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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인터뷰] 마이클 하트 /자율평론7호 20040103

by 마리산인1324 2010. 10. 24.

<자율평론> 7호(2004-01-03)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447&p_no=1

 

 

이방인들의 학문을 향하여? - 마이클 하트 인터뷰

역자 : 양창렬

 

2003년 9월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브리안 홀므(Brian Holmes), 존 솔로몬(Jon Solomon)과의 인터뷰)

* Multitudes지 14호·2003년 가을에 실린 인터뷰(74-79쪽)를 번역한 것임.
une science des étrangers를 이방인들의 학문으로 옮기긴 했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단어 선택이다. 알아서 이해해주시길 바란다.-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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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ltitudes(이하 M) : 이라크 침공을 전후로해서 쓰여진 소논문들에서, 당신은 미국의 일방주의(unilatéralisme)을 "지구적 체계 내부에서의 쿠데타"로 기술한 바 있습니다. 당신은 부시의 일방주의와 제국주의적 엘리트들의 고귀한 다자주의 협상을 대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저항이 대중들(multitudes)의 구성과 관련하여 무엇을 밝혀주었습니까? 어디에서, 그리고 어떤 수단을 통해서, 민주 세력들(민주적 힘들)이 지구 무대 위에서 배우의 지위를 따낼 수 있겠습니까?

마이클 하트 : 이라크 전쟁 이전 몇 달 동안, 지배적인 정치 세력들간에 벌어진 거대한 이데올로기 투쟁은 지구를 운영하는 형태와 관련하여 두 선택지적인 참호를 제기했습니다. "일방주의"냐 "다자주의"냐, 즉 미국이 지구 정치를 지배하느냐 아니면 유엔의 매개를 통해 여러 국가들이 통제력을 나누어 갖느냐로 말이죠. 바그다드를 점령한 순간에, 미국은 소리 높이, 그리고 강력하게 자신들의 일방주의적 입장이 결국 좋은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만한 군사력을 가졌고, 그네들의 해결책만이 지구적 무질서의 어김없고 불가피한 난입에 맞설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점령은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미군 병사들은 하나 둘 게릴라의 공격 앞에 쓰러져가는 반면, 이라크와 "해방된" 아프가니스탄은 항상 혼란스럽고, 통치불가능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죠. 이라크에서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승리는 점점 더 다자주의적 입장에 손을 들어주는 듯 했습니다. 미국은 단독 행위를 취할 수 없는 것이죠. 미국은 적군을 쓰러트릴 수 있는 경이로운 군사력을 가지긴 했으나, 장기간 동안 점유를 하면서 치안활동을 벌이는 데 필수적인 부대를 제공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정치적, 문화적 구도에 있어서, 미국은 안정적인 정부를 만들어내고 부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경제적 차원에서 보자면, 미국은 이 비싼 기획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는데 필요한 돈을 갖고 있지 않구요. 특히 이라크 석유의 부재 속에선 말이죠.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능력(puissances)의 다자적인 연합이, 전반적인 수준에서 질서와 안전을 보존하면서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지배하고 변형시키기 더 수월했으리라는 것을 지칭해주는 듯 합니다.


