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13호(200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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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상태
지오르지오 아감벤/ 역자 : 홍철기
아감벤의 파리 7대학(드니 디드로) 롤랑 바르트 센터에서의 강연을 요약/발췌한 것이다. 저자는 베로나 대학의 철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원문은 www.generation-online.org/p/fpagambenschmitt.htm 에서 볼 수 있다.■역자
그의 『정치신학』(1922)에서 칼 슈미트(1888~1985)는 예외상태와 주권사이의 본질적인 인접성에 대하여 확인하였다. 그러나 슈미트의 주권자에 대한 유명한 정의, 즉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자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수 차례에 걸쳐 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법의 영역에서 예외상태에 관한 제대로 된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사학자뿐만 아니라 법학자들에게 있어서 예외상태는 법학에 고유한 질문이라기보다는 보다 사실상의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예외상태는 법과 정치의 한계에 위치 지워져 있기 때문에 용어의 정의 자체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널리 인정되는 견해에 따르면, 예외상태는 “법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교차점에 있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언저리”에 위치 지워져 있고, “공법과 정치적 사실 사이의 불균형의 지점”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상태의 한계들을 정의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실로 예외상태에 그 성격을 부여하는 예외적인 조치들이 일정 기간의 정치적 위기들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예외적 조치들이 법 혹은 헌법의 영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치의 영역을 통해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면, 이러한 조치들은 그 스스로가 법적인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는 법적 조치들이라는 모순적인 위치에 있음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며, 이 때 예외상태란 그 자신을 법적 형식을 가질 수 없는 법적 형식으로 제시하게 된다.
나아가서 만일 주권자적 예외라는 것이 법 자신의 실행을 중지시키는 그러한 동일한 제스처에 삶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삶을 법과 관련시키게 되는 본원적인 배열이라면, 예외상태에 관한 이론은 살아있는 존재와 법 사이의 구속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공법과 정치적 사실, 그리고 다른 편에는 법질서와 삶 사이에 존재하는 이러한 불확실성의 영역을 덮고 있는 베일을 걷어내는 일은, 정치적인 것과 법적인 것, 그리고 법과 삶의 이러한 차이 자체, 혹은 가정된 차이의 중요성을 포착하도록 한다. 예외상태에 관한 정의를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 중에서 우리는 예외상태와 내전, 반란, 그리고 저항권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알고 있다.(?) 그리고 사실상 내전이 정상상태와 반대되기 때문에 예외상태, 즉 심각한 종류의 내부적 투쟁에 대하여 국가가 즉각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는 그러한 상태와 내전간에 유착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20세기는 ‘합법적 내전’이라고 정의되는 모순적인 현상을 산출해왔다.
나치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히틀러가 집권한 직후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히틀러에게 권력이 제공된 직후) 그는 1933년 2월 28일에 인민과 국가의 보호에 관한 법령을 선포한다. 이 법령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바이마르 헌법의 모든 조항을 중지시켰다. 이 법령은 폐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제3제국 전체를 법적 관점에서 12년 간의 장기 예외상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대의 전체주의를 하나의 제도, 즉 정적뿐만 아니라 정치 체계로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집단 전체를 제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예외상태 혹은 합법적 내전의 방식의 제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영속적인 예외상태의 의도적인 창출은 민주주의 국가를 포함한 모든 현대 국가들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외상태는 더 이상 기술적인 의미에서 선포될 필요가 없게 된다.
전지구적 내전
최소한 1811년 12월 24일의 나폴레옹의 법령 이래로, 프랑스의 학설들은 군사적 계엄상태와 구분되는 “허위의, 혹은 정치적” 계엄상태라는 것에 반대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 법학이 ‘가상의 예외’라는 말을 쓰며, 나치 법학자들은 국가 사회주의의 국가를 확립하기 위해서 무조건적으로 ‘의도된 예외상태’라는 말을 사용한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동안 예외상태에 대한 의존은 모든 교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오늘날 ‘전지구적 내전’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무언가의 지속적인 진행에 직면하여, 예외상태는 점점 더 현대 정치의 지배적인 통치 패러다임으로서 나타난다. 예외상태가 원칙이 되어 버린 후에는 이러한 한시적이고 예외적인 조치가 통치의 기술이 되는 변형으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헌정 형식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이 제거되는 위험성이 존재한다.
