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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의 흐름과 전망 /조정환(자율평론11호 20050108)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4.

<자율평론> 11호(2005-01-08)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680&p_no=1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의 흐름과 전망


 

조정환


<동국대대학원신문> 2004년 11월호에 실렸던 글이다.■편집자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두 개의 사건이 이탈리아를 세계 좌파운동의 초점으로 만들었다. 그 하나는 1999년 씨애틀 시위에서 온몸에 흰 옷을 입고 나타나 세계시민들의 이목을 끌었던 <뚜떼 비안께>(Tute Bianche)의 출현이다. 이들은 2002년 제노바에서 열린 G8 정상회담 항의시위 때부터는 <디스오베디엔띠>(Disobedienti)로 이름을 바꾸고 사회적 불복종을 전투적 방식으로 주장함으로써 다시 한 번 주목을 끌었다. 또 한 가지 사건은 이탈리아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로 평가되어온 안또니오 네그리가 2000년에 미국 출신의 마이클 하트와 함께 현대 세계의 주권형태의 이행을 분석한 ꡔ제국ꡕ을 출간하고 이어 2004년에 제국의 항구적 전쟁질서 속에서 다중의 절대적 민주주의의 필요성과 그 혁명적 의미를 밝힌 ꡔ다중ꡕ을 출간하여 이탈리아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사상과 이론을 이탈리아적 문맥을 훌쩍 뛰어 넘는 전 지구적 화두로 만든 것이다.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별의 논리에 가로막혀 비교적 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만 공유되어온 자율주의가 그 이탈리아적 경계를 넘어 갑작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전 지구적 좌파운동의 화두로 대두된 이유가 무엇일까? 이 문제를 가벼운 가십거리로 취급하려는 일부 미디어들의 격하전술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은 점차 커져가고 있다. 2004년 9월 9일에서 11일 사이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 대학에서는 이 문제를 ‘이탈리아 효과’(Italian Effect)1)라고 명명하고 21세기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안또니오 네그리, 지오르지오 아감벤, 빠올로 비르노, 마우릿지오 랏자랏또, 프랑꼬 베라르디 등 이탈리아 사상의 잠재력을 탐구하려는 대규모 포럼을 열었을 정도이다. ‘이탈리아 효과’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난 두 세기에 걸친 자본주의 사회의 변화와 그에 대응해온 좌파 운동 전체에 대한 평가와 대안 탐구라는 거시적 문제틀 속에서만 그것이 충실하게 설명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탈리아 효과’의 중심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는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및 사상이 지난 40여년간 전개되어온 흐름을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써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오뻬라이스모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은 1956년 헝가리 노동자들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그리고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노동자들을 향해) 탱크를 보냈던 소련 사회주의에 대한 불신에,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개혁주의적 선거주의로 기울었던 (빨미로 똘리아띠의) 이탈리아공산당과 이탈리아사회당에 대한 불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전투적 노동자들과 제도적 좌파정당들의 불화는 1962년 피아뜨 공장 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 조합사무실을 습격한 사건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라니에로 빤찌에리, 마리오 뜨론띠, 로마노 알꽈띠, 안또니오 네그리 등은 자신들이 속해 있던 사회당과 공산당을 탈당하여 ꡔ꽈데르니 롯씨ꡕ(Quaderni Rossi), ꡔ끌랏쎄 오뻬라이아ꡕ(Classe Operaia) 등을 통해 자본은 물론이고 모든 당으로부터도 자율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론화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탈리아 좌파운동 속에서 오뻬라이스모(Operaismo; 노동자주의)라고 불리는 새로운 경향의 출발점이었다. 오뻬라이스모는 자본과 전통적 노조운동의 명령으로부터 자율적인 노동계급 행동과 주체성이 생성되는 생산의 물질적 조건이 무엇인가를, 즉 계급의 정치적 구성과 기술적 구성이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1961년에 첫 호가 발간되어 좌파정치가들, 조합간부들, 작업장 활동가들, 평당원들 사이에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킨 ꡔ꽈데르니 롯씨ꡕ는 작업장 현실과 노동자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이 탐구를 수행했다. 이 과정에서 주목된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테크놀로지의 자본주의적 사용, 자본의 계획화와 사회적 자본의 형성, 임금관계의 사회로의 확산과 사회적 공장, 대중노동자와 새로운 노동계급의 형성 등이었다. ꡔ끌랏쎄 오뻬라이아ꡕ는 자본의 경쟁적 자기운동을 분석의 중심에 두었던 전통적 좌파들과는 달리 노동계급의 행동과 투쟁을 분석의 중심에 놓고 자본주의 발전이 그것에 의존한다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물리에 부땅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평가한 바 있는 이 계급관점의 역전을 통해 사회학적이고 실체론적인 계급개념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오뻬라이스모의 구성적 계급분석, 즉 ‘계급구성’ 개념이 발전되었다. 이 개념은 투쟁을 통한 노동력의 다양한 층들의 결속을 통해 노동계급이 발전되어 나온다는 생각을 구체화함으로 사회주의 의식의 교육에 의해 노동계급이 형성되어 나온다는 레닌주의적 계급의식 개념을 대체했다.

