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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경향> 888호 2010 08/17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008111916031&code=115

 

 

 

[커버스토리]조선백성의 탈을 쓴 황국의 신민들

 
ㆍ대한제국 고위관료들의 매국 행각…
ㆍ귀족 작위 받고 부와 권력 누려

여기 가로 45㎝, 세로 30㎝ 크기의 대형 사진이 있다. ‘동경문우회’라는 단체가 강제병합 체결일자인 1910년 8월 29일에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동경문우회가 어떤 단체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최장근 대구대 교수는 “당시 일본 대륙팽창주의자들의 단체인 것 같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액자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사진에는 모두 2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24명은 서양식 홀 안에 3층으로 배열된 자리에 앉아 있다. 인물사진은 실제 사진이지만 홀은 그려진 것이다. 사진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함께 나온 배치도(☞ 사진 참조 )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귀족회 부회장이 된 민영휘

 

인물 배치가 교묘하다. 메이지 천황을 정중앙에 두고 좌우 상하로 인물들이 도열해 앉아 있는 형태다. 사진 상단 제목을 보면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일한합방 기념사진’.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실력자들을 권력서열에 따라 배치한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일본인의 시선으로 구성한 일종의 가상 내각인 셈이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는 병합조약 체결 시점에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지만 사진에 들어가 있다. 자료를 제공한 이돈수 한국해연구소장은 “병합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진 속 일본인은 모두 15명이다. 메이지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를 제외한 나머지 일본인들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첫줄 왼쪽 첫번째)를 비롯,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들이다. 관심사는 사진 속 조선인 9명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무슨 일을 했기에 ‘제국의 내각’에 포함되는 ‘영광’을 누린 것일까.


첫째줄부터 살펴보자. 메이지 천황 오른쪽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은 차례로 순종, 고종, 민영휘다. 배치도는 순종을 ‘전 한국 황제 창덕궁 이왕’, 고종을 ‘전 한국 황제 덕수궁 이태왕’, 민영휘를 ‘전 한국 중추원 고문’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대한제국은 병합조약 체결 이후 이미 사라졌으므로 ‘전’이라고 표기한 것이다.


민영휘(1852~1935)는 1901년 이름을 민영준에서 민영휘로 개명했다. 1877년 4월 별시에 합격해 1894년에는 병조판서로 임명됐다. 1905년 12월에는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선 대신들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07년에는 궁내부 특진관으로서 고종이 헤이그 특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양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9년에는 일본 천황가의 시조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조직된 신궁봉경회 고문에 추대됐다. 1910년에는 일진회의 ‘합병 성명서’에 찬성을 표명하고 합병 지지 여론 확산을 위해 조직된 국민동지찬성회 고문에 추대되는 동시에 이완용과 조중응 주도로 합방 찬성을 위해 조직된 정우회 총재가 됐다.


강제합병 직후인 1910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의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1911년에는 작위를 받은 조선 귀족들이 천황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해 조직한 조선 귀족회를 조직해 부회장이 됐다. 이후 1928년에는 쇼와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고, 1935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주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둘째줄에는 이완용(메이지 천황 바로 아래, 전 한국 총리대신) 오른편으로 박제순(전 한국 내부대신), 조중응(전 한국 농상공부대신), 이근상(전 한국 궁내부대신), 이하영(전 한국 중추원고문)이 앉아 있다.


이완용(1858~1926)의 친일행각은 명확한 데다 짧은 지면에 요약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 1910년 8월 22일 조선통감부에서 강제병합 조약에 조인한 인물이 바로 그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은 기본적으로 해당 인물의 공과를 모두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이완용의 경우는 친일행각이 대부분이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표제어 ‘이완용’은 6쪽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완용은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그는 1867년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사돈이었던 이호준의 양자로 입양됐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제2대 회장으로 선출됐으나, 같은해 7월 외국에 많은 이권을 넘겨줬다는 이유로 협회에서 제명당했다. 1905년 11월에는 을사늑약에 찬성해 ‘을사5적’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1907년에는 내각 총리대신이 됐다. 같은 해 7월에는 고종의 양위를 주장하고 같은 달 24일에는 대한제국의 입법·행정·인사 등 내정권을 통감에게 넘겨주는 정미조약 체결을 주도했다. 강제병합 이후인 1910년 10월 1일에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고문이 됐다. 같은 달 7일에는 조선귀족령에 따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 그가 죽은 지 13년이 지난 1939년, 일본의 대륙낭인단체 흑룡회는 ‘일한합병’ 30주년 추도식을 열어 이용구, 송병준, 박영효 등과 함께 그를 합병 공로자로 선정했다.


을사오적·정미칠적·경술국적의 이완용

박제순(1858~1916)은 을사오적이자 경술국적이다. 1855년 별시에 급제했다. 1901년 의정부 찬정 겸 특명전권공사로 일본 정부의 의향을 엿보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 승리 후 한국에 대한 보호조약을 추진하자 반대입장을 표명했으나 결국 그해 11월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을사늑약을 체결해 을사오적으로 지탄받았다. 강제병합 당시에는 내부대신으로 병합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 참석해 가결에 동조, 경술국적이 됐다.


