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8호(2004-03-30)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545&p_no=1
이 번역글은 『트랜스토리아』창간호(2002, 하반기)에 수록되었던 글을 역자 안준범님께 협조를 구해 재수록한 것입니다.
역자 안준범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전합니다. ■ 편집자
포스트식민 연구의 모호한 의식
마이클 하트 / 역자 : 안준범
1990년대 포스트식민주의 연구는 미국 대학의 학위 논문들 사이에서 맑스주의, 해체론,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비판적 인종 이론 등과 견줄 만한 지배적인 이론적 패러다임이 되었다. 실제로, 포스트식민 연구에서 더욱 흥미로운 측면들 중 하나는 저 다기한 패러다임들을 취합해서 새로운 이론적 정치적 위상을 창출하는 방식이다. 미국의 지적 유행이 늘 그러했던 것처럼, 포스트식민 연구가 권위 있는 중심적 흐름이 되자, 여타의 이론적 담론은 저마다 범지구적인 이론적 구조를 채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페미니스트 이론은 제3세계 여성들의 상황을 일관되게 다루어야만 했고, 미국의 인종 관계에 대한 연구는 식민지 인종주의 및 그 유산의 역사에 포함되어야함 했고, 심지어 해체론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식민적이며 범지구적인 세계 체제들을 사용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듯 대학의 교재 채택에서 포스트식민주의 연구가 압도적인 까닭에 서점에 나오는 신간들 사이에서도 역시 포스트식민주의 연구가 두드러 진다.
민족적 한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지적 전망의 경향은 그 자체로 미국학(gli strudi americani)의 발전에 매우 유용하다.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포스트식민 연구가 미국 학계에서 발전되었다고 하더라고, 이것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지식인들, 대부분은 인도에서 그리고 특히 많은 수가 벵골에서 온 지식인들의 작업 덕택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 연구의 진정으로 미국적인 성격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된다. 왜냐하면 미국의 대학 체제가 전 세계 지식인들의 엘리트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이렇듯 포스트식민 연구가 지배적인 지위를 점하는 현상이 하필이면 왜 오늘날 그것도 미국에서 나타나는가? 한 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필요나 지적 유행에서 우발성을 분리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미국에서 포스트식민 연구가 전반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이 범지구적인 현대 세계의 정상―제국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의 독특한 힘과 연관된 것이라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포스트식민 연구는 제국의 권력이 지난 사악한 양심(la cattiva coscienza)을 달래주는 데 적합한 보상 메커니즘으로 태어난 것이라는 가설을 세워 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저지적 운동을 제국을 이해하고 제국의 지배에 대한 가능한 대안들을 이해하기 위해 바로 이 제국의 핵심부에서 등장한 모호하고 불완전한 하나의 시도라고 파악하는 것이 더 유용하며 더 정확하다.
얼핏 보기에 포스트식민 연구는 이해하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하나의 ‘사상 유파’로 간주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저자와 제안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포스트식민 연구는,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지금으로선 포스트식민적 세계에 대한 하나의 이론 또는 범지구적 장치들에 대한 하나의 이론 그리고 식민 체제의 소멸에 따른 공백을 채웠던 권력의 동학들에 대한 이론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식민 연구는 분명히 연결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분리되어 있는 두 가지의 프로젝트로 이루어지는데, 이 점이 해명되어야 비로소 나름의 일관성을 갖춘 이해 가능한 연구 분야가 된다. 첫번째 프로젝트, 회고적인 시선으로, 과거의 식민 세계를 검토한다. 두번째 프로젝트는, 미래를 향한 시선으로, 포스트식민주의의 현재와 미래의 조선을 검토한다는 혼합적인 시도를 수행한다. 