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Mouvements 37호(2005년, 1-2월), 89-92쪽
Mouvements : 이탈리아에서 슈미트의 사상이 가졌던 지위에 대해 언급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특히, 한편으로 슈미트의 사상의 이론적 함의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의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 말입니다.
네그리 : 슈미트와 저의 이론적 마주침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는 제가 대학에 있었을 때, 즉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연구하기를 요구했던 헌법학자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슈미트는 이탈리아 헌법을 주도했던 이론 연구의 책임자인 코스탄티노 모르타티(Costantino Mortati)의 ‘아버지’였고, 이탈리아 국가가 노동에 기초한다는 개념을 정초했던 사람이기도 했죠.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가톨릭과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을 결정적으로 매개했던 것도 바로 그였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모르타티는 독일의 시장 사회 국가 이론가인, 에른스트 포르스트호프(Ernst Forsthoff) – 그 자신도 슈미트의 제자였죠 – 의 분신이었습니다. 포르스트호프와 마찬가지로, 코스탄티노 모르타티는 파시스트 기간 동안 슈미트 곁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보자면, 슈미트와 저의 이론적 마주침은 다음과 같이 이뤄진 셈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즉 <정치 신학>보다 먼저, 헌번, 슈미트의 헌법에 대한 주요 논설들, 전쟁 직후 이탈리아내 헌법 연구에 체계적으로 사용되었던 그 논설들을 연구했습니다.
슈미트와의 이러한 관계는, 켈젠이 소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에서는 결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즉, 켈젠은 슈미트와는 다른 관점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켈젠의 관점은 독일 공법에 내적인 상태로 머물러 있었고, 미국에서 유래한 토크빌적이거나 고전 자유주의적인 관점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유효한 관점이었습니다. 당대의 이탈리아 문화는 슈미트와 켈젠이라는 이 두 원천 내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절대 다수는 슈미트라는 원천이었죠. 켈젠의 경우, 그는 본질적으로 국제주의자들이나 연합국 이론가들에 의해 도입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켈젠의 형식주의는 트레베스(Treves), 보비오(Bobbio) 등등의 저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한참 후, 즉 1960년대의 일입니다. 1950년대에, 독일 공법의 중요한 전통은 완전히 슈미트적인 채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특히, 자유주의적이고, 주의주의적인 경향들, 옐리네크(Jellinek)같은 주관주의적 법 경향들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하지만 매우 동질적인 하나의 틀 내에서 그것은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슈미트와의 정치적인 접촉은 비의회주의 좌파와는 전혀 무관한 작업의 토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비의회주의 좌파에서 빠져나와 당을 만들었던 동지들의 작업과 관련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유럽 사민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슈미트에 기댔던 앙드레 글뤽스만(André Glucksman)과 그 패거리보다는 다른 방식에서 더 진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슈미트를 이용했을까요? 사실, 그들은 슈미트에게서 발견되는 과도함이나 ‘극단화’가 무엇이든 간에, 슈미트를 근대 주권에 대한 주요 이론가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슈미트의 주권 개념은 막스 베버나 레닌의 주권 개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초월적이고, 전체적인 주권으로서의 국가 개념, 결국 삶권력으로서의 국가 개념을 대표하는 주요한 근대성의 사상가들입니다. 따라서, 저는 왜 우리가 슈미트에 대해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유태인들을 공격했기 때문인가요? 하지만 훨씬 더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우리는 유태인들, 나아가 모두를 공격할 수 있는 국가 기계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대해서조차 전혀 분노하지 않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제 관점에서는, 이탈리아 비의회주의 좌파의 일파가 슈미트를 따라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 [1970년대초 마리오 트론티가 발전시킨 개념] 이라고 불렀던 것과의 관계는 이탈리아의 노동자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전형적이었던 사회 질서와 정치 질서의 연속성 개념과 단절하는 순간을, 그리고 정치적인 것이 그것의 고유한 자율성을 갖는다는 관념이 부과되는 순간을 정의해줍니다. 따라서 그것은 좌파에서 슈미트를 참조하는 저자들에 대해 우리가 비난했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슈미트는 항상 이러한 홉스적인 초월성을 주장했던 사람이며, 완전히 통속적으로 말해, 이 위대한 권력, 이 위대한 초월적 권력에 기초해야하는 부르주아적 자유의 내용과 관련된 지속되고,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아주 명백한, 정통의 대표자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자유주의자들이 권력은 그 안에 입헌주의의 차원들을 담고 있다고 주장할 때, 저는 그 관념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이것이 어디에서 표명되었던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우리는 [이제서야] 이러한 요소들을 결정짓는 어떤 역사적 조건들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인데 말이죠. 근대 권력이 그 자체 안에 권력 분립의 관념, 정부 및 독립적인 법 생산의 관념, 그리고 법률학 혹은 실질적인 법률학적 권력 관념을 담고 있다는 것은 근거없는 관념일 뿐입니다.
