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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2.03.06 20:45:31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culture/201203/h2012030620453186330.htm&ver=v002

 

 

"자본권력의 정치 영향력 확대가 민주적 의사형성 위협"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5> 독일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 Axel Honneth

공동기획=이택광 경희대 교수

인터뷰 진행·번역=문성훈 교수

정리=이훈성기자 hs0213@hk.co.kr

 

악셀 호네트는 최근 출간된 사회연구소 기관지 <베스텐트> 한국어판 서문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통 속에 형성된 비판이론은 그 낡은 유럽적 뿌리에서 벗어나

다양한 형태의 근대화를 적절히 주제화할 때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학파 계승자로서 의지를 밝혔다

 

금융시장 등 제한 철폐로 기업들 활동·이윤 극대화
이젠 국가마저 종속시켜

고소득에 누진세 부과
소득 재분배는 근대 민주주의의 주춧돌

이론적 지도자 전혀 없이 불의에 도덕적으로 맞서는 월가 99% 시위 큰 감명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자유영역의 적극적 상호작용
다양한 영역에 관심 가져야

 

 

마르크스의 고향인 독일에서 태동한 그의 사상적 후예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은 단연 프랑크푸르트학파다. 이들은 1923년 프랑크푸르트에 설립된 사회연구소(Institut fuer Sozialforschung)에서 활동한 학자 그룹으로, 비판이론(die Kritische Theorie)이라는 지적 전통을 형성하면서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대안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한때 뉴욕으로 연구소를 옮겼다가 전후 되돌아오는 수난을 겪는 와중에도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벤야민, 마르쿠제, 프롬 등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그 1세대로 활약했으며, 이어 국내 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하버마스가 2세대를 주도했다.

악셀 호네트(63) 프랑크푸르트대 교수는 이 학파의 3세대 대표로 꼽히는 사회철학자다. 본대에서 철학, 보훔대에서 사회학, 베를린대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그는 콘스탄츠대, 베를린대 교수를 거쳐 1996년 교수 자격 논문 지도교수였던 하버마스로부터 프랑크푸르트대 철학교수직을 물려받았다. 2001년부터는 이 학파의 산실인 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마르크시즘에 인간학을 접목시킨 호네트 이론의 핵심은 인정투쟁. "인간은 자기 보존이나 권력 강화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한 사회 속에서 투쟁한다"는 주장이 담긴 개념이다. 호네트는 인정투쟁 이론을 윤리학, 사회ㆍ정치철학 영역으로 확장 적용하면서 새로운 행위 및 사회운영 원칙으로 발전시키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호네트는 1941년 발간이 중단된 사회연구소 기관지를 2004년 <베스텐트(WestEnd)> 제호의 반년간지로 복간, 현대사회의 위기, 병리적 현상 등을 진단하는 글을 실으며 담론을 주도하고 있다. 2009년에는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가치를 강탈하는 주체는 더 이상 자본가가 아니라 (고율의 세금을 걷는) 국가"라며 유럽 복지국가를 비판한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에 맞서 복지정책을 옹호하는 논쟁을 독일 유력 일간지를 통해 벌여 화제가 됐다.

호네트와의 인터뷰는 문성훈 서울여대 교수가 이메일을 통해 진행했다. 호네트는 문 교수의 박사 논문 지도교수였다.


