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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2.02.21 21:50:49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culture/201202/h2012022121504986330.htm&ver=v002

 

"反원전 시위, 일본사회 전반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죠"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3> 日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 柄谷行人

 

공동기획=이택광 경희대 교수
도쿄= 글·사진 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최근 일본 내 반(反)원전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은 지난해 9월 도쿄 신주쿠에서

6만여명이 참가한 집회에서 연설하며 "집회는 주권국민의 권리이자 사회를 바꾸는 근본적인 수단이다"라고 역설했다.

 

사회에 팽배한 냉소주의와의 싸움
잠자고 있던 시민의식 일깨워

일시적 공황후 만성적 불황기 예상
자본·국가 간 경쟁 지나쳐 전쟁 날 수도
저항운동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어

즐겨보는 한국 왕조 드라마서 '세계사의 구조' 집필 영감 받아
왕 앞에서 관료들 격론에 감명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ㆍ71)은 문학평론가에서 출발해 역사, 건축, 철학 등 전방위 비평가로 활동하는 일본의 대표적 사상가다. 비서구인의 주변부적 문제의식에 서양의 근현대 사상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결부시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한 그의 사유방식은 서구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국내 지성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쳐 '근대문학의 종언'을 비롯한 다양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그가 여느 학자들과 차별화된 지점의 하나는 현실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 발언한다는 사실이다. 도쿄대 재학 중인 1960년 미일상호방위조약 개정에 반대해 일어난 '안보투쟁'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91년 걸프전쟁 때는 일본의 참전을 반대하는 '문학인 집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계속되는 반(反)원전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시작된 집회는 전국으로 번져 9월 도쿄 도심 신주쿠에서 열린 집회에는 6만여명이 모였고, 요즘도 한두 달에 한번 열리는 집회에 1만명 이상이 꾸준히 참가하고 있다. 그는 신주쿠 시위 당시 연설에서 "집회는 주권국민의 권리이자 사회를 바꾸는 근본적인 수단"이라며 "이 운동을 원전 반대에만 국한하지 않고 일본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이 되게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생산협동조합 운동을 비롯한 여러 정치운동에 실패를 맛봤던 가라타니는 젊은 직장인은 물론 주부, 10대 청소년 등까지 대거 참여한 반원전 시위에서 일본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 듯하다. 지난달 도쿄의 자택에서 만난 그는 "노동조합 등 조직에 속하지 않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온 것은 원전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분노를 느끼기 때문"이라며 "기성 세대가 국가와 조직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희생하거나 감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 반면 요즘 젊은이들은 시위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의 자기표현을 해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 신자유주의 흐름에 반대하는 시위,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주목 받고 있다. 당신은 이미 2000년 신자유주의에 대항해 노동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신연대운동'(NAMㆍNew Associationist Movement)을 주창했는데, 그 배경과 취지는 무엇이었나.

"내가 NAM을 시작한 것은 노동자 운동이면서도 별개의 문제로 취급되던 노동운동과 소비자운동을 연결시켜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두 종류의 운동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노동운동이나 이런저런 시민운동처럼 자본이나 국가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 경제권 밖에 비자본주의적인 경제권을 만드는 것이다. 지역통화나 협동조합 같은 것이다. 양쪽 모두 예전부터 있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이들을 묶는 이론적 기초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런 신 연대주의 운동이 세계 각지에서 현실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거다."

-NAM은 지식인이 적극적으로 주도한 시민운동이란 점에서 한국 시민운동계에서 고무적인 사례로 꼽혔다. 하지만 NAM을 비롯한 일련의 정치운동은 4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원인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내가 NAM을 전개할 당시 일본에서는 언론 등으로부터 상당히 강한 억압이 있었다. 이것은 총알이나 비판 같은 직설적인 것이 아니라, 냉소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NAM을 시작했을 때 나를 조소했던 언론은 최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계기로 확산된 반원전 시위에 대해서도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뭔가 하기에 앞서 냉소주의와 싸워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 사회에 냉소주의가 자리잡게 된 배경은 뭔가.

