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12.02.14 21:39:36
"점령·분노 시위, 민주주의의 새로운 미래 보여줘"
정리=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자크 랑시에르가 2008년 심포지엄 참석차 방한했을 때 서울 강남의 조계종 사찰 봉은사를 찾아 둘러보고 있다.
방한 이후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설명할 때면 한국의 촛불집회를 민주주의 대표 사례로 꼽는다. 도서출판b 제공
강대국의 금융자본은 모든 존재를 시장논리에 종속
이를 거부하자는 대중적 시위 매우 중요
월가 점령하라 시위 등서 기성 정치에 대한
체념이나 테러서 벗어난 평화적 운동 가능성 확인
인터넷과 SNS의 힘은 정보와 소통을 재분배…
전통 민주주의 퇴조 시기에 새 민주주의 도구 역할
극소수의 손에 富와 권력 편중 현상은
프랑스나 한국이나 모두 다 똑같은 현실
자크 랑시에르(72) 파리8대학 명예교수는 알랭 바디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에티엔 발리바르와 함께 프랑스 비판철학계의 4대 대가로 꼽힌다. 국내에서는 2007년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처음 번역된 뒤 잇따라 7,8권의 저서가 번역 출간되며 지성계의 '핫 피플'이 됐다.
랑시에르는 정치, 민주주의, 미학에 관한 독창적인 사유로 주목 받았다. 동세대 철학자들과의 가장 큰 변별점은 대중이 흔히 '정치'라고 말하는, 국가를 비롯한 기성 권력체제가 사회를 경영 관리하는 현상을 '치안'이라 부르며 정치를 새롭게 정의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정치는 이 치안의 논리를 문제 삼아 새로운 집단적 가능성을 만드는 행위다. 민주주의 역시 새로운 정치 주체가 기성체제를 넘어서서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미학은 새로운 가능성이 출현하는 대표적인 분야로 그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을 기성의 권력체제가 만든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는 2008년 방한해 가진 공개강연과 심포지엄에서 한국의 정치 현상을 자신의 독특한 민주주의 이론에 대입해 설명하기도 했다. 2009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인터뷰집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발행ㆍ2010)에서는 민주주의가 구현된 사례로 한국의 촛불집회를 들며 "국가기계로부터 분리된 집단적 힘에 대한 어떤 생각 같은 것이 인민(demos)이 거리를 메우는 스펙터클한 형태로 옮겨진 것"이라고 소개했다.
랑시에르는 지난달 이메일 인터뷰에서 최근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정치현상에 대한 견해부터 신간에 대한 소개까지 폭넓은 질문에 장문의 답변을 보내왔다.
공동기획= 이택광 경희대 교수
-당신은 방한 당시 인터뷰에서 유럽에서 회자되는 '민주주의 죽음'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면서 한국을 예로 들며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일어난 아랍혁명 등 일련의 사건들은 당신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들이 당신이 평소 주장해온 민주주의론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랍의 혁명은 내가 자주 강조했던 것을 상기시켜준다. 민주주의란 정부 기구들의 집합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기성 권력에 대한 새로운 주체들의 저항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구조를 바꾸는 것과 혁명을 동일시하지만, 나는 이 둘을 다르다고 생각한다. 혁명이란 사물들의 정상적인 질서를 바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올 때, 두려움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권력과 맞서기를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을 때, 침묵하던 자들이 말하기 시작할 때, 기존 권력의 권위는 발가벗겨진다. 혁명은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자신의 역량을 표명함으로써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들을 지워버린다. 혁명의 미래는 이런 역량의 지속성, 일관성에 달려 있다."
-한편에선 아랍혁명 이후 아랍 국가들이 다시 보수정치로 회귀하는 현상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종교 정당들이 튀니지와 이집트의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이 국가들 내에서 민중의 변화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종교적 정당들이 선거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정치 주체가 기성체제를 넘어서 통치에 참여하는 형태의) 민주주의가 지속되는 시간과 국가적 제도가 지속되는 시간은 다르다. 우리가 자발적이고 일시적인 운동과 장기적인 조직을 서로 대립시키면 이 문제를 제거할 수 없다. 대의적(민주주의가 실현되는) 형식과 관련해 우리가 민주주의에 어떤 자율성을 부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보다 장기적인 기간을 고려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시민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SNS가 공론장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이 영향력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나고 있다. 당신이 방한한 2008년에 일어난 촛불집회는 SNS를 매개로 발생한 대표적인 반정부 시민저항이었다. 비슷한 일이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에서도 일어났다. SNS 혁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런 운동들을 SNS 혁명이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기술 그 자체로는 미학적인 혁명이나 정치적인 혁명을 생산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터넷과 SNS가 공공의 의견이나 결집의 새로운 형식을 구성하는 데 있어 지극히 중요한 도구였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혹자는 인터넷과 SNS가 개인들의 삶에 전적인 통제를 가할 수 있는 유해한 투과의 도구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인터넷과 SNS는 정보와 소통의 형식을 재분배하는 민주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것들은 한편으로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를 유통시키는 수단들을 다양하게 만들었고, 국가 지배가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일을 지극히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기술들은 투쟁적인 집회 같은 전통적 민주주의 형식이 퇴조하는 시기에 새로운 민주주의 형식을 만들었다. 인터넷과 SNS는 아랍 국가들이나 이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이 다수임을 깨닫게 해줬고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줬으며 사람들 사이에 신뢰를 심어주었다. 그것들은 또한 (기성) 투쟁 집단의 위계적 논리와 단절하면서 수평적 관계를 만들기도 했다. 사람들이 이 새로운 형식들을 사용하게 되면서 권력은 반체제적인 집단에 뒤처지게 되었다. 그리고 권력은 그 자신의 계산에 맞게 이 형식들을 사용하기 위해 오히려 그러한 인터넷과 SNS의 실행을 제한하려 애쓰고 했다."
