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 이야기/사회

누가 서해 5도를 ‘화약고’로 만들었나 /위클리경향904호

by 마리산인1324 2010. 12. 17.

<위클리경향> 904호(2010 12/14)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012091047001&code=113&s_code=n0002

 

 

 

[커버스토리]누가 서해 5도를 ‘화약고’로 만들었나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군사력을 집중배치 함에 따라 서해 5도는 일촉즉발의 화약고가 됐다. 특히 양측이 불과 10여㎞를 사이에 두고 전력을 집중배치하고 있어, 사소한 군사적 충돌이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 20년이 지났건만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냉전의 삭풍’이 몰아치고 있다.

[장면1] 1968년 1월 북한 124부대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수도권으로 잠입해 경찰과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을 자행했다. 이에 정부는 같은 수(31명)로 구성된 684부대를 창설해 서해안 외딴섬 실미도에서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그들의 임무는 평양 주석궁에 침투해 김일성 주석의 목을 따오는 것이었다.

[장면2] 북한 공작원들이 1983년 10월 버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했다. 이 사건으로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이 순직했다. 당시 육사 12기를 주축으로 한 장교들은 ‘벌초계획’이라는 작전명 하에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는 모의훈련을 진행했다.

한반도가 둘로 갈라진 이후 60여년 동안 남북은 도발과 응징의 역사를 써왔다. 동서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 20년이 지났건만 한반도에서는 아직도 ‘냉전의 삭풍’이 몰아치고 있다. 끝없는 보복의 악순환이 우려된다. 결국 피해자는 남북한 주민들이다. 남북한 주민들은 오늘도 분단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에 시달리고 있다.

연평도 곳곳에 다연장로켓포(MLRS)가 배치돼 있다. |김영민 기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1월 29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특별담화’를 통해 “북의 도발에는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며 결기어린 다짐을 했다. 이 대통령의 담화 직후 우리 군은 연평도를 포함한 서해 5도에 최첨단무기를 배치하는 등 전력 증강에 돌입했다. 지대공미사일인 ‘천마’와 MLRS 다연장로켓포를 새로 배치했다. K-9 자주포 6문을 추가로 늘렸으며, ‘먹통’이었던 레이더를 최신 대포병레이더로 교체했다. 다연장로켓포는 130㎜ 로켓탄 36발을 20초 안에 쏠 수 있는 것으로, 한 번 발사로 축구장 4개 면적을 초토화시킬 수 있다. 군 당국은 지상표적 정밀 타격유도무기와 K-55자주포, 음향표적장치 등도 추가로 배치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군은 대북심리전도 재개했다. 군은 최근 경기 연천, 김포와 강원도 철원 대마리 등에서 대북전단지 40여만장을 기구에 달아 북한지역으로 날려보냈다.

북한도 자국 영토 턱밑에 있는 서해 5도로 인해 긴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서해 5도 인근의 북측 섬들과 황해도 일대에 군사와 무기를 집중배치하고 있다. 사곶과 해주, 옹진반도, 개머리, 무도 등 서해 주변에 주요기지가 있다. 이들 기지는 해안포(사거리 12~27㎞)와 방사포(사거리 27㎞), 곡사포(사거리 54㎞)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들은 북한의 서해함대 사령부와 예하부대 소속이다.

참여정부 5년 서해상 군사충돌 없어
서해 북방한계선(NLL) 지역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군사력을 집중배치함에 따라 서해5도는 일촉즉발의 화약고가 됐다. 특히 양측이 불과 10여㎞를 사이에 두고 전력을 집중배치하고 있어, 자칫 사소한 군사적 충돌이 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이미 서해에 남북한의 군사력이 밀집되어 있는 상황에서 이 같은 남측 무기의 대대적인 전력증강은 북한의 반작용을 야기해 군사적 긴장을 더욱 고조시킬 우려가 있다”며 “또한 면적이 좁은 연평도에 전력을 집중시킬 경우 유사시 북한의 핵심적인 공격 대상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참여정부 때는 양측이 서해상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통신채널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 이 지역에서 양측의 소통채널이 막혀 이 같은 우려는 더욱 커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5년 동안에 서해에서 양측의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

서해 5도와 NLL지역은 남북간에 분쟁이 발발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곳이다. 1953년 한국전쟁 정전협정 때 북한, 미국, 중국 등 관련국들은 육상의 군사분계선(휴전선)만 확정하고 해상경계선은 합의하지 못했다. 현재의 NLL은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8월 30일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임의로 설정했다. 당시 유엔군이 점령한 서해의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서해 5도의 북단과 북측에서 관할하는 옹진반도 사이에 중간선을 그은 것.

