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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인터뷰] 마이클 하트-제국 이후 /자율평론8호 20040330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4.

<자율평론> 8호(2004-03-30)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544&p_no=1

 

 

 

제국 이후- 마이클 하트 인터뷰




 


* 이 글은 Conjonctures n°36/37 ― Democrates et barbares[민주주의자들과 야만인들], pp. 15-29에 실린 마이클 하트와의 인터뷰를 번역한 것이다. 인터뷰 시기가 비슷해서인지, 지난 번 자율평론에 번역되어 게재된 바 있는 <이방인들의 학문을 향하여?>의 내용과 일부 중복되긴 하지만, 거기에선 전개되지 않았던 설명들을 살펴볼 수 있다. <정세(Conjonctures)>는 1년에 2회 정도 간행되는 퀘백의 잡지로서, Multitudes지에 파올로 비르노의 글을 불역하여 게재하고 있는 Veronique M. Dassas가 참여하고 있다. 이 잡지는 최근호에 한해서 pdf로 다운을 받아서 읽어볼 수 있으니,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들러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양창렬 옮김nomade02@hotmail.com ← 미숙한 부분에 대한 지적은 이곳으로 보내주세요)■역자




정세 : <정세> 지난호에서, 우리는 당신이 >제국>에서 발전시킨바 있는 테제들을 중심으로 논쟁을 시작했었습니다. 당신의 책이 출간된 이후, 우리는 적어도 제국의 역사와 관련해 주목할만한 두 가지 정치적 사건을 목도했습니다. 하나는 뉴욕의 9월 11일 사건이었고, 두 번째는 특히 이라크와의 두 번째 전쟁이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지금 당신의 책을 출판한다고 한다면, 당신이 변경시키고픈 요소들이 있을까요?

하트 : 네, 확실히 책을 다르게 써야할 겁니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제국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이것은 거의 하나의 유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점점 더 많은 책들이 제국이란 문제를, 특히 미-제국이란 문제를 둘러싸고 나오고 있죠. 우리가 세계 질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에 대한 이론적인 논쟁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비록 모두가 지금은 제국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듯이 보여도, 여전히 어떤 유형의 제국에 대해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최근의] 정치적 논쟁은 다음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이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것처럼, 미국이 단독 행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다자적인 지원을 필요로 할 것인가? 달리 말해, 미국은 지배적인 다른 국민-국가들의 보조를 필요로 하는가?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들에 대한 고려를 언급하지 않고... 다른 단어로 표현하자면, 미국이 통제하는 제국이라는 “군주제적”인 중심화된 버전보다는 적어도 제국의 귀족제적인 버전 혹은 탈중심화된 제국을 가져야할 것인가? 어찌되었든, 저는 그 자체로 논쟁적인 무게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는 제국이라는 개념이 이제는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세 : 어떤 이들은 당신이 제국 같은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고 비난합니다. 당신은 제국주의라는 오래된 좋은 개념을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미 제국주의라는 표현이 현재의 상황을 더 잘 특징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트 : 우리는 이 점과 관련해서 두 가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사용하는 제국이라는 개념 그리고 네그리와 제가 쓴 책 자체는 이 점, 미국의 역할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관점은 약간은 “자기-모순적”이었죠. 하지만 이것은 제가 보기엔 아주 유용한 방식으로 그러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아주 명확하게 더 이상 제국주의는 없으며, 어떤 국민-국가도 중심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고, 세계의 전지구적 질서를 관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자주 제국이라는 이 새로운 개념 내부에서 미국이 갖는 중심적이고 본원적인 역할에 대해 자주 언급했습니다. 미국의 헌법 ―그것의 역사에 할애된 긴 장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지구적 질서의 모델로 자처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강조가 그것을 증언해주죠.


