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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2.02.28 21:01:12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culture/201202/h2012022821011286330.htm&ver=v002

 

 

"우리는 지금 정치적 공백의 시기에 살고 있다"

[위기의 시대 지성과의 대화] <4>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자본주의 위기는 옛날 방식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탓
정부는 일 처리할 수 있는 권력과 정치간 괴리 없애야
SNS의 사회변혁 효과에 대해선 아직 답하기 이르다

 

공동기획=이택광 경희대 교수
정리=이훈성기자 hs0213@hk.co.kr

 

 바우만은 한 인터뷰에서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에 대해 회의적이고,

흔히 오해하듯 포스트모더니스트도 아니다'라며 '내가 강조하는 것은 현대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에 대한 자각'이라고 말했다

 

지그문트 바우만(87) 영국 리즈대 명예교수.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인 그에게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자이자 동료 학자 사이에서 즉각적인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가디언), "오늘날 인간의 조건에 대한 가장 흥미롭고 영향력 있는 논평자 중의 한 사람"(데니스 스미스 영국 러프버러대) 등의 찬사가 따른다.

폴란드 바르샤바대,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리즈대에서 교수로 재직한 그는 1990년 정년 퇴임 이후 더 바빠졌다. 세계 각지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면서 독일, 프랑스, 중부 유럽,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 몇 달씩 체류해왔고, 교수로 있을 때보다 더 많은 30여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정통 마르크시즘에서 학문적 이력을 시작한 바우만은 오늘날 가장 주목 받는 탈근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핵심 이론은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언급할 만큼 유명한 개념인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 기존 근대 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ㆍ제도ㆍ풍속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용어로, 이런 액체 근대에서는 ▦인간 행동 및 장기 생활 전략의 준거 소멸 ▦권력-정치의 분리로 인한 국가 기능 약화 및 시장 득세 ▦실패한 개인을 보호해주던 국가 공인 장치의 축소 ▦정치 및 개인적 삶의 파편화로 인한 발전ㆍ진보 개념의 무용화 ▦선택에 따른 개인의 위험 부담 증가 등 미증유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바우만은 지적한다. 그의 논의는 탈근대의 조건을 모호성, 불확실성, 상대성으로 꼽는다는 점에서 다른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마르크시즘의 문제 의식을 이어나가며 회의주의가 아닌 실천적 전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평을 얻고 있다.

바우만과의 인터뷰는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이메일을 통해 진행했다
.


_지난해 당신은 웹진 '사회 유럽(Social Europe)'과의 인터뷰에서 2011년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해(the year of people on the move)'라고 묘사했다. 당신은 평소 현대사회가 유동성의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이로 인해 우리는 언제나 해체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조건은 재난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언급한 '움직이는 사람들의 해'라는 것은 평소 이야기해온 내용과 관련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무엇이라고 확정 짓기에 너무 이른 감이 있다. 유행이라는 것은 왔다가 스러져 버린다. 그래서 역사적인 변동은 종종 잠복해 있는 법이고,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제 '아랍의 여름'은 요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아랍의 봄'을 환영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간단하다. 기존의 정치제도가 수립할 수 있고, 수립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불만과 실망이 광범위하게 드러난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적 행위의 대안 형식이 도출될 것이다. 이런 대안들의 효과는 서서히 발현될 수밖에 없다. 월가의 점령 시위는 실제로 그곳에 있던 시위자들에게 아무런 예고도 주지 않았다. 오래된 분노의 방식들을 그대로 따랐는데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_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종언이라는 말도 들린다. 자본주의는 끝났다는 선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진정 위기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고 보는가.

"독심술사가 아니라서,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 사람들이 진짜로 그걸 믿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진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계속 내가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지금 우리는 좋든 싫든 정치적 공백의 시기에 살고 있다. 옛날 방식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새로운 정책들도 겨우 마지못해 미적지근하게 시도되고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파산의 기회를 지연시키면서 말이다."

_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실업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신자유주의 경제를 도입해서 이런 문제가 더욱 가중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가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만연한 소비주의와 분수에 넘친 삶이 캄캄한 복도로 우리 자신을 밀어 넣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한 마디로 미래 세대를 대가로 지불하고 나눠 가져야 할 미래를 저당 잡힌 상태다. 그러나 당신의 지적대로 증가하고 있는 청년 실업은 특별한 무게감을 갖는다. 이 문제는 능력주의 사회(meritocracy)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그래서 대단히 야단스럽게, 특별조치로,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잠재적인 갈등을 무화시키고, 박탈 당하고 거부 당한 집단들을 사전 제거함으로써 반대자를 무력화시키는 수단들이 강구되고 있는 것이다."

_지난해 일어난 영국 폭동을 일컬어 당신은 "좌절한 소비자들의 반란"이라고 말했다. 다름 아닌 '소비자의 좌절감'을 폭동 원인으로 지적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런 좌절감의 원인은 무엇이고, 무엇이 이런 좌절감을 행동으로 이끌게 만든다고 생각하는가.

