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리선녀 이야기/마리선녀 철학

지젝을 만나다 /김민웅(프레시안20120629)

by 마리산인1324 2012. 6. 30.

<프레시안> 2012-06-29 오후 6:25:54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629170347§ion=05

 

 

지젝 "히틀러보다 간디가 더 폭력적!", 왜?

[지젝을 만나다] 그가 남긴 유쾌한 인사, 통렬한 고언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거침없는 농담

슬라보예 지젝은 첫 만남에서도 거침없이 농담을 즐겼다.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안내로 조인원 총장실에서 대면한 지젝에게는 유쾌한 기운이 넘쳤다. 이야기를 나눈 후 둘이 함께 사진을 찍자, "아, 당신 영화 좋아하지? 이거 둘이 찍으니까 <덤 앤 더머> 같잖아?" <덤 앤 더머>는 짐 캐리와 제프 다니엘즈가 함께 출연한 1994년 작 코미디 영화로, 사람은 참 좋지만 돈 없고 엉뚱하고 바보 같은 인물을 그린 작품이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조차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열패자로 살아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꺼낸 건, 물론 농담이면서도 지젝의 삶의 궤적과 지향점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화다. 나는 인디고 연구소의 청소년들이 직접 지젝을 인터뷰한 내용을 엮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인디고 연구소 기획, 궁리 펴냄)의 서평(☞바로 가기 : 지배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을 쓴 적이 있다. 그 인연으로 이번에 만나게 된 지젝은, 글은 어렵게 쓰지만 말은 아주 쉽게 일상의 방식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펼쳐낸다. 아마 그가 헤겔, 마르크스, 기독교 신학과 라캉으로 무장했지만, 역시 언어에 대한 분석을 중심 과제로 삼아 대중과 소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슬라보예, 당신이 왜 이리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줄 아는가?" 지젝은 역시 또 서슴지 않고 답을 내놓는다. "음, 이거 한국 정말 문제 있어. 국제적으로 좀 뜬다하면 열광하는 거잖아? 문화 제국주의에 지배받고 있어서 그래. 으하하하하." 그렇다고 지젝이 젠체하면서 이 말을 한 것은 아니다. 동유럽 변방 출신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며 살아온 그가 유럽 철학 전반에 대한 반격을 취하면서 유명해진 건, 서구 제국주의의 정신적 근간을 타파하는 역할을 감당해온 결과다.

공산주의 억압의 체험

▲ 슬라보예 지젝. ⓒ마인드브릿지
지젝은 한국이건 어디건 이 문화 제국주의의 지배질서를 바로 그 문화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언어와 사고로 되받아치는 일종의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것 같다. 그의 철학은 저항과 반역, 해체가 중심이 된다. 이는 이미 관성이 된 구시대의 혁명철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연하다. 지젝은 "나라는 사람에게 공산주의의 억압이라는 체험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라고 토로한다. 기껏해야 어디 시골 구석 대학에서 별 볼일 없는 교수 자리 하나 꿰차고 앉아 자기처럼 바보같은 학생들을 상대하며 세월을 죽였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 그는 대학에서 일자리를 제대로 얻지 못하고 백수가 됐다. 연구교수인 그는 학교에서 강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젝은 바로 그런 처지에서 "빈둥거리며 종일 읽고 쓰고 말하고 산다"고 한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유배자 철학의 생산자"가 된 셈이다. 그런데 이 유배자의 철학은 기이하게도 이미 실패가 입증된 공산주의에 대해, 그 복권을 주장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다. 물론 인간을 유린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한 사회를 질식시킨 공산주의를 재구축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공산주의는 패배했다. 그러나 그 패배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공산주의의 실패, 전체주의의 패배를 앞세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우리에게 선을 가져다 줄 것처럼 여기도록 조장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사유 방식에 혼란을 조성한다. 공동선, 평등, 공공성을 가진 재화와 제도의 사회적 소유 같은 개념들을 혐오하게 만든다. 그 혐오의 심리적 작동 속에 자본주의의 지배전략이 숨어 있다. 나는 이 기만을 해체하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진보 진영과 지젝

이 말에서 오늘날 한국 진보 진영이 처해 있는 현실을 읽게 된다. 통합진보당 사태로 인해, 진보 정치의 '진'자만 나와도 '진저리'치는 상태가 되고 있다. 진보 세력이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진보가 정말 혐오의 대상이 되는 상황이 그 혐오를 느끼고 있는 주체들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작업은 시급하다. 그 대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보라. 자본주의가 얼마나 많은 재앙을 가져오는지 그 증거는 압도적으로 도처에 존재한다. 오늘날 유럽의 현실이 바로 그 생생한 예 아닌가? 이러고도 여전히 자본주의를 대충 개보수해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진짜 미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마르크스나 헤겔 철학의 역사관이 주장하듯 '역사의 열차를 타고 가자'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지금은 일단 급제동 고리를 잡아 다녀야 할 판이다." 지젝은 모두의 생명을 안전하게 하는 작업 자체를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 다음을 도모할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여기서 '폭력의 문제'가 제기된다. 경희대학교 강연에서 이미 그에 관한 열정을 쏟아내 청중석에서 다양한 질문을 받았던 지젝은, 건국대학교 강연에선 아프리카 출신 젊은이의 도전적인 질문을 마주했다. "지젝, 당신은 폭력을 옹호한다고 말한다. 그게 어찌 대안을 위한 수단이 되는가?"