다음으로, 우리가 제국적 규칙들에 중심적인 세 요소들, 즉 폭탄, 커뮤니케이션 수단, 돈이 있다고 주장했을 때, 우리는 어떤 점에선 모순적이었던 셈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들을 미국의 세 도시, 워싱턴, 로스앤젤레스, 뉴욕에 상응하게 만들어버린 것이었거든요. 왜 런던, 파리, 베를린은 안될까요? 이러한 모순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군주제적 권력(백악관과 펜타곤이 그것을 대표하고, 우리는 그것을 일방주의적 권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과 지배적인 다른 국민-국가들로 구성된 다자적인 귀족제 간의 협력의 필요성을 둘러싼 현 세계 질서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이 두 권력들이 정치, 경제 등등의 수준에서 협력하고 교환해야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미국은 홀로 세계 질서를 이끌어갈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협력에 대한 논쟁이 미국 우파 내부에서 격렬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유럽의 국가들과 여타의 지배적인 국가들로부터 멀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미국은 그네들의 협력을 요청해야하는가? 미국은 이 전쟁을 군사적으로 이끌 수는 있지만, 그것의 비용들을 보장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미국의 경제 위기가 이 전쟁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여타의 지배적인 국가들의]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이 협력이란 재정적인 차원의 것일 뿐이죠. 자, 이것이 당신이 던진 질문에 대해 답하는 첫 번째 방식일 것입니다.


그 질문에 답하는 다른 방식이 있죠. 제국주의와 제국을 구별하면서, 우리는 근본적인 뭔가가 변했으며, 미국이 유럽식의 제국주의를 리메이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차원들은 우리가 제국주의보다는 미 제국에 대해 말해야할 정도로, 저에겐 너무나 분명한 듯이 보입니다. 영국 역사학자, 니알 퍼거슨(Niall Ferguson)은 최근에 [제가 네그리와 함께 출간했던 책과] 마찬가지로, 영국 제국주의의 역사를 설명하는 >제국>이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출간했습니다.1)

 

그는 미 제국이 영국의 기획을 반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는 영국의 제국주의가 잘못된 평판을 받긴 했지만, 실상 그것은 그것에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환상적인 무언가였고, 모두가 그로부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환상적인 기획을 다시 취해야 한다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 이건 우스운 얘기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명제에 반대하기 위해서 우리는 제국주의와 제국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 시대에 제국주의를 다시 만들어보겠다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거든요. 우리가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정치를 변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의 정치 행태들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고려와는 독립적으로, 우리는 현재 상황이 지닌 새로움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세 : 비록 당신은 제국에 대해 매우 비판적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당신은 그것이 “일보 전진”을 구성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일보 전진’이라는 이러한 생각들이 클린턴이나 여타의 사람들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경향보다는 오히려 부시로 대표되는 종교적 우파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건가요?

하트 : 이것은 우리의 책에 대한 보다 우호적인 다른 비판이로군요. 우리의 책은 사실 클린턴 정부 하의 상황을 묘사했던 것이지, 부시의 세계를 정확하게 기술했던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거기에 참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대통령들로부터 출발해서 미국사를 읽어내는 것에는 어떤 타당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경우에도 역시 저는 미국의 대외 정치 혹은 전지구적 지정학에서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부시 아버지, 클린턴, 조지 부시의 정치들 사이에 하나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당연히 저는 코소보에 대한 클린턴의 접근과 이라크에 대한 부시 아버지나 부시의 접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세 명 모두, 우리가 미행정부의 몇몇 공무원들이 하는 것처럼, “개방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런 전략을 절합합니다. 이 개방 전략이라는 것은 전지구적인 상호작용과 교환을 의미하죠, 물론 미국의 헤게모니 하에서 말입니다. 이것은 냉전 말기 때부터 무르익었던 것이며, 아마도 냉전 자체의 전략의 일부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 행정부들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인정하지 말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마찬가지로 그것들간의 연속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세 : 우리는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와 극단적 보수주의자인 부시 사이의 연맹이, 횡단적인 방식으로, 연속성에 대한 당신의 주장을 잘 예증해주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블레어가 종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민주주의적 가치들에 기초한 제국이라는 관념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트 : 제가 블레어를 제국의 근대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시각의 예로 선택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소위 자유주의 정치학 내부에서,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테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미국이 헤게모니적인 능력임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헤게모니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용어의 부정적인 의미에서 지배적인 헤게모니가 아니라 말이죠. [‘긍정적인 헤게모니냐 지배적인 헤게모니냐’라는] 이 두 선택지 사이에서 전자가 더 나은 것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선택지는 그다지 흥미로운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이 제국에 맞서기 위해 어떤 종류의 정치를 가져야하는가?’라는 중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정세 : 그러나 이 자유주의적인 지적 흐름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미국 지식인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부시 배후에 있다고 간주하는 유럽의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 생각에, 부시의 정치에 대한 진정한 반대들이 존재합니까?

