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록> 2001
정토문화관 /에코아나키즘 과정
에코아나키즘에로의 초대
- 구승회(동국대학교 윤리학과 교수) -
I. 에코아나키즘에 대한 변명
에코아나키즘이라는 말은 제가 1995년 '에코필로소피'에서 처음 사용한 이래 21세기 키워드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제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그때까지 외국어로 이를 표현한 경우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개념만 만들어 놓고 6년이 지났습니다만, 내용이 충만하지 않은 채 여전히 무슨 마술어(Zauberwort)처럼 허공에 맴돌고 있습니다.
위 책을 내기 전 저는 약 3년간 고전 아나키즘을 연구하면서 아나키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데올로기적 전선이 비교적 단순했던 전통 아나키즘(푸르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을 다원적인 갈등과 분화로 특징지어지는 현대적인 논쟁의 무대에 세우기에는 부적절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현대사회의 문제에 적용 가능한 이론으로 재구성해 보자는 의도에서 “에코아나키즘”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오늘날 급속히 팽창하는 ‘생태학적 상상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생태학적 지평의 확대는 특히 철학, 사회학, 정치학과의 결합이 두드러지는 바, 근대 세계에서 주체의 지배권 강화를 주도해 온 이들 학문분과들은 최근 2~30년 사이에 급부상하고 있는 생태학적 사유와 결부되면서, 그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 출생 배경이 무엇이건 간에 ‘생태학적·환경론적’ 문제제기를 끌어들이는 태도는 요즈음 학문활동의 유행이 되었습니다(생태정치학, 생태사회이론 , 생태학적 여성학 등등). 심지어는 과거 이들이 성취한 이성적 기획의 귀결들을 전면 부인하는 당혹스러운 주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당시 저는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의 생태학적 관점을 “사회생태론(social ecology)”이라 이름 붙인 데에 착안하여, 아나키즘을 환경·생태문제와 연결하는 입장을 “에코아나키즘”으로 독해하였습니다. 북친이 자신을 ‘생태학적 아나키스트’라고 적극적으로 표방하지 않고 있습니다마는, 주지하다시피 그의 사회생태론이 아나키즘에 근거해 있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의 에코아나키즘은 북친의 입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또 리처드 플럼우드(Richard Plumwood)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명한 생태주의 운동가로서 1980년에 시드니에서 출간된 책 “Environmental Philosophy ”에 실은 논문에서 아나키즘에 기초한 “자율적 생태사회”의 구성을 논하였습니다. ?에코필로소피?의 「에코아나키즘」을 다룬 장에서 저는 그의 생각을 많이 원용하였습니다.
하여튼 이런 지적 편력을 통하여 주조된 “에코아나키즘”은 지난 6~7년간 대학생, 청년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수 십여 대학신문은 물론이고, 주요 일간지들도 앞다투어 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급기야는 텔레비전까지 나서서 마치 무슨 “신기한 대안”인양 재조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중들의 호기심과 저널리즘의 과대포장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충분히 채워지지 못한 미완의 화두로 남아 있습니다. 이 개념의 탄생에 기여한 한 사람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오늘 여기 <생명운동아카데미>가 나를 부른 것도 “아나키즘,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달라!”는 혹은 어쩌면 혹세무민으로 결판날지도 모르는 이론적 사고실험에 “책임지라!”는 문책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II. 역사적·개념적 접근
1. 아나키의 개념
우리가 즐겨 쓰는 두 용어 ‘아나키즘’에 대한 어원적인 접근에서 시작합시다. 아나키라는 말은 그리이스어 아나르키야(αναρχια) 혹은 아나르코스(αναρχοs)에서 유래합니다. 이 말은 호머와 헤로도투스의 글에 최초로 등장하는데, 지도자, 또는 지배자 없음을 의미하는 말로, 또 유리피데스는 ‘선장 없는 선원’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투키디데스는 무정부, 무지배, 무질서, 무규율을 의미하는 단어로, 또 크세노폰은 ‘집정관이 없는 상태’라는 중립적인 의미로 쓰는가 하면, 반대로 아이스퀼로스는 ‘전제지배’라는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기도 한다.