지젝이 말하는 폭력

모두의 관심이 지젝의 입에 쏠렸다. "내가 폭력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오늘날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을 고문하고 짓밟는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구조와 심리, 언론과 철학,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의식에 폭력적 훼손을 가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가만히 있는 건 우선 말이 되지 않는다. 반격해야 한다. 나는 이 반격의 폭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격의 폭력"이라. 프란츠 파농이 생각나게 하는 발언이다. 제국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반격의 폭력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파농 말이다. 지젝의 말이 이어졌다. "히틀러보다 간디가 더 폭력적이었지 않았는가?" 아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

"히틀러는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무수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우리가 타파해야 할 폭력이다. 이건 기존의 제도, 체제를 작동시키는 폭력이다. 그런데 더 거대한 폭력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건 기존의 제도, 체제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아하, 이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간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니 간디야말로 비폭력을 앞세웠지만 폭력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수준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는가?" 어떻게 보면 억지로 들릴 수 있지만, 그가 말하는 반격의 강도와 수준을 이해하게 된다.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문제가 되고 있는 요소들을 그대로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며 뭔가 고쳐보려는 것이 우리의 선택이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그가 앞서 말했던 "급제동의 폭력"이 되는 셈이다. 이건 히틀러의 폭력과 달리 누구도 물리적으로 다치게 하지 않으며, 도리어 해방의 감격을 선사한다.

총파업, 대중교통의 전국적 마비, 수백만 시민들이 도시를 점령하고 연좌시위를 하는 일 등은 바로 이 반격의 폭력인 셈이다. 그것은 기존의 통념이 포착할 수 없는 폭력이다. 왜? 기존 제도의 작동을 멈추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걸 폭력이라는 개념으로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지만, 기존의 불합리, 모순, 억압을 중단시킬 방법에 대해 우리가 너무 과도하게 구체적이고 준비하려 드는 경향이 있지는 않는가 하는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숙고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기껏 하는 일이라고는 "유기농 식품을 사고 공정무역의 뜻에 동참"하는 정도 아닌가 하고 지젝은 힐난한다. "그것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저 지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정도의 만족감만 주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그런 정도에 머물러서 과연 우리의 위기를 넘겨나갈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 지젝의 "저항과 해체철학의 근본에 깔린 문제의식"이다.

대안적 삶의 모습

이후의 대안에 대해서도 그는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인류는 보다 유연하고 유목적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국가의 주권이라는 개념도 철저하게 재정립되어 인류의 미래에 대한 "세계적 협력"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이건 사실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불가능의 가능성의 탐색이 철학의 임무일 것이다. 과학도 끊임없이 불가능의 영역에 도전해왔다.

전 시대에는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이 지속적으로 무너져왔다. 그렇다면 철학이라고 그런 시도를 하지 못할 까닭이 있겠는가? 공산주의의 실패는 인류에게 "유토피아의 꿈을 버리고 현실의 속박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했다"고 지젝은 슬퍼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 정당하고 선하다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분명 아니다. 불가능한 꿈인 유토피아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 철학의 사명이라고 지젝은 온몸에 땀을 흘려가며 열변을 토했다.

불가능의 가능성 그리고 자기애

지젝의 결론은 루소로 이어졌다. 루소의 저 유명한 "자기애(amour de soi)"의 개념에 대한 재조명이다. 진실로 인류 문명의 발전에 필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관해 성찰하고 그걸 어떻게든지 확보하며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도에 대한 고민이라고 길게 설명할 수 있는 루소의 자기애는,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와는 다르다. 그런 자기애의 철학은 이웃의 인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딀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철학이 바로 공공의 선을 도모할 수 있는 기본 자세를 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예수의 말이 들린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자기애는 이웃 사랑, 공공선의 출발점이다.

지젝의 철학은 우리를 유쾌하게 만든다. 자기를 출발점으로 삼는 철학이 고뇌를 넘어서는 흥겨움을 구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니체는 기존의 학문과 종교가 인간을 암울하게 만든다면서 "유쾌한 학문"을 강조했다. 지젝이 니체를 언급한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지젝 역시 바로 그 유쾌한 학문의 대중적 힘을 과시하는 인물이다.

지젝의 그 호쾌한 발언과 통렬한 성찰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떤 파장을 계속 일으켜나갈지 흥미롭다. 여기에 세계적 변화의 흐름까지 총괄적으로 짚어내는 능력이 결합된다면, 동아시아의 사회철학은 새로운 방향 전환의 기운을 얻게 될 것이다.

지젝, 그와의 만남은 속을 후련하게 하는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