강제병합 직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돼 1916년 6월 사망할 때까지 6년 동안 매년 수당을 받았다. 1910년 10월 7일에는 자작 작위를 받았다. 같은 달 23일부터 11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의 비용으로 일본을 다녀와 11월 18일자 <매일신보>에 “천황 폐하로부터 박애인자한 내지 동포의 지도에 의해 장족의 발전”을 소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1915년에는 다이쇼 천황 즉위 대례식에 참석해 “직접 거룩한 시대를 만나 성대한 의식을 올리는 것을 보게 되었는 바, 하늘을 바라보고 성인을 우러르면서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립니다”라는 글을 지어 바쳤다.


조중응(1860~1919)은 1890년 조중협에서 조중응으로 개명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10여년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정치와 법률을 공부했다. 법부대신으로 있던 1907년 7월에는 당시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교수형과 종신형 등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주(임금에게 아룀)했다.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서 정미조약 체결에 참여해 정미칠적으로 지탄받았다. 1907년에는 일본 황태자의 한국 시찰을 환영하기 위해 조직된 신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0년에는 이완용과 함께 병합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된 정우회 경비를 지원했다. 1910년 8월 16일에는 농상공대신 신분으로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방문해 ‘합병조약안’과 ‘합병각서’에 대한 찬성의사를 표명했다. 같은 달 22일 어전회의에 참석해 합병조약을 가결해 경술국적으로 지탄받았다.


병합 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8월 29일자 <매일신보>에 ‘병합 1주년 기념 감상’이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서는 병합 후 1년이 무사히 지나간 것은 천황의 은덕이라면서 조선이 병합 후 일본의 동생이자 아들이 되었다고 표현했다. 1915년 11월에는 다이쇼 천황 즉위대례식에 참석해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그의 매국 행각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보기에도 과도한 것이었다. <매일신보>는 그가 사망한 다음날 신문 사설에서 “매국적(매국을 한 역적)” “경조부박의 수괴” 같은 표현을 사용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조중응 병합 후 중추원 고문 자작 작위

 

이근상(1876~1920)은 세 형제가 모두 친일행위를 했다. 큰형 이근호는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둘째형 이근택은 을사오적이다. 을사늑약 이후 궁내부 특진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이근상은 1905년 남산 왜장대에서 러일전쟁 해전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축첩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06년에는 친일관료와 일본인 관료들의 사교단체인 대동구락부 위원이 됐다. 강제병합 후에는 중추원 고문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2년 8월에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6년에는 조선반도사 편찬사업에 참여해 역사왜곡에 가담했다. 191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전국 6개 농공은행을 통합해 창립한 조선식산은행 감사에 임명돼 죽을 때까지 재임했다. 1920년 사망한 그의 작위는 양자 이장훈이 물려받았다.


이하영(1858~1929)은 부산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제중원에서 미국인 의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관직생활도 미국인의 추천으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7년에는 미국 주재 공사관 서기관을 지냈고 1896년에는 일본 주재 특명전권공사에 임명됐다. 1904년 4월부터 1905년 9월까지 외부대신으로 재임하면서 일본에 각종 이권을 넘겨줬다. 1907년 10월에는 일본 황태자의 한국 방문을 환영하는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1909년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념하는 송덕비를 건립하기 위해 만들어진 송덕비건의소에서 수금위원을 지냈다. 강제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5년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도 참석했고, 1928년에는 쇼와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셋째줄에는 조선 사람이 한 명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이재곤(1859~1943))이다. 이재곤은 1907년 이완용 내각에서 학부대신을 맡아 고종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정미조약 체결에 동조한 정미7적 중 한 명이다. 1909년 12월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이등박문추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동대문 밖에서 추도회를 개최했다. 강제병합 직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으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에는 <매일신보>에 “손을 모아 하늘(천황)을 기리고 축원한다”는 내용의 합병기념 축사를 썼다. 1937년 8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개전 직후 조선총독부 주최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다.

 

이 시국간담회는 새로운 시국에 맞추어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자는 취지로 열린 행사였다.1939년에는 조선유도연합회 고문에 추대됐다. 조선유도연합회는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해 전쟁을 위한 정신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다.


사진 속 조선인 권력자들은 대개 비슷한 경로를 걸었다. 강제병합 전부터 충실한 친일의 행로를 걸었고, 병합 후에는 일본이 하사한 귀족 작위를 받고 돈과 명예를 거머쥐었다. 이들이 생전에 누린 부와 권력은 그들 개인에게는 ‘영광’이었을 테지만, 우리 역사에는 커다란 치욕으로 남았다.


참고자료 : <친일인명사전>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편, 민족문제연구소)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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