1969년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은 오뻬라이스모 운동에게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위기이기도 했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 여성들, 학생들은 자본가들, 공산당 관료들, 노동조합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었던 점에서 오뻬라이스모의 새로운 계급이론을 경험적으로 확인해 주었지만 이들의 분석이 피아뜨의 자동차 공장이나 마르게르 화학공장과 같은 전통적 공장의 노동자들에 대한 분석에 집중되어 있었던 점에서 1969년의 운동들은 이미 오뻬라이스모의 이론적 시야를 초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오뻬라이스모의 가장 주요한 집결점이었던 <뽀떼레 오뻬라이아>(Potere Operaia)는 자신을 새로운 유형의 전위로, (계급 외부에 있는 전문적-직업적 전위는 아니지만) 계급 내부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외부에 있는 일종의 대중 전위로 사고하는 레닌주의적 경향을 띤다. 이것의 끝은 1973년을 전후하여 <뽀떼레 오뻬라이아>(및 <롯따 꼰띠누아>(Lotta Continua), <아반과르디아 오뻬라이아>(Avanguardia Operaia))의 해체를 가져온 제도주의와 테러리즘이라는 양극으로의 오뻬라이스모 운동의 분열이었다.


아우또노미아

1977년은 공장노동자, 학생, 여성, 동성애자, 실업자 등 사회의 전 층이 자율인하, 무상쇼핑, 대학과 공장의 점거 등을 통해 노동으로부터 분리된 소득을 보장할 수 있도록 사회체제를 변화시키려 한 새로운 운동의 분출기이다. 이 새로운 상황은 오뻬라이스모 운동을 붕괴시키면서 세 가지 경향을 포함하는 범 아우또노미아 운동을 발전시켰다. 하나의 경향은 <붉은 여단>에 의해 대표되는 것, 즉 초레닌주의와 폭력적 테러리즘에 의해 이끌리는 ‘무장한 아우또노미아’였으며, 또 하나는 <조직된 노동자 자율>에 의해 대표되는 것, 즉 운동의 이 새로운 양상을 계급의 새로운 구성으로, 요컨대 대중노동자의 사회적 노동자로의 재구성으로 파악하면서 이 새로운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주장한 ‘조직된 아우또노미아’였으며, 또 다른 하나의 경향은 정치적 조직화의 개념을 거부하면서 주로 문화적 개입에 강조점을 두어온 여성, 동성애자, 미디어활동가 중심의 ‘확산적 아우또노미아(사회적인 것의 아우또노미아)’였다. 상호비판과 동시에 상호협력을 포함했던 이 다양한 경향들로 구성되었던 이탈리아의 아우또노미아 운동은 정치권력을 거의 붕괴 직전의 상태까지 몰고 갔으나 1978년 3월 16일 <붉은 여단>에 의한 알도 모로 수상납치 사건을 반전의 계기로 삼아 전개된 정권의 1979년 4월 대탄압으로 이 운동은 감금, 망명, 지하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0년대 초에 이루어진 아우또노미아 운동의 중요한 이론적 성과는 1980년대의 새로운 사회적 긴장과 대결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1970년대 운동의 성격에 대한 분석과 평가들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된 노동자의 자율>(Autonomia Operaia Organizatta) 소속이었던 11명에 의해 감옥에서 작성되어 1983년에 ꡔ일 마니페스또ꡕ에 발표된 「당신은 혁명을 기억하는가?」이다. 안또니오 네그리와 빠올로 비르노를 포함한 열 한명의 활동가들에 따르면, 1970년대의 비합법적이고 폭력적인 운동은 좌파 정당 및 노동조합과의 타협 속에서 이루어진 자본의 억압적이고 포스트포드주의적인 구조개혁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응이었다. 그리고 비합법성과 폭력이 운동을 규정했던 것은 두 가지 흐름에 근거한다. 한편에서 그것은 구조개혁으로 말미암아 위기에 처한 공장평의회의 전통적 노동투사들이 전통적 공장권력을 지키려는 필사적 대결의 결과였으며 다른 한편에서 그것은 재구조화로 인해 분산되고 이동적으로 된 새로운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력의 적극적 자기표현이었다. 이 중에서 후자가, 임금노동에 대한 비판을 자기조직적 기업가 정신의 형태 및 아래로부터의 복지구축의 방식으로 국가권력과의 ‘비대칭적 관계’ 속에서 발전시킨 투쟁이 1977년 운동이었다. 물론 이 비대칭적 운동은 사회적 게토에의 유폐나 국가에 대항하는 정면 대치에의 유혹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또 그 때문에 결국 군사적 정치적 패배를 겪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이 ‘작업장들, 사회적 지식의 조직화, 대안경제, 지역적 서비스들, 행정과 소통들 전반’에 걸친 은밀하나 생산적인 대장정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다.