예외상태를 통해서 법은 삶-존재와 결합하고, 또한 자신을 중지시킴으로써 이들을 결합한다는 예외상태의 기본적인 특징은 미국 대통령이 2001년 11월 13일에 공표한 군사 명령을 통해 극도로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 선포는 시민권자가 아닌 테러 활동 용의자를 특별 관할권에 종속시키는데, 이 관할권에는 “기간이 한정되지 않는 구속”과 군사법정에서의 심리가 포함된다. 2001년 10월 26일의 미국 애국 법안은 이미 검찰총장(법무부 장관?)으로 하여금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모든 외국인 용의자들을 구속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일 이내에 이 외국인들은 추방되거나 어떤 범죄의 죄목으로 기소되어야만 했다. 부시의 명령에 새로운 점은 이 개인들로부터 법적 지위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 그리고 법에 의해서 명명되거나 분류될 수 없는 존재들을 산출한다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체포된 탈레반들은 제네바 협약이 정한 전쟁 포로의 지위에서만 배제된 것이 아니라 미국 법에 의해 정해진 어떤 관할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죄수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기소된 것도 아니다. 단지 그들은 구속된 것이며, 그들은 순수하게 사실상의 주권에 종속된 것이고, 시간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본성에 있어서 무제한적인 구속상태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구속 상태라는 것은 법 자체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법적 통제 외부에 놓이기 때문이다. 관타나모 항구의 억류자들과 함께 '벌거벗겨진 삶'은 가장 극단적인 무규정성으로 되돌아온다.
칼 슈미트의 저작들에서 예외상태의 이론의 구축에 대한 가장 엄밀한 시도를 찾을 수 있다. 그의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은 『정치신학』(1922)에서뿐만 아니라 1년 먼저 출간된 『독재론』(1921)에서도 발견된다. 1920년대 초에 출판된 이 두 책에 의해 그 당시에만 한정되지 않는(?), 사실상 오늘날 그 진정한 완성을 발견하게 되는 어떤 패러다임이 확립되었기 때문에 이 저작들의 근본적인(토대가 되는?) 주장들을 요약할 필요가 있겠다.
주권론
이 두 책의 목표는 예외상태를 법학적 맥락에 기입하는 것이다. 슈미트는 법질서 전체의 중지를 가능하게 하는 한에서 예외상태란 모든 법적 고려를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유형이든 간에 예외상태와 법질서 사이의 관계를 확실시하는 일이다. “예외상태는 언제나 법적 의미의 무질서나 혼돈과는 구별되며, 그것이 법적 질서는 아닐지라도 여전히 예외상태에는 질서가 존재한다.”
이러한 절합은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법의 영역 내에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법의 영역 외부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오직 법질서 자체의 중지에만 대응되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를 법질서에 이렇게 기입하려는 작용자의 본성이 무엇이든지 간에 슈미트는 법의 정지가 단순한 무질서가 아닌 법의 영역으로부터 도출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예외상태는 법 내부에 무규범(anomy)의 지대를 도입하는 것이며, 이는 슈미트에 따르면 현실의 효과적인 질서확정(ordering)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예외상태가 『정치신학』에서 주권이론으로 제시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주권자는 이런 이유로 법질서에서 분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여기서 결정은 규범의 무화와 관련되기 때문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예외상태는 외부적이지도, 내부적이지도 않은 공간에 대한 통제를 표상하기 때문에, “주권자는 정상적으로 유효한 법질서의 외부에 남아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질서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그는 헌법이 그 자체로 유예될 수 있는 결정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넘어서면서 속하기
‘외부에 존재하면서 여전히 속하기’: 이것이 예외상태의 위상학적 구조이며, 예외를 결정하는 주권자의 존재가 논리적으로 바로 이러한 구조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주권자는 또한 ‘ecstasy-belonging’이라는 모순 어법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을 것이다.
