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13호(200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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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주의인가 야만인가: 발리바르 인터뷰
Contretemps/ 역자 : 양창렬
■ 이 인터뷰는 원래 쇠이유(Seuil) 출판사에서 슈미트의 <토마스 홉스의 국가론에서의 리바이어던>의 프랑스어판(2002) 번역 출간에 맞춰, ContreTemps지에 처음 실렸던 것이다. 미카엘 뢰비(Michael LÖWY)와 라즈믹 쾌셰얀 (Razmig KEUCHEYAN)이 정리했다. ■ 옮긴이: 번역대본으로는 http://www.solidarites.ch/journal/index.php3?action=4&id=1025&aut=80을 사용하였다. 당신은 최근 프랑스어로 번역된 칼 슈미트의 저작에 서문을 썼습니다.1) 어떤 점에서, 이 작가–그와 나찌 체제와의 관계는 유명했죠–는 좌파의 사유에 관심을 가졌습니까? 발리바르 : 칼 슈미트는 극우 사상가들 중 가장 명석하며, 그래서 가장 위험한 사람입니다. 현 정세에서, 우파와 극우파가 다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즉 그들이 실제로 헤게모니를 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는 대통령 선거 결선 투표에 르 펜(Le Pen)이 올랐던 것과 같은 일시적인 에피소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극우파 사상의 원천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치않은 일입니다. 적을 알기 위해서는 적의 나라에 가봐야 한다, 바로 이것이 슈미트의 책 서문에, 제가 인용했던 레닌의 슬로건입니다. 우파나 좌파의 사유는 닫혀진 총체성이 아닙니다. 즉 그들의 사유 사이에서 문제틀은 순환합니다. 그 이유는 기존 질서의 모순들을 해명하고자 하는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의 공통된 이해 때문입니다. 슈미트는 부정할 수 없이 일부 혁명적 사상의 교훈들을 끄집어냈습니다. 역으로, 혁명적 사상이 슈미트의 저작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슈미트는 예외 상태로부터 출발해서 헌법 질서를 사유합니다. 발터 벤야민은 예외 상태를 영구적으로 만들어야할 필요성에 대해 말하면서, 슈미트의 이러한 생각을 변형시켰습니다. 저의 경우엔, 헤게모니 질서는 항상 일종의 ‘예외면 (face d’exception)’을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슈미트는 근대 국가의 형성과 기능을, 특히 그것이 전쟁 및 법과 맺는 관계를 엄청나게 예리한 방식으로 검토합니다. 그는 이 점에서 오늘날 좌파든 우파든 ‘주권론자들’이라고 불리는 모든 이들에 앞섭니다. 어떤 의미에서 슈미트는 주권론자의 이상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적에 맞서, 적의 담론의 약한 판본이 아니라, 강한 판본에 말을 거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슈미트가 내린 분석의 결론들을 억지로 승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그가 내린 분석의 결론들을 그에 걸맞게, 아니면 그보다 더 잘 승인해야할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당신은 Lignes 지에 «국제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소논문을 기고했습니다. 당신에게 이러한 이분법은 무엇으로 구성되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습니까? 발리바르 : 제가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르크스주의 유산의 중핵은 계급 투쟁과 국제주의입니다. <공산주의자 선언>은 이 두 개념의 결합, 심지어 동일시로 끝을 맺습니다. 결국, <선언>은 계급 투쟁과 국제주의는 하나의 동일한 것이며, 이 두 현상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쓰여진 셈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과연 오늘날 계급 투쟁과 국제주의의 관계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용어를 동일시하는 것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음을 인정하도록 강제되고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이 진보적인 방식이 아니라, 반동적인 양식으로 현재의 위기 상황에 반응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계급 투쟁의 어떤 정향들이 국제주의의 요청들과 모순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우리는 계급 투쟁도, 국제주의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둘의 결합이 자명하다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계급 투쟁이나 국제주의에 대한 끈을 놓는다면, 어떤 형태의 야만이 나타날 것입니다. 제 소논문의 제목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유명한 정식에 대한 암시였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말했을 때, 그녀는 국제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사회주의냐, 제국주의의 야만이냐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야만’이란 매우 강력한 단어로서, 그것은 폭력이 정치를 대체해 버리는 순간을 지칭합니다. '국제주의냐 야만이냐'를 말하면서, 저는 암묵적으로, 국제주의에 도달하기 위해 사회주의로 경유해야할 필요는 없음을 주장한 것입니다. 저는 분명 사회주의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는 폭력의 문제, 특히 동일성(정체성)의 폭력(la violence identitaire)을 직접적으로 공격해야 함을 말하는 한 방식일 뿐입니다. 동일성(정체성)의 폭력은, 인종-간 (inter-ethnique), 민족(국가)-간 (inter-nationale), 종교-간 (inter-religieuse)이라는 여러 형태들을 지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동일성 일반에 대해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동일성들에 맞서는 어떤 동일성들, 다른 동일화 체제에 맞서는 어떤 동일화 체제에 찬성하느냐하는 것입니다. 