하트 : 중요한 것은 대항-정치를 정식화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 좌파의, 국제 좌파의 무능력이겠죠. 저는 제국주의에서 연유하는 것과 제국에서 연유하는 것간의 차이들에 대한 이런 모든 분석들이 어떤 타당성을 가지리라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대항-정치를 정식화하는 것일 테죠. 일부 국제 좌파는 현재 상태에서 전지구적인 대항-정치 기획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제는 거의 유지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회-민주주의적인 입장의 어떤 판본에 상응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 입장은 현재의 자본주의적 전지구화를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국가 주권을 강화함으로써 그에 응답해야한다고 주장하죠. 이러한 입장은 최근까지 영국 좌파 내에 매우 팽배해 있던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구요. 그것은 포르토 알레그로에서 지배적이었던 입장들 중 하나를 대표합니다. 제 생각에, 국가 주권을 강화하자는 이러한 입장은 자본주의적 전지구화에 반대하는 자리를 갖지 않습니다. 강조해야할 보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 내 지식인 분파들 내에서 지배적인 것은 ‘미국 정부와 그것의 전지구적 헤게모니에 대한 비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촘스키와 그의 분파의 입장이죠. 그것은 어떤 유용성을 갖긴 하지만, 아주 멀리까지 가진 못합니다. 이러한 비판은 중요하긴 하죠, 예를 들어 촘스키에서 고어 비달(Gore Vidal)에 이르는 사람들의 비판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국가 주권에 대한 주장도 미국 권력의 폭정에 반대하는 탄식도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국제적인 정치를 정식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다중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지게 됩니다. 다중 개념은 이론적 구도에서는 그리 잘 발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천의 구도에서 그것의 유용성이 증명되었죠. 예를 들어, 2월 15일 전세계에 걸친 반전 시위들은 매우 중요한 하나의 사건을 구성했으며, 이 전쟁에 반대한 국가적이지 않은 반대가 실존함을 증명해주었습니다. 전쟁에 반대하여 시위한 것은 영국의 민중도, 미국의 민중도, 태국의 민중도 아니었죠. 그것은 진정으로 전쟁에 반대한 전지구적이고 조직된 시위였습니다. 저에겐 이것이 새로운 대답 형식의 징조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이론적 구도 위에서 발전될 필요가 있죠. 이런 뜻에서 다중이라는 용어를 생각해야 합니다. 단순히 민중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중은 국가 주권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것은 국가의 국경들을 넘어서 있습니다. 이 운동은 아래로부터 이 전지구적 전쟁, 이 권력 형태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려 합니다.

정세 : 당신이 다중과 동일시한 이 반전 운동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대중 매체들이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면 사라져버리는, 미디어의 효과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릴 위험은 없나요?

