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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평론> 11호(2005-01-08)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681&p_no=1

 

 

지오르지오 아감벤 : ‘삶-정치’와 ‘예외 상태


 

김상운/양창렬



 

특정한 사람을 이러저러하게 분류한다고 해서 과연 그 사람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지오르지오 아감벤에게 어떤 꼬리표를 붙일 수 있을까? 미학 이론가, 벤야민 연구가, 정치 철학자? 설명 불가능의 지대에 있는 것은 사실 어떤 특출한 인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모든 사람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모든 영역이 구분되기 어려운 그야말로 ‘비차이의 지대’에 위치한 사람이 “지오르지오 아감벤”이라고 한다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서구에서는 이미 어느 정도 철학적 입지를 확보한 것으로 보이는 그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네그리-하트의 『제국』이나 슬로베니아 정신분석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책들에서 언급되고 있는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감벤은 폭과 깊이에 있어서 여느 철학자들 못지않으며, 나름의 독창적인 문제들을 우리에게 던져주기에, 앞에서 언급한 어떤 하나로 축소되기 보다는 그의 작업 전체에 대해 직접적인 독해와 평가가 다방면에 걸쳐 이뤄져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여행은 무엇보다 활공(survol), 말하자면 아감벤의 (정치!)철학에 대한 활공이다.

아감벤의 정치 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저서들로는 ‘통일 없는 단독성’에 입각한 공통성을 주장하는 선언적 저작인 『도래하는 공동체』(La comunita che viene, 1990), 『호모 사케르』 연작1), 『호모 사케르』 1권의 토대이자 보충이 되는 논문 모음집인 『목적 없는 수단들 : 정치에 관한 노트』(Moyens sans fins. Notes sur la politique, 1995) 등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사정상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호모 사케르』 연작에서 특히 ‘삶-정치’(bio-politique)와 ‘예외 상태(l'etat d'exception)’라는 개념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는데 머물고자 한다. 활공치고는 너무 소심한 것 아니냐는 타박을 감내하면서, 그러나 속으로는 이보다 더한 활공은 없다고 자부하면서!


1. 삶-정치

『호모 사케르』(를 비롯한 제반의 책들)는 지금 우리가 하나로 사용하는 ‘삶’이란 단어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둘로 구분되어 쓰였음을 지적하면서 시작된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생명체들에 공통된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조에’(zōē), 그리고 이런 저런 개체나 집단에 특유한 ‘삶의 형식이나 방식’을 가리키는 ‘비오스’(bios).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이 둘은 각기 ‘오이코스’에서의 자연적 삶과 ‘폴리스’에서의 정치적 삶으로 구분되었지만, 사실 이러한 구분은 비단 고대 그리스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오히려 ‘공’과 ‘사’를 구분하려는 모든 시도들에 여전히 잔존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러한 분석의 선구자는 무엇보다 푸코이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생물학적 삶이 국가 권력의 메커니즘과 계산에 통합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즉 국민들의 삶 자체를 관리하는 것이 통치 행위의 중심에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던 것은 푸코의 위대한 작업이 아니었던가? 아감벤은 이 점을 수용하지만, 푸코에게는 집중 수용소와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의 통치 구조에 대한 연구가 공백으로 남아있음을 지적하면서 그 공백을 메우려는 작업에 착수한다. 이 점에서 아감벤의 ‘삶-정치’ 연구는 푸코의 작업을 확장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2).