첫번째 프로젝트는 포스트식민적 세계의 시점에서 식민 세계를 비판하는 것으로 매우 중용한 주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때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연구의 대상(식민세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의 관점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는 포스트식민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식민지 시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지배했던 식민적 역사들과의 차이를 명확히 해 준다. 이 포스트식민적 역사 프로젝트는 확실히 한 세대 전의 프란츠 파농이나 알베르 멤미(Albert Memmi), 마하뜨마 간디 같은 저자들과 전사들의 반식민적인 사상과 실천적 지속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지만 또한 그 전통과 비교해 볼 때 결정적인 변화를 겪은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흐름의 견구에 숨어 있는 전제는, 포스트식민적 시기, 즉 인도에서는 1940년대로 소급되며 1960년대에는 범지구적 조건이 된 이 시기가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이러한 포스트식민적 전망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잘 제시되어 있다. 1978년에 첫 출판된 이 책은 포스트식민 연구에 초석을 놓은 텍스트로 간주된다. 사이드가 확고하게 주장하는 바는, ‘동양’에 대한 인식들이 식민 프로젝트의 필요에 따라 규정되었다는 것, 이 인식들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북아프리카나 중동의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리엔탈리즘은 학문적이고, 정치적이고 대중적인 인식들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통해 확산되었던 유럽 식민주의의 한 구성 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미국의 대학에서 식민 세계를 연구하는 형식을 변화시키면서, 그리고 전통을 통해 물려받은 식민지 인식에 대해 논의를 재개하면서, 일련의 학문 분과들―역사, 인류학, 문학 비평 같은 ―이 제도적으로 재편성되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이야말로, 사이드의 작업이 제한한 것이다 대체로 달성한 것이다. 그 밖에도 주목해야 할 것은, 옳건 그러건, 식민 세계에 대한 신진 연구들이 정치적 경제적 힘들에 집중하기보다는 식민적 인식론이나 식민적 이데올로기의 비판에 대부분 집중하도록 고무하는 데 사이드의 작업이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식민 연구의 이 첫 번째 역사적 방향은 또한 인도 역사가인 라나지뜨 구하(Ranajit Guha)에 의해서도 전개되는데, 그의 작업은 1982년에 간행되기 시작한 『서발턴 연구』라는 저널의 근간을 이룬다. 구하의 작업은, 사이드의 작업과 유사하게도, 작금의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역사를 갖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고뇌에서 한 원천은 영국의 식민적 역사학뿐이라는 점, 이런 점들이 바로 구하의 작업이 시작된 고뇌의 지점들인 것이다. 구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사이들의 기획을 넘어서고자 한다. 요컨대, 사이드가 식민적 인식을 비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반면, 구하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는바, 즉 인도에 대한 ‘인도인의’ 역사학 혹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피식민자의 관점으로 식민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학을 건설하는 기획을 제시한다. 이 새로운 역사을 서술하는 일이 몹시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데, 왜냐하면 특히 20세기 이전에는 피식민자의 전망을 기록한 문서 또는 사료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는 역사의 자료들이 거의 배타적으로 식민 지배자들에 의해 수집되고 편찬되었다. 서발턴적인 역사를 복원하고 조명하려면 역사학에서 새롭고 창조적인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구하와 『서발턴 연구』의 다른 멤버들, 가령 디뻬쉬 짜끄라바르띠(Dipesh Chakrabarty)와 빠르타 짜떼르지(Partha Chatterjee)같은 이들이 구사한 전략은 식민주의자들의 사료 안에 숨겨져 있거나 또는 가려져 있는 서발턴적인 전망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컨대, 어떤 영국 관리가 자신의 혼란스러운 보고서에서 대중의 “종교적 광신주의” 운운하며 설명했던 저 1857년의 인도의 대규모 반란에서 전사들의 정치적 열망을 읽어 낸다든가, 혹은 공장 감독관에 의해 기록된 장부들을 검토함으로써 황마 공장의 일부 노동자들의 경험을 해석해 내는 것이 바로 이들의 전략이다. 다루는 소재를 어디에서 끌어오든 간에, 여하튼 이들의 연구는 예속된 피식민자들의 감춰진 역사들을 묶어 내고자 한다.