이런 희랍적인 어원으로부터 ‘아나키즘’ 혹은 ‘아나키스트’라는 말이 오늘날과 같이 일정한 정치적 지향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전반부터 였는데, 프랑스 대혁명을 거치면서 이 용어는 혁명을 선동하고, 상대방을 정치적으로 비방하는 신조어로 등장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평등과 정의에 대립하는 “파괴와 아나키는 무지한 사람들을 위협하고, 편견을 심어주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로 칭하고, 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했던 최초의 사람은 피에르 조셒 프루동이었습니다. 그는 처녀작 ?소유란 무엇인가??에서 아나키를 “무질서나 혼돈이 아니라, 여하한 형태의 지배자도, 주권자도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하였습니다. 프루동은 인간이 권위로서 타인을 지배하는 낡은 사회에서는 무질서와 혼돈이 있을 뿐이고, 그래서 결국 몰락에 이르게 되는데 반해서 정의와 평등을 실현한 새로운 사회는 아나키즘에서 ‘질서’를 추구하였습니다. “아나키즘은 인간에 의한 임의의 지배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법칙의 권위, 즉 법적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유이다.” 그러나 프루동은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아나키즘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 파악합니다.
19세기 말엽에 접어들면서 아나키즘은 유럽에서 현저하게 그 세력을 잃어버립니다. 정확히 말하면 바쿠닌파가 맑스파에서 갈라져 나와 라틴-카톨릭 계열의 유럽 여러 나라에서 소규모의 조직을 갖추고 활동하던 187o년 이후 몇 년간을 고비로 아나키즘은 노동운동의 역사, 그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그것은 파리꼼뮌의 실패와, 인터내셔널의 붕괴 이후에도 계속되는 아나키스트들의 내부분열, 그리고 실천적 과격주의로 인해, 아나키즘은 현재의 사회문제 해결과 노동 조건의 개선이라는 현실적 과제를 수행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되었습니다.
지난 세기말과 금세기 초반에 있었던 ‘1~2차 노동운동’은 이제 제1인터내셔널을 통해 맑스와 엥겔스가 제시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론에 따라 수행되었습니다. 맑스의 혁명적 이론과 실천은 그가 여생을 1o여 년 남겨둔 이 시점에서 완성을 보게됩니다. 1848년 이래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대한 맑스의 신뢰는 1867년의 ?자본론? 1권의 출간과, 인터내셔널에서의 독일을 대표한 서기로, 그리고 <총무위원회>의 실질적인 대표자로서 이론적-실천적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두 시기에 있어서 아나키즘적인 경향은 다양한 사회주의적 흐름과, 프랑스의 신디칼리즘에 부분적으로 흡수됩니다.
레닌은 19o1년에 아나키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테제형식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아나키즘이 19세기 유럽의 노동운동에서 그 이론적-실천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레닌에 의하면, 슈티르너와 바쿠닌을 포함한 지금까지의 “아나키즘은 착취에 반대하는 일반적인 상투어”이며,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불안정한 지식인이나 방랑자의 절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고, 아나키즘은 “이론도 혁명적 교조도 없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정치의 부정이라는 가면아래, 노동계급을 부르주아의 정치에 종속시킨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2. 우리 시대의 아나키
아나키즘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허무적인 테러나 극단적인 파괴주의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무정부주의’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던 현대사의 한 시대에는 그러한 의미의 아나키즘이 전부였다. 일제(日帝)의 식민지 지배와 더불어 시작된 한국의 무정부주의 운동은 민족주의, 민족주의에 경도된 사회주의, 혹은 스탈린적 공산주의에 비해 더욱 강력한 도덕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아나키즘이 역사적 추억거리로 되고 말았는가?’는 저간(這間)의 이데올로기적 세계구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일제 하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 보다 더 많은 핍박을 받았으며, 박열, 신채호, 의열단, 나아가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님 웨일즈의 실명소설 ?아리랑?에 나오는 ‘김산(실명은 장지락)’이라는 이름을 들면 제국주의 시대에 아나키즘의 본령이 무엇이었던가는 자명해 집니다.
시민사회를 허물고 등장한 근대 국민국가에서 권력은 우선 ‘완력으로부터’, 그리고 ‘자본주의의 공장 굴뚝으로부터’ 나왔지만, 변화된 세상에서 권력은 ‘정보로부터’ 나온다. 정보사회에서 중앙집권적 거대 권력은 급속하게 분산되고 있습니다. 수 십만, 수 백만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 오직 하나의 목표를 위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정보사회에서 사회운동은 어떤 통일된 목표를 지향하지도 않습니다. 중심의 전복함으로써 하루 아침에 세상을 바꾸는 레닌적 방법보다는 저변, 주변을 허무는 다중심적인 행위규범을 선호합니다. 페미니즘운동, 환경·생태운동, 반전-반핵운동, 지역주의 운동, 평화운동, 소비자운동 등등 신사회운동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회운동의 다양성은 언제나 이론적인 동일성의 토대 위에서만 자신의 다양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력의 부재, 탈중심성, 주체의 해체는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론적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나키즘이 바로 그 이론적 동질성 회복의 시멘트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운동 이론의 도매상은 맑스-맑스주의-사회주의 였습니다. 그러나 정보사회에서 이들이 현실적 사회운동의 이론적 도매상 역할을 독점해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습니다.
