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주르디의 사람과 세상 사이> 2012.10.1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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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재단’ 중 가장 은밀한 곳, 한국문화재단
- 오주르디 -
박근혜 후보가 ‘아버지 시절’과 관련돼 이사장을 맡았거나 맡고 있는 재단은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영남학원, 한국문화재단 등 모두 네 곳이다. 이들 중 현재까지 이사장 직함이 유지되고 있는 곳은 한국문화재단으로 1980년에 취임했으니 지금까지 32년째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박근혜 4개 재단’ 중 가장 은밀한 곳
정수장학회는 이미 정치적 쟁점이 된 상태이고, 육영재단은 운영권 다툼으로 ‘형제의 난’을 두 차례 겪으며, 현재는 박 후보의 남동생인 박지만이 추천한 임시이사 9인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영남학원은 박 후보가 이사장과 이사로 있던 당시 부정입학, 영남대병원 비리, 장학금 비리 등이 불거져 사학 사상 최초로 국정감사를 받고 20년 동안 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돼오다가 2009년에야 정상화 됐다.
논란이 됐던 이들 세 재단에 비해 한국문화재단은 세간의 시선에서 한발 비껴 있었다. 한국문화재단은 어떤 곳일까. 내용을 들여다보니 ‘아버지 시절’과 깊은 연관이 있고, 상당부분이 베일에 가려져있다는 점에서 정수장학회 등 세 곳의 재단과 공통점을 갖는다.
인터넷 검색조차 불가능하다. 홈페이지를 통해 설립취지와 활동상황 등을 홍보하는 여타의 장학재단과는 완연히 달랐다. 통일교 측이 설립해 ‘리틀엔젤스’를 운영하는 동명의 한국문화재단만 검색될 뿐이다. 용케도 구글에서 박 후보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국문화재단이 검색됐다. 클릭을 해보니 이게 웬일인가. 지도 한 장만 달랑 뜰 뿐 재단 관련 내용은 단 한 줄뿐이었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 588.”
‘미스테리 재단’과 삼양라면, 그리고 박정희와 JP
인터넷 세상인데도 인터넷 공간에 족적을 남겨놓지 않은 재단. 이 ‘미스테리 재단’의 출발은 박정희 사망 7개월 전인 1979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설립 당시 명칭은 ‘명덕문화재단’이었고, 삼양식품 창업자인 전중윤 명예회장이 현금 5억원 등 총 11억원을 들여 만든 재단이다.
설립 다음해인 1980년 7월 전중윤 등 설립 임원 전원이 사퇴하고 박근혜 후보가 이사장을 맡는다. 이후 32년 동안 한결같이 ‘이사장 박근혜’ 체제가 유지된다. 이 정도면 사실상 재단의 ‘소유주’는 박 후보라는 얘기가 된다.
어떻게 재단이 박 후보의 손에 넘어간 걸까. 그 배경을 알려면 삼양라면 창업 당시 상황을 살펴야 한다. 삼양식품 창업자 전중윤은 강원도 철원의 부잣집 출신으로, 일제시대에 선린상고를 나와 총독부 체신국 보험과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6.25 동란 후 이 당시 경험을 살려 동방생명을 공동창업(1959년)한다. 창업 초기 경찰공무원 4만명에 대한 퇴직보험을 몽땅 유치해 업계 1위로 부상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 받기도 했다.
<삼양라면 하월곡동 공장 / 창업 당시>
1961년 유지공업체를 인수해 삼양공업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무렵 남대문 시장에서 ‘삼양라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시장 바닥에서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떠올린 전중윤은 ‘새로운 식품개발’이라는 사업계획서를 들고 쿠데타정권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JP(김종필)를 통해 박정희에게 라면 샘플을 전달하고 라면 제조기 1대를 구입할 돈 5만 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외화는 총 16만 달러뿐이었다.
미 잉여농산물 대금 5만 달러 불하, 재단 ‘기부’는 보은 성격?
박정희는 라면을 신기하게 여기며 맛이 좋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러자 JP가 나섰다. 농림부가 미국 잉여농산물 대금으로 10만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며 농림부를 가보라고 귀뜸한다. 당시에는 미국 원조를 받는 국가가 원조액의 일정비율(20%)만큼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구매(미공법 480호)해야 했다.
<초기 '삼양라면' 신문 광고>
이렇게 해서 5만 달러를 불하받아 라면 제조기계를 도입하고, 1964년부터 대량생산을 시작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박정희도 “라면에 고춧가루를 넣어 먹으니 얼큰해서 좋아”라며 술 먹은 다음 날이면 라면을 찾곤 했다고 한다. 5만 달러를 불하해준 박 정권에 대한 고마움 때문일까. 전중윤은 자신의 딸 셋 모두 육영수가 다닌 배화여고에 보냈다. 배화학원 이사장을 맡아 기념관도 건립해 줬다.
