있고, 발터 벤야민 이탈리아어 판 전집을 펴냈다. 아감벤은 문학 및 예술 이론, 철학, 법학, 정치학, 종교학 등을 독창적으로 혼합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도전적인 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조르조 아감벤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내용 없는 인간L?omo senza contenuto』(1970), 『유아기와 역사: 경험의 해체와 역사의 기원Infanzia e storia: distruzione dell?sperienza e origine della storia』(1978), 『언어와 죽음: 부정성의 자리에 관한 세미나Il linguaggio e la morte: un seminario sul luogo della negativity』(1982), 『미래의 공동체La comunit?che viene』(1990), 『호모 사케르: 통치 권력과 벌거숭이 삶Homo sacer: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1995), 『목적 없는 수단Moyens sans fins』(1995), 『아우슈비츠에서 남은 것Quel che resta di Auschwitz』(1998), 『비상사태Lo stato di eccezione』(2003) 등이 있다.



[주]
1) 이 글의 인용은 Giorgio Agamben, Homo Sacer: Die souverane Macht und das nackte Leben, Frankfurt, Suhrkamp, 2002에 따름.
2) ‘벌거숭이 삶’은 모든 사회적, 정치적 차원이 사상된, 생물학적인 의미의 생명, 또는 생존을 뜻하며, 아감벤이 벤야민의 에세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따온 개념이다. 벤야민은 ‘blo?s Leben’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3) 독일어 단어 ‘Bann’은 이러한 배제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이 단어는 ‘공동체로부터의 추방과 파문’을 뜻하는 동시에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마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4) 주권sovranity는 최고, 상위를 의미하는 라틴어 ‘super’에서 유래한 말로서 문맥에 따라 최고 권력, 통치권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다.


김태환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

저서로는 『푸른 장미를 찾아서─혼돈의 미학』 등이 있고, 역서로는 『비판적 문학 이론과 미학』 『이데올로기와 이론』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