"간단하다. 당신이 지금 대량실업과 희망 없는 가난으로 고통 받고 있는 박탈 당한 도시에 살고 있는데, 눈앞에 '잘 나가는' 소비자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화려한 쇼핑몰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 소비자들은 신용카드를 몇 개씩이나 가지고 우대 계좌를 보유한 이들이다. 그러나 당신은 이 쇼핑몰에 들어갈 수도 없고, 얼쩡거리다가 안전요원에 발각이라도 되면 대번에 쫓겨날 신세다. 런던 폭동 가담자들은 소비의 맛을 보고 싶어 했지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소비주의의 즐거움은 이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런던 폭동은 소비주의로부터 추방당한 부랑자들이 벌인 소비주의적인 카니발이었다."

_당신은 최근 정부의 문제로 정책 집행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상황을 지목했다. 예를 들어 당신은 경제공황에 대비한답시고 쏟아내는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일괄해결책'에 비판적이었다. 그렇다면 정상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신은 어떤 대책을 제시할 수 있는가.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바쁜 장관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맡겨진 일이 그것이다. 정부의 무능은 권력과 정치의 분리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과 어떤 일을 할 것인지 결정하는 능력인 정치 사이에 괴리가 발생했다. 현존하는 정치제도가 자신의 권력을 무장해제 당한 것과 달리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권력은 정치적으로 통제되지 않고 있다. 권력과 정치를 다시 결합시키지 않는 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거나 일시적으로 구멍을 메우는 것 외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_어떤 이들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사회혁명이나 민주화를 위한 촉매제로 상찬한다. 한국의 촛불 집회나 아랍의 자스민 혁명, 월가 점령 시위 같은 대중운동과 SNS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이다. 민주주의를 향한 사회변화에 SNS가 어떤 효과를 미친다고 보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너무 이른 판단이다. 디지털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온라인상의 동원력은 전례 없던 일이다. 그러나 또한 과거에 볼 수 없던 부박함도 드러낸다. 인터넷 데이트를 생각해보라. 하룻밤 섹스를 할 수는 있지만, 이 관계가 오래 지속되거나 행복한 관계로 이어지기 어렵다. 사람들을 거기로 이끄는 데는 '사회적' 웹사이트들이 유용하다. 그러나 계획했던 일이 끝날 때까지 그들을 붙잡아두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치열하게 블로그에 글을 남기고 열심히 트윗을 보냄으로써,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의무를 다하고 훌륭하게 정치적인 삶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소셜네트워크는 정치제도를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으로 대체하고 있는가? 정치에 대한 환상? 오프라인의 현실성으로 전이될 수 없는 온라인의 인공성? 소셜네트워크의 효과를 묻는 질문들에 답하기에는 아직 우리가 아는 것이 없다."

_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더불어 당신의 책들을 읽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

"현재 위키피디아에서 가장 긴 항목인 '2012년 현상(2012 Phenomenon)'을 찾아 읽어보라. 이 백과사전은 실시간으로 현재 발생하고 있는 관심의 강도, 쟁점들 사이의 위계관계, 그리고 인간의 지식 상태와 더불어 대중적 관심이 쏠리고 있는 지점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의 백과사전이 주요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기도 하다. 많은 각주와 참고문헌들도 망라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위키피디아를 신뢰할 수 있다. '2012년 현상'은 대중적 관심의 중심에 계속 놓여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인간의 걱정, 예감, 이해를 다양하게 엮어낸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재활용하면서 이런 작업의 중요성은 점점 증대될 것이다. 위키피디아의 작업은 서로 비교하고 집약하고 뒤섞고 혼합해서 '전복적인 대폭발'을 구성한다. 또한 해체되거나 증발되는 것들, 기대와 희망의 관점에서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일상적으로 폭로한다. 지금 우리는 친숙성과 일상성, 그리고 더 나은 것으로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에 안주하느라 현재의 사물과 조건을 편안하고 아늑하게만 인식하고 의지한다.

역사, 자본주의, 정치, 가족, 문명, 이런 저런 '종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오늘날 가장 쉽게 눈에 띄는 유행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주의를 당부하고 싶다. 무엇인가 진짜로 종언을 고한다면,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심지어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는 그 판단이 제대로 들어맞은 것인지, 그리고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미래가 무엇을 가져올 것인지 알고자 한다면, 사회학자가 아니라 현재의 경향을 열심히 분석하는 점쟁이에게 물어보라. 이미 세상을 떠난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은 실제로 일어나기도 전에 역사를 기획할 수 있다는 예언과 환상을 경계하라고 조언했다.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싶다면, 어떤 노래를 국민이 부르고 싶어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바로 그 말에 덧붙이기를, 내년에 국민이 무슨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나 역시 (그런 예견을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 참고

http://en.wikipedia.org/wiki/Zygmunt_Ba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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