MouvementsM. : 이번 호, 쟝-끌로드 모노(J.-C. Monod)의 소논문은 비판적 저자들의 슈미트 참조가 갖는 기능을 살피고 있습니다. 주요 좌파 사상가들과 슈미트와의 대화는 항상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사람들[네그리, 발리바르, 아감벤] 외에도,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나, 공공 영역의 붕괴에 대한 슈미트적인 서술을 양식화한 초기 위르겐 하버마스, 그리고 쟈콥 타우베스(J. Taubes)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슈미트의 어떤 현실성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요? 슈미트에게서 우리는 어떤 도구들을 찾는 것인가요?
네그리 : 저는 이러한 슈미트의 현실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슈미트에 대한 이 모든 담론들이 매우 애매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이브-샤를르 자르카(Yves-Charles Zarka)가 슈미트[에 기대는] 담론 내의 반유태인적 구성요소를 드러내려고 했을 때에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자르카는 근대 국가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배제에 근거했음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극단적인 경우 우리는 사실 슈미트나 홉스의 그런 면모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에띠엔 발리바르는 아니죠. 발리바르에게, 근대 국가는, 비록 그것이 동일한 개념들에 기초하기는 했지만, 횡단(transversalité), 개방(ouverture) 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죠.
저의 경우, 제가 슈미트의 제헌 권력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사실 우리 모두가 제헌하는 권력이 제헌된 현시에 대해 외부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런 중립적인 권력입니다. 이것은 비판적인 관점에서 슈미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접근해왔던 것과는 정확히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아렌트나 다른 이들처럼 -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슈미트와 연결되어있던 사람들입니다 –, 제가 이해시키고자 하는 바는, 권력의 폐쇄와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렌트가 비의회주의 좌파의 주요 표현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르카가 시작한] 이 사건에는 사실 순전히 기회주의적이고, 사람들이 쓴 것을 읽지 않게 만드는 개념들과 형상들의 고착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슈미트가 제헌 권력이 외부에 있고, 제헌 구조 안에 갇힐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는 시에예스(Siéyès) 이래로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구성요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제헌 권력을 긍정한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어떤 방향에서’ 그것을 긍정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제헌 권력의 방향이 민주주의로 향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슈미트가 말한 것의 반대, 곧 슈미트가 제헌 권력은 그것의 고유한 권력과 그것이 그 자신 안에 담고 있는 것, 즉 자율화와 그것의 고유한 권력의 독립, 그것의 고유한 권력에 고유한 유효성을 긍정하는 것에로 나아가야 한다고 적으며, 그가 말한 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제헌 권력 – 제헌 권력의 다양한 국면들, 우리가 날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것의 실효성을 확인할 수 있는 대중의 주요 현상들, 스페인 사회당의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빠떼로(Zapatero)의 승리에서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에 대해 말하는 것을 굳이 피하고자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슈미트에게서 어떤 도구들을 발견할 수 있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쟝-끌로드 모노가 거론한 저자들의 경우, 저는 발리바르가, 슈미트나 베베가 근대성을 통해 정의한 바 있는 권력 개념을 참조하는, 근대성에 연결된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슈미트를 전체주의적으로, 베버를 민주주의적으로, 레닌을 사회주의적으로 말한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는 항상 자본의 관리 형태, 그리고, 그 형태가 어떤 것이든 간에, 이 관리가 필요로 하는 집중화가 관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실체는 동일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들은 점점 더 동질화되어 갑니다. 