일방주의적인 세계 정부―적어도 워싱턴에 있는 현재의 지도부들이 파악하는 그런 방식의―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토로하는 것이 저에겐 중요한 듯이 보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미국이 이러한 모험들(여기에 포함되는 사람들 모두에게는 분명히 비극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미국은 지구적 질서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지 못할, 과도기적 현상들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보기엔, 일방주의의 실패가 다자주의의 테제, 적어도 우리가 자주 상상하며 흐뭇해하는 식의 개방적이고 다원주의적인 형태를 띈 그러한 다자주의를 유효하게 인정해주지는 않습니다. 현재의 지구적 질서 형태는 예를 들어 유엔의 포럼 내부에서 일치조화되는 민족국가들의 민주적 콘서트에 의해 유지되지 않을 것이며, 현존하는 지구적 권력 구조상에 있는 실제적인 위계들을 인정하지 않는 전략에 의해서도 유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현재의 담론들 속에서 파악하는 그런 의미의 다자주의는 아닙니다. 다자주의란 작은 수의 민족국가들이 결정권과 이윤들을 나눠먹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 대한 다자주의적 전략은 모든 석유 계약을 한 미국 기업에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을 어떤 프랑스 기업에 나누어 주었겠죠. 사실 일방주의와 다자주의의 드라마는 왕이 혼자서는 자신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어서, 귀족이나 용병대 대장들에게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구하러 가야했던 옛날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작동하는 그런 종류의 다자주의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것은 그저 지구를 통제하는 두 전략, 전지구적인 전쟁의 다른 두 모델간의 투쟁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올바르게 제안한 바대로, 이 모든 것은 다중의 저항과 진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부시 일방주의에 대한 시라크 다자주의의 "저항"이 의미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자체로 보면, 전쟁에 대한 저항의 장은 오히려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이라크 전쟁 동안의 다중의 운동들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훗날, 우리가 현 시대를 회고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2003년 2월 15일은 아마도 새천년이 시작된 후 가장 중대한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 세계의 도시 곳곳에서 전쟁에 반대해 시위했던 바로 그날로 말이죠. 그것은 정말로 지구적인 첫 번째 시위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반대한 항의들은, 그것들의 크기가 어떠했든지간에,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다른 운동들에 다시금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단순히 부정적인 표현들로만 남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반대한 시위들은 현재의 세계화 형태에 반대하는 항의들, 그리고 그것의 조직화 및 정향의 구도와 본래적인(내적인) 관계를 갖습니다. 시위자들은 며칠 사이에 이미 지구적 전쟁 상태가 지구적 아파르트헤이트의 형태와 일치한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지구를 분할하는 불평등과 빈곤화의 체제, 하나에 맞서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에 맞서야만 하는. 그리고 틀림없이, 2월 15일 그리고 전쟁에 반대한 대규모의 항의들은, 물질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지구 사회 포럼 그리고 1999년 씨애틀에서 오늘날까지 지구화의 현 형태에 반대하는 반세계화 투쟁들의 전과정 같은 사건들에 의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전쟁에 대한 저항은 민주적인 전지구적 행동 형태에 대한 가장 긍정적이고 유망한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M : 오늘날 대중들의 구성적 역학은 역설적으로 "늙은 유럽"의 사회적 운동들―떠오르는 대륙 블록에 복무하면서 도구화되는 위험한 상수와 함께― 속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어떻게 구성적 역학을 확대할까요? 전 행성적인 차원에서,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을 통해서 그것을 추론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요? 가장 넓은 제헌주의(구성주의)(constitutionalisme)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농업 노동, 산업 노동, 비물질 노동의 지구적 분할에 대한 새로운 마디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마이클 하트 : 여기서 우리는 부정적인 영역에서 긍정적인 영역, 즉 지구적 지배 형태에 대한 다중의 저항의 영역으로부터 다중이라는 것, 혹은 그보다는 다중이 될 수 있는[생성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무엇보다 다중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적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기획, 사회적 조직화 양식입니다. 다중은 특이한 사회적 주체성들의 개념입니다. 이 주체성은 항상 차이나게 남으며, 자유롭게 스스로를 표현하지만, 그러면서도 소통하고, 협동하고 공통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중의 기획에는 어떤 가능성의 조건들이 있습니다. 다중은 차이들로 합성되지만, 이 차이들이 협동이나 소통을 가로막아서는 안됩니다. 당신이 제안한 바대로, 노동의 지구적 장은 오랫동안 그러한 소통에 장애물이 되는 위계와 구분에 의해 분할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노동 계급의 국제적 위계들, 노동의 인종적인 그리고 성적인 분할,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적 노동간의 분할, 노동 계급과 빈민간의 분할, 산업 노동자들과 농민들간의 분할. 아주 오랫동안, 사회주의적인, 그리고 공산주의적인 정치 기획들은 이러한 분할들 위에 세워졌습니다. 예를 들어 산업 노동자 계급은 농민들과 다른 근로 계급에게 길을 제시해야한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렇지만, 다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다른 계급들을 나눴던 이런 종류의 분할들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됩니다. 노동의 공통-생성(devenir-commun), 소통과 협동의 공통 토대의 출현을 향한 경향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특히 지구적 계급 구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요하는 경험적인 문제입니다.


다중의 기획에 가장 큰 도전이 되는 것 중 하나일 수 있는 농업 노동을 예로 들어보죠. 맑스 자신도 그렇고, [맑스주의] 전통의 다수적 흐름들도 그렇고, 그들은 농민을 자기 자신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기획들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다른 노동 계급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협동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전통적으로 보면, 농민은 그네들의 정치적 이해를 보장해줄 수 있는 산업 노동자 계급을 따라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정치적 위임은 농민 계급의 구성에 대한 분석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그네들은 지정학적으로 떨어져있기 때문에, 산업 노동자 계급이 사용할 수 있었던 소통의 도구들을 사용할 수 없는 듯이 보였던 것이죠. 다중의 기획이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정이 더 이상 그러하지 않으며(사실 이것은 결코 그런 적이 없습니다), 농업 노동은 동등하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기획들에 대해 모든 다른 형태의 노동과 협동할 수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날 노동의 공통-생성의 경향이 있으며, 이 공통-생성은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헤게모니라고 말할 때, 이는 오늘날 세계에서의 노동의 다수가 비물질적 생산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농업은 양적인 측면에선 지배적인 채로 남아있고, 전반적으로 취해서 생각해보면, 산업 노동자들의 수 역시 낮아지지 않았죠. 그렇다고 마치 마이크로소프트의 프로그래머들이 우리에게 빛나는 길을 제시해줄 수 있는 양, 비물질적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헤게모니를 쥐어주자는 말도 아닙니다. 저는 비물질적 노동의 질과 조건들이 모든 다른 형태의 노동들, 그것들의 과정, 리듬 그리고 기술을 변형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전 시대에는 모든 형태의 노동 그리고 사회 자체가 산업화되도록 강제되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오늘날 그것들은 점점 더 비물질화되도록, 다시 말해, 비물질적 노동의 현저한 특징들에 적응하도록 강제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하나의 예를 들어보죠. germoplasme, 즉 배아 안에 포함된 유전 정보를 둘러싼 투쟁을 고려할 때 우리가 볼 수 있듯이, 농업은 정보의 생산과 수행 위에 그것을 재중심화하는 변형을 치르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면허 자격을 둘러싼 갈등이 농민들의 일상적 삶을 차지하고 있죠.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농업 생산의 본질적인 요소였던 전통적인 지식들 혹은 "토착적인 지식들"은 오늘날, 그것들 역시 비물질적 면허와 소유의 대상이 될 때, 새로운 상황에 놓이는 것이죠. 요컨대, 저는 다중의 기획을 가능케 하는 노동의 공통-생성이 오늘날 비물질적 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발전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했듯이, 그러한 담론은 여기에서 우리가 토론하는 틀을 넘어서는 규모상 경험적인 연구들을 요구할 것입니다.


