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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2.03.20 20:17:18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culture/201203/h2012032020171886330.htm&ver=v002

 

 

"자본주의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철학자들의 지적 정치인들은 새겨들어야"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7>그렉 램버트Gregg Lambert 뉴욕 시러큐스대 인문학장 

 

공동기획= 이택광 경희대 교수
정리=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유엔 영구평화 프로젝트 일환 방한
칸트의 영구평화론 주제로 토론… 철학자와 정치가의 관점에서 평화를 공평하게 고찰해볼 것


철원 조선노동당사 유적 방문
영구평화 부재 증명하는 폐허 뒤… '영원' 의미 담은 무궁화 심어… 전쟁·평화염원의 결합 아이러니

위기와 혁명의 시대
관념과 현실 사이엔 괴리 커… 월가점령시위 사건은 美서 급진운동 복권시킨 전기

 

그렉 램버트(51) 미국 시러큐스대 인문학장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문학평론가 가브리엘 슈왑을 사사한 후 들뢰즈 이론을 연구하는 독특한 지형의 철학자다. 문학비평과 이론의 역사, 동세대 대륙철학, 종교철학 등 다양한 이슈에 관한 글을 발표했는데, 국내에서 영문학과 영화비평계에서 들뢰즈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램버트의 대표저서 <누가 들뢰즈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Who's afraid Deleuze and Guattari?)>를 번역 중인 인문학자 최진석씨는 "램버트는 동세대이지만 이질적인 데리다와 들뢰즈에게서 모두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철학자의 교차점을 찾고, 이것을 자기 사유의 바탕으로 삼는다"고 소개했다. 램버트는 이 책에서 1980년대 초반 미국 학계에서 회자된 들뢰즈/가타리의 철학, 문학 비평 문화연구들을 재평가한다. 그는 들뢰즈 이론이 프레드릭 제임슨,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 안토니오 네그리, 조르조 아감벤 등 현대 인문학자들에게 사유의 원천이 됐지만, 미국학계에 이 이론이 수용되면서 한편에서는 과소평가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문화주의 미국의 정체성 정치학에 너무 빨리 동화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학계에서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정신분석학자 라캉을 비판한 것으로 풀이하지만, 실제로 들뢰즈/가타리는 라캉 이론이 문학, 영화 비평에서 도구로 쓰이는 것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시도로 이 책을 썼다고 주장한다.

2010년 성균관대 BK21 석학 강연프로그램에 초청돼 강연했던 그는 지난달 28일부터 일주일 간 유엔 영구평화 프로젝트로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인터뷰는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과 교수가 지난 7일 인사동 서머셋호텔에서 진행했다.

-당신은 영구평화 프로젝트(Perpetual Peace Project)의 창립자 중 한 명인데, 이 프로젝트의 취지는 무엇인가?

"2010년부터 시라큐스대와 유엔이 공동 주관해 온 영구평화 프로젝트는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주제로 평화에 대한 생각들을 나누는 행사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사상가 엘렌 식수(Helen Cixous)를 비롯한 다양한 인문학자들이 이 행사에 참여했다. 이 행사의 의미는 학계를 구성하는 철학자와 유엔이라는 현실적인 정치제도가 만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적시하고 있는 것처럼, 철학자의 평화와 정치가의 평화는 일정한 차이를 가지면서 역사적으로 고착되었다. 오늘날 운위되고 있는 평화의 문제도 이런 차이 위에서 전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화에 대한 철학자의 논의는 경험적 원리에 충실해야 하는 현실 정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허용될 수 있다는 칸트의 견해는 철학자와 정치가의 관점에서 평화를 공평하게 고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홈페이지에서 참가한 학자들과 정치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참으로 다양했다. 한국에서 특별하게 준비한 행사는 무엇인가?

"철원에 있는 조선노동당사 유적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폐허로 남은 그곳이 '전쟁의 정지'(the suspension of war)라는 것이 결코 영구평화일 수 없다는 칸트의 명제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 이런 계획을 세웠다. 칸트의 주제를 그곳만큼 명확하게 드러내는 곳도 없을 것 같았다. 아주 흥미로운 여행이었다."

-지젝도 방한 당시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한 체험기를 그의 책에서 밝히고 있다. 북한을 남쪽에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극장'으로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는데, 이런 분석은 남과 북이 적대적이라기보다 공생적 관계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백낙청 교수 같은 분이 분단체제론을 제기하면서 남북문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 적이 있었다.

"철원 조선노동당사 건물을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은 기이했다. 한국은 극단적 반공주의를 거쳐온 나라인데, 왜 이런 기념물을 남겨두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특히 폐허 뒤쪽에 심어놓은 무궁화가 인상적이었다. 무궁화라는 말에 영원(eternity)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이 폐허를 남겨둠으로써 의도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원한 평화에 대한 갈구와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폐허의 대립은 아이러니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평화가 처해 있는 현실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가 본 그 건물은 한반도에서 고착되어 있는 평화의 현재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물이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