_당신은 프랑크푸르트학파 3세대의 대표자로 꼽히는데, 어떤 관점에서 현대사회를 비판하고 있으며, 어떻게 사회적 진보를 설명하고 있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전통은 무엇보다도 내재적 사회비판 방법에 있다. 이는 사회비판의 토대가 되는 규범이나 표준을 어떤 초월적 가치나 구성된 원칙처럼 사회 밖에 있는 것에서가 아니라, 사회 자체에 '내재해'있는 것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이런 식의 사회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광범위하게 확장된 비판이론의 흐름 안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내가 따르는 사회비판 전략은 한 사회를 정당화시키는데 있어 내적 전제가 되는, 이미 제도화된 규범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에 관한 가장 명확한 사례는 근대적 권리다. 근대적 권리는 그 정립기부터 모든 시민의 평등한 관계를 요구했다. 그리고 근대적 시민 혁명 초기부터 사적 영역, 시장 영역, 민주적 공공 영역에서도 각기 특수한 형태의 동등대우와 사회적 자유에 대한 요구가 자리잡았다. 진보란 아주 장기적이고, 투쟁적이며, 늘 역공을 겪으면서도 다양한 사회 영역에 내재된 사회적 자유에 대한 약속이 인정투쟁을 통해 점차 실현되는 과정이다."

_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금융위기가 각국 정부의 재정위기로 이어지면서 자본주의의 위기 내지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철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금융위기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데는 사회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가 적합할 것 같다. 그럼에도 대답을 한다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새로운 모습은 금융시장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다. 내가 따르고 있는 해석은 이렇다. 미국을 비롯한 개별 국가들이 경제적 세계화 압력과 이로 인한 국가 경제에의 위협에 직면해 1980년대 말부터 생산 및 금융 시장에 대한 제한을 철폐했다. 이는 기업들에게 이윤극대화를 위한 보다 큰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개별 국가들이 스스로 풀어준 시장에 종속되고 말았다. 그래서 시장이 흡사 자체적으로 명령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국가 정책은 생산과 유동성 보호를 위해 이를 따라야만 하는 상황이 됐다."

_신자유주의가 추구한 복지 축소, 규제 철폐를 통한 자유경쟁체제의 확대는 '1대 99 사회'라 할 만큼 극심한 양극화를 낳았다. 슬로터다이크와 복지국가 논쟁을 펴기도 했는데, 사회복지국가가 여전히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나.

"19세기 말 서구에서 시작되었던 복지국가적 권리의 형성은 분명 모든 국민의 동등한 자유권 보장이라는 이념 속에 내재된 규범적 약속에 해당한다. 강력한 투쟁을 통해 정착된 최저 생계, 실업 보험, 노령 연금 등에 대한 제반 권리는, (영국 사회학자) 토마스 마셜의 분석이 보여주듯이 대다수 국민이 자신의 자유권을 효과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물질적 전제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고소득에 누진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근대 민주주의를 위한 주춧돌이며, 이에 따른 소득 재분배를 통해서만 국가의 복지 정책은 재정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조세체계에 대한 공격은 복지국가적 민주주의의 전체 구조를 공동화시키려는 것이다."

_반 세계화 운동에서부터 월가 점령 시위에 이르기까지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저항에 담긴 규범적 요구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를 통해 어떤 대안적 사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보나?

"아니다. 현재 일어나는 새로운 저항 운동을 통해 어떤 대안적 사회의 비전을 말하는 것은 분명 시기상조다. 내가 월가 점령 시위에 큰 감명을 받은 것은 단지 이 운동이 새로운 형태의 집단 운동을 창출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 운동은 인터넷망을 이용한 덕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활동적이고 순식간에 놀라운 행동들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행동반경을 확대하기 위해 공간적 거리를 즐기듯 뛰어넘으며, 관료화와 위계화도 방지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점령 시위는 이집트 카이로의 타히르 광장에서 열린 저항 운동에 비견할 만하다. 돌이켜 보면 타히르의 저항 운동은 새로운 형태의 저항 운동의 선구자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이 점이 바로 내가 점령 시위에 감명을 받았던 두 번째 이유다.

