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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거대도시와 다중 /안또니오 네그리(자율평론7호 20040103)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4.

<자율평론> 7호(2004-01-03)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446&p_no=1

 

 

거대도시와 다중

 

네그리/ 역자 : 문갑



 

1. ‘파업을 일반화하기’


이탈리아의 2002년 봄과 여름 투쟁의 경우, 불안정하고 사회적으로 분산된 남녀노동자들의 운동에서 ‘파업을 일반화하기’ 기획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총파업' 아래에 무용하고 헛되게 포섭되는 듯이 보였던 가를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 경험 이후, 투쟁에 참여했던 많은 동지들은 노동자들의 파업은 고용주에게 ‘피해를 주는’ 반면, 사회적 파업은 전지구적 노동일이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주목없이 지나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본가들에게 피해를 주지도 못하고 노동의 유동성과 유연성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주지도 못했다. 이런 깨달음에서 일련의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분산된 노동자가 투쟁하는 방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 노동자는 생산에의 종속과 착취의 폭력을 거대도시의 공간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뒤엎을 수 있을까? 거대도시는 다중에게 어떻게 나타나 보이며, 공장의 노동자계급의 관계는 거대도시의 다중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가?

실제로 이 가설은 사회적 투쟁과 노동자들의 투쟁 사이의 즉각적 효력에서 보이는 명백한 차이라는 또다른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것은 타당하고 일반적인 질문이다. 즉 만일 거대도시가 가치화와 착취의 자본주의적 관계에 의해 뒤덮여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안에서 다중의 적대를 이해할 수 있는가? 60년대와 70년대에 이런 문제들이 노동자계급투쟁들과 거대도시의 삶의 변화에 대한 관계에서 나타났을 때, 종종 매우 효율적인 대답들이 주어졌다. 우리는 나중에 이것들을 요약할 것이다. 당분간 우리는 이런 답변들이 노동자계급과 거대도시에서 임금노동 그리고/또는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기타 계층들 사이의 외적 관계와 연관이 있다는 점만 강조하고자 한다. 오늘날 문제는 다르게 제기되어지는데, 왜냐하면 노동력의 다양한 부문들은 거대도시의 잡종 집단에서는 내적관계로서 그리고 직접적으로 다중으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거대도시 공간들의 (적대적인) 모습을 틀짓는, 특이성들의 총체이자 집단들및 주체성들의 다수적 집합이다.

2. 선구적 이론들


대도시에 대한 이론가들(건축가들과 도시이론가들) 중에서, 쿨하스(Koolhaas)는 70년대말에 광란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대도시의 새로운 이미지를 제공해줬던 사람이다. 우리는 『광란적 뉴욕』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무엇이 이 책의 중심주제인가?

쿨하스는 (다소 일관되게 발전된 계획으로 인하여 그러면서도 일관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문화적 층들, 생활양식들과 형태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다양한 가설들과 기획들의 동력학, 갈등및 강력한 병치를 겪어나가고 있는 대도시의 상을 그렸다. 도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힘들의 이런 복잡성과 이런 미시물리학을 내부로부터 바라봐야만 한다. 특히 뉴욕은 도시계획의 다양한 형태들의 비상한 역사적, 정치적, 기술적, 그리고 예술적 축적의 예였다. 그러나 이것은 충분치 않았다. 왜냐하면 또한 거대도시가 도시중심(city centre)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거대도시는 도시 담론의 조건들을 어지럽게 뒤섞었다. 특정한 도시 집중으로부터 시작해서, 거대도시는 새로운 범주들을 구성했다. 그리고 번식시켰다. 척도는 스스로를 넘어섰다. 필요한 것은, 수많은 능동적 특이성들을 설명할 수 있고 또한 다중의 힘이 만나는 억압과 장애의 형태들을 설명할 수 있는, 거대도시(이 경우에는 뉴욕)에 대한 미시물리학적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쿨하스의 건축은 도시 공동생활의 거대한 계획속에서 성장했고 그것이 나중에 다시 선택되어 변화되고 다른 건축형태와 혼합되었던 것이다... 쿨하스의 건축은 거대한 이야기를, 잡종적 거대도시에 의한 서구 도시들의 파괴와 교체에 관한 이야기를 말해준다. 쿨하스에게서는 건축적 발전이 건축작업의 다른 조직화된 기술들과 함수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분류된다는 사실은 적절하지 않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정확히 그 반대이다. 생산 행위자들의 산업적 통합화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우리는 어느 정도로, 거대도시가 지속적이지만 비틀어진 계층들을 토대로, 복지 패러다임과 일치하지만 그러면서도 잡종적인 계층들을 토대로 조직되는지를 알게 된다. 거대도시는 공통적 세계이고, 우리 모두의 산물이다. 일반의지가 아니라 공통적 우연이다.