하지만 아감벤과 푸코에게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푸코가 개체들의 자연적 삶에 대한 관심을 자기 내부에 통합시킴으로써 통치하는 ‘정치 기술’과 개체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체화 과정으로서의 ‘자기 기술’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일종의 대안으로 생각하는 반면, 아감벤은 위와 같은 전체화 과정과 개체화 기술은 구분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푸코처럼 단순히 ‘폴리스 내에 조에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외부적인 자기 주체화가 가능하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아감벤은 조에가 단순히 폴리스 내에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폴리스 내에 ‘포함적으로 배제되는’ 복잡한 구조에 착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은 이처럼 ‘포함적으로 배제된’ 삶을 고대 로마법에 등장하는 ‘호모 사케르’로, 또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힌트를 얻은 ‘헐벗은 삶’으로 개념화한다. 부모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폴리스의 ‘경계’를 헤치거나 손님에게 부정한 짓을 일삼는 사람을 ‘처벌’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을 가리켜 고대 로마인들은 ‘성스러운 인간’(호모 사케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처벌’은 엄밀히 말해서 근대적 방식의 ‘처벌’이 아니다. ‘호모 사케르’로 명명된 사람은 세속의 법질서 바깥에 존재하므로 신과 동격의 인물로 취급되며, 따라서 그를 종교적 의례를 통해 희생시킬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누구든지 그를 죽여도 사형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점(적‘법’한 살해)에서 여전히 인간 공동체에 포함되어있는 존재가 된다. 요컨대 그는 법 바깥에 있는 동시에 안에 있는 것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헐벗은 삶의 단적인 예는 나찌즘 체제하에서 집중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의 삶이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 1권 3부에서 다뤄지는 ‘근대의 삶-정치 패러다임으로서의 수용소’, 『목적 없는 수단들』에 실린 ‘수용소란 무엇인가?’,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 등을 통해 보다 상세히 설명된다. 현대의 삶-정치 패러다임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우리가 오늘날 성스러운 인간에 대한 미리 결정된 형상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으로 성스러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지적을 따른다면, 이제 어느 누구든 희생되지 않으면서, 그 어느 누구에 의해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성스러운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삶-정치의 모델은 푸코가 말하듯이 근대 주권 권력의 새로운 특징이 아니라, 정치권력이 탄생하던 바로 그 때부터 그것이 헐벗은 삶과 맺어온 본원적인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푸코와 아감벤을 나누는 근본적 항의 다른 모습이다.

『호모 사케르』의 서론에서부터 아감벤은 바로 ‘삶-정치’적 문제에 입각해 근대의 민주주의와 현대의 전체주의적 지배체제가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의 민주주의는 처음부터 ‘조에’의 권리요구와 해방운동으로서 등장하고 있으며, ‘헐벗은 삶’ 그 자체를 삶의 형태로 만들어 내려고 한다. 따라서 아감벤은 근대의 민주주의가 맞서 싸워야할 예속의 장소에서 오히려 인간들의 자유와 행복의 둥지를 만들려고 했음을, 그것은 결국 전체주의적 지배체제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인권과 시민권’에서 해방의 테제를 찾으려는 정치적 시도들은 위와 같은 함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선언들은 사실 국민-국가의 법-정치적 질서에 자연적 삶이 등록되었음을 보여주는 근본적인 형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겨누는 비판의 화살은 인도주의적인 인권 운동 조직에도 마찬가지로 돌아간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의 퀭한 눈, 폭탄 파편에 사지를 잃은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서 그러한 조직은 인간의 삶을 여전히 헐벗은 삶, 성스러운 삶의 형상 속에서 이해하고 또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만들어내는 제반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헐벗은 삶’에 관한 결정을 최고의 정치적 기준으로 삼았던 나찌즘과 파시즘은 비참하게도 언제까지나 오늘날의 문제로서 존재할 것이다.


2. 수용소라는 문턱

‘삶-정치’와 ‘예외 상태’의 문턱 혹은 두 개념이 수렴되는 지점인 ‘수용소’를 살펴보자. 아감벤에게 수용소란, ‘예외 상태가 규칙’이 되기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 열리는 공간이며, 현대 정치 공간의 비밀스런 모체이자 노모스이다.

아우슈비츠가 우리에게 던지는 아포리 중 하나는 역사적 인식에 대한 아포리이다. 우리에게 보고된 사실과 진실(진리)이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증언자들의 증언의 문제를 지적하는 프리모 레비의 역설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모든 증언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공백을 포함하는데, 완전한 증언은 밑바닥으로 내팽개쳐졌던 사람들의 증언, 또는 가스실에 끌려가기 전부터, 말하자면 신체적 죽음을 맞이하기 전부터 이미 그들의 죽음이 시작되었던 사람들인 ‘이슬람인들’2)의 증언뿐이기 때문이다. 생존해서 증언하지만, 진실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자들(인간, 말하는 자)과 할 말은 많지만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자들(비인간, 벙어리) 중 과연 누가 증언의 주체일까?라고 아감벤은 묻고 있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에 대해 증언의 주체 ― 이것은 그에게 동시에 윤리적 주체이기도 하다 ― 란 탈주체화를 통해 증언을 하는 자라고 대답한다. 생존자들은 이슬람인들의 자리에 서서 대신 말함으로써, 즉 스스로를 탈주체화(desubjectivation)함으로써만 증언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결국 ‘증언’이란 이 두 증언의 주체가 함께 참여하고 공존하는 과정인 셈이다. 엄밀히 말해 완전한 증언은 비인간의 편에 있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동일성이 결코 완전할 수 없긴 하지만, 인간을 통째로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절대적 비인간화는 없는 셈이다), 항상 무언가는 남기 마련이고, 이 남은 것은 언제나 죽음 속에서도 생존하는(survivre) 것으로서, 인간, 즉 남은 자들의 말을 통해 증언한다. 증인이란 이 남은 것을 가리키며, 아감벤의 책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2)