1. 1990년에 자크 데리다는 뉴욕에서 「법의 힘: 권위의 신비로운 토대」라는 제목의 강의를 하였다. 실제로 발터 벤야민의 글,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독해로 이루어진 이 강연은 철학자들과 법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아무도 이 강연의 제목으로 붙여진, 외형상으로 불가사의해 보이는 공식에 대해서 분석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철학과 법학적 문화를 분리시켜놓는 확고한 교차(chiasm)의 징후 일뿐만 아니라 법학적 문화의 쇠락의 표시이기도 하다. ‘법의 힘’이라는 어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efficacy, the capacity to oblige”를 나타내는 시대인 로마와 중세의 긴 법 전통에까지 관련된다. 그러나 단지 근대에 와서, 프랑스 혁명의 맥락에서 이 표현은 인민대표회의에 의해 표명된 포고령(act)의 최고의 가치를 지시하기 시작하였다. 1791년 헌법의 6조에서 ‘법의 힘’은 법의 파괴될 수 없는 성격을 지칭하는데, 주권자 스스로 법을 폐기하거나 변경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기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고대의 학설에서뿐만 아니라 근대에 있어서도 ‘법의 힘’이라는 어구는 법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글자그대로의 의미에서 ‘법의 힘’을 지닌 법령(decrees) ㅡ 특정한 경우에,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는 예외상태의 경우에 집행부가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허용되는 ㅡ 을 지칭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법학 전문 용어로서의 "법의 힘"이라는 개념은 법의 효력과 법의 형식적 본질의 분리로 정의되는데, 이 분리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법이 아닌 법령(decree)과 조치가 여전히 법의 힘을 지니게 된다.
아노미의 공간
집행부(executive power)와 입법부의 행위간의 이러한 유형의 혼란은 예외상태의 필연적인 특징이다. (가장 극단적인 예는 나치 정권의 경우였는데, 아이히만(Eichmann)이 계속해서 되풀이하였듯이 “총통의 말은 법의 힘을 지녔다”) 그리고 현대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부 포고령에 의한 법창조(결국 의회가 승인하게 되는)는 일상적인 과정이 되고 있다. 오늘날 공화국은 의회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행정부 중심적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집행부와 입법부간의 혼동만큼이나 법 자체로부터 법의 힘의 분리도 예외상태에 고유한 것이다. 예외상태는 그 내부에서 규범이 유효하지만 적용될 수 없는 (왜냐하면 규범은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법의 가치를 지니지 않은 행위?(acts)가 법의 힘을 갖는 그러한 법 체제를 정의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법의 힘이란 국가의 권위에 의해서건, 혹은 혁명 조직에 의해서건 주장될 수 있는 규정되지 않은 요소로서 동요한다는 사실이다. 예외상태는 아노미의 공간이며 그 안에서 결정적인 것은 법이 부재한[혹은, 법률적 근거를 가지지 않는] 법의 힘이다. 그러한 법의 힘은 실로 신비로운 요소이거나 법이 그것에 의해 아노미를 자기 자신의 일부로 삼으려고 시도하는 픽션(허구)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신비적인 요소, 즉 그러한 요소에 의해 법이 그 자신 자신에 대한 말소로부터 살아남으며, 예외상태에서 순수한 힘으로 행사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2. 예외상태의 특유한 질은 예외상태의 진정한 원형으로 간주될 수 있는 로마법의 조치 중 하나인 iustitium[법정지 상태]를 살펴볼 때 분명하게 나타난다. 로마 원로원이 공화국을 위협하거나 위태롭게 하는 상황에 대해 인지하게 되면, 원로원은 senatus consultum ultimum[비상사태 선포]를 선언하였는데, 이때 집정관들(혹은 그 대리자들과 시민 각자)은 공화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조치들을 취해야만 했다. Senatus consultum[원로원의 결정]은 그에 의해 tumultus[소요], 즉 내부적인 무질서에 의해 촉발되는 비상사태를, 혹은 iustitium을 선언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반란[상황]을 선언하였던 조치를 함축하였다.