북측은 20여년 동안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다가 “국제법적 근거가 없다”며 1973년부터 서해 5도 주변수역을 자신의 영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 북한 해군은 NLL을 수없이 넘나들었으며, 우리 군도 예의주시하며 때로는 물리적 방법으로 대응했다. 이 같은 양측의 물리적 충돌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햇볕정책을 만든 김대중 정부 때도 NLL지역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다. 1차 연평해전(1999년 6월)에서 양측은 서로 경비정을 충돌시키는 방법으로 밀어내기를 하던 중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경비정이 침몰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북한의 보복공격 성격이 짙은 2차 연평해전의 무대 역시 NLL이었다.

이번 연평도 포격에 대한 북한의 구실도 NLL문제였다. 북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는 연평도 포격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거듭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남조선 괴뢰들이 연평도 일대의 우리측 영해에 수십발의 포격을 가하는 군사도발을 감행했다”며 “앞으로 조선 서해에는 오직 우리가 설정한 해상군사분계선만 존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서해협력지대’합의
햇볕정책을 대북정책의 기조로 삼았던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서해지역에서 분쟁을 막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연구했다. 2000년 12월에 개최된 제4차 남북장관급 회담을 통해 남북어업협력문제가 공식적으로 제기된 이후 남북수산협력실무협의회(2005년 7월) 등 다양한 협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이 지역이 북한 최고의 군사요충지라는 점 때문에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안보외교전략비서관은 “북한이 NLL 때문에 자유롭게 서해를 드나들 수 없어 숨이 막힌다고 했다”며 “참여정부 때도 북한이 NLL을 무력화하기 위해 온갖 이상한 행동을 다했다”고 회고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11월 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참여정부가 고민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 발상의 전환이다. 서해 5도를 포함한 NLL지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선(NLL) 개념을 벗어나 면(지역)개념으로 접근하자는 것이다. 이 같은 접근이 열매를 맺은 것이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에 합의한 10·4 공동선언이다. 남북은 10·4 공동선언 3항에서 NLL지역에서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서해협력지대) 설치에 합의했다. 참여정부 마지막 통일부 장관을 지낸 이재정 국민참여당 대표는 “군사적으로 완충지대가 없었기 때문에 서해에서 우발적 충돌이 항상 염려됐다”며 “이 지역을 양측의 충돌을 막는 완충지역으로 만드는 것이 당시 남북정상회담의 핵심의제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북측은 해상경계선이라는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경제협력을 통해 서해에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남측의 구상을 마침내 수용했다. 서해협력지대에는 ▲해주경제특구 개발 ▲인천~해주 간 직항로 활성화 ▲공동어로수역 설치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더불어 노무현 정부는 서해협력지대를 인천~개성공단~해주를 잇는 서해권 삼각 경제벨트로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의 미래 경제발전의 핵심축으로 상정했다. 해주는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20㎞에 있어 인천과 분업체계를 형성할 수 있으며, 개성공단의 수출항구로서도 적임지였다.

특히 해주경제특구와 관련, 이 특구가 설치됐다면 이번 연평도 포격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있다. 해주경제특구는 해주 외곽과 인근의 황해도 강령군 일대에 설치될 예정이었다. 당시 남북정상회담 실무 총책임을 맡았던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남북한이 해주 외곽과 강령군 일대에 경제특구를 설치하기로 의견접근을 이룬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해주경제특구가 황해도 강령반도 일대에 들어서고, 물류 이동통로로 해주항을 활용하는 계획이었다”고 설명했다.

해주항은 북한 서해에서 남포 다음으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이번 연평도에 포탄을 쏜 개머리진지가 강령군에 있다. 강령군은 북한 서해함대 사령부 예하 8전대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는 사곶과 인접해 있다. 이에 따라 북한도 남측의 해주경제특구 제안에 상당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해주특구를 제안하자 김정일 위원장은 국방위원회 관계자를 불러 해주를 열어도 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동안 해주는 북한의 입장에서 무역항보다는 군항으로밖에 사용할 수 없었다. 중국 또는 남한에서 해주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백령도를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남북은 해주경제특구 합의로 경제적 실리와 군사적 긴장 완화를 얻어냈다.