"한국에서 1960년 4ㆍ19혁명을 비롯한 정치운동은 이후 5ㆍ18 광주민주화 운동을 거쳐, 90년대 민주화 운동으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4ㆍ19혁명을 통해 정권을 바꾼 한국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1960년 안보투쟁 등을 정점으로 시위가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바꾼 경험이 없다는 것과 연결된다. 막부시대에는 복종을 강요당했고,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정부수립에서 헌법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미군에 의해서 이뤄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인 마음속에는 무엇을 해도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이 자리잡은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의 반 원전 시위도 결국 언론과 시민들의 무관심과 냉소로 사그라질 것으로 보는가.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그런 냉소주의를 깨뜨리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더 많은 시위가 일어나야 한다. 원전 반대 시위는 잠자고 있던 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웠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고 본다."

가라타니는 원전 문제와 관련, 일본 정부가 여전히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정부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 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쿄 역시 결코 안전한 도시라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도쿄전력 등 원전 운영회사가 원자력 관련 전문가 및 학자들에게 연구비 지원 명목으로 돈을 건넨 검은 커넥션이 속속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도 "올 것이 왔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는 "원전 사고 당시 업계와 유착된 학자들은 원전이 안전하다고 강조하거나 입을 닫았다"며 "원전의 위험성을 주장한 일부 학자들도 이후에 검은 돈을 받은 의혹이 있다"고 비난했다.

-당신은 여러 저서에서 1990년대 이후를 '신자유주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자유주의보다는 제국주의에 가깝다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대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나.

"내가 말하는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적'이라는 것은 이매뉴얼 월러스틴(예일대 석좌교수)에게서 차용한 개념이다. 그는 자유주의를 헤게모니국가가 취하는 정책이라고 보며, 제국주의를 헤게모니국가가 몰락해 새로운 헤게모니국가를 목표로 각국이 경쟁하는 상태로 본다. 그에 따르면 근대 세계경제사에서 헤게모니를 쥔 국가는 네덜란드, 영국, 미국 세 나라밖에 없다. 이들이 헤게모니를 쥔 때도 자유주의적 시기라면, 네덜란드가 몰락한 이후는 제국주의적이다. 흔히 말하는 1880년 이후의 제국주의도 영국이 몰락하면서 독일, 미국, 일본 등이 후계지위를 노리고 경쟁을 시작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같은 견해에 따르면 미국이 헤게모니를 쥔 1930년 이후는 자유주의적인 단계로, 미국의 몰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1990년 이후는 다시 제국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시대를 금융자본주의, 인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일련의 정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월러스틴에 따르면 헤게모니국가가 성립하는 시기는 우선 제조부문의 우월성이 상업부문, 금융부문의 우월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시기다. 세 부문 모두에서 우위를 점하기란 어렵기 때문에 단기간에만 나타난다. 일단 헤게모니국가가 성립되면 제조부문에서 헤게모니를 잃게 되더라도 상업이나 금융만으로도 유지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네덜란드, 이탈리아도 생산 면에서는 몰락했지만, 상업이나 금융에 있어 장기간 헤게모니를 유지했다. 사실 1960년 이후 미국도 같은 길을 걸어왔다. 즉 제조부문에서 몰락했지만 금융이나 상업(석유, 곡물, 에너지 등)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이런 점에 비춰볼 때 지금을 금융자본주의의 단계로 보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2008년 일본에서 출간된 인터뷰집 <정치를 말하다>(2010ㆍ도서출판b)에서 향후 헤게모니국가는 출현하지 않고, 자본주의 자체도 종말을 고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미국이 헤게모니국가로서 몰락했고 다음을 중국이 이어받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처럼 헤게모니국가가 성립할 일은 없다고 본다. (경제성장으로 인해) 중국이나 인도의 농업인구 비율이 일본이나 한국과 비슷해지는 시기에는 세계자본주의라는 개념은 없을 것이다. 즉 차기 헤게모니국가가 출현하기는커녕 자본주의 그 자체가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전에 헤게모니를 둘러싼 각국의 치열한 경쟁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자본주의 위기는 일시적인 위기인가, 장기적인 것인가.

