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자율평론> 13호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798&p_no=1

 

 

 

피플이란 무엇인가?
What is a people?


 

지오르지오 아감벤 / 역자 : 서정연

 


• G. Agamben, "What is a people?", means without end, Univ. of Minnesota, 2000
• 옮긴이_서 정 연 thered@sogang.ac.kr
• 옮긴날_2005. 5. 12
■ 역자




 

피플 people 이라는 용어의 정치적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말이 근대 유럽의 언어들 속에서 언제나 가난한 자, 사회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자, 그리고 배제된 자를 가리켜 왔다는 특유의 사실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이 동일한 용어는 정치로부터―법률상으로는 아닐지라도, 사실상―배제된 계급만이 아니라 구성적인 정치적 주체도 아우르고 있다.

이탈리아어의 popolo, 프랑스어의 peuple, 스페인어의 pueblo―이에 상응하는 형용사들인 popolare, populaire, popular와 더불어―, 그리고 이 용어들 모두의 유래가 되는 중세 라틴어의 populus와 popularis는 일반적인 말이나 정치적인 어휘 속에서 (“이탈리아 사람 people”이나 “배심원 giudice popolare”을 말할 때처럼) 단일한 정치체로서의 일반시민 전체와 더불어, (평민 homme de peuple , 서민구역 rione popolare, 인민전선 front populaire에서처럼) 하층계급의 사람들도 똑같이 가리킨다. (좀 더 획일적인 느낌이 드는) 영어의 people조차도 부자와 상류층에 반하는 보통 사람들 ordinary people의 의미를 담고 있다. 미국의 헌법 속에서는, 즉 “우리, 미합중국의 사람들 people ....”이라는 대목에서처럼 아무런 구별도 두지 않고 읽게 된다. 하지만 링컨이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라고 외쳤을 때, 이 반복되는 말이 은근히 가리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피플과는 다른 피플이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 동안에도 (즉, 피플의 주권 원리가 주장되었던 바로 그 순간에도) 이러한 의미의 이중성1이 어느 정도로 본질적인가 하는 것이 배제된 계급으로 취급되는 인민에 대한 동정심에 의해 수행된 혁명에서의 결정적인 역할을 통해 입증되었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 말의 규정은 동정심으로부터 생겨났으며, 그 용어는 불운과 불행의 동의어가 되었다. ―로베스피에르 Robespierre는 “인민, 그 가련한 이들이 나에게 갈채를 보낸다” le peuple, les malheureux m'applaudissent

고 말했으며, 또한 프랑스 혁명에서 가장 감상적이지 않으며, 가장 냉정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던 씨에예스 Sieyès 조차도 “늘 불쌍한 인민” le peuple toujours malheureux.이라고 말했던 것이다.2