반혁명과 새로운 운동형식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신자유주의와 결부되어 가속적으로 전개된 포스트포드주의 개혁으로 헤게모니적 지위를 갖게 된 이 새로운 노동력들이 사회운동의 표면에 다시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제도들에서 전개된 일련의 반혁명적 움직임들과의 대비를 통해 더 잘 파악될 수 있다. 우선 공산당은 1985년에 임금과 인플레이션을 연동시키는 법안을 국민투표에 회부했지만 완패했고 이후에는 정부와 협력하며 실리주의적 입장만을 취했다. 사회당은 지식, 정보, 소통에 관계하는 이 새로운 노동력의 힘을 포착하여 그들의 심성, 욕구, 생활양식과 효과적인 정치적 연계를 수립하였지만 지식 프롤레타리아의 특권을 강조함으로서 궁극적으로 그것을 위계적 지배구조의 힘으로 역전시켰다. 포스트포드주의적 노동자들의 욕망을 혁명적으로 구현할 의지나 장치 혹은 능력이 당이나 조합에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지식, 정보, 소통의 특권화를 파악하면서도 그것을 마치 자연현상처럼 설명하려 한 보수적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었다.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비되는 혁명적 사회운동으로는 세 가지가 주목된다.

첫째는 청년들, 실업자들, 이주노동자들, 평조합원들, 소외된 여성들, 활동가들 등에 의해 이탈리아 사회 전역에 수립된 사회센터들(CSOA)이다. 이것들은, 1970년대에 청년들이 의회외적 좌파의 활동에 나타난 보수주의와 권위주의에 반대하면서 설립한 것으로, 1980년대 초에는 대안적 생활스타일 운동의 형태로 살아남았다. 이들은 198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계급투쟁의 흥기에 자극되어 이탈리아 전역의 버려진 건물들을 점거하면서 자율적이고 직접민주주의적인 삶을 조직했다. 이들은 공공토론, 펑크나 록 공연, 영화 페스티벌, 콘서트, 집단 카페테리아, 외국 이민을 위한 원조, 공동의 집회참가, 외부사회와의 소통, 지역과 도시의 결연건물 구축, 작은 기업체의 건설 등을 통해 경찰의 폐쇄공작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최근에 이들은 비국가적 공공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사회의 ‘지하’에서 생산된 정치적 문건들, 하층민의 목소리들과 함성들, 사회적 투쟁의 소식들, 개인적 의견들 등을 유통시키기 위해 대안적인 컴퓨터 네트워크를 이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점차 증가하는 비노동의 시간을 자율적 활동으로 조직하고 그것에 긍정적인 내용을 부여해 감으로써 사회적 게토화의 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둘째는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작업장에 수립된 기초위원회들(COBAS: Comitati di base)이다. 1987년에 학교 교사들, 철도 직원들,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의해 작업장에서의 직접행동과 자기조직화를 촉진하기 위해 시작된 이 운동은 알파 로메오 공장을 비롯한 몇몇 공장으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학교와 대학의 학생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기초위원회들은 스스로를 대안적 노조로 보는 시선들을 거부하면서 부활한 사회센터들 및 학생들과 연결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공공노동자들의 파업권을 폐지시켰던 입법조치에 대항하여 투쟁했고 노동조합의 국가구조에의 합체에 대항하여 투쟁했다. 