Ⅲ. 에코아나키즘의 과제
1. 과제1: 근대적 해방에서 탈근대적 ‘자연해방’으로
이제 다시 에코아나키즘으로 돌아와야 겠습니다. 에코아나키즘은 이미 그 복합명사가 말해 주듯이 다양한 아나키즘들 중에서 생태(학)운동에 적용되는 현대적 변용입니다. 그러나 이 복합명사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저는 아나키즘의 이론을 생태운동(사실 이 말은 좀 추상적인데, 인간의 환경과 지구 생명계 전체를 배려하는 운동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론으로서의 아나키즘과 실천으로서의 생태학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생태운동이 많은 사회이론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아나키즘과 결합되어야 하는가? 어떤 19세기 식 사회이론도 자연을 배려하고, 생명을 소중히 하는 소위 순수 자연중심주의적인 이론은 없었으며, 아나키즘도 19세기의 산물이고 보면, 결국 반자연주의 이론이 아닌가? 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나키즘에 대한 무수한 개념정의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 개념을 둘러싼 논쟁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태학운동에 왜 아나키즘 이론이 관여하는가, 관여해야하는가에 대답하기 위해서 최소한 추상적인 범주를 정하는 일은 불가피해 보입니다. 거두절미하고, 제가 생각하기에 아나키즘 이론이 보여주는 ‘해방에의 열정’이 양자(생태학과 아나키즘)의 결합력을 높여준다고 봅니다. 19세기 아나키즘 이론은 개인, 사회, 국가의 권위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그런 목표는 당대의 경쟁적인 이론이었던 맑스주의와 다를 바 없습니다(아시다시피 방법론상의 차이였지요). 나는 이를 ‘근대적 해방’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근대적 해방은 개인해방(르네상스와 종교개혁), 민족해방(프랑스대혁명), 계급해방(맑스주의와 사회주의)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이는 한결같이 ‘사회’라는 틀 안에서 인간중심적으로 논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대에 주조된 아나키즘 역시 ‘이상적인 사회구성체의 건설’이라는 목표에 따라 이론화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는 저런 사회적 맥락에서의 해방에 더하여 ‘자연해방’을 추가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를 ‘탈근대적 해방’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해방되어야 할 환경, 생명·생태계는 사실 매우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이는 자연관·세계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이들 개념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면 이를 포괄할 수 있는 이론적 지평을 가져야 합니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아나키즘은 그 적용 영역이 매우 포괄적인 사상체계입니다. 이는 지금까지 아나키즘의 약점으로 널리 비판되어 왔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는 생태계 위기라는 전지구적인 문제를 포섭하기에 가장 유망한 사상체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심층생태주의, 에코페미니즘, 기술지향적 환경관리주의, 그 어떤 이론도 독자적으로 ‘생태계 위기’라는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태계 위기는 ‘자연 해방’을 통해 극복될 수 있으며, 에코아나키즘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사상체계에 비해 수월성을 가집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나키즘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과격한 해방’을 추구했던 유토피아적 정치철학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이는 매우 중요한 발상의 전환이라고 자부하는데―전통 아나키즘이 문제삼았던 ‘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 그(국가) 생존 조건의 변화―생태계 위기, 세계화, 생명기술, 정보기술의 발달, 그로 인한 문화의 디지털화―로 인하여 논쟁점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민국가의 기능변화는 ‘지배와 피지배의 갈등’, ‘권위와 자율의 갈등’, ‘정당한 권위를 보증하는 제도(귀족정치, 민주주의, 전체주의 등등)를 둘러싼 갈등’을 원인 소멸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한 데 아나키즘이 여전히 국가의 권위와 개인의 자율성을 둘러싼 싸움에 매달리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일 것입니다.