하지만 이것은 민주주의나 인민 국가 État populaire에 관해 정의하고 있는 ꡔ국가론 제6권ꡕ Les Six Livres de la République의 장 보댕 Jean Bodin에게 있어서는 ―비록 다른 의미에서긴 하지만― 이미 이중적인 개념이다. 즉 하찮은 피플 menu peuple3은 정치적 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 것이 현명한 반면에, 집합체로서의 피플 peuple en corps은 주권성을 받는 자격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의미론적으로 광범위하고도 변함이 없는 이중성이 우연한 것일 수는 없다. 이것은 서구 정치에서 피플 people이라는 개념의 본질과 기능 속에 내재하는 의미의 이중성을 확실하게 반영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피플이라 부르는 것은 실은 일원화된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대립하는 양극 사이에서의 변증법적인 진동이라 할 수 있다. 곧 한편으로는 총체적이자 일체화된 정치체로서의 피플 People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배제된 자들의 부분적이자 파편화된 다양체로서의 피플 people인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남겨진 공백이 없는 듯 해 보이는 포함적인 개념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런 희망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배제적인 개념이다. 한 쪽 극에는 주권과 일체화된 시민들의 총체적인 상태가 있으며, 다른 쪽 극에는 비참한 자, 억압받는 자, 그리고 정복당한 자에 대한 ―기적의 거리이든 수용소이든― 추방이 있다. 피플 people의 개념이 지시하는 단 하나의 간결한 대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근본적으로 중요한 수많은 정치적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이 점에서 보자면, 아벨 Abel과 프로이트 Freud의 원형들 Urworte이나 또는 뒤몽 Dumont의 위계적인 관계들과 유사하다), 피플 people은 두 극단 사이에서의 이중적인 운동과 복잡한 관계를 가리키는 양가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인류를 정치체로서 구성하는 것이 근본적인 분할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피플 people이라는 개념을 통해, 일찌감치 동일화시켰던 개념적인 쌍을 본래의 정치적 구조에서의 규정적인 범주, 즉 헐벗은 삶 (people)과 정치적 실존 (People), 배제와 포함, 조에 zoē와 비오스 bios로 손쉽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플 people이라는 개념은 개념 자체에 근본적인 삶정치적 균열을 언제나 이미 담고 있다. 피플은 자신이 언제나 이미 포함되어 있는 전체에 속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전체에 포함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피플의 개념은 정치적 무대에서 불리어지고 작동되는 모든 순간마다 모순들과 아포리아를 발생시킨다. 이것은 언제나 이미 있는 것이며, 또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동일성의 순수한 원천이며, 배제, 언어, 혈통, 그리고 영토에 따라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규정하고 정화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자신의 부족한 그 본질을 자신의 정 반대의 극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의 실현은 그 자신의 폐지와 동시에 일어난다. 존재하기 위해서 이것은 자신의 대립물을 통해 스스로를 부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특유한 아포리아는 피플을 향해 있으면서도, 이와 동시에 피플의 폐지를 목표로 한다.) ―언제나 매번 반동의 피 묻은 깃발로써, 그리고 혁명과 인민전선의 쇠퇴의 징표로써 펄럭여지는― 피플이라는 개념은 적과 동지 사이의 분할보다 더 근원적인 분할을 항상 지니고 있는데, 끊임없는 내전은 그 어떤 대립 보다 더 근본적으로 이 개념을 분리시키며, 그 어떤 동일성 보다 더 확고하게 이 개념을 구성하고 하나로 결합시킨다. 사실상 맑스가 말한―비록 그가 이에 대한 정의를 실질적으로 내린 적은 전혀 없지만, 자신의 사상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계급투쟁은, 모든 피플을 분리시키는 내부적인 전쟁이자, 계급이 소멸한 사회에서나 혹은 메시아적인 왕국에서 피플 People과 피플 people이 일치되는 때에만, 정확히 말해서 어떤 피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때에만 종식되어지는 내부적인 전쟁 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피플 people이라는 개념이 그 자체에 근본적인 삶정치적 균열을 필연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면―, 금세기 역사의 몇몇 결정적인 장면들을 새롭게 읽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만일 두 피플 사이의 투쟁이 언제나 진행되어져 왔다면,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 이 투쟁은 그 어떤 최후의 폭발적인 가속화를 경험해 오고 있다. 중세 시대에 장인 popolo minuto과 상인 popolo grasso사이의 구분이 상이한 미술 공예품들의 정확한 분절에 상응했던 것처럼, 고대 로마에서는, 피플에 내재한 이러한 균열이 populus와 plebs 사이의 명확한 구별4을 통해 법적으로 승인―각기 자신의 법령과 정무관을 갖게―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나타난 주권성이 피플에게만 전적으로 위임되어졌을 때, 피플 people은 난처한 존재가 되었으며, 빈곤과 배제가 처음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서 등장했다. 근대 시기에 있어서, 빈곤과 배제는 경제적이자 사회적인 개념일 뿐만이 아니라, 탁월하게 정치적인 범주들이다. (근대 정치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제주의와 “사회주의”는 사실상 정치적인 의미, 또는 오히려 삶정치적인 biopolitical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배제된 자들인 피플을 근본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피플을 분리시키는 분할을 메워보려는 조직적이고 무자비한 시도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시도는 상이한 양상과 지평에 따라, 좌파와 우파,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들과 사회주의 국가들 모두를 단일하며 비분리된 하나의 피플을 창출하고자 하는 계획에 전부 협력하도록 만들어 왔다. ―하지만 이는 모든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되긴 했지만, 궁극적으로 헛된 계획이었다. 발전에 대한 강박 현상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무척이나 위력적이었는데, 발전이 균열이 없는 하나의 피플을 창출하려는 삶정치적 계획에 부합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 나치 독일에서의 유대인 말살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국민적인 정치체로의 통합을 거부한 피플로서의 유대인들은 (사실상, 유대인의 동화는 실은 가장된 것에 불과하다고 간주된다) 피플 people, 즉 근대성에 의하여 그 내부로부터 불가피하게 창조될 수밖에 없었지만 더 이상 어떤 방법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헐벗은 삶의 뛰어난 전형이자 살아있는 상징이다. 우리는 ―일체적인 정치체로서의 피플의 훌륭한 전형인―독일 민족 Volk이 피플 People과 피플 people을 분리하는 내부 투쟁의 최종적인 국면으로서 유대인들을 영원히 말살하고자 했던 그 분명한 광기를 인식해야만 한다. 나치즘은 이처럼 용납하기 어려운 어두운 그림자들을 서구의 정치 무대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그리고 원래의 삶정치적 균열을 해소할 수 있는 피플로서의 독일 민족 Volk을 마침내 창출하기 위하여―집시들뿐만 아니라 어떤 이유로 인해 동화시킬 수 없었던 다른 구성원들까지 포함시킨―궁극적인 해결책을 가지고 음흉하고도 어리석은 노력을 했다.5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나치의 우두머리들이 유대인과 집시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들이 사실상 다른 유럽의 피플들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그렇게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주장했던 이유이다.)