그러므로 거대도시는 제국적이길 원한다. 쿨하스는 희미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이다. 거대도시의 계보학을 그리며, 그는 발달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결정적이 될 작업을 예기했다. 즉 경제적 관점과 생활형태에 대한 더 생산적이고 풍부한 전지구적 차원의 인식이 그것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노력은 고립적이지도 중립적이지도 않다. 반대로 그것은 다른 비판을 생산한다. 그것은 현실운동속에 자신을 맡긴다. 가령 우리가 도시에 관한 지식에서 차이적이고 적대적 요소들을 제시할 때나 우리가 그 요소들을 거대도시 건설의 동력으로 만들때, 우리는 또한 삶과 투쟁의 여러분야들, 즉 공통적인 것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들은 거대도시와 집단화에 관계한다. 확실히, 이런 오래된 사회주의적 세계는 현재 새로운 세대의 의식에서는 쓸모없고 지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는 아니다. 기획(project)은 집단화는 아니지만, 인식이며 공통성의 조직화이다. 공통적인 것은 생활형태의 거대한 부, 소통과 삶의 재생산의 집단적 수단들, 그리고 특히 거대도시 공간에서 삶의 공통 표현의 초과로 만들어진다. 우리는 거대도시의 삶의 두 번째 발생을 즐기고 비물질적이고 관계적인 언어적 가치들속에서 협력과 초과의 창조를 즐긴다. 그것은 생산적 발생이다. 특이적이고 집단적인 다중의 거대도시가 있다.

많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집단적이고 개별적인 공간, 거대한 공통성 그리고 주체적인 유연성, 항상 새롭게 발명되는 것으로서 다중의 거대도시에 관한 가능성을 거부한다. 이런 거부는 권력에 대한 조롱꾼이거나 아첨꾼으로 분석가를 변모시킨다. 사실 우리는 외부경제들에 관한 생각, 비물질적 역학에 관한 생각, 투쟁주기에 관한 생각 그리고 다중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회복해왔다.

뉴욕은 그것이 근대의 모든 무대에 참여하는 한, 말하자면 비평속에서 그리고 다른 것들을 예상하는 것속에서 그것들을 소비하는 한, 탈근대적이다. 결과는 잡종, 투쟁들의 시공간적 형태로서의 거대도시적 잡종, 권력의 미시물리학의 계획이다.

3. 거대도시와 전지구적 공간

다른 이들보다 먼저 그리고 누구보다도 많이 싸스키아 싸센(Saskia Sassen)은 (쿨하스처럼) 잡종적이고 내적으로 적대적인 집합체로서뿐만 아니라 제국적 국면에서 자본주의의 일반구조에 상응하는 형태로서 거대도시를, 모든 거대도시들을 보도록 우리를 가르쳤다. 거대도시는 그 가장 분명한 지점들에서, 명령의 복잡한 형식들과 그 실행 속에서 전지구적 위계들의 공고화를 표현하고 개별화한다. 계급차이들과 분업의 일반계획은 더 이상 국가들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대도시의 중심과 주변사이에서 만들어진다. 싸센은 냉혹한 교훈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층건물들을 관찰한다. 명령하는 사람은 꼭대기에, 복종하는 사람은 아래에 있다. 최상위층에 있는 사람들의 고립 속에서 세계와의 연결이 있고 반면 최하위층에 있는 사람들의 소통속에서 거대도시적 재구성의 유동점들, 생활양식들, 다시 새로워진 기능들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투쟁의 실들을 한데 엮기를 원한다면, 연결의 통로와 형식들, 그리고 주체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들을 발견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거대도시의 가능한 공간들을 가로질러야만 한다. 싸센은 고층건물들을 제국적 통합의 구조로서 바라보길 제안한다. 동시에 그녀는 전체보다는 위와 아래로서 고층건물을 상상하는 미묘한 도발적 제안을 한다. 위와 아래 사이에는 명령관계, 착취관계가 있고 따라서 혁명의 가능성이 있다.