3. 예외 상태

예외 상태를 개념화하기 위한 아감벤의 작업은 『호모 사케르 1: 주권 권력과 헐벗은 삶』(1995)이나 『목적 없는 수단들』(1995)에서부터 이미 시작되며, 『호모 사케르』 2권 1부인 『예외 상태』(2003)를 출간하면서 그는 이 문제를 한 단계 더 심화시킨다. 그만큼, 이 개념은 그가 수년간에 걸쳐, 놓지 않고 있는 정치철학의 중요한 문제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역사 개념에 대하여>의 여덟 번째 테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예외 상태’라는 것이 이제 규칙[상례]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상응하는 역사 개념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진정한 예외 상태를 도래시키기라는 과제를 우리의 눈앞에 두게 될 것이다.” 예외 상태와 관련된 아감벤의 작업은 벤야민이 우리에게 남겨준 위 과제에 대한 약속 이행이라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아래에서 아감벤의 작업을 두 부분으로 간략하게 나누어 볼 것이다. 즉 예외 상태를 인식하기 위한 작업 그리고 진정한 예외 상태를 도래시키기 위한 준비 작업.

일반적으로 예외라는 것은 규칙의 부정 혹은 대립물로서 간주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논리 구조 속에서는 규칙이 예외에 선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외는 규칙이 아닌 것, 그것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코, 키에르케고르, 칼 슈미트 등은 이러한 통념과는 반대로 '예외가 규칙을 정초한다'라는 입장을 가진다. 이러한 테제는 기본적으로 예외가 규칙에 선행한다는 식으로 단순히 논리가 뒤집힌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외가 규칙의 단순 대립물이 아니라는 통찰에 근거한 것이다. 즉, 예외는 규칙의 바깥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일단 이것이 아감벤이 예외 상태를 인식하는 방식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즉, 예외 상태란 법질서에 외적이지도, 내적이지도 않은 것이다. 혹은 규범이 중단된다는 것이 곧바로 규범의 폐지를 함축하지 않듯이, 예외 상태 혹은 아노미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법질서와 무관해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예외 상태는 법질서에 귀속되면서도 여전히 바깥에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예외 상태의 위상적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포함적 배제'의 논리는 서구 정치에서 폴리스 안에 조에(헐벗은 삶)가 포함되는 동시에 배제된다는 『호모 사케르』 1권의 논리와 동형적이다. 이와 같은 예외 상태에 대한 개념화는 앞에서 언급되었던 칼 슈미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그는 주권(le souverain)의 측면에서 예외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아감벤의 중요한 참조인 중 하나이다.

반면, 세 번째로 예외 상태에 대한 다른 개념화도 가능하다. 슈미트의 정치철학적 의도가 돌출하는 예외들을 예외 상태에서의 주권의 '결정'을 통해 법질서 내로 포섭하려는 시도 ―이점에서 이 주권 기계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개념화한 바 있는 공리계의 논리와 일치한다― 였다고 한다면, 벤야민이 <역사 개념에 대하여> 여덟 번째 테제에서 말한 '진정한 예외 상태'혹은 '실제적 예외 상태'는 예외 상태를 법과 무관한 절대적인 상태로 만들려는 기획으로서 ―이것은 역시 들뢰즈-가타리의 절대적 탈영토화의 선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과의 그 어떤 관계도 거부하는 인간 행위, 내전, 혁명적 폭력으로 해석된다. 이 점에서 전행성적 정치 질서의 주요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은 '원해진 예외 상태'2)에 맞서 싸우기 위한 아감벤의 중요 참조인 중 한 명은 역시 벤야민이다. 아감벤과 벤야민의 이러한 친화성은 놀라운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아감벤은 이탈리아판 벤야민 전집의 편집인이며, 벤야민에 대한 여러 논문 ―Potentialities에 편집, 수록됨― 과 단행본, 『유년시절과 역사』를 쓴 바 있기 때문이다.