Iustitium이라는 말은 정확히 solstitium[지(至)점; 회귀선]―글자 그대로 “ius[법, 권리], 즉 법질서의 정지, 혹은 중지”를 뜻하는―과 같이 구성되었을까? 라틴어 문법학자들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극점(soltice)에서의 태양과 똑같이 법이 정지의 지점을 표시할 때.”
결과적으로 iustitium은 법 자체의 중지인 만큼 사법적 틀 내부에서의 중지이다. 만일 우리가 예외상태의 구조와 본성을 파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법적인 진공 상태의 산출, ius가 완전히 제거된 공간의 산출만을 단지 의미하는 이러한 법적 제도의 이율배반적인 지위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키케로가 언급한 iustitium을 그의 Philippic Discourses 중 하나에서 살펴보자. 안토니우스의 군대는 로마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고, 집정관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나는 iustitium을 선언하고 전투에 준비하기 위해서, tumultus를 선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 Iustitium을 ‘법적 공백(legal vacancy)’으로 보는 통상적인 번역은 여기서 전적으로 무의미하게 보인다. 이와 반대로,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여 급박한 문제는 법집행자(magistrate)의 행위에 대해 법률적으로 부과된 제한(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대중의 판단에 의거하지 않고 시민을 죽일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금지)을 파기하는 것이다.
도시[정치질서]의 공간과 폭력적으로 결합하게 되는 이러한 아노미의 공간에 직면하여, 고대와 근대 모두의 저술가들은 모순적인 두 개의 관점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 첫째는 iustitium을 모든 권력과 모든 법적인 구조가 그 안에서는 폐기되는 완전한 아노미라는 생각에 대응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iustitium을 실제적인 것의 총체와 일치하게 되는 법의 충만함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법의 비(非)-집행(Un-executing the law)
그때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Iusititum 동안에 행해지는 조치들의 본성은 무엇인가? 법적 공백 상태에서 그러한 조치들이 취해지는 순간부터 그러한 조치들은 어떤 법적 함의도 없는 순수한 사실들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이 문제는 중요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보다도 살인면허를 암시하는 행위의 공간에 대해 고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Iustitium 동안에 시민을 살해한 법집행관은 iustitium이 끝났을 때, 살인죄로 재판을 받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입법과 집행, 그리고 범죄(transgression)에 대한 전통적인 법적 구분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는 행위의 유형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Iustitium 동안의 법집행관의 행위는 예외상태 동안의 명령권자(officer)의 행위와 같은데, 이때의 행위는 새로운 법창조 행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법의 수행이나 위반도 아니다. 모순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우리는 법집행관이 법의 ‘비-집행(un-executing)’의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의 비-집행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인간 행위의 전체 범위 안에서 이 특수한 종류의 행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는가?
이제 iustitium에 대한 계보학적 조사의 결과들을 예외상태의 일반 이론의 관점으로부터 발전시켜볼 수 있다.