-경제 위기에 따른 다양한 시위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우선 지난 20년을 회고해봐야 한다. 20년 동안 우리는 세계지배체제의 공고화를 목격했고, 강대국들이 국가 간 기구를 통해 금융자본권력이 바라는 바를 수행하면서 사회 보호망을 파괴하는 것을 목격했다. 또 우리는 금융자본이 모든 존재를 시장 논리에 종속시키는 것도 목격했다. 금융자본은 집단 항의의 모든 형식을 무위로 돌리고, 폭력적인 사회적 운동을 범죄시하며, 이들의 요구가 정치체계에서 수용되지 않으면 불법 테러행위라고 규정한다. 스페인의 '분노하라' 시위, 월가의 점령 시위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점령하라 시위에서 비롯된 세계 정치 변화는 향후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 것 같나?
"세계의 정치, 경제 위기에 대한 시위가 스페인에서 먼저 전개됐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의 좌우파 정부들은 모두 세계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따라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같은 똑같은 프로그램을 적용하고 있다. 정규직과 사회 공공서비스를 박탈당한 유럽의 젊은이들이 이 운동(지난해 5월 스페인에서 일어난 '분노하라'시위)을 시작했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국가의 논리와는 독립적인 민중의 권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이들은 기성 정치에 대한 체념과 테러행위 사이의 단순한 선택지로부터 벗어나 평화적인 대중운동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여기서 어떤 다른 가능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자율적인 형식들을 발명하고 재발명하는 행동으로 가능한 민주주의의 미래다. 그러나 이러한 미래는 분명 부서지기 쉬우며, 따라서 과두제 자본주의 국가의 세계화 전략에 맞서 이러한 미래를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거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당신의 저서에서 평등은 성취해야 할 가치, 이념이라기보다는 평등을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정치 가능성을 만드는 기제로 설명된다. 프랑스처럼 이민자나 소수자 집단이 가시적으로 존재하는 곳에서 이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비서구 국가에서 이런 평등의 요구는 대체로 민족주의를 통해 봉합된다.
"내게 정치란 단순히 통치 권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고유한 실현 방식을 갖고 있다. 정치는 국가적 제도와 구분되는 민중적 제도를 만든다. 그리고 오늘날 평등을 표명하는 형식은 단순히 민족 공동체의 주변부에 있는 집단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민족 공동체의 한가운데에서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월가의 '점령하라' 시위나 스페인의 '분노하라' 시위는 서구 국가 내에서 불평등의 만연, 노동 불안정의 일반화, 사회적 보호망과 연대 형식의 파괴, 재정적 능력이 곧 신분이 되는 소수의 과두적인 지배 집단에 의한 전체 권력의 몰수 등의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나는 이런 관점에서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는 지점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나라들의 지정학적 상황이 민주주의적 투쟁과 민족적 의식 사이의 관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꾸기는 하겠지만, 오늘날 극소수의 손에 부와 권력이 편중되는 현상은 영국과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과 일본에서도 역시 똑같은 현실이다."
-서구와 비서구 국가들은 저마다 다른 형식으로 기성 권력에 저항하고 있다. 이 차이를 어떻게 보는가?
"저항은 국가마다 다른 형식을 띨 수 있다. 아랍의 독재정권들은 침묵을 강요한다. 소위 민주적이라 불리는 유럽은 반체제적인 언사들이 발언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만, 분노하고 고통 받는 소수자의 말은 지배담론에서 '소음'으로만 들린다. 그러나 튀니지나 마드리드나 뉴욕에서 사람들은 현재의 경제, 정치 질서에 같은 방식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한국의 촛불시위나 아랍의 혁명 등 분노한 사람들의 운동은 경제적 불안정과 정치적 박탈이라는 이 세계화 전략에 맞서 민주주의적 감성의 각성을 다른 맥락으로 옮겨 담아내고 있다."
-당신은 최근 프랑스에서 출간한 <아이스테시스(Aisthesisㆍ감각)>(국내에는 출판사 길에서 상반기 출간 예정)에서 다양한 미학적 형식에 대한 사유를 보여준다. 특히 '문학의 정치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면서 예술사에 대한 기존 담론을 혁신했다. 이전 저서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나는 당대 지배적인 예술의 관점과 대립하면서 예술의 역사(그린버그나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 당대의 지배적인 예술관점)에 대해 내 나름의 견해를 피력해왔다. 또 영화, 문학 같은 영역을 이런 관점에 도입해 비평했다. <아이스테시스>는 서구 근대역사에서 인간의 감각과 지성을 통해 예술과 미학에 관한 중요한 순간을 발견했던 장면을 포착한 책이다. (여기서 소개한 예술적인 장면은) 연극, 영화의 미장센, 전시회, 강연 등 어떤 독특한 사건을 경유하는, 근대성에 대한 일종의 반(反)역사와 같은 것이다."
번역=최정우(비평가 겸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인터뷰 원문은 자음과모음 카페 홈페이지(http://cafe.naver.com/cafejamo/)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참고
http://fr.wikipedia.org/wiki/Jacques_Ranci%C3%A8re
'마리선녀 이야기 > 마리선녀 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뷰] 그렉 램버트Gregg Lambert 뉴욕 시러큐스대 인문학장 (0) | 2012.03.24 |
---|---|
[인터뷰] 슬로베니아 철학자 지젝 /한국일보120208 (0) | 2012.03.14 |
[인터뷰]日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 /한국일보120221 (0) | 2012.03.14 |
[인터뷰]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한국일보120228 (0) | 2012.03.14 |
[인터뷰] 독일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 /한국일보120306 (0) | 2012.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