하트 : 저는 미디어 조작의 위험 그리고 다중 개념과 연결된 보다 폭넓은 위험에 대해 지적했다는 점에서 당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점에 있어서, 다중 개념은 민중이라는 개념과는 구별됩니다. 그것은 책임 지도하에 조직되는 중심화된 형태와도 구별되죠. 다중을 파시스트적인 군중이나 대중 효과와 동일시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다중이 그것들과 차이가 나지 않고, 구별도 되지 않는 듯이 보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아마도 바로 그 이유들 때문에 미디어 조작이라는 것이 가능하겠죠. 파시스트적인 민중주의를 하나의 군중 혹은 대중 현상으로 묘사하는 카네티(Canetti)의 이론들과 약간은 같은 의미에서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고려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또한 운동들에 내적인 조직화 형태들도 인정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 2월 15일은 하나의 자생적인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포르토 알레그로만큼이나, 여러 반-세계화 운동들, 전쟁에 반대하는 역사적 운동들로부터 출발해서 점진적으로 발전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탈중심화된 연결망을 통한 조직화가 발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2월 15일의 다중을 군중 혹은 대중으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것입니다. 운동은 자생적이지도 비차이적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의 고유한 내적 조직화 형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중심화되지도 위계적이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정세 : 당신은 전쟁과 전지구화에 반대하는 정치 운동으로서 다중에 대해 많이 말해왔습니다. 그것은 “다른” 다중, 예를 들어, 비르노(Virno)가 말하는 언어 활동 안에 있는, 부의 생산 안에 있는 그런 다중과 어떤 관계를 갖습니까?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다중은 아마도 제국내의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의 첨병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하트 : 저는 다중과 생산 형태들을 실제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대해 숙고하면서도 지나치게 일반화되거나 과장되지 않을 수 있는 방식 중의 하나는, 그것을 협동과 소통에 기초한 연결망의 새로운 종류의 생산으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탈중심화된 연결망의 형태를 갖춘 생산 형태들은 손에서 손으로, 한 걸음씩, 조직화의 정치적 형태를 가지고 발전되는 한 과정을 위한 모델을 구성할테죠. 저는 파올로 비르노가 했던 다중의 언어적 능력을 채택한 것은 훨씬 더 정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말해, 그는 생산의 언어적 본성에 대해 많이 주장하죠. 비르노가 모든 생산 과정은 그 중심에 언어활동을 갖고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소통과 협동이 본질적임을, 공통의 토대라는 것이 존재함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어활동은 늘 공통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어활동을 중심에 놓으면서, 비르노는 또한 정치와 경제의 차이들이 흐려지고 있음을 보입니다. 달리 말해, 고전적으로 우리는 정치를 공적으로 행해지는 활동으로 간주합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의사소통 행위이기도 했구요. 반면, 경제는 침묵하는 무언가, 즉 재화의 생산, 엄밀히 말해 물질의 생산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소통에 기초한, 언어적 합의에 기초한 이러한 새로운 생산 유형은 이미 정치적인 것입니다. 제가 말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생산의 조직화 형태들이 조직화의 정치적 형태들을 승인할 뿐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직화의 정치적 형태들과 함께 발전된다는 사실입니다. 생산의 조직화 형태와 정치적 조직화 형태는 서로를 지탱합니다. 제가 정치적 조직화로서 다중의 형태들에 말할 때, 이것은 그것들이 다른 어느 곳에서도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치사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경제적 교환들 속에서 준비되고 발전되는 것입니다. 저는 생산의 언어적 측면에 대한 비르노의 주장들을 그리 잘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주장들이 어떻게 경제가 이미 “공통된” 것 속에서 협동과 소통의 한 예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고, 어떻게 경제적 삶이 정치적 삶과 구분될 수 없게 되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정세 : 쿠르츠(Kurz)같은 이는 이 “다중”이라는 것이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진짜 다중은 여전히 바깥에 남아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그들은 언어활동에 여전히 집중화되지 않은 과제들 속에, 따라서 정치에는 더 적게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죠2)
.
하트 : 이것은 극히 중요한 점입니다. 그것을 분석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본질적이죠. 그것에 대해 숙고하기 위해서는, 다중이 단순히 지금 정치적 조직화의 전위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노동자들만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비물질 노동이라는 개념을 제기하는 방식은 언어적 요소들의 한편에 정서적 요소들의 생산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 이미지의 생산이나 언어활동의 생산 이외에도 정서들의 생산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정들의 생산, 사회적 관계들의 생산도 마찬가지로 협동과 소통에 기초합니다. 그것은 다중 개념을 훨씬 더 폭넓은 방식으로 바라보게 해주죠. 70년대, 미국, 캐나다, 영국의 영어권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흐름 속에서 발전되었던 그런 방식으로 말이죠. 이것은 다른 범주들에로 확장될 수 있으며, 임금 노동과 비임금 노동을 막론하고, 여타의 훨씬 다른 경제적 활동들을 보다 잘 이해하게끔 해주죠.