포스트식민 연구의 첫번째 흐름은 식민주의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식들을 새롭게 해명하려고 과거를 재검토하는 데 전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식민 연구는 현재의 문제들과 정치적 열망들에 의해서도 항상 영향을 받는다. 오늘의 포스트식민적 세계에서, 식민 역사에 대한 이러한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무엇인가? 다소 간접적인 답변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주체들이 갖고 있는 역사를 만들어 내는 힘을 다룬다는 데 이 프로젝트의 중요성이 있다고 답하는 것이 최상일 것 같다.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이나 식민지 연대기들은 피식민 주체들을 역사의 수종적인 객체들로 변모시켰으니, 이들은 유럽을 행한 것의 희생자였거나 아니면 수혜자였을 따름이다. 이 무기력과 수동성의 이데올로기는 포스트식민적 시기에까지 연장되어, 피식민 주체들의 후예들에게서 역사를 만들며 능동적으로 행하는 힘을 앗아간다. 반면에, 이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포스트식민 연구는 피식민주체들의 집단적 행위라든가 또는 이 주체들이 갖고 있는 역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보여 주는데, 이 행위와 능력은 식민 세계와 대립적이면서도 동시에 그 세계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이 지점에서, 포스트식민 연구의 역사학적 프로젝트가 갖는 정치적 중요성과 톰슨의 작업 특히 그의 걸작 『영국 노동 계급의 형성』 사이의 상관성은 뚜렷해 보인다). 피식민 주테들의 능동성과 능력은 다중에게 이전되어 가는데, 포스트식민적 세계 내부의 저 다중은 피식민 주체들의 후예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저 침수된 연사가 무기력과 수동성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리고 그것의 바깥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는 조건 하에서다.
포스트식민 연구의 이러한 흐름은, 포스트식민적 세계의 통제와 지배의 낡은 장치를 해석하는 것일 뿐이므로, 그 세계의 현실적 문제들과 실질적으로 대결할 수 없다. 이 흐름은 식민 체제의 종말과 더불어 일어났넌 역사적 뱐화를 인식할 수 없으며, 오늘날의 범지구적인 제국의 형상을 규정했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발생을 인식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단적으로 말해 이러한 변동이 저 연구 흐름의 가시적 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이드의 태도가 그런 징후를 보이는데, 20세기 말에 미국의 권력이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졌다는 점을 비판하는 사이드이지만, 그는 미국이 낡은 유럽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의 일부 요소들을 다시 채택하고 있다고 비판할 뿐이지 그 이상의 엄밀한 비판은 찾지 못한다. 미국이 실제로 포스트식민적 권력으로 되었다는 점을 사고하지 못하고 있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역사적 이행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지적한 것처럼, 포스트식민 연구의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이 존재하는데, 이 흐름은 오늘의 세계의 차이와 복잡성을 다루는 데에 앞의 흐름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 이 흐름은 식민 권력의 전복 이후에 구성되었던 사회적 관계와 권력의 초민족적이거나 아니면 범지구적인 체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 흐름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저자인 호미 바바(Homi Bhabha)와 가야뜨리 쓰삐와끄(Gayatri Spivak)는 그들의 난해한 문장으로 유명하며 비판도 많이 받는다. 이런 특징 때문에 이들은 사이드나 구하 같은 앞의 흐름의 저자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사이드와 구하의 문장은 대단히 명료하며 교육적이다.