동일성의 문제는 차이성(l’altérité)이 나타나는 곳이라면 필연적으로 제기되기 마련입니다. 이 논쟁의 쟁점은, 특히 유럽 구성의 틀에 있어서, 매우 분명합니다. 유럽은 오래 전부터도 그래왔고, 점점 더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문화의 본질적인 부분이 유럽 바깥 세계로부터 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까요? 교황에서부터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땡에 이르는 보수주의자들은 유럽이 기독교적이라고 주장하며, 유럽의 동일성(정체성)을 닫아두려고 합니다. 유럽의 동일성은 이행중인 개방적인 동일성입니다. 이것은 문화적 동일성이며, 우리가 19세기에 민족 정체성을 정의하고자 노력했던 것처럼 위로부터 그것을 정의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은 일부 텍스트에서 스피노자에 기원을 둔 ‘다중’이라는 개념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 개념에 대한 당신의 정의는 어떤 점에서 토니 네그리의 그것과 구분됩니까? 네그리의 개념과 당신이 부르길 좋아하는 ‘씨빌리떼의 정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발리바르 : 저는 다중 개념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휘하에 위치하고 싶어하는 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네그리는 스피노자에게서 다중의 역량이라는 아주 강력한 관념을 끌어냈습니다. <제국>에서 다시 사용된 이 관념에 따르면, 헤게모니를 조직하는 힘 – 국가, 제국 –은 다중 자체의 힘에 그것의 기원이 있습니다. 국가에 의해 포획되고, 집중되며, 독점되는 다중의 역량이라는 것이 있고, 이렇게 국가는 인민을 꼼짝 못하게 합니다. 네그리는 다중 개념에 본질적으로 긍정적인 함의를 부여합니다. 저는 항상 스피노자를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제 생각에 스피노자는 대중들을 극도로 양가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그는 대중들의 역량이 건설적인 만큼이나 파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다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네그리는 다중이라는 호칭으로, 기존 질서에 의해 구현된 리바이어던에 맞서는 해방 정치의 비-주체, 반-주체를 제시합니다. 네그리에게 다중은 파악할 수 없는, 정의내릴 수 없는 특성을 갖습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불충분할뿐 아니라 어쩌면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다중이라는 개념은 실제적으로 진보적이고 해방적인 ‘반-체제’ 운동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제공해주지 못합니다. 저는 네그리의 개념에서 진보 운동과 그렇지 않은 운동 사이에 충분히 명확한 구획선을 그을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씨빌리떼의 정치'라는 제 고유한 개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씨빌리떼의 정치는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들에 대한 정치입니다. 폭력의 진행을 예방하고, 중단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하는 모든 개입이야말로 씨빌리떼 정치의 예입니다. 씨빌리떼의 정치는 어떤 의미에서 ‘반-폭력’ 정치이며, 정치의 가능성 자체를 파괴하는 폭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근본적인 사회 변혁이라는 관념이나 그것이 그 안에 담고 있는 폭력이라는 관념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회 변혁이라는 관념은 폭력에 맞서야 하는 필수적인 저항에 대해 충분히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에게, "당신은 비-폭력을 옹호하는 것이고, 당신은 비-폭력적으로 되어버렸어"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해야 했죠. 비폭력 사유의 어떤 전통 속에 중요한 뭔가가 확실히 있으며, 우리가 거기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하는 뭔가가 있다. 그래서 저는 간디와 마틴 루터 킹같은 저자들을 보다 심각하게 연구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최근의 어느 소논문에서 지금껏 이뤄지지 못했던 커다란 회합은 20세기의 두 혁명 전략인, 레닌과 간디의 회합이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간디는 위대한 정치가이자, 조직가였습니다. 저는 간디의 비폭력이 동일성이라는 페스트에 맞서 인도에 백신을 주입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혁명적 폭력이 정치가 군사화되는 지형을 준비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혁명적 폭력을 포함해서, 폭력의 파괴적 효과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 1) Carl Schmitt, Le Léviathan dans la doctrine de l’Etat de Thomas Hobbes, Paris, Seuil, 2002. 칼 슈미트(1888-1985), 독일의 정치 철학자이자 헌법이론가. 그는 1933년에 나찌당에 입당해서 법률 고문 역할을 했다. 유태인 친구들과의 우정을 유지했다는 이유로 고발되어, 1936년에 출당됨. 1년 간의 수감 이후, 1946년 뉘렘베르그 전범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음. 그의 주저로는 «정치 신학»(1922), «정치적인 것의 개념»(1933), «대지의 노모스»(1950), «파르티잔 이론»(1963) 등이 있음. 혐오스러운 정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칼 슈미트는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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