기초위원회의 힘은 1992년 가을, 노조와의 합의를 통해 연금, 의료보조 등의 사회적 지출을 줄이려고 한 아마또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항의파업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셋째는 1990년 2월 로마동물원에서 표범이 탈주한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나타났다는 이유로 팬더 운동이라고 불렸던 이탈리아 학생운동은 지식을 생산에 응용하는 포스트포드주의의 중심적 경향에 초점을 맞추면서 여러 달 동안 대학을 마비시켰다. 이들은 교육을 사유화하려는 정부 프로젝트에 항의함으로서 대도시들에 흩어져 있었던 새로운 노동자들(연구자들, 기술자들, 컴퓨터 전문가들, 교사들, 문화산업종사자들 등)을 결집하는 초점이 되었다. 또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반(半)노동자-(半)실업자적 정체성으로 인해 COBAS나 사회센터와도 쉽게 교류되었다.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와 비대의주의적 대안들 사이의 갈등

빠르게 불타오른 학생운동이 그만큼 빠르게 사회운동 무대에서 사라진 1990년대 초 이탈리아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에 의해 특징지어졌다. 산업노동의 위기는, 개인이 노동 속에서 재현되고 노동은 국가 속에서 다시 재현되는 메커니즘, 즉 산업민주주의가 기초했던 노동자와 시민의 동일성을 파괴했다. 부의 생산에서 공장 노동이 부차적 역할만을 담당하고 지식과 소통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노동에 기초하여 전후에 정립되었던 이탈리아 제1공화국 헌법이 흔들렸던 것이다. 사회센터, 노동자기초위원회들 등은 이 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를 재현/대의의 개념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시도였다. 이미 1970년대에 시도되었던 이 비대의적 민주주의의 노력이 성공하려면 1970년대 운동의 경과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반성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비대의적 민주주의 운동은 항상 이것을 침식하려는 자본과 권력의 공세와 대면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서 움직이는 다양한 부정적 경향들(예컨대 케토화, 제도화, 혹은 테러화의 유혹)을 극복하면서 그것을 혁명적으로 연결하고 조정하려는 정교한 조직적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는 비대의적 민주주의의 움직임으로만 채워졌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비상사태와 예외권을 확대하려는 새로운 우익의 형성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것은 보수적 우익이 아니라 포스트포드주의의 새로운 노동력의 혁신을 촉진하는 새로운 우익이다. 이탈리아 북부지역에 뿌리를 둔 <북부동맹>과 미디어 재벌 베르루스꼬니를 중심으로 한 <포르짜 이탈리아>가 그것을 표현하는 두 개의 조직체이다. <북부동맹>은 인종, 전통과 관습, 종교나 도시에 기초한 지역적 정체성을 정치적 대의나 시민권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내세우면서 고대의 것과 탈근대적인 것을 뒤섞는 반국가주의적 연방주의를 내세운다. <포르짜 이탈리아>는 대의민주주의의 절차들을 기업세계에서 끌어낸 모델들과 기법들로 대체한다. 선거민은 시청자 대중과 등치되고 당의 형식은 네트워크 기업구조를 재생산하며 <포르짜 이탈리아>를 지지하는 클럽들은 네트워크 기업의 자회사가 모회사와 맺는 관계를 반복한다. 이들에게서 지식노동자의 반국가주의, 반대의주의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하는 반혁명의 힘으로 왜곡된다.