그러나 훨씬 더 크게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농업 노동이 이러한 논의에 관련되는지 아닌지를 자문해봐야 합니다. 저는 농업 노동 역시 비물질적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보이고자 합니다. 분명히 이것은 농업 노동이 비물질 노동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의 노동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노동이 물질적이기를 그쳤고, 생산물들은 비물질적이 되었다라는 것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보, 소통, 기호들, 등이 항상 보다 중심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점에서 종자들과 그 종자들에 대한 유전 정보가 농업에 중심적으로 되었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지식의 형태들과 정보가 생산 과정에서 훨씬 중요해졌음을 잘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세계적으로 회자되는 특허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숙고해본다면 ―예를 들어, 지금은 미국 기업들이 특허를 가져가 버린, 인도의 유명한 네암 나무(Neam Tree)3)


사례에서처럼, 전통적인 지식에 대한 특허들― 우리는 이 지식들도 마찬가지로 비물질적인 집단 노동의 형태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업에 대한 이러한 예는 비물질노동, 자연 개념, 경제의 변동이 임금 노동과 비임금 노동을 막론하고 노동의 모든 형태들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듯이 보입니다. 이런 유형의 분석은 다중 개념을 정치적으로 유용하게 만드는데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정세 : 기술과 다중의 관계들이 또한 기술과 언어활동간의 관계들만큼이나 밀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기술과 다중도 짝이 될까요? 둘 사이에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하트 : 우리가 말하는 작동들 중 몇 가지는 실제로 공공재가 사유화되는 방식의 작동들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비르노의 사유노선에 선다면, 우리는 이러한 공공재의 형태가 비물질적이며, 공공재의 형태가 지식, 정보, 관계들의 형태를 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특징짓는, 자주 북/남간의 전지구적 투쟁 형태를 띄는 투쟁 형태는 이러한 지식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공동의 것이라고 간주하는 공공재와 이러한 지식들은 사유 재산으로 변형되어 버렸죠. 유전정보만큼이나 나무의 형태도 그처럼 바뀌어 버렸구요. 그리고 이러한 전통적인 지식들은 이제 모두 특허를 부여받았고, 따라서 사유 재산의 형태로 도둑질을 당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논의로 되돌아와서 말하면, 이 모든 비물질적인 재화들은 언어활동같은 논리적인 것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죠.

정세 : 만일 공공의 것이 사적인 것에 의해 강탈되었다고 말하는 대신, 우리가 지배계급들 내부에서의 단순한 이전(transfert)에 대해 말한다면요? 19세기에 부르주아는 그네들이 막 발견한 새로운 유전법칙들에 따라 농민들이 일하도록 강제하면서 농민들의 지식들을 이미 전유해버린 것이 아닌가요. 지난 세기의 지식의 강탈이라는 것은 (서구에서) 훨씬 더 어려운 물질적인 조건들 때문에 보다 심각한 것이 아니었나요? 19세기의 농민 사회들과 산업 사회들에서 지식이 분배되어있었고, 그것은 공통의 것이었지만, 어느 한 쪽에 의해 강탈당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선동적이지 않나요? 자본주의에서 지식은 축적할 목적으로 항상 강탈되었던 것이 아닌가요?

하트 : 당신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맑스가 본원적 축적이라고 불렀던 것의 심급들을 다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영국에서, 이러한 본원적 축적은 방목권이 공공 재산에서 사적 재산으로 변형된 것의 결실이었습니다. 때로는, 아주 단순히 부족장을 자본을 소유한 자로 바꿔치면서 그렇게 한 것이었죠. 우리는 확실히 하나의 목가적인 상태에서 착취의 상태로 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의 착취 상태에서 다른 착취 상태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죠. 현재 사적 재산권이 새로운 모든 삶의 형태에까지 퍼져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이 어쨌든 중요합니다. 오늘날, 유전 코드에 포함된 정보들조차 사적인 것이 되어버렸죠. 이러한 사적 재산권의 확장은 모든 경우, 공통의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의 변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권력들의 통제에서 자본의 권력으로의 이행이기도 하구요.

정세 : 수잔 손탁은 미군 병사들의 죽음과 다른 자들의 죽음을 다르게 보여주는 미국 미디어들에 대해 한 논문을 썼는데요. 다른 이들의 죽음은 잔인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보여질 수 있었지만, 미국인들의 죽음은 항상 깨끗했죠. 손이나 발이 잘려나가는 경우도 없고, 피를 줄줄 흘리는 머리도 안나오고 말이죠. 수잔 손탁은, 개인들이 제국에 속해있는 순간에는 모두 “평등했던” 로마 제국과는 반대로, 여기에서는 죽음과 폭력의 표상이 ‘미국인이냐 아니냐’에 따라 매우 다르게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미국인들은 그네들의 경제적인 능력의 수준에서 높은 곳에 위치해있지 않나요? 제 질문이 지나치게 문화주의적입니까?