"선진자본주의 국가는 1960년대 신용의 위기를 맞았고, 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행된 것이 세계화다. 그것은 지금까지 외부에 있던 제2세계, 제3세계를 세계시장으로 흡수시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이나 인도의 경제발전에 의해 세계자본주의는 일단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임금상승,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만일 지금 시기가 공황이라면 이후 장기 불황은 어떻게 발전할 것 같나.

"공황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심각한 것은 그 후에 오는 불황기다. 내 예상으로는 향후 만성적인 불황이 지속될 것이다. 그래서 자본 간의 경쟁, 국가 간의 경쟁이 더욱 격심해질 것이다. 이 경쟁이 전쟁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있다. 그것을 억지하는 저항운동이 없다면 말이다."

-당신은 2010년 한국에서 열린 동아시아평화포럼에서 '국가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동아시아 구상'을 발표하며 '세계동시혁명'의 필요성을 말했다. 개별 국민국가들의 팽창욕구를 억누를 수 있는 외부장치로서 국가를 지양하는 세계연합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너무 이상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 구상이 실현 가능하다고 보는가.

"각국에서 자본과 국가에 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 세계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세계동시혁명은 대체로 그러한 이미지다. 하지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연계는 국가간 대립을 부채질하기만 해도 간단히 무너져버린다. 과거 유럽 사회주의자들이 제2인터내셔널을 결성했지만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국을 지지하며 해산해버렸다. 이후에도 각국의 대항운동은 국가에 의해 간단히 해체돼버렸다. 즉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열쇠를 칸트의 평화론에서 찾았다. 칸트가 말한 영원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국가간의 대립을 없애는 것이다. 칸트가 제국가 연방을 구상한 것은 그 때문인데, 당시에는 이상주의라고 웃어넘기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본 사람들은 그 이념을 받아들여 국제연맹을 결성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엔이 생겨났다. 물론 칸트의 이념과는 다소 거리가 멀긴 하지만…. 현재의 유엔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칸트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다수 국가간의 협의 없이도 한 나라만이라도 실행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일본이 헌법9조(전쟁을 영원히 포기하고 어떠한 군사력도 가지지 않는다)를 실행하는 것이다. 즉 전력을 완전히 방기하고, 유엔에 증여한다면 그런 나라를 공격하는 국가는 없지 않을까. 또 동조하는 국가가 많이 생겨날 것이다. 이에 따라 유엔이 바뀌고 세계동시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무력보다도 '증여의 힘'이 더 위대하다. 이렇게 말하면 공소(空疎)한 이상주의라고 비난하지 모르지만, 현 상태로 그냥 간다면 세계전쟁은 피할 수 없다. 이념과 공소는 분명이 다르다."

-'선덕여왕' 같은 한국드라마를 즐겨보고 있다고 들었다. 이 드라마들이 <세계사의 구조> 집필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영감을 받았나.

"역사를 여러 국가가 관계하는 세계시스템의 역사로 보는 <세계사의 구조>를 쓰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의 고대국가 등에 관해 조사했지만 구체적으로 알기 힘들었다. 한데 한국의 사극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또 제국의 중심, 주변, 아(亞)주변이라는 구조의 개념도 그려졌다. 예를 들어 한국 왕조의 역사는 중국이라는 문명의 주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이라고는 하지만 중심 이상의 주변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아주변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고려왕조 이후 과거 등 중국의 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반면, 일본은 많은 점에서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았으나 관료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사의 우위가 계속된 거다. 한국 사극에서 왕 앞에서 관료가 격론을 펼치는 장면을 보고 감명 받았다. 일본의 지배층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막후에서 교섭을 하는 경우는 있지만 겉으로 의논하는 법은 없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반면 한국인은 언제나 공공연히 의논한다. 한국 드라마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다고 공부를 위해서만 한국드라마를 보는 건 아니다. 드라마 자체의 재미도 크기 때문에 즐겨 보고 있다."

 

 

*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Kojin_Karat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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