•예외상태는 독재가 아니라 법이 전무한 공간이다. 로마 헌정 질서에서 독재관은 인민에 의해 투표로 결정된 법으로부터 그의 권한을 위임받은 특정한 종류의 법집행관이다. 그렇지만, iustitium은 근대적인 예외상태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법집행관의 생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법적 규정이 비활성화되는 아노미의 지대를 만들어낼 뿐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리고 통상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무솔리니나 히틀러는 전문적인 관점에서는 독재자로 정의될 수 없다. 히틀러는 특히 합법적으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라이히 수상이었다. 나치 정권의 성격을 결정하고 그것을 이러한 위험한 모델로 만드는 것은 나치 정권이 바이마르 헌정질서를 나치 정권 자체와 결합시켰는데, 이러한 바이마르 헌정질서는 일상화된 예외상태가 지탱해주지 않으면 나치 정권과 양립할 수 없는 이차적이고 비형식화된 구조를 지닌 이차적인 것인 한에서 존속하도록 허용되었다는데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법이 전무한 공간은 법질서 자체에 대해서 너무나 본질적인 것으로 보여서, 후자는 전자와의 관계를 보장하려는 모든 가능한 시도를 마치 법이 자신의 작동을 보장하기 위하여 아노미와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만든다.
미래의 폭력
3.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1923년부터 1940년까지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를 대립하도록 만든 예외상태에 관한 논쟁을 읽어야만 한다. 논의는 통상적으로 1923년의 벤야민의 ꡔ독일 바로크 비극의 원천ꡕ에서의 ꡔ정치신학ꡕ에 대한 독해와 슈미트의 주권이론으로부터의 수많은 인용에서 출발한다. 벤야민이 그의 사상에 대한 슈미트의 영향을 인정한 것은 언제나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을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도, 슈미트의 주권이론을 벤야민의 폭력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제안함으로써 나는 불명예에 대한 비난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이 그의 「폭력 비판」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벤야민에게 있어서 문제는 법을 보존하고 정립하는 폭력간의 변증법을 단절시킬 수 있는 폭력, 즉 법을 넘어서, 그리고 법의 외재적인 미래의 폭력의 가능성을 어떻게 수립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벤야민은 이 다른 폭력을 ‘순수한’ ‘신성한’ 혹은 ‘혁명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법이 견딜 수 없는 것, 그리고 법이 참을 수 없는 위협으로써 불쾌해하는 것은 법에 대해 외재적인 폭력의 실존이며, 이는 폭력의 목적이 법질서의 의도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외재성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슈미트의 주권 이론이 벤야민의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예외상태는 바로 그 안에서 슈미트가 법 외부에 존재하는 순수한 폭력이 존재한다는 테제로 포괄하고 포함시키고자 했던 그 공간이다. 슈미트에게 있어서 순수한 폭력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노모스의 절대적으로 외재적인 폭력도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혁명적인 폭력은 일단 예외상태가 수립되면 언제나 법에 포함된 것으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외상태는 따라서 순수한 폭력이 존재한다는 벤야민의 테제에 대응하기 위하여 슈미트가 고안해낸 수단이다.
벤야민-슈미트 논쟁의 가장 결정적인 문서는 역사의 개념에 대한 8번째 테제일 것이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예외상태’란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통찰을 유지시켜주는 역사관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과제란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이는 파시즘에 대항한 투쟁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향상시켜 줄 것이다.”