하트 : 대중 매체들이 미군 병사들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과 관련해서는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에 대한 제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전통적이지만 정확한 시각 ―제국을 삶의 가치와 관련하여 인종주의적인 것으로 지시하는― 과 다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이라크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에서도 사정이 똑같았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얼굴색이 진한 사람들의 죽음은 셈해지지도 않았죠. 저는 이번 전쟁에서 죽은 이라크 병사들의 수에 대한 어떤 통계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수잔 손탁의 그 논문을 읽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잘 이해했다면, 손탁은 다른 병사들의 죽음이 미군 병사들의 죽음과 동일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 점에서 옳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보편적 시민권(une citoyennete universelle)에도 배치되는 것입니다.

정세 : 제국의 맥락에서는 사용될 수 없는, 반동의 접근, “오래된” 시각이 문제인가요? 당신은 미군 병사들의 시체의 폭력성을 보여주길 거부한다는 이러한 사실에서 긍정적인 뭔가를 보십니까? 아니면, 그것은 그저 인종주의에 불과한 것일까요?

하트 : 저는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긍정적인 뭔가를 보기를 좋아합니다. (웃음) 그에 대한 제 첫 번째 반응은 일종의 역겨움이죠. 말할 시간을 좀 줘보세요... 저는 제국 혹은 제국주의의 모든 통념이 필연적으로 인종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대중매체들의 반응이나 일반적인 미국 주민의 반응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생명에 대한 가치 평가에서의 이러한 차별은 근본적으로 인종주의라는 통념에 기초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종주의 없이는 기능할 수 없죠. 자, 이것이 제 첫 번째 반응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우리가 거기에서 긍정적인 뭔가를 발견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관계된 것일텐데요... 한 번 노력해보게 놔두세요 (웃음). 미국 우파의 가장 모험적인 세력들, 우리가 신-보수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은 지금 이것이 미국 내에서 애국주의의 한 형태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희생자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바라는 거죠. 미국 주민들이 사망자 수가 많아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앞으로의 결과들에 대한 심각한 책임을 느끼게 만들고, 커다란 강제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죠. 그들은 미국 민중이 이러한 사망자들과 희생자들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길 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9월 11일 이후 많은 글들이 쓰여졌죠. 미국 우파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 사건에서 미국 민중이 결국 많은 수의 미국인 사망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le potentiel)을 보았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애국주의가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있어 보이죠. 아마도, 이걸 머리 속에 염두에 둔다면, 당신이 방금 말한 것 속에 뭔가 긍정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미국 주민은 미군 병사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미국 주민 자체의 죽음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미국의 대중 매체들도 마찬가지로 어떤 값을 치러서라도 이 지배의 기획을 쫓아갈 준비는 아직 되어있지 않구요. 제가 당신의 질문에 대답을 한 건지 모르겠네요...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정세 : 솔직히 저 역시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트 : 손탁은 거기에서 긍정적인 뭔가를 보았나요?

정세 : 아니요. 그녀는 이것을 매우 부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거기에서 타인의 죽음에 대한 경시와 인종주의만을 보죠.

하트 : 결국 그녀도 고전적인 입장을 가진 셈이군요. 제 첫 반응처럼 말이죠.

정세 : >제국>에서 당신은 군대를 세계 경찰로서 말했었는데요. 이라크에서 미군은 경찰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라크 경찰 없이는 그 경찰행위도 할 수 없죠... 출발점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가는 듯이 보이는 것...