"영원을 상징하는 무궁화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뜻한다는 안내문의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 장소는 한국인에게 어떤 영원성에 대한 갈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영원성이 국가의 통일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통일이 곧 평화라고 한다면, 이런 염원은 영구평화에 대한 소망과 무관하지 않다. 전쟁이 멈춘 자리에 영구평화에 대한 염원을 상징하는 꽃을 심어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 건물을 전시해놓은 까닭은 북한공산집단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북한에 대한 극단적 공포를 이끌어내려는 의도와 무궁화로 표상되는 영구평화에 대한 갈망은 모순적인 것처럼 보인다. 냉전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그 폐허에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러니하다는 것이다. 전쟁과 폭력에 대한 환기가 영구평화에 대한 염원과 결합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상황은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제시한 첫 번째 조항과 맞아떨어진다. 칸트는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유보한 채 맺는 어떤 평화조약도 결코 평화조약일 수 없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지금 전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건물이 남아 있는 것은 영구평화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부재는 또한 영구평화에 대한 염원과 관계가 있다. '적을 배제한 평화'라는 전제가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형이상학적인 차원과 물질적 차원이 서로 결합해 있는 것이다. 이 상황 자체가 두 차원의 관계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 폐허의 건물은 마치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보였다. 과거의 것은 사라졌지만, 거기에 부여한 의미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이런 의미에서 그 폐허는 특정한 지리학적 장소에 속한 것이라기보다 '개념의 영토'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말했듯이, 어떤 개념이 사람들 사이에서 작동할 수 있는 것은 특정한 범위, 영토(territory)에서다. 이 영토는 현실적인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조선노동당사라는 역사적인 건물은 거기에 없다. 오직 폭력의 기억으로서, 부재한 영구평화를 증명하는 기념물로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냉전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민족주의적 기획은 이 지점에서 붕괴한다. 언제나 국가의 안보 목적을 빠져나가는 영구평화에 대한 염원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통일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그것은 평화에 대한 갈구라는 점에서 이미 민족주의적이지 않다. 국가의 안전은 영구평화와 다르다. 생명정치든, 민족주의든, 국가는 물리적 안전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이런 안전은 정치적 자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전쟁의 폭력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건물을 보전하는 행위는 국가의 안전을 환기시키려고 하는 것이지만, 이 안전을 통해 정치적 자유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 괴리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철원에서 본 폐허의 실체일 것이다."

-이야기를 돌려보자. 당신은 해체주의로 유명한 데리다의 지도를 받아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들뢰즈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 곧 국내에 번역될 <누가 들뢰즈와 가타리를 두려워하는가?>를 보면, 당신이 들뢰즈를 중요한 이론적 준거로 삼는 이유가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미국 학계의 상식적인 인식에 도전하면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쓴 들뢰즈와 가타리의 의도가 라캉에 비판적이지 않다고 말한 점이다.

"내가 그 책에서 비판하고자 한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를 해석하는 작업에 치중하고 있는 미국 학계의 풍토였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것이 한계가 있는 이론이고, 정신분석학을 중요한 사상이라고 보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철학자들의 해석이론(해석을 위해 도식적으로 이용되는 이론)으로 쓰이는데 반대의견을 제시한다. 들뢰즈는 철학을 해석이 아니라 삶의 문제로 접근한다. 나도 이런 태도에 동의한다. 지젝처럼 라캉을 이용해서 다양한 문화현상들을 징후적으로 읽어내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라캉의 무의식을 해석해서 철학이론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의 정신분석 방법들을 찾고 삶의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한 작업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들은 라캉을 신학적 주석학에서 해방시켜서 구체적인 실천지침으로 만들고자 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국한해서만이 아니라, 이론 전반에 걸쳐서 새겨들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많은 이들이 위기와 혁명을 이야기하는 시대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월가 점령시위가 일어나기 전에 영구평화 프로젝트를 뉴욕에서 진행한 적이 있다. 2010년 4월이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나는 화폐를 전쟁의 수단으로 묘파했던 칸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뒤에 월가 점령시위가 일어났다. 월가 점령시위는 미국 사회에서 종적을 감췄던 급진운동을 다시 복권시킨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영구평화에 대한 이론적 관념과 실천적 지식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런 지적에서 유추해볼 수 있듯이, 18세기 정치 환경은 철학자의 평화관과 정치인의 평화관이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평화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분열증적인 결합이 형성된 것이다. 칸트는 이를 지적하면서 둘의 공존을 주장했지만, 사실은 영구평화에 대한 철학자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칸트의 평화론은 실질적인 평화협정에 대한 패러디이자 비판이었다. 자본주의가 전쟁의 원인이라는 지적은 철학자의 논의일 수 있지만, 현실 정치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내용이다. 이 괴리를 좁히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일 것이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마르크스의 저작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비판적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인 사건을 만들어내는 인간 욕망을 특정한 규범에 구겨 넣는다. 정치 영역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특이성'이다. 인간이 곧장 정치적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정세(conjuncture)의 구조적 효과로서 사건이 생긴다. 마르크스주의의 문제는 혁명과 사건을 인간을 통해 설명한다는 것이다. 사회 변화는 이미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고정관념이나 기성체계를 파괴하고 해체할 때 이뤄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수적인 질서를 허무는 해체의 운동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에 대한 뚜렷한 전망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재고해야 한다."

-당신은 다른 미국 학자들에 비해 한국에 자주 오는 편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가 세계사상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미국 대학에서 지켜보면, 유학생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집단이 아시아 학생들이다. 이런 진단이 경제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급성장한 아시아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이런 아시아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한국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다른 근대성의 차원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가 서구에 말해줄 수 있는 것이 많다. 한국 방문을 통해 찾아낸 여러 문제들, 그 중에서도 남북관계와 관련한 상징성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암시해줬다. 앞으로 여기에 대한 고민들을 발전시켜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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