저는 단지 안토니오 네그리와 저자신이, 당신이 제안한 대중들(multitudes) 대신에 다중(multitude)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음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이것은 사소한 구분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중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그것을 복수로 쓰던, 단수로 쓰던간에, 이미 모든 단일성 혹은 동일성(정체성) 개념에 대해 어떤 거리를 취하고 있고, 이 개념은 항상-이미 차이들로 채워져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다중이라는] 기획의 정치적인 능력을 표식하기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 다중의 결정 능력(capacité décisionnelle)을 표시하기 위해서―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온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는 단수 형태가 우리에겐 중요하게 보입니다. 다중은 차이들로 구성됩니다. 그것은 지능의 중심, 내적인 위계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중은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혹은 똑같은 것을 다른 단어로 말해보자면, 다중은 어떤 사회를 창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다중 개념의 단수적 용법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M : 제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좌파의 이론적 혁신들을 영어라는 체를 통해 걸러내는 하나의 복잡한 종합입니다. 당신이 보기엔, 제국주의적인 확산(방송(?)diffusion) 기계 속에서 미국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소수자적인" 언어들을 인정하는 것이 제국주의적 수행의 가장 억압적인 형태에 적합한 민족주의에 자양분을 제공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소수자들을 인정하는 것과 제국주의적인 민족주의의 발전 사이의 이러한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백인이면서 동시에 소수자적인 지식인들에 의한, 미국 내부에서부터 분절되는, 내적인 일종의 엑소더스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다시 말해, 주권성과 식민주의의 논리를 갱신시키는 학제의 분배를 와해시키고 새로운 이방인들의 학문을 도입하는 방식으로, 인문학의 근본적인 변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이클 하트 : 이방인들의 학문이라는 이 개념이 마음에 드는군요. 적어도 제가 그것을 잘 이해했다면 말이죠. 이것은 들뢰즈가 즐겨 인용하던 프루스트의 구절을 떠오르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의 언어 속에서, 마치 그것이 외국어인양 글을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실 이것이 저에겐 일종의 엑소더스이자, 아카데믹한 권위의 지위를 철거하는 것, 그리고 풍부한 가능성들로 개방되는 다른 것-되기인 듯이 보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학제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결국 인문학을 계속해서 지배하는 식민주의와 냉전 논리에 의해 발전된 "area studies"(지역 연구) 체계로부터 빠져나오는 탈출구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제가 보기엔 훌륭한 기획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국 지식인들을 특권화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그들을 당신이 제안한 방식같이 명백히 드러내지도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미국 지식인 영역에 필요한 것으로 제기한 그 내적인 엑소더스라는 것은 확실히 다른 곳에서도 필요할 것입니다. 동일한 용어상으로 말이죠. 저는 미국 지식인들에게 특정한 역할을 할당하려는 생각을 꼬집으려는 것일 겁니다. 물론, 당신도 물론 알고 있겠지만, 지식인이 국가를 떠받치길 바라는 지배적인 억압과는 반대로, 그리고 이 억압에 반작용하면서, 많은 이들이 반-미국주의가 미국 좌파 지식인들의 주된 의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가에 대한 비판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주된 의무이듯이,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구요. 이것이 저에게는 반작용적인 입장 안에 우리를 가두는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에서만 정치적인 대안을 파악하게 만드는 일종의 올가미인양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낡아빠진 오래된 질문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진 탓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당신의 질문을 잘 못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제안한 내적인 엑소더스같은 유형, 자기 자신의 국가안에서, 그리고 모든 국가 안에서의 이방인-되기는 사실상 오래된 문제틀들을 완전히 대체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학문이라는 지적 기획, 모든 언어를 말하지만 다른 세상을 가능케 하기 위해 소통하고 행동할 수 있는 타종족 사회(une société d'allogènes)를 만들어내려는 이러한 노력, 이것은 확실히 다중의 기획을 파악하는 다른 방식일 것입니다.


브리안 홀므에 의해 영어에서 불어로 번역됨.
양창렬(nomade02@hotmail.com)이 불어에서 한글말로 번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