쓰삐와끄와 바바 특유의 모호한 스타일은 의심의 여지없이 데리다의 강력한 영향에서 또는 해체론의 특수하게 미국적인 버전의 강력한 영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미로 같은 그들의 문장이야말로 그들의 포스트식민적 세계에서 파헤치려 하는 사회적 동학과 권력의 모호함을 도리어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텍스트에 엘리트주의나 난해함이나 추상성 등의 손쉬운 비난을 던지면서 그들을 비판하기보다는, 이러한 모호함과 난점을 하나의 징후로 독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제국에서의 삶이란, 헤겔이 말한, 모든 소들이 한결같이 검고 모호하게 보이는 밤에, 아니면 좀 더 정확히 말해, 제국 권력의 모습이나 대중의 저항을 한눈에 알아보기가 거의 어려운 안개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접근하기 어려운 그들의 스타일은 그러니까 제국의 발전에 대한 작금의 인식 부족을 반영한다. 특정한 분석들이나 논제들의 명료함을 굳이 찾으려 들지 않고, 포스트식민적 저자들을 적절하게 읽는다면, 그들의 이론적 구조의 복잡성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바바의 작업은 ‘잡종’ 개념에 집중된다. 따라서 그가 주요하게 논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제국안에서의 불확정성과 무차별성의 문제이다. 바바에 따르면, 포스트식민적인 것은 주로 문화적 의미에서의 잡종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즉 사회적 정체성이 더욱더 불안정하고 혼합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잡종성 말이다. 식민 시기에 (또는 적어도 그 시기의 이데올로기에) 특징적인 피아(彼我) 혹은 흑백의 어휘와는 반대로, 잡종성은 포스트식민적 주체들의 조건이다. 이 포스트식민적인 잡종적 주체를, “‘중간에 있는’ 어떤 현실의 경계에 살고 있는 주체의 ‘내면에’ 있는 하나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바바의 견해다. 게다가 바바는 잡종성의 이념을 식민 세계에서도 발견한다. 예를 들면, 피식민지자들이 잡종성의 이념을 구사하면서 식민적 정체성의 체제에 맞설 때가 그런 경우인데,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포스트식민적 세계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잡종성의 이념이 등장하는 것의 서곡일 따름이다. 꼬여 있는 그의 문장도 곤혹스럽지만 더 곤혹스러운 점은 그가 잡종성을 오늘날의 맥락과 상황에 놓고 평가하려 하지 않거나 아예 그렇게 평가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때로 바바는, 문화적인 잡종성의 이념 그 자체가 권력의 이원성을 교란하기 때문에 하나의 해방 형식이라고, 또는, 예컨대 백도 흑도 아닌 잡종적 주체에겐 인종주의의 구조를 혼란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포스트식민적 주체가 갖고 있는 접근하기 어려우며 판독하기 어려운 속성은 힘(Virtu)이나 저항 행위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바바는 그의 작업에서 모호하게 대처할 뿐이지만, 이제 분명한 것은 제국의 세계에서는 권력 자체가 잡종적인 정체성의 감독과 통제를 통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자면, 잡종성의 이념은 오늘날 권력에의 저항을 구성할 수 없으며, 확실히 제국 권력의 장치들의 중심 요소이다. 바바의 잡종성 개념이 우리의 포스트식민적 조선을 특징 짓는 것을 도울 수 있지만, 가치를 평가하고 차이를 구별하는 틀이 첨가되지 않는 한, 잡종성의 개념에 함축되어 있는 지배와 해방의 테마들(그리고/또는 문제들)을 결코 다룰 수 없을 것이다.
이 두번째 흐름의 또 다른 주요 대표자인 쓰삐와끄는, 포스트식민주의 저자들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또한 아마도 가장 곤혹스러운 저자다. 그녀의 작업의 이론적 패러다임들의 믿기 어려운 조합을 보면 그녀의 프로젝트의 야심 찬 목표를 알 수 있다. 그녀가 선호하는 테마들은 해체론(그녀의 첫 출판물은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의 빼어난 영어 번역본이었다), 맑스주의 사상(그녀는 종종 맑스의 사상을 배반했다고 현대 맑스주의자들은 비난한다), 범지구적 페미니즘이다. 쓰삐와끄의 최근 저서인 『포스트식민적 이성 비판: 사라지는 현재의 역사를 향해』는 포스트식민 역구의 모든 분양의 정점을 보여 준다. 그런데 이것은 실로 기이한 정점인데, 왜냐하면 미국 학계의 포스트식민 연구 대부분을 경계하고 있기 때문인다. 