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2007년11월22일 제6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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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하] 교회여, 내 노래를 받아랏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서른 무렵 노래뿐 아니라 삶에 대한 전반적인 회의감이 깊게 밀려들었다. 스스로를 ‘사회 부적격자’로 치부하고 술에 깊이 빠져 늘 세상을 떠날 궁리만 했다.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갈 결심 아래 해인사 원당암으로 찾아간 그는 나중에 조계종 종정을 지내게 되는 ‘혜암’ 스님의 제자가 되기로 약속하기에 이른다. 1987년이었다.
그해 7월 친구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이무하(51)씨는 뜻밖의 일을 겪게 된다. “마지막 밤을 (알고 지내던) 가수 정태춘씨 집에서 묵었는데, 이상하게 그리 친하지 않았던 친구 얼굴이 자꾸 떠오르는 겁니다. 낮에 몇 번 통화를 시도해도 안 됐고, 밤 10시라고 생각한 때(나중에 알고 보니 새벽 1시)에 전화를 걸어 겨우 연결이 됐어요.” 그 친구는 ‘크리스천’이었다. 다음날 친구를 만난 이씨는 ‘기적 같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겪으며 신앙을 갖게 됐다.
‘불자’가 될 뻔했다가 기독교인이 된 그는 새로 가진 신앙에 한동안 푹 빠져 지냈다. 그런 그를 새롭게 일깨운 이는 강원도 태백에 신앙 공동체 ‘예수원’을 설립한 대천덕(아처 토리) 성공회 신부였다. “교회 이데올로기라는 게 돈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본주의와 정반대여야 하는데,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국가 체제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예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린 친구 부부에게 축가를 불러주기 위해 태백에 간 인연으로 교회의 역할에 대한 대천덕 신부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2년 전부터 다니던 교회당을 나와 별도의 건물이 없는 ‘가정교회’에서 신앙을 이어가는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여기에 영합하는 한국 기독교를 비판하고 나름의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려는 그에게 무기는 ‘노래’다. 음악을 전공했고(경북대 작곡과), 대학 졸업 뒤에도 직장 근방엔 기웃거리지도 않고 꾸준히 노래판을 지켜오며 쌓아온 내공 덕이다. 지금까지 그가 작곡한 곡은 70~80곡에 이른다. 토지 문제를 비롯해 사회적 이슈를 담은 노래가 많으며, 그가 직접 부른다. 지난 11월5일 토지정의시민연대 주도의 ‘토지+자유 연구소’ 창립식 때 축가를 부른 이가 그였던 데서 노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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