싸센의 테마는 일부 적대적 세력들이, 약간은 어렵지만 효과적으로, 거대도시 구조를 지구화의 모순들의 거울로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인 90년대의 유럽에서 강력한 반향을 얻었다. 실제로 고층빌딩이 있던 없던 간에, 전지구적 질서는 거대도시에서 위와 아래를을 재확립하였고, 도시사회의 내적 지평을 가로질러 퍼지는 착취관계를 재확립했다. 싸센은 착취의 장소들과 관계들을 보여주었고, 다중을 용해하여 분산되어 실행되는 물질적 행동들로 되돌렸다. 그 반대면에는 명령이 있다. "블레이드 러너"는 과학소설이 되었다.

4. 역사적 예상


다른 이들은 고층건물과 제국의 거대도시들을 공통적인 면들을 드러낼 수 있고, 특히 저항과 전복의 조직화와 절차들을 구현할 수 있는 투쟁의 장소로서 본다. 이 점에서 한 가지 사례가 곧바로 떠오른다. 1995-96년 겨울의 파리투쟁이 그것이다. 이 투쟁은 그 당시에 공공운송수단의 민영화 계획들은 노동조합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거대도시 대중들의 결합된 투쟁들에 의해서도 거부되었기 때문에 기억되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 투쟁은 증명서(papier)없고, 집(logement)없고, 일자리(travail)없는 사람들의 투쟁이 그것을 가로지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선례가 되지 않았다면 그 거대한 강렬도와 중요성을 획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최고 수준의 거대도시적 복잡성은 도시빈민의 전체에게 탈주선을 열어놓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때 거대도시는, 제국적 거대도시일지라도, 적대를 각성하게 된다.

이런 발전과 적대는 70년대에 이미 앞질러 나타났다. 독일과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말이다. 전선이 공장으로부터 거대도시로, 계급으로부터 다중으로 대대적으로 이동한 많은 전위들에 의해 이론적 실천적으로 경험되었고 조직화되었다. "도시를 회수하라"는 이탈리아에서 중요하고 압도적인 그리고 끊임없이 나오는 슬로건이었다. 이와 유사한 말들이 독일의 시민운동단체들(German Burger)과 대부분의 유럽 거대도시들의 불법점거자들의 경험에서 나왔다. 공장노동자들은 이런 발전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했지만, 조합질서와 노동자계급 운동의 당적 질서는 그것을 무시했다. 운송료지불에 대한 거부, 주택에 대한 집단적 점거, 자유시간의 조직화를 위해 그리고 경찰과 검찰수사관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한 거리 점거는 매우 용의주도하게 실행된 기획들이었다. 그후 이들 지역들은 '붉은 기지들'로 불려졌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장소이기 보다는 오히려 공론을 위한 도시공간들이 되었다. 때때로 그것들은 결정적으로 ‘비(非)장소’였다. 즉 그것들은 광장과 지역들을 거쳐가며 점유하는, 움직이는 대중적 시위였다. 그러므로 거대도시는 독특한 연대에 의해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바로 공장노동자들과 거대도시의 프롤레타리아들의 연대가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연대가 얼마나 강력하게 될 수 있는 지를 보기 시작했다.

이런 정치적 경험들의 기초에는 또 다른 더 거대한 이론적 실험이 있었다. 70년대 초기에 우리는 지구화와 함께 거대도시가 고층건물들의 침입을 받는 것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알베르토 마그나기(Alberto Magnaghi)와 그의 동료들은, 호가 지날수록 더욱 설득력있게 자본이 어떻게 도시들을 포위하고 거리들을 상품들의 생산적 흐름으로 전환시키는 지를 보여주는 굉장한 잡지(『꽈데르니 델 떼리또리오』Quaderni del Territorio)를 발행했다. 이제 공장은 사회로 확장된 것이라는 점 만큼은 명백했다. 그러나 또한 이런 도시에 대한 자본의 생산적 투자가 계급투쟁을 근본적으로 변경했다는 것도 명확해졌다.