하트 : 저는 그것이 유용한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저처럼 우리가 현재 상태를 끝날 수 없는 전쟁으로 본다면 말이죠. 저는 실제로 사정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수준의 전투들과 폭력이 존재하죠. 이러한 수준들은 한편에 한계 없는 군사 행동이 있고, 다른 한 편에 경찰 행위 그리고 그것의 질서의 복원 기능이 있다는 식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수준들 대부분은 “저강도 전쟁”에서 연유하거나 고강도의 경찰 행동에서 연유합니다. 혹은 그 둘의 혼합에서 연유하거나요. 부시가 이라크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한 이후에도 미군 병사들은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고, 지속적인 갈등이 계속되고 있죠.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미국인들이 설립하고 싶어하는 그런 유형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단순히 이라크 경찰에 기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체제를 변화시키고 하나의 국가를 건설해보겠다는 이런 기획은 커다란 노력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완전한 제국적 행동을 좋아하는 우파는, 미국인들이 제국적 행동의 첫 번째 국면, 즉 군사적 파괴에만 유효하고, 그들이 두 번째 국면인 국가의 건설과 개입에서는 유효하지 못하다는 사실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국인들이 지속적인 주의[attention span]가 없거나, 그들이 [이라크 국가 재건에] 필수적인 자원들을 투입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저는 만일 우리가 미국의 지배를 원하는 자들의 관점을 거부한다면, 우리가 지배에 맞서는 반란과 이러한 권력 형태들에 대한 저항들이 항상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위안이 될만한 것이죠. 비록 이 반란이나 저항의 형태들이 필연적으로 해방적이거나 그 자체로 승리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말입니다.

정세 : 제국 내에서의 국가 건설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트 : 저는 국가 건설이 제국적 질서 내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국가 주권은 제국적 질서에서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국가 주권의 신봉자들과 전지구화의 신봉자들간의 끝날 수 없는 갈등들이 아무런 유용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만일 전지구화가 이뤄진다면, 국민 국가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리라고 말하지만, 다른 이들은 국민 국가들은 항상 중요하고, 전지구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요. 오히려 전지구적 권력이 형성되는 가운데, 국민 국가들은 존재하지만, 그것의 제한된 주권은 이 제국적 질서를 위해 기능하는 하나의 토대이자 형태를 갖게되겠죠. 국가적인 수준에서만큼이나 지역적인 수준에서, 지역적 경제와 지역적 조직화 역시 전지구적 권력의 구조에 매우 중요합니다. 이라크 전쟁 이후에 미국 행정부 내에서 벌어졌던 토론의 예를 보세요. 그들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없애버려야하는지 아니면 반대로 세계의 다른 지역들에 NATO를 더 만들어야 하는지 자문합니다. NATO내의 유럽 국가들이 미국을 신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이스라엘, 아마도 이집트를 포함하는 중동의 지역적 군사 구조가 필요하다는 것에 대해 모든 국가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미국이 더해지죠. 마찬가지로 일본, 한국, 등과 함께 하는 아시아의 NATO가 있을 수 있죠. 거기에 미국이 더해지고 말이죠. 이런 뜻에서, 이런 지역적 조직들(형성체들formations)은 전지구적 권력 구조 내에서 필수적인 요소들이 될 것입니다. 저는 단지 이와 같은 지역적 예들만을 가지고 국가 주권들이 필연적으로 전지구적 권력 구조와 필연적으로 모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군요. 사실, 그것들은 전지구적 권력 구조의 필수적인 요소들을 구성합니다.

정세 : 그렇다면 퀘백의 독립은 필연적으로 반동적인 것도 아니고, 보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다른 국제주의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겠네요? 우리는 근대적인 의미의 제국, 그 용어의 “긍정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제국에 참여하는 퀘백 국가, 그렇다고 필연적으로 반동적인 민족주의에 빠지지는 않는 그런 퀘백 국가를 가질 수 있을까요?

하트 : 저는 그것에 대해 답변할 것이 없네요. 민족 해방이라는 기획이 전부 필연적으로 반동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주 한 지배 형태에 대한 거부의 표현이 될 수 있죠. 제가 보기에, 이러한 모든 기획들은 그것이 국가(민족) 주권, 혹은 지역 주권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보장을 구성한다고 주장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끝)


미주
1) Niall Ferguson, Empire : The Rise and Demise of the Gritish World Order and the Lessons for Global Power, Basic Books, 2003.
2) <정세> 이번호에 실린 그의 아티클, “L'eau pour laver les carottes et H2 O”을 보라.
3) 전통약에 사용되던 인도와 아프리카에 널리 퍼져있는 나무로서, 근래 의약 산업에서는 약을 제조하기 위해 거기에서 물질을 추출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