규칙으로서의 예외
그 이후로 예외상태가 규범이 되었다는 것은 예외상태에 대한 결정불가능성(undecidability)이 극점에 도달하였다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또한 슈미트에 의해 예외상태에 주어진 과제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슈미트에 따르면 법질서가 작동하는 것은 배열의 최종심급, 즉 예외상태에 근거해서만 가능한데, 예외상태의 목표는 규범의 실행의 일시적인 중단에 의해 규범을 적용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예외가 상례가 되면 이러한 배열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고 슈미트의 예외상태의 이론은 무너지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벤야민에 의해 제안된 구분, 즉 실제적인 예외상태와 허구적인 예외상태의 구분은 거의 주목받고 있지 못하지만 본질적인 것이다. 이는 이미 슈미트의 이론에서 발견되는데, 그는 이러한 구분을 프랑스의 법학 이론으로부터 빌려왔다. 그러나 슈미트는 법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라는 자유주의적 관념에 대한 비판의 동일한 논리에서 법률에 의해 통치된다고 공언되는 모든 예외상태를 허구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거인들의 전투
벤야민은 이 대립을 재정식화하는데, 이 대립을 슈미트에 대항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예외상태의 가능성, 즉 예외와 정상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구분되는 그러한 가능성이 한번 사라지면, 효력을 갖는 것은 우리가 그 내부에서 살게되는 예외상태이며, 거기서 우리는 더 이상 규칙을 구분해낼 수 없게 된다. 이 경우에 예외상태와 법을 묶어주는 허구는 사라지고, 어떤 법률적 보호 없이 순수한 폭력에 의해 지배되는 아노미의 지대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슈미트와 벤야민 사이의 논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 논쟁은 슈미트에게 있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법과의 연결관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반면, 벤야민에게는 이러한 법과의 관계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아노미의 공간에서 벌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과 폭력과의 관계, 다시 말해 정치적 행위라는 암호를 푸는 열쇠로써의 폭력의 지위이다. 아노미에 관한 언쟁(logomachia)은 서양 형이상학을 정의한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간의 전투"와 동등한 정도로 서양 정치에 있어서 결정적이다. 형이상학의 마지막 문제로써의 순수한 존재에 대응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궁극적인 문제로써의 순수한 폭력이다. 따라서 로고스의 그물 내에서 순수한 존재를 원하는 존재-신학적 전략에 대하여 폭력과 법의 관계를 보장해야만 하는 예외의 전략이 대응한다. 그것은 마치 법과 로고스가 삶과의 관계를 정초하기 위하여 아노미, 혹은 ‘비-논리적’인 지대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4. 법과 아노미, 그리고 순수한 폭력과 예외상태의 구조적 인접성은 자주 그렇듯이 전도된 형상이다. 역사학자, 인종학자, 그리고 민속의 전문가들은 로마의 Saturnalias, charivari, 그리고 중세의 카니발과 같이 정상 질서를 정의하는 법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들을 중지시키고 전도시키는 아노미적인 축제들에 매우 익숙하다. 주인은 하인에게 봉사하고, 사람들은 동물과 같이 분장하고 행동하며, 나쁜 습관이나 범죄와 같이 보통 때에는 불법적인 것이 갑자기 허용된다. 칼 모일리(Karl Meuli)는 특정한 고대적인 형벌 제도를 특징짓는 이러한 아노미적 축제들과 법의 중지 상황간의 관계를 처음으로 강조했다. 여기서는 iustitium에서처럼, 재판 없이 사람을 죽이고, 그의 집을 파괴하고, 그의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 신화학적 과거를 재생산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카니발의 무질서, 그리고 charivari의 소란스러운 파괴는 아노미의 실제적 역사 상황을 다시 현실화한다. 법과 아노미의 애매한 관계는 따라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 즉 예외상태는 무제약적인 축제로 변환되며, 여기서는 완전하게 자유로운 상태에서의 순수한 폭력이 드러난다.
5. 따라서 서양의 정치 체계는 이중적인 장치로 보이는데, 그것은 서로 이질적인 그리고 또한 대립적인 요소들(그 절합이 예외상태에 의해 보장되는 노모스와 아노미, 법적 권리와 순수 폭력, 법과 삶의 형태들)의 변증법 위에 세워져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분리된 채로 남아있는 한, 그들의 변증법은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들이 상호적인 비결정성을 향하는 경향이 생길 때, 그리고 양면을 지닌 하나의 특유한 권력으로 합성될 때, 즉 예외상태가 상례가 될 때, 정치 체계는 죽음의 장치로 변모한다. 우리는 묻는다. 왜 노모스는 그 일부로서의 아노미를 필요로 하는가? 왜 서양의 정치학은 이러한 내부적인 진공상태와 결합해야만 하는가? 그렇다면 만일 정치적인 것이 이러한 법적 공백에 본질적으로 할당되어 있는 것이라면 정치적인 것의 실질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을 할 수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서양 정치사 전체를 관통하여 울리는 이 다른 질문에도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정치적으로 행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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