5. 경찰과 전쟁


90년대에 거대도시를 채우게 된 생산관계들의 거대한 변동은 양적 한계에 도달했고 새로운 국면을 형성했다. 도시의 또는 거대도시의 자본주의적 재합성(recomposition)은 그 복합적인 모든 측면들이 제국에서 세력관계의 새로운 형성에 의해 주어진다.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는 탈근대적 거대도시를 특징짓는 현상의 적절한 이미지를 제공한 첫 번째 사람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접근할 수 없는 지역들을 구획하는 장벽의 구축, 지구상의 절망하는 사람들을 모아놓을 수 있는 게토 공간의 설정, 질서를 유지하는 통과선과 통제선에 대한 규율, 예방적 분석과 봉쇄실시 그리고 순환을 방해하는 경구 그에 대한 박해가 있다. 오늘날 제국의 문헌에서 전쟁과 지구경찰 사이의 연속성이 언급될 때, 우리는 연속적이고 동질적인 전쟁기술과 경찰기술은 거대도시에서 발명되어졌다고 말할 것을 종종 간과한다.

'무관용'(Zero tolerance)은 순종적이지 않고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유지되면서도 전사회적 계층을 둘러싸는 표어이거나 혹은 더 정확하게는 예방기제가 되어간다. 피부색 그리고 인종 또는 종교, 관습 또는 계급차이는 차례로 거대도시 내에서 억압적인 지역 구획을 규정하는 요소들로 간주된다.

거대도시는 이런 기제들 위에서 건설된다. 우리가 사센의 작업에 관해 말했을 때, 공간의 크기, 즉 건물과 공적 공간의 너비와 높이는 완벽하게 통제논리에 종속된다. 이것은 그것이 가능한 어느 곳에서나 일어난다. 주택자본이 거대한 도시 과정의 적용을 통한 직접적 통제의 도구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책정한 공간에서는 거대도시의 풍경이 전자통제 네트워크로 뒤덮여지고 텔레비전과 헬리콥터가 그려내는 위험의 재현(표상)들에 의해 가로질러진다. 곧 우리는 각 도시에 군대가 전쟁에서 최근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자동통제 도구들, 무인자동비행기, 복제인간 경찰 등이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곧 엔클로저와 레드존(red zone)이 통제 비행기들의 논리에 따라 수립될 것이다. 도시계획은 지구 전체에 대한 항공통제의 형태를 내면화할 것임에 틀림없고 공간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자유보다 그것들을 우선시 할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말할 때 우리가 아직 제한된 경향을 부각시키고 잇으며 거대도시 발전의 일부분에 불과한것을 나타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전쟁에 관한 이론처럼 권력측에서 폭력을 발전시키는 거대한 능력, 소위 전적인 비대칭성은 여기서도 적절한 대응을 발생시킨다. 즉 골리앗의 실재성에 대항하는 다윗의 유령이 그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도시에 관한 통제의 '무관용'계획은 새로운 형태의 저항을 생산한다. 거대도시의 네트워크는 저항의 망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방해받고 때때로 전복되는 것이다.

거대도시의 자본주의적 재구성은 다중 내에 연관된 재구성을 만든다. 통제 그 자체가 가해지기 위해서는 시민권의 초개인적 도식을 인식해야만 하거나 심지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시카고 학파로부터 요즘까지 모든 도시사회학은, 극단적 개인주의의 틀내에서 개념과 해석이 초개인적 차원, 거의 공동체의 차원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삶의 이런 형식들의 발전에 대하여 분석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이것이 앞으로 다중운동의 명확한 지역화와 거대도시 안에서의 확연한 공간들이 발견되는 방식이다. 주거와 수입(소비)의 시공간적 규정들이 구역의 윤곽을 계획하고 주민행동을 결정하는데 사용된다. 질서의 정당화로서 전쟁 그리고 질서의 도구로서 경찰. 거대도시의 구성적 기능으로서 가정되고 시민과 운동을 대신하는 이들 권력들은 성공할 수 없다. 다시, 거대도시 분석은 비물질적 노동의 협력에 의해 생산된 가치의 잉여분에 대한 인식으로 되돌아간다. 거대도시의 위기는 더 멀리 나아간다.

6. 거대도시적 파업 만들기


'24시간 총파업’이 쎄빌(Seville)에서 한밤중부터 밤새 전개되었을 때 사람들이 모든 지역에서 모여 모든 도로, 모든 나이트클럽(boites de nuit)을 봉쇄하였으며 투쟁의 긴급성을 도시에 알렸다고 들었다.

