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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이야기/아나키즘

오스기 사카에 - “나는 자유를 원하기 시작했다.” /아나클랜

by 마리산인1324 2011. 3. 22.

<아나클랜> 2008-03-25 17: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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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헤드

 

오스기 사카에 - “나는 자유를 원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유를 원하기 시작했다.”

오스기 사카에 (大杉榮, 1885-1923)는 대표적인 일본인 아나키스트이다. 그는 아나키스트 운동가였으며, 일본 당국의 끊임 없는 탄압과 폐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정기간행물을 발행하던 언론인이었다. 그는 또한 번역가로서 파브르의 ‘곤충기’, 다윈의 ‘종의 기원’ 그리고 크로포트킨의 주요 저작인 ‘상호부조론’도 일본에 처음으로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1910년 대역사건이 일어나 일본 사회주의/아나키즘의 선구자인 고토쿠 슈스이가 처형당하자 이후 일본 아나키 운동을 이끌었다. 자신이 발행하던 <근대사상> <평민신문> <노동운동> 같은 잡지에 문예평론과 수필, 시 등을 창작해 발표하기도 했으며, 외국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동아시아의 여러 아나키스트들에게 에스페란토 어를 소개하며 동아시아 에스페란토의 선구자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엠마 골드만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킨 자유연애론은 당시 일본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를 항상 논쟁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다. ‘자유연애론’은 그가 주장한 아나키즘적 인간관계론이었다.

오스기 사카에는 1885년에 군인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 육군 유년학교에서 철저한 군인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반항심이 컸던 그가 학교를 제대로 다녔을 리 없다. 체벌을 받기도 하고, 동성애가 발각되어 정학에 처해지기도 한다. 동료 학생과 칼을 들고 싸움을 벌이다 결국 퇴학을 당하고 만 오스기는 학교의 집단적 광기와 폭력 속에서 자유로운 하늘을 떠올렸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1902년 그는 도쿄에서 대학과정을 공부한다. 문학을 전공하며 주로 러시아 작가들, 즉 고리키,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빠져든다. 오스기가 사랑하던 어머니가 죽자 그는 심한 우울증을 겪으며 더욱 독서에 매진하게 되고, 특히 영적인 필요에서 기독교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는 자연과학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는데, 특히 진화론에 관심을 갖고 폭넓은 독서를 하게 된다. 자연과학에 바탕을 둔 크로포트킨에 빠져들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지적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편 도쿄에서 독립적 생활을 하던 오스기 사카에는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토시히코가 중심이 된 <평민신문>을 읽으며 사회주의(당시 아나키즘은 사회주의와 큰 차이가 없었다)를 접하게 되고, 일본의 침략적 군국주의와 배타적 애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갖게 된다.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그는 동료 사회주의자들이 종교에 대한 비판하는 견해들을 듣게 되는데,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전 일본 열도에 불기 시작한 애국주의 열풍에 그가 다니던 교회도 빨려들게 되자 기독교를 버리고 아나키즘에 투신하게 된다.

1906년 전차요금 인상반대 운동에 참여한 그는 이 집회가 폭력사태로 번지자 체포되어 수감된다. 감옥에서 그는 사회주의 관련 책들을 독파하며 사상적으로 완전히 급진적인 사회주의 즉 아나키즘으로 돌아서게 된다. 그 이후로도 수 차례 투옥이 되었던 오스기는 一犯一語의 원칙을 세우고 에스페란토, 독일어, 스페인어 등을 습득하게 된다. 출판법 위반, 경찰폭행죄 등에 연루되어 1907년, 1908년 계속 감옥을 들락거리게 되고, 적기사건으로 1908년 말부터 1910년까지 수감되기도 한다. 이 기간에 천황을 암살하려 했다는 대역사건이 터지고 당시 이름을 날리던 사회주의자/아나키스트는 거의 모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조선을 병합하고 바야흐로 동아시아 전역을 침략해 복속시키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파시즘적 열망이 분출하던 시기였던 것이다.

그는 암살이나 테러 등의 방법보다는 노동자들의 총파업 같은 직접행동을 통해 사회를 바꾸려는 아나키적 생디칼리즘에 보다 가까웠다. 그러나 그가 어떤 하나의 사상을 신봉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개인의 철저한 자유에 기반을 두고, 어떤 외부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은 오스기 사카에는 노조지도자의 노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노동운동을 지지했으며, 창의성 주체성 자발성 등을 강조했다.

그는 성의 해방을 주장했으며 여성을 노예로 보게 만드는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했다. 그가 주장한 자유연애론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가운데 동등한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삼각관계를 합리화시키기 위함이었는지 또는 말그대로 아나키즘을 일관되게 추구하기 위함이었는지는 평가가 엇갈리기도 한다. 성적으로 조숙했으며, 금기가 없었던 오스기 사카에를 당시 많은 언론은 ‘부도덕한 사회주의자’로 매도하면서 그에게 낙인을 찍으려 했는데, 이에 대한 반응이 자유연애론으로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일본 사회주의 운동을 활발하게 이끌며 동아시아의 혁명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던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동아시아에 볼세비키들이 등장하자 이들과 연대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혁명 이후 러시아 사회를 이끌던 볼세비즘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자유가 희생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본을 탈출해 프랑스로 밀입국을 한 뒤 메이데이 행사에 참여했다가 프랑스 경찰에 잡혀 일본으로 추방된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간토 대진재 이후 혼란스런 상황에서 급진파 운동을 제거하려는 일본 정부의 계획에 따라 그는 헌병에 끌려간 뒤 잔혹하게 살해되어 우물에 던져진다. 그와 동거하던 이토 노에 및 어린 조카 역시 같이 끌려가 살해된다. 국가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아나키즘을 추구했던 개인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스기 사카에 역시 예외는 아니었던 셈이다.

오스기 사카에를 다룬 영화가 일본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요시다 요시시게 감독이 1970년에 만든 흑백영화 <에로스+학살>이 그 작품이다. 영화는 그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로서의 그의 활동보다는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던 그의 풍운아적인 모습에 보다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즉 오스기 사카에의 ‘자유사랑’ 관계들을 주로 다루고 있지 않을까? 그는 세 명의 여성과 연인관계를 유지했는데, 22살 때인 1906년 결혼한 부인 호리 야스코, 헌병에 끌려가 같이 살해당하는 이토 노에, 그리고 급진적 여성주의자로서 질투심에 불타올라 오스기 사카에를 칼로 찔러 죽이려고 한 가미치카 이치코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