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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경향> 895호2010 10/12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010061815201&code=117

 

 

[2010 연중기획]일본의 양심 가지무라 히데키는 누구

 
 
ㆍ그의 이론 따르던 한국학자 일부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선회

스위치를 켰다. 파리한 형광등 아래 자료들이 드러났다. 묘한 정적이다. 사무실 벽 빼곡히 자료가 차 있었다. 책은 몇 권 안됐다. 주로 팸플릿과 소책자, 논문들이다. 자료가 담긴 각대봉투는 일본어로 유형별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일본도쿄 소재 재일코리아NGO센터의 한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구자료들. 가지무라 히데키 교수가 생전에 모은 것이다.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 뜻밖의 장소에서 이름이 나왔다. 일본 도쿄 신오오쿠보 지역에 있는 코리아NGO센터를 방문한 자리였다. 이곳 실무자인 김붕앙씨(전 재일코리안청년연합(KEY) 사무국장)의 말에 따르면 “가지무라 히데키 교수의 책들은 생전에 그가 재직하던 대학(가나가와 대학)에 기증되었고, 팸플릿 등 기타 자료를 코리아NGO센터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몇몇 자료를 들춰 보았다. “논문(조선어)+(일본말) ‘구한말 북한지역 경제와 내외교역’, ‘구한말 함경도(○○의 북부)에 있었던 지역경제’”, “820-2 야마타니(山谷)통일구원회 뉴스 일산전협 야마타니 쟁의단·야마타니통일노조”. 전자는 비교적 익숙한 내용이지만 아마도 일본 노동조합 관련 자료인 듯한 후자의 자료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박스에 담겨있던 누렇게 바랜 한 팸플릿을 들여다보았다.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조총련이 1969년 10월 발간한 ‘정훈상 청년에 관계된 자료’다. 자료는 일본어로 되어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군인 신분으로 일본으로 밀항한 정훈상씨는 북으로 보내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일본 당국은 남한으로 강제송환을 하려 했다. 그래서 그가 왜 월북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 내용을 진술한 팸플릿이다. 정씨는 팸플릿에서 자신의 가족 배경과 남한의 부패 실상 등을 자세히 거론하고 있다. 관련해서 일본에서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남한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자료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 없다.



재일코리안 단체서 생전자료 보관

 

가지무라 히데키 교수는 국내에서는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사 연구가·사회경제사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독도문제에 관하여 일제의 식민지배 시기 등을 거론하며 한국측 입장에 선 일본의 양심적 학자”로 거론되어 있는 것이 나온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의 논문들은 1980년대 ‘편집부 편’ 사회과학도서들이나 잡지에 섞여 나왔지만 국내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그의 얼굴 사진 하나 찾아볼 수 없다. 그의 ‘행적’은 한 진보매체에 실린 와다 하루키 교수의 1960~70년대 회고록에서 그 편린이 드러난다. 그의 개인사와 관련,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는 지난 1997년 계간잡지 ‘역사비평’에 실린 강덕상 일본 시가현립대 명예교수(77)의 추도글이 유일하다. 강 교수는 이 자료에서 가지무라 교수의 저작들을 ①조선사의 발전법칙에 관한 이론적 저술 ②사회경제사 연구 ③민족해방 투쟁과 그 사상 ④일본의 조선관 ⑤재일조선인 문제 ⑥일반통사 ⑦조선에 관한 서적의 서평 및 소개의 7가지 ‘관심’으로 분류했다. 가지무라의 자료들이 재일코리아NGO센터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도 강 교수가 거론한 ⑤번 테마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1989년에 53세를 일기로 타개했으니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생전에 조선, 그리고 한국을 위한 많은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국내에는 그의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한 책에 실린 가지무라 히데키전 가나가와 대학 교수의 사진.

 

기자가 제일 궁금한 것은 말년에 그가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졌을까라는 것이다. 사실 가지무라 교수의 논문들을 제일 많이 인용한 그룹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돌아서기 전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가지무라 교수의 식민지반봉건사회구성체론 등은 이대근 성균관대 명예교수, 장시원 방송통신대학 전 총장, 그리고 안병직 서울대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이론적 근거였다. 안병직 교수는 1985년 일본으로 떠나 그곳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종전의 입장을 수정하게 된다. 나카무라 사토루(中村哲) 교수가 한국사회를 판단했던 ‘중진자본주의론’을 수용하면서 이념적 선회를 경험한 것이다. 1987년 그가 귀국 후 만들어진 것이 ‘낙성대연구소’다. 학계뿐이 아니다. 안병직과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등의 대담집을 보면 ‘스승’의 전향에 따라 당시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있던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도 입장을 선회해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으로 들어간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에게 과거 사숙이었던 가지무라 히데키 교수는 어떻게 평가될까. 김낙년 낙성대 연구소 소장(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일단 인간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존경스러운 분인 것은 틀림없다”며 입을 열었다. 가지무라 교수로부터 직접 강의도 들었다는 김 소장은 그러나 “내 입장에서 보면 (가지무라 교수 등의 논의는) 지나버린 옛날 이야기라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증에 치밀한 가지무라 교수의 연구 작업의 유효성은 인정하지만 매판자본이나 민족자본 등의 ‘비경제적인 정치적 요소’를 분석틀로 끌어들이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만약 가지무라 교수가 살아있었다면? 그도 식민지근대화론자들처럼 입장이 달라졌을까.



시대적 한계 있지만 실증연구 업적

 

허수열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도 가지무라 교수가 내건 범주인 ‘민족자본’ 등은 시대적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실증연구 업적은 여전히 인용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설왕설래가 있을 수 있지만 한국경제사, 재일코리안이나 한국조선사회의 연구에서 가지무라 교수는 태두(泰斗)의 위치에 있다고 봐야 한다. 특히 평양 메리야스 산업에 대한 연구는 아주 치밀하게 실증을 해내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독보적인 연구로 기억되고 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물론 살아계셨다면 1960년대나 70년대에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으리라고 예상하진 않는다”며 “당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 중에는 민족적 정통성뿐 아니라 산업화까지도 북한 쪽에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 가지무라 교수가 살아있다면 그의 양심에 비춰서 북한의 세습문제에 대해 비판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덕상 교수가 추도글에서 「Weekly경향」의 질문에 대신 답했다. “…나는 가지무라가 제기한 것은 연구의 시발점, 미완의 연구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과제가 매듭지어질 전망은 1960년대보다도 어둡게 느낀다. 

‘철도, 도로, 항만, 전신전화 등 사회시설이 누구 때문에 건설되었는가. 자본가로서 노동자로서 또 농민으로서 근대적 계급의 성장이 누구 때문에 촉진되었던가. 모두 일본인 덕택이 아닌가’ 등의 논리로 대변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유교근대화 긍정론’이 날로 그 세를 확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러한 논리는 조선이 내재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무시관, 정체론과 똑같다고. 왜 근대 조선이 일본 식민지배가 되지 않았더라면 식민지가 되기 이전의 상태 그대로 남아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일본 도쿄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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