저는 발리바르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 보증하는 부의 증대와 연결된, 다양한 주체들이 누릴 수 있는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면서, 이 지형 위에서 진보적인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군주제적인 방식으로, 귀족제적인 방식으로,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슈미트가 그것을 군주제적인 방식으로 했고, 베버가 귀족제적인 방식으로 했으며, 발리바르가 민주주의적인 방식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감벤은 자유의 심급이란 이런 것과 지속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주의자입니다. 그는 권력이란 변혁될 수도, 이용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감벤은 확실히 하이데거주의자이긴 하지만, 여하튼, 세계의 운명과 우리가 머물고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혼동하기에 앞서, 사태를 약간이나마 헤아리며, «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다른 것에로 열릴 수 있다 »라고 말하는 하이데거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사실 권력은 우리가 여기에, 이러한 개방(열림)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운명적 특성을 꿈꿉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자들의 글에서, 이러한 운명적 특성은 절대적인 것이 될 뿐더러, 그 안에는 자유에 대한 어떤 개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권력이란 관계, 정확히 <자본>에서와 같은 관계, 즉, 이 관계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논쟁하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며, 때로는 피착취자들도 승리할 수 있는 날이 온다고 생각하는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제 문제는 그것입니다. 하나의 적으로 간주하기. 저는 슈미트를 하나의 적으로 간주합니다. 저는 슈미트를 권력의 극단적인 대표이자, 극단적인 파시스트로 간주할 뿐이지, 전혀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건의 문제적인 추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 지에 대해선 아직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MouvementsM. : 자유주의자들은 [좌파의] 비판적인 슈미트 활용 속에서, 법률적 형태들을 보증인이나 반-권력으로 간주하길 거부하는 혹은 반자유주의라는 유령을 선동하는 마르크스주의적 모체가 지닌 일종의 반법률주의적 잔재들을 바라봅니다.
네그리 : 자유주의자들은 어떤 점에서 소유권이 우리의 자유를 그다지 방어할 수 없는 지에 대해서는 결코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아주 나쁘게 기능했던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권리는 착취의 권리가 아니라, 반대로 세상에 대한 소유로서의 인간의 표현을 투자해야 하는 권리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토론해야만 하는 개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유주의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수락한다면, 그들과 논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그래 좋아, 인간 본성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완벽한 자유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관건은 끊임없이 재정의되는 어떤 도구들에 의해 제어된 자유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 그러나, 정확히 거기에 슈미트적인 논변이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자연적이지 않은 것을 자연적인 것인양 간주하면서, 주권과 그것이 긍정되는 형태들을 혼동하면서 과장합니다. 이 수준에서 볼 때, 신비화의 형식들이란 우리가 어떻게 그것과 논쟁해야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감벤이 자유 민주주의는 집중 수용소를 경험하는데 이르렀음을 보일 때,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권력 형태 자체와 관련된 것입니다. 권력이 그런 종류의 것에로 이른 것입니다.
비자유주의자인 슈미트 자신은 게르만 전통 깊숙히에서 나온 것입니다. 슈미트는 라반트(Laband) 이후, 즉1870-1880년대 공법 및 헌법의 논설들을 작성했던 저자들 이후, 가장 위대한 독일 공화주의자입니다. 그는 라인 연방 전통과 프러시아 왕국 전통 사이의 동맹을 법률적인 관점에서 봉인한 것입니다. 이것이 극히 중요합니다. 슈미트는 프러시아적인 관료주의국가(Obrigkeitsstaat)의 고전적 권위주의의 원천과 결부시키기 위해, 가톨릭적인 라인 전통에서 반동적인 원천을 채취해냅니다. 그는 헌법들을 생산해낸 주요 독일 공법 학파의 언어에 비추어볼 때, 세심한 언어를 가지고 이 모든 것을 해냈습니다. 이 학파 자체도 18세기에 형성된 한 흐름, 언어를 법률적 도구로 사용함에 있어서 참으로 강력하고, 발전되었던 전통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사실, 만일 슈미트가 역시 중심적이라면, 그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입니다. 타우베스와 슈미트가 주고받았던 서신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아주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타우베스는 슈미트가 권력, 국가를 이해했음을 암시적으로가 아니라, 진정으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근대 민족 국가는 슈미트에게서 그 가장 고도의 건축물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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