국가 권력을 넘어선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적 연합’이라는 유토피아적 이상사회 건설은 좋든 싫든 세계화를 통하여 문화 코드의 디지털화를 통하여 실현―물론 그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만―되어 가고 있습니다. 국가의 정당 근거는 개인의 ‘자율적 사회성’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나 자율적 사회성은 성원자격(membership)을 인간에게만 부여할 때―사회제도 안에서만―자율적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 자율성의 행사는 아나키즘이건 다른 사상이건 간에 생태계 위기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 아나키즘은 전선의 확대가 필요합니다. 울리히 벡(Ulrich Beck)은 이를 반성적(반사적) 의미를 함축한 ‘제2현대’라 불렀습니다. 제2현대에서 해방은 자연해방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이는 생태(학)운동의 적실한 이론으로서 아나키즘이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과제2: 다양한 생태(학)주의 비판
‘생태(학)주의’는 다양한 분광적 현상(spectrum)을 보이는 용어입니다. 이는 소박한 자연보존론자, 기술지향적인 환경보호론자, 형이상학적인 생명중심주의자, 혹은 반문명주의를 선언하는 과격한 전체론자(holist)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학)주의는 하나의 통일된 이념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생태계 전반을 포괄하는 ‘이념의 총체(Ensemble der Ideologie)’입니다.
60년대 초반 미국에서 등장한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은 오늘날 ‘생명·생태계 전체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6-70년대 주로 ‘인간의 생활환경’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환경사상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태도, 생태계에 대한 위상에 대한 반성없이, 어떻게 하면 자연환경을 지속 가능하게 할 것인가에 주목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자연의 보존, 보호보다는 생태(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생활방식(modus vivendi)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즉 인간과 자연의 관계 양상만이 아니라, 삶의 양식, 세계관의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태(학)주의의 부흥은 산업문명적 범형(paradigm)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우선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규모의 경제에서 생태효율성적 경제로 변화하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포스트모던적 경향과 때를 같이하여 급속한 탈중심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제고를 위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분화되었고, 그로 인하여 합리화된 ‘제도’와 불합리한―하버마스의 말로 하면 ‘식민화된’―‘생활세계’의 대립은 ‘연대와 결속’이라는 공동체적 삶의 준칙을 회복해 가는 징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이미 공동체주의 이론과, 공동체적 삶의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민족국가 모델의 변화와 사회구조의 변형은 자연스럽게 공적 도덕의 토대를 바꾸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적합한 경쟁, 타협, 합리성이라는 공적 도덕은 생태(학)주의 시대를 맞이하여 연대, 결속, 보편적 관용이라는 ‘생태(학)적 도덕’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생태계 위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과 그로 인한 문화의 파급력으로 인하여 한편으로는 경제와 사회, 정치 시스템을 급속히 파편화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사회세계는 급속히 지구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적 영역에서 세계화가 지속될수록, 사적인 생활세계는 더욱 ‘탈중심화’, ‘지역분산화’할 것이고, ‘우주적 사유와 국지적 행동’이라는 존재방식은 생태(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다문화주의 시대의 공존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2.1. 심층생태운동 비판
에코아나키즘은 다양한 생태(학)주의를 모두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모든 근본주의적 생태주의 노선은 모든 유형의 생태주의를 점점 더 극단적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래서 환경친화적이고, 생태지향적인 것은 모두 좋다는 식의 전체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의 종교적 전통, 그리고 동양사상에 대한 캘리포니아식 이해가 실패한 뉴에이지의 과격주의와 만나 만들어 낸 21세기형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심층생태운동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밝힘으로써 에코아나키즘의 위상을 반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양한 생태(학)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일은 시간관계상 어려운 일이므로 심층생태운동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심층생태론자 중에서 소위 가장 과격하다고 알려져 있는 아르네 네스는 어떤 책에서 “심층생태론자들은 공산주의보다는 비폭력적 아나키즘을 지향하는 듯이 보인다. 현대의 비폭력 아나키스트들은 정치적 삼각관계에서 명백히 녹색의 방향에 근접해 있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보면 이 녹색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생태학적 전체주의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쪽에서 네스는 “여러 지역에서 인구 압력과 전쟁 내지 준-전시 상황이 점점 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이 마당에 공정하고 강력한 중앙 정치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그리고는 이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지역적 자결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중앙 권력이 강해져야만 기본적인 녹색 정책이 지역적으로 사보타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지역적 자결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중앙 권력의 필요는 커진다”는 중앙집중적 권력을 요청하는 심층생태운동의 태도는 유럽의 극단적 우익 환경주의자들의 근본 신조와 완전히 일치하는 태도입니다.
‘강력한 국가’에 대한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자유로운 선택, 개인 특수한 행동양식, 개인적 재능, 개체의 주체성은 이 강력한 국가의 전제에 예속되는 것은 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폭력 아나키즘도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자아를 용해시키는 우주적 큰 자아”가, 계급 제도 위에 구축된 전통적 가정과 공동체 내에서의 개인의 정체성을 초월한 초인간적 유기체, 즉 “하나의 큰 전체(whole)”라고 본다면, 심층생태론은 명분은 “자연의 권리”를 영속시키기 위함이지만, 실상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위한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닙니다.