박정희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했던 전중윤은 박정희가 급서하자 보은 차원에서 맏딸인 박 후보에게 자신이 설립한 재단을 맡겼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32년 동안 박 후보와 측근들이 운영을 맡아왔다면 사실상 전중윤이 박 후보에게 재단을 ‘기부’한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한국문화재단이 언론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때는 박 후보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했던 2002년 2월이었다. 탈당 선언문을 박 후보 의원실이 아닌 외부에서 작성했고, 그곳이 한국문화재단인 것으로 확인되면서 부터다. 이후 박 후보가 비공식 조직인 ‘신사동팀’을 두고 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정수장학회 장학금 전달식 / 2003년>
한국문화재단은 ‘박근혜 정치’의 중요한 축
‘신사동팀’의 거점이 한국문화재단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 팀을 이끈 인물은 ‘박근혜의 그림자’라고 불렸던 고 최태민의 사위 정윤회로 알려졌다. 그는 최태민의 다섯째 부인의 딸인 최순실의 남편이다. 박 후보의 비서실장을 지낸 바 있으며, 육영재단에 관여하기도 했다. 항간에는 그가 지난 4.11총선 공천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소문도 있다.
한국문화재단이 박 후보를 돕는 정치적 서포터 역할을 해왔다는 증거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임원진 구성부터 그렇다. 5명의 이사중 4명이 박 후보의 정치행보와 연관이 있다. 영남대 부총장이며 박정희정책새마을대학원장인 최외출 이사는 박 후보의 ‘국민행복캠프’ 기획조정특보이고, 변환철 이사는 친박 교수 모임인 ‘국가미래연구원’의 발기인으로 참여한 바 있다.
전 경북대 총장인 김달웅 이사는 TK지역 친박교수 모임인 ‘바른사회 하나로 연구원’의 대표이고, 김덕순 이사는 정수장학회의 이사를 겸하고 있다. 감사인 김삼천은 정수장학회 수혜자 모임인 ‘상청회’ 회장이다.
재벌기업이 계열회사 임원을 순환시키는 것처럼 ‘박근혜 재단’ 4곳도 꼭 그짝이다. 4곳 모두 거친 임원이 3명, 3곳에서 임원을 맡았던 사람이 3명, 2곳 16명 등이며 현재 임원을 맡고 있는 사람도 5명이나 된다.
재단 장학금 75% 대구-달성에 집중
재단이 박 후보의 정치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해왔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한국문화재단의 장학금 지급 현황을 들여다보면 비록 간접적이긴 하나, 박 후보가 재단을 선거운동에 활용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박 후보의 정계 입문은 1998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다. 1997년 이전에는 한국문화재단이 대구-달성 지역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사실이 전혀 없다. 그러다가 박 후보가 출마한 1998년에는 65명(달성군 2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것을 필두로 매년 대구-달성 지역에 편중되도록 수혜자를 선정해 왔다.
1997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문화재단이 선정한 장학금 수해자수는 총 715명. 이중 75%에 달하는 538명이 대구-달성지역 학생들이었다. 달성군 재학생 수는 206명으로 전체의 30%를 차지했다. 자신의 선거구에 ‘한국문화재단 이사장 박근혜’라고 적힌 장학증서를 집중적으로 뿌린 셈이다.
정수장학회 장학금 TK편중 현상 심해
이런 현상은 정수장학회에서도 목격된다. 정수장학회가 서울시교육청에 제출한 결산보고서에 의하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10년 동안 지급한 장학금은 모두 30억3400만원. 이를 16개 시도별로 분류해 보면 TK편중 현상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인구 비율이 10.2%에 불과한 TK지역에 전체의 22%인 6억7400만원을 지급했다
특히 박 후보가 이사장으로 있었던 기간에는 편중현상이 더 심각했다. 대구는 서울의 3배 이상, 경북은 인구가 훨씬 많은 경기도 보다 40% 정도 더 많이 지급됐다. 흥미로운 사실도 관찰된다.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남과 전북에 장학금이 많이 지급된 것을 어떻게 풀이해야 할까. 호남 외연확대를 위한 ‘선심공세’였나?
박 후보가 이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TK편중현상이 다소 완화되다가, 2010년부터는 타지역과 동일한 수준으로 낮아진다. TK편중 현상이 심하다는 주변의 지적을 의식한 조치로 보인다.
'아버지 시절' 또 다른 유산 '한국문화재단'
한국문화재단의 돈이 박 후보의 개인적 기부행위나 박정희 업적 홍보에 사용되기도 했다. 재단은 2004년과 2005년 문화활동비 명목으로 박 후보의 미니홈피 접속수 200만회와 300만회 돌파를 기념해 수백만원에 상당하는 물품을 영아원과 어린이 시설에 지원했다. 또 학술연구비 명목으로 ‘박정희 치적 연대표 조사연구’ 등에 1500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재단의 연구비 지원 5건 중 2건이 박정희와 관련된 것이었다.
인터넷에서 검색도 되지 않고, 건물 안내판에도 간판을 붙이지 않은 재단.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까? 한국문화재단 또한 ‘아버지 시절’의 어두운 유산이기 때문에 그럴 것으로 짐작된다. 아버지 덕택에 보은의 의미로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한국문화재단. 외형은 작아도 역할은 ‘박근혜 정치’의 주요한 축이다.
한국문화재단이 입주해 있는 신사동 건물. 1층 안내판에 재단 간판이 보이지 않는다.
정수장학회가 3만명의 상청회원을 거느린 사실상 박 후보의 외곽조직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국문화재단도 만만치 않다. 한국문화재단의 겉모습은 정수장학회보다 못할지언정, 박 후보의 정치적 ‘손발 역할’에 초점을 맞춘다면 정수장학회를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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