이렇게 성장한 비대의주의의 두 경향의 충돌은 199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다. 새로운 우익의 반민주주의적 정치경향이 포스트포드주의의 새로운 노동력들의 사회운동적 표현들을 공격한 것은 1994년이었다. 이 해에 네오파시스트였던 밀라노의 시장은 점거된 레온까발로 사회센터의 철거를 지시하면서, “이제부터 점거자들은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들 이상의 그 어떤 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회센터의 활동가들은 이 말에 유머로 응답하기 위해 유령처럼 온 몸에 하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섰는데 이것이 <뚜떼 비앙께>(White Overalls)의 탄생을 알리는 첫 걸음이었다. 폭동이 연이어지고 점거된 사회센터는 보호되었다. 이 때부터 <뚜떼 비앙께>가 입은 하얀 옷은 자본주의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비가시성을 알리는 상징이 되어 핀란드에서 멕시코에 이르는 세계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야 바스타!>(Ya Basta!)는 투쟁의 정반대의 유통, 즉 멕시코에서 이탈리아로의 흐름을 표현한다. <야 바스타!> 연합은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연결하는 많은 그룹들의 네트워크이다. 1996년 치아빠스 열렸던 제1차 엔꾸엔뜨로에 참가했던 이탈리아 투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 네트워크는 사빠띠스따 투쟁을 지지함과 동시에 유럽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을 확산시킨다는 이중목적을 갖고 출발했다. 1998년에 <야 바스타!>의 투사들은 <뚜떼 비안께>에 합류했는데 이것은 사회센터의 청년들, 실업자들과 임시직 노동자들, 일자리를 찾는 민중들을 신자유주의의 압박에 대항하여 결집시키는 것으로 작용했다. 이후 더욱 힘을 얻은 <뚜떼 비안께>는 이탈리아 사회에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소득, 모든 사람을 위한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요구하면서 어떤 보장도 사회보험도 없이 정상적 삶의 주변에서 살도록 강제당하는 사람들의 비가시성의 조건을 상징하는 강력한 이미지로 부상했다.


아우또노미아의 지구화

우리가 1999년 씨애틀에서 목격했고 이 글의 첫머리에서 다루었던 그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바로 포스트포드주의 하의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특징을 불안정성으로만 정의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이들은 삶의 어떤 안전도 보장받지 못하는 당혹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생산적이고 창의적이며 유머스럽다. 그들은 경찰 폭력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 그들의 폭력을 흉내 내는 폭력을 사용한다. 수상 베를루스꼬니가 ‘외국인이 이탈리아를 후진국으로 보지 않도록 외출시에 내의차림을 해서는 안 된다’는 포고를 내렸던 1991년의 G8 정상회담에서<뚜떼 비안께>의 활동가인 지울리아니가 경찰이 쏜 탄환에 맞아 죽었을 때 이들은 ‘저들은 8명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60억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과 대치했다. <뚜떼 비안께>의 전 지도자인 루까 까사리니는 자본주의적 삶이 경제적 폭력으로서의 굶주림, 정치적 폭력으로서의 탄압, 군사적 폭력으로서의 전쟁 등으로 얼룩져 있는 현실에서 자신들의 폭력흉내를 문제삼는 폭력/비폭력 논쟁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운동의 폭력을 비난하면서 전개되는 권력의 폭력은 운동이 내전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억제하면서 사회갈등을 생산하고 조절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까사리니는 우리의 전망은 불공정한 법을 위반하면서 새로운 구성적 법(헌법)을 창출하고, 착취와 전쟁의 지구화에 대항하여 존엄한 삶의 지구화를 달성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2) 이 주장은 새로운 제국적 주권으로부터의 저항적이고 구성적인 기계적인(machinic) 탈주의 전략을 제기하는 안또니오 네그리의 ꡔ제국ꡕ과 커다란 공명을 보여준다. 아우또노미아와 <디스오베디엔띠>의 이 21세기적 공명을 통해 1960년대 이후 40여 년 간 오뻬라이스모, 아우또노미아, 사회센터, <노동자 기초위원회>, <뚜떼 비안께>, <야 바스타!>, <디스오베디엔띠> 등으로 이어져 온 비대의적 반국가적 자율적 이탈리아 운동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인류의 존엄을 만회하고 발전시키려는 전 지구적 기획의 초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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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arts.usyd.edu.au/departs/rihss/italianeffect.html

2) Movimento dei Disobedienti Luca Cassarini Interview by By Ezequiel Marcos Siddig, http://www.zmag.org/ZMag/articles/april02siddig.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