이드 Es와 자아 Ich 사이의 관계에 대한 프로이트식의 공준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근대적인 삶정치가 “헐벗은 삶이 존재하는 그 곳에 피플 People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따른 원리에 의해 뒷받침 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 원리는 “피플 People이 존재하는 그 곳에 헐벗은 삶이 존재할 것이다”라고 주장되는 그 반대의 정식에 있어서도 유효하다고 곧 덧붙여 말할 수 있다. 피플 people ―즉, 이의 상징인 유대인들―을 제거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고 여겨졌던 균열이 스스로를 새롭게 재생산하였으며, 이에 따라 전체 독일 피플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성스러운 삶이자 (정신적 질병과 유전적 질병의 보균체를 제거함으로써) 끊임없이 정화되어야만 하는 생물학적 몸으로 바꿔 놓았다. 오늘날, 상이하면서도 여전히 유사한 방식으로, 가난한 자를 제거하려하는 자본주의적-민주주의의 계획은 자신의 내부에 배제된 피플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제 3세계의 모든 인구를 헐벗은 삶으로 바꿔놓고 있다. 서구의 근본적인 삶정치적 분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진동을 막을 수 있을 것이며, 지구상의 피플과 시민 전체를 분리하는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95)

[미주] ------------------

1. [옮긴이] 여기서의 ‘의미의 이중성’은 ambiguity를 옮긴 것이다. 'ambiguity'는 의미가 단일하거나 확실하지 않은 채, 모호하고 애매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말에서는 애매하다, 모호하다, 또는 다의성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 단어의 어근인 ‘ambi’가 ‘둘’을 뜻하는 말이며, 또한 이 글에서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피플의 개념적 의미가 단일한 정치체로서의 피플과 하층계급으로서의 피플로 나누어 지적되고 있듯이, 피플이라는 개념의 양가적 성격을 드러낸다는 뜻에서 ‘의미의 이중성’ 또는 ‘이중성’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양가적인 개념’이란 말은 ‘poral concept'를 번역한 것이다.

2. Hannah Arendt, on Revolution (New York: Viking Press, 1963), p.70.

3. [옮긴이] 여기서 menu peuple은 불어로 ‘서민’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피플로서의 서민의 특성, 즉 정치적 주권성을 부여받는 집합체로서의 피플과는 대조적으로 정치적 배제를 당하는 하찮은 피플로서의 서민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서민’이라는 명사를 ‘하찮은 피플’로 풀어서 옮겼다.

4. [옮긴이] populus는 영어의 people, nation, large crowds에 해당되는 말로써, 아감벤이 말한 피플이라는 의미의 이중성 가운데 하나인 동일한 정치체로서의 피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plebs는 영어의 common people, lower classes의 의미를 지님으로써, 아감벤이 지적한 배제되고 가난한 하위 계급으로서의 인민에 해당된다.

5. [옮긴이] ‘궁극적인 해결책 final solution’이란 1942년 나치 독일에 의해서 시행된 유대인 절멸정책을 말하는 것이다. 나치는 이미 1930년대 초반부터 직업관리재건법(1933년)과 뉘른베르그법(1935년)의 재정을 통해, 유대인 상점의 불매 운동 및 폐쇄, 유대인과의 혼인 금지, 유대인의 공직 추방 등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공식적으로 자행해 오고 있었다. 마침내 1942년 1월 22일 현재의 베를린에 위치한 반제Wansee에서 열린 제 3제국 수뇌회의에서, 나치는 전 유럽의 유대인을 동유럽으로 강제 수송하여 격리시키고 말살하려는 방안을 채택한다. 이 방안은 나치의 유대인 정책에 있어서 가장 최종적으로 나온 것이며, 가장 극한적인 ‘말살’이라는 방법을 택했다는 의미에서 나치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불리운다. 이 해결책이 시행된 이후로 전 유럽에 위치한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작업장과 가스실에서 총 600여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감벤은 이러한 유대인 대학살을 일체적인 정치체로서의 피플로부터 헐벗은 삶으로서의 피플을 분리해 내려는 근대의 ‘내부 투쟁의 최종적인 국면’의 결과로 지적하고 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