이집트의 저항 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독재 정권의 필연적 몰락이었지만, 점령 시위에서 나타나는 것은 경제 체제에 대한 도덕적 문제 제기다. 정말로 왜곡된 논리로 지난 몇 십 년 간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득 격차를 강화시켰던 경제 체제에 대한 문제 제기 말이다. 2010년 미국의 상위 1%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인당 1,200만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지만, 나머지 99%의 상당수는 절대 빈곤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한다. 이는 눈을 비비고 봐도 놀라운 상황이다. 이런 극단적 소득 격차를 일상에서 경험할 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의에 대한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운동의 창조적 성과는 어떤 대안에 대한 분명한 표상을 갖지 않고도 불의에 대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했다는 데 있다. "우리는 99%다"라는 슬로건은 언뜻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잠재된 불만을 표출하고 계속되는 잘못된 상황을 명명하는데 있어 충분한 도덕적 표현력을 갖고 있음이 금세 입증됐다. 이 운동의 지적 소박함, 즉 이론적 지도자가 전혀 없어 보인다는 사실은 오히려 이 운동의 커다란 장점이다. 이 때문에 이 운동은 잘못된 상황에 대해 아주 신선하고, 그 어떤 교조적 방향 설정에 얽매임 없이 도덕적으로 이름붙일 수 있었고, 꺼지지 않은 불만에 민주적으로 협상 가능한 방향을 부여할 수 있었다."

_민주주의 위기 또한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대의제 민주주의가 대표성의 위기, 참여의 위기 때문에 정당성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민주주의는 어떤 것일까. 아니면 이제 민주주의 자체를 넘어서 대안적 정치체제를 상상해야 하나.

"내가 보기에 오늘날 서양의 많은 국가들에서 민주적 의사형성의 핵심이 위협받고 있다. 왜냐하면 각국 정부의 정치적 결정이 금융 및 산업자본의 직접적 영향이나 투자이전이라는 위협을 통해 사전에 이뤄지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를 (영국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탈 민주주의'로 규정한 바 있다. 분명 이는 점차 대다수 국민을 탈정치화로 이끌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중요한지, 아니면 과연 정치적 중요성을 갖고 있기나 한 것이지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차 적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체현상, 즉 정치적 결정에 대한 자본권력의 영향력 확대와 이로 인한 민주적 의사형성의 무력화 현상이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의 징표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 지역적 수준에서 더 직접적 형태의 민주적 의사결정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일고 있다. 그러나 전체 수준에서는 이미 정착됐던 민주적 권력분립을 되찾으려는 확실한 노력이 중요하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세계화 압력과 국제적 금융 및 산업 기업들의 권력 강화 속에서 평등하고 공적인 의사 형성 이념을 실현하자는 사회적 투쟁에 대한 대규모 역공이 이뤄져 왔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더 활동적이고, 더 적절한 형태의 민주주의를 시험하기에 앞서 다시 한번 이러한 잃어버린 영역을 되찾는 일이다."

_한국에서는 올해 대통령 선거가 있다. 복지 확대와 한미자유무역협정(FTA),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낳은 각종 병리적 현상의 해결 방안이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향후 정치적 플랜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국 사회가 강조해야 할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조건에 충분히 들어맞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큼 한국 상황에 정통하지 않다. 따라서 유럽의 상황에 빗대 답할 수밖에 없다. 내 생각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란 다양한 자유 영역의 조화로운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민주적 의사 형성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전제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의 영역들 속에서 상보적으로 형성된다. 민주적 인륜성에 기초한 사회 체제는 상호의존성이 만들어낸 복합적 네트워크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영역에서의 자유의 실현은 다른 영역들에서 각각의 자유 원칙이 실현되는 것과 연관돼 있다. 자유로운 시장 참여자, 자기 의식적이고 민주적 국민, 그리고 해방된 가족 구성원 등 근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제도화된 이상에 상응하는 이 모든 형상들은 상호의존적이다. 결국 한 영역의 특성은 나머지 둘의 특성 없이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금융 및 생산 시장을 다시 제한하는데 모든 정치적 노력을 집중함에 있어서 이와 인접한 자유의 영역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내에서 여성의 평등한 지위를 확보하고 정치적 공론장에서 시민 참여를 확대하려는 노력 역시 함께 경주돼야 한다."

*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Axel_Honn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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