공동어로구역 설치도 남북 어민 모두에게 윈·윈할 수 있는 구상이었다. 주지하다시피 NLL지역은 한반도 최대의 꽃게어장이다. 이 지역에서 양측의 크고 작은 충돌도 꽃게 때문이었다. 남북의 어부들이 더 많은 꽃게를 찾아 NLL을 넘다보니 군함이 뒤따라가고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뿐만 아니라 중국 어선들도 이 지역을 호시탐탐 노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공동어로구역 설치는 남북 어부들에게 꽃게를 마음놓고 잡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셈이다. 이와 관련, 남측은 공동어로 수역을 NLL 기준으로 각각 남과 북의 동일수역을 제시했다. 우리 정부가 북측에 제시한 공동어로구역은 ▲백령도 북쪽 ▲대청도 동쪽 ▲소청도와 기린도 사이 ▲기린도와 등산곶 사이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서해 5도 어민들은 공동어로구역을 어디에다 설치하더라도 무조건 찬성했다”며 “이는 공동어로구역이 기존의 NLL 아래 지역에 있는 어로한계선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꽃게를 잡을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해협력지대에서 중요한 지역은 또 있다. 개성에 인접해 있는 예성강과 서울을 바다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한강하구다. 남측은 우선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 지역을 친환경적으로 개발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워두고 있었다. 특히 토사가 퇴적된 한강 하구는 모래 채취를 위해 남측 기업들이 탐을 냈던 곳이다. 이밖에 남북은 서해협력지대에 해양평화공원을 만드는 안에도 합의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백령도 일대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서식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물곰이 있는 등 희귀 해양생물이 많다”며 “당시 남북이 해양환경적 측면에서 생태평화수역으로 만드는 데 의견의 일치를 봤다”고 말했다.

어민 위한 공동어로구역 설치도 구상
10·4선언 이후 남북 당국은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이행하기 위해 2개월여 동안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접촉했다. 남북 총리회담이 11월 27~29일 개최됐으며, 이어 국방장관 회담(11월 27~29일)과 남북 부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12월 4~6일)’가 개최됐다. 특히 남측에서는 통일부 장관을 단장으로 하는 ‘2007년 남북정상선언 이행종합기획단’을 구성해 구체적 추진방안 강구와 이행상황을 점검했다. 그 결과 문산~봉동 간 남북 화물열차의 정례운행이 시작됐으며, 12월 12~14일 개최된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는 개성공단의 통행·통신·통관 등 3통 문제에 관한 군사적 보장 장치가 마련되기도 했다.


특히 총리회담에서 NLL지역과 관련, 남북은 서해협력지대추진위원회를 둔다는 데 합의했다. 서해협력지대위 산하에는 ▲해주경제특구 협력분과위 ▲해주항개발협력분과위 ▲공동어로협력분과위 ▲한강하구협력분과위 등 4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서해협력지대 논의는 이것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를 불과 3개월여 앞둔 시점에서 남북이 정상회담 합의사안을 추동력 있게 밀고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구상은 이명박 정부 들어 10·4선언 자체가 흐지부지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서해협력지대 구상은 민감한 NLL 문제를 넘어 평화수역을 새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보수층의 지지가 필요했던 이명박 대통령은 NLL 문제와 관련해서는 사수에만 집중했다. 한나라당 등 보수진영은 NLL을 영토주권 문제로 접근했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NLL 문제를 후속 실무협상 테이블에 올려놓는 것 자체를 거세게 반대했다.

만약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2006년에만 성사됐더라도 서해협력지대 구상안은 실행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연평도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손자병법을 보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싸움의 기본이다. 군사력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군사력만 갖고 서해를 긴장의 바다에서 평화의 바다로 만들 수는 없다.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은 “단기적으로 군사적인 긴장으로 평화를 얻을 수 있지만 이 같은 군사적 대치상태가 장기적으로 계속된다면 남북관계에서 또 다른 불상사가 나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