요컨대, 이 연구들은 틀렸을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잊혀진 문제를 부적절하게 추도하는 포스트식민 연구들이, 전반적 맥락에 자리 매김되지 않을 때, 하나의 알리바이가 될 수도 있다. ‘식민 담론’에 관한 연구들이 유독 피식민자의 표상이나 식민지들의 변천에만 집중할 때, 결국 식민주의/제국주의를 효과적으로 과거 안에 위치시킴으로써, 그리고/아니면 저 과거와 우리의 현재 사이의 어떤 연속성을 제안함으로써, 현존하는 신식민지적 인식들을 산출하는 데 이 연구들이 유용하게 되는 경우들이 생길 수 있다.” 달리 말한다면, 포스트식민 연구들은 우리의 포스트식민적 조선을 인식하는 데 너무 자주 실패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 주제의 많은 영역에 실제로 해당되는 매우 중요한 비판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반면 쓰삐와끄에 따르면 올바른 전망을 갖고 포스트식민 연구를 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근현대 세계를 식민주의(외국의 영토를 유럽이 행정적으로 지배하는 국면), 신식민주의(식민 체제의 몰락 이후 출현했던 제국의 경제적 문화적 장치들) 포스트식민주의(범지구적 지배의 현재적 조건)로 시기 구분하는 것이다. 쓰삐와끄는 새로운 포스트식민적 세계를 규정하는 지배 권력의 하나의 이름을 부여하기를 망설인다. 때로는 그것을 “새로운 제국”으로 부르고, 다른 때는 “흉물스러운 북/남의 범지구적 국가”라고 부른다. (식민주의/신식민주의/포스트식민주의로의) 시기 구분에 관한 그년의 일관된 강조와, 포스트식민적 국면에서의 범지구적 지배의 본질적으로 새로운 조건에 대한 그녀의 인식은, 포스트 식민 연구의 장에서 큰 전진을 대표한다.
포스트식민 연구에서의 쓰삐와끄의 두번째 중요한 기여는, 민중을 대표한다는 것에 근거하는 이런저런 저항 형식을, 그년가 거부한다는 점이다. 민중이란 하나의 단일체가 아니라, 독특한 개인들의 환원 불가능한 다수성이라고, 쓰삐와끄는 주장한다. 게다가, 미학적인 재현이든 정치적인 대표성이든 이 대표성(/재현)의 전제는, 다수성을 어떤 특정한 정체성으로 환원하는 경향을 띨 뿐만 아니라, 바로 저 다수성을 담지한 주체들에게서 행동과 표현의 가능성을 박탈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쓰삐와끄가 열망하는 것은 제국의 이론이요 다중의 이론이다.
쓰삐와끄가 논지를 바꿔, 비판에서 제안으로 나아갈 때, 그녀의 작업은 더욱 추상적이고 도식적이게 된다. 또한 그녀의 작업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목들도 있다. 제국과 제국의 구성을 서술하는 데에서는, 여하튼 제국 자체에 속하는 초국적 경제 기구들―IMF, 세계은행, WTO 등등―을 열거하는 것에 그친다. 다중을 확정하는 데에서는, “새로운 유형/유형성의 서발턴” 또는 제3세계의 여성들의 포스트식민적 세계 질서와 그 경제적 착종을 지탱하는 주요한 기둥이라는 점을, 그렇기 때문에 이 주체야말로 해방을 쟁취할 최고의 잠재력을 보유한 주체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점을 주장하는 데 머문다. 설사 쓰삐와끄의 주장이 방글라데시의 NGO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검증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이러한 논지가 그 어떤 분석적 논거에 의해서도 확인되지 않으며, 심지어 이런 유형의 명제에 포함되어야 할 정치적 잠재력도 보여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쓰삐와끄의 해체론적인 수사는, 하루살이 주장이나 순간의 직관 이외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비록, 대체적으로 개념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애매하긴 하지만, 포스트식민 연구는 제국에서의 삶의 가이드로 간주될 수 있다. 포스트식민 연구에 접근하는 최상의 형식은, 그 연구의 오류를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논지들이 어디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고, 포스트식민 연구가 귀결될 논리는 오늘의 제국 체제에 대한 명료한 이해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달리 말하자면, 포스트식민 연구의 신비한 (심지어 그 자체만으로 파악이 어려운) 의식을 분석하는 것에 의해, 포스트식민적 세계가 오랫동안 갈망했던 무엇인가가 있는데, 이미 그것을 장악했음을, 좀 더 용이하게 이해할 수 있를 것이다. 결국 포스트식민 연구의 진정한 완성은 제국에 대한 이론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에 진정한 대안을 창조할 수 있는 힘으로서의 다중에 대한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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