폭력과 법의 밀착 관계에 대해 파헤친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 대한 정치한 해석은 아감벤의 정치적 대안의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이것을 폭력과 법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일단, 벤야민은 위 논문에서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변증법을 넘어서는 전혀 다른 폭력으로서 순수 폭력, 신의 폭력, 혁명적 폭력을 제시한다.3) 아감벤은 이러한 폭력이 사실상 바로크적인 종말론(eschatologie)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보는데,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 종말론이 최후의 심판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구원도 모르고, 저 너머의 것도 모르며, 반대로 세기에 내재적인 그러한 것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 아감벤은 데리다가 『법의 힘』 말미에 말하는 신의 폭력의 서명자로서의 신, 혹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메시아'라는 단어가 줄 수 있는 오해와 오독의 가능성에 휘말리지 않는다. 이러한 순수 폭력에서 '순수'라는 말은 어떤 목적과 관련해서 수단으로서 제시되는 것이 아닌 순수 수단, 아감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목적 없는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순수 폭력은 타자를 지배하거나 금지를 실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폭력이 아니라, 순수하게 행동하고 발현하는 폭력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정한 예외 상태 이후에, 계급 없는 사회에 우리에게 도래할 '법'은 어떤 모습일까? 일단, 이러한 법의 도래를 위해서는 기존의 법을 단순히 강제와 금지를 목적으로 하는 다른 법으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정립하는 것도 보존하는 것도 아닌, 법을 버리고 철거시켜버리는 것, 그럼으로써 폭력과 법의 밀착 관계를 해소시켜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법은 카프카가 말했던 '더 이상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연구되는 법', 푸코가 말했던 '새로운 법',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일 것이며, 타자를 통치하기 위한 것도,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도 아닌 법,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용법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올 법의 모습을 띌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이마냥 이 법을 가지고 놀게 되리라는 것이 아감벤의 설명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목적 없는 수단들』에 수록된 「삶-의-형태(Forme-de-vie)」라는 논문에서 개진된 아감벤의 전망을 언급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서구 정치에서 우리의 생물학적 삶이 중요한 정치적 화두가 되어버렸을 뿐 아니라, 언제나 그 삶이 희생 불가능하지만 누구에 의해서든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인간(호모 사케르)의 헐벗은 삶으로 되어버리고, 그 삶이 그것의 형태로부터 분리되고 있음을 우리는 위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국가-주권에 맞서 아감벤은 역량의 삶(une vie de la puissance) -- 여기에서 역량은 『호모 사케르』 1권에서 언급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가능태(la puissance)/ 현실태(l'acte)의 관계를 전혀 새롭게 사유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 을 슬로건으로 내세운다. 이러한 삶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공통된 사유의 경험이다. 여기에서는 우리가 이미 공통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무나도 다양한 다수성 혹은 다양체로서 존재하는 우리가 그저 '무리'나 '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가진 소통가능성을 통해 공통된 것을 사유하는 경험이 중요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요강』에서 지나가듯 언급했으나, 현재의 시간 속에 있는 우리에겐 더 없이 요청되는 '일반 지성(general intellect)'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삶으로부터 그것의 형태를 분리시켜 내려는 국가 주권에 맞서 끊임없이 삶과 그것의 형태를 결합시키고, 무수히 다양한 새로운 삶의 형태들을 발명해내는 것. 이것이 곧 아감벤이 말하는 역량으로 흘러넘치는 삶일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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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이전의 아감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베로나 대학교의 미학교수라는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주된 활동 무대는 미학이다. 프랑스의 『국제철학학회』나 미국의 각종 대학교 등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이라크 전쟁 후 미국이 외국인 입국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미국의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거부하는 논리정연한 글을 기고해 갈채를 받기도 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개최된 하이데거 세미나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에게 하이데거의 냄새가 풍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대에 발표한 『내용 없는 인간』(L’uomo senza conenuto)은 근대 예술가의 운명을 고찰한 미학서이다. 1977년 『서구 문화에 있어서 말과 판타지』(Stanze. La porola e il fantasma nella cultura occidentale), 1982년 『유년시절과 역사』(Infanzia e storia), 1982년 『사유의 종언』(La fine de pensiero), 『언어활동과 죽음』(Il linguaggio e la morte), 1985년 『산문의 이념』(Idea della prosa)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한편 그는 발터 벤야민의 이탈리아판 저작집의 편집에도 관여했듯이 벤야민 연구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예외 상태’에 관한 그의 논의도 사실 벤야민의 선구적인 작업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해야만 할 것이다.