이 파업은 오후에 대규모 대중이 시위를 위해 거대도시에서 총동원되면서 하루종일 지속되었다. 이는 총파업을 진행시킨 좋은 사례이다. 평일 24시간 동안 사회적 노동의 서로 다른 부문들이 만나서 이루는 거대도시 파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대한 정치적 운동은 '파업을 일반화하기'를 특징짓는 데는 부적절해 보인다. 우리는 각 이행 그리고/또는 재구성의 운동, 사회적 파업의 구축으로 흐를 수 있는 투쟁의 각 계기를 더 깊게 파고들어 분석할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거대도시파업을 거대도시에서 다중의 재구성의 특수한 형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거대도시파업은 노동자계급파업의 사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대항권력의 새로운 형태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것이 시공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노동의 사회적 재구성의 다양한 부문들을 자본주의적 통제아래 놓으려고 하는 기능주의적 사회학은 거대도시파업을 계획할 수 없을 것이란 것이다. 거대도시 다중의 상이한 층들의 조우, 충돌 그리고 뒤얽힘과 전진은 다중의 힘의 투쟁을 통한 건설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런 운동은 어떻게 힘을 펼칠 수 있게 되는가? 우리에게 대답은 ‘겨울궁전’을 암시하지 않는다. 거대도시 혁명은 시장(市長)을 교체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민주주의 및 통제와는 다른 계획의 새로운 형태를 표현한다. 거대도시 혁명은 항상 도시의 재창립이다.

7. 거대도시를 재건설하기


그러므로 ‘일반화된 파업’은 그 안에 거대도시의 재건설이라는 ‘기뻐서 미칠 듯한’ 계획을 담아야만 한다. 이것은 공통적인 것을 발견하는 것과 거대도시의 인접 지역의 구축을 수반한다. 이 계획의 절대적인 표시가 되는 두 가지 형상이 있는데, 이들은 공동체의 극단적 주변부에 있다. 바로 소방관과 이민자들이다. 소방관은 공통적인 것을 안전으로서, 모든 위험한 경우에 의탁할 것으로서 아이들의 공통적 상상 속의 건설자로서 표현한다. 이민자들은 연대에 의미를 부여할 뿐 아니라 거대도시에 색깔을 주는데 필요한 사람들이다. 소방관은 위험이고, 이민자는 희망이다. 소방관은 불안전이고 이민자는 장차 올 것이다. 거대도시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을 부인 바의 그리고 문화적 공동체의 생산인 바의 물리적 공동체로서 파악한다. 생태보존적 발전이라는 계획, 즉 생태학과 생산을 삶 정치적 틀 속에서 종합하는 계획을 거대도시보다 더 잘 묘사해 주는 것은 없다. 이런 시기인 오늘날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낡고 저열하고 무기력한 일련의 도식들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이 도식들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발전의 극적 효과를 화폐로 바꾸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종국에는 수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사회적 안전판(safety valves)을 그 안에 도입할 때에만 거대도시는 재생산할 수 있다. 정치가와 부정한 노조들은 이런 안전판들을 놓고 협상하고 있다... 우리는 도심이 빈민가, 막사, 그리고 혼돈으로 구성되어질 때조차도 거대도시는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자원이 된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경찰을 통해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지배하는) 전능한 권력을 통해 미리 구현되는 질서구도도, 또한 중립화하는 구조들 (제지, 완충 기타 등등)도 거대도시와 그것의 사회적 조직에 부과될 수 없다. 거대도시는 자유롭다. 거대도시의 자유는 매일매일 스스로에 대해서 수행되는 건설과 재건설로부터 발생한다. ‘총파업’은 이런 틀에 삽입되어진다. 그것은 도시 깊숙히 살아있는 것의 연장이거나 혹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발현 또는 드러남이다. 필경 쎄빌(Seville)에서의 ‘총파업’은 평일 전체동안 거대도시에서 살아있는 다른 사회의 발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건들이 정말로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총파업’이 거대도시의 삶에서 일종의 뿌리까지 파고드는 발굴이라는 점이다. 거대도시의 생산적 구조와 거대도시의 공통성까지 파고드는.


*Published in the journal Posse and then circulated on multitudes-infos@samizdat.net on 20/11/02. Translated by Arianna Bove for http://www.generation-onlin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