또 소위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후 ‘언어활동’에 입각해 유럽적 인간의 조건에 관한 미학적 고찰을 전개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중심을 ‘미학’이 아니라 ‘정치’로 옮겨가면서 이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전개하기 시작했지만, 이런 와중에도 1993년에 질 들뢰즈의 “바틀비”론(1989년)을 받아들여 『바틀비―창조의 공식』(Bartleby. La formula della creazione)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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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모 사케르』 연작 중 지금까지 출간된 것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권인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헐벗은 삶』(Homo Sacer, 1995), 3권인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 : 문서고와 증인』(Quel che resta di Auschwitz. L'archivioi e il testimone, 1998), 3권의 보론적 성격을 띤 『남은 것의 시대』(2000)가 있다. 한편 2003년에는 연작 시리즈의 2권 1부에 해당하는 『예외상태』가 간행되었다.

2) 한편 이 글에서는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으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나 전체주의에 대한 일련의 분석들이 아감벤에게 미친 영향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아감벤에 의해 지칭되는 ‘이슬람인들’이란 아랍어를 사용하는 실제 이슬람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가스실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끼리 만들어낸 말이다. 피부는 마치 멍이 든 양 얼룩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 죽기만을 기다리던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문턱을 가리킨다. 그들의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니며’, 따라서 그러한 이슬람인들이 있던 공간인 아우슈비츠는 ‘죽음 없는’ 시체들을 양산하는 곳이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4)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억압할 수 없는 최소치로 남는 것’이라는 그의 논리는 푸코의 논리(자기 주체화의 가능성으로서 남아있는 외부)와 동형적일 뿐 아니라, 그가 즐겨쓰는 ‘포함적 배제’(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사라짐으로써, 결국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 체계)의 논리와도 어긋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포함적 배제’라는 그의 논리는 푸코에 대한 비판, 즉 저항의 가능성을 위축한다는 비판을 똑같이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5) 현대의 전체주의 그리고 미국의 부시 정부는 예외 상태를 통한 적법한 내전 상태를 설립하는 바, 이것은 가히 영구적인 긴급 상태 혹은 비상사태를 자발적으로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라고 할 만하다. 이것은 불안을 조장-위장함으로써 과도한 안전장치를 정당화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의 정치 질서 내에 배제적 포함의 장소를 구축하는 데, 이것은 이전의 민족 국가적 틀 내에서는 게토 혹은 캠프였지만, 제국적 질서 내에서는 불량 국가 혹은 적국, 예를 들어 이라크를 통째로 캠프화시키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라크 민중의 삶은 단숨에 헐벗은 삶이 되는 동시에, 가스실에 줄맞춰 들어가던 현대판'이슬람인들'(musulmans)이 된다.

6) 이것과 관련하여 아감벤은 네그리의 입헌 권력 혹은 구성 권력과 거리를 취한다. 아감벤이 보기에 구성 권력/ 구성된 권력 쌍은 법정립적 폭력/ 법보존적 폭력과 상동적이기 때문에, 구성 권력은 새로운 법을 정초하기 위한 폭력에 불과하며, 결국은 주권성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구성권력이 구성된 권력으로 소진되지 않는다(트로츠키의 영구 혁명론이나 모택동의 중단 없는 혁명) 혹은 구성 권력은 그 창조적 역량을 잃지 않는다(네그리의 입헌 권력론)는 주장을 가지고는 주권성의 아포리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입장이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법과 무관한 폭력, 폭력과 무관한 법을 주장하는 아감벤에게는 대신 정치적'주체'의 구성에 대한 논의가 적어도 지금까지의 그의 저술 속에서는 부재 ―『아우슈비츠로부터 남은 것』에서 언급되는 윤리적 주체, 증인, 남은 것을 제외한다면― 하게 되는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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