2.2. 에코페미니즘 비판
에코페미니즘은 생태학을 ‘여성주의 운동’에 이용하는 입장이라면, 에코아나키즘은 거꾸로 생태학적 요청에 의해 아나키즘이 이용된다는 것입니다. 에코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보다 더 자연에 가깝다는 주장, 여성이 남성보다 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 (이는 여성운동에 있어서 일종의 역설인데) 페미니스트들이 거부하는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고정관념에 만족하고 ‘어머니=대지’라는 등식에 고착되려는 희망, 남성의 자연 지배양식과 남성의 여성 지배양식 간의 유비추리 등등 에코페미니즘은 생태학을 통하여 한계에 봉착한 여성운동의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코페미니즘이 비판되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입니다.
남성의 여성지배를 자연지배와 등치시킴으로써 생태계 문제 전반을 “남성 때문”으로 환원하는 에코페미니즘은 매우 포괄적인 세계관적 기획으로서 생태계 위기와 여성 억압을 동일한 문제로 이해하는 가장 최근에 등장한 여성주의의 한 부류입니다. 에코페미니즘은 1970년대 중반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프랑수아즈 도본느(Franc,oise d’Eaubonne)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원래는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이었지만, 최근에는 학술적 담론의 지위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 지배와 자연 지배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여, 정치·경제제도, 그리고 생명을 위협하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 저항하고, 이를 전복하는 데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구 생명-유지체계(life-support-system)를 위협하는 최종적인 근원으로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세계체제”를 지목합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남성중심적인 사회·경제체제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환원주의적인 전략 때문에 에코페미니즘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사회운동의 강령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여성해방의 실천적 강령으로서 ‘에코페미니즘은 에코페미니스트 숫자만큼이나 많다’고 할만큼 너무 다양합니다. 이 용어는 1976년 머레이 북친이 버몬트에 세운 <사회생태연구소>가 ‘생태-기술’, ‘생태-농업’, ‘생태-페미니즘’ 등의 시민강좌를 개설하면서 쓰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에코페미니스트 이네스트라 킹은 거기서 <에코페미니즘 강좌>를 맡아 강의하였고, 곧이어 1980년 메사추세츠 암허스트에서 열린 <여성과 지구적 삶: 80년대의 에코페미니즘 전망>이라는 회의의 주된 테마로 될 만큼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에코페미니즘의 약속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존재와 인식 둘 다를 불러들이는 ‘이성적인 재마법화’라는 말에 잘 함축되어 있습니다. 자연과 문화의 대립구도를 거부하고, 양자의 변증법적 종합을 주장하는 킹은 에코페미니즘을 급진적 문화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의 통찰을 결합한 변형된 페미니즘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주목해 볼만한 것은 그녀의 논술이 북친을 매우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재마법화’, ‘변증법적 상호작용’, ‘외적 자연과 내적 자연’ 등의 개념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북친의 어투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당시 북친과 함께 <사회생태연구소>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에코페미니즘은 90년대 중반 일군의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 운동의 ‘신이론’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이야 말로 지구인들의 마지막 구명선”이라든가, “대립적인 페미니즘들을 화해시키고, 의식적으로 중재하고, 역사의 배후를 재인식하며, 천년 이상 지속되어 온 여성들의 보이지 않고, 소리없는 실천에 관한 사상, 이론과 실천의 연계성과 총체성에 관한 사상, 중층적 지배체계로 이루어진 오늘날의 위계적 문명 하에서 훼손되고 거부된 모든 억압받은 자의 복권”이라는 주장은 우리가 보기에 ‘설득적이긴 하지만 논증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에코페미니즘이 현대 페미니즘의 운동강령 수준을 넘어, 우리 시대의 주류 생태(학)적 담론이 되려면 에코페미니즘 내부의 비일관성을 극복하고, 심층생태론과 사회생태론 등 근본생태주의의 다양한 목소리와 대결하기보다는 이들을 결합하여 생태-사회‘이론’의 역동성을 제고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2.3. 사회주의적 페미니즘과의 연대
대부분의 사회주의적 페미니즘(socialist feminism)은 생태학적 문제에 관한 페미니즘의 논쟁을 기꺼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페미니즘이 비역사적,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여성과 자연의 동일성을 찾으려는 태도가 반페미니즘적이라는 우려 때문이기도 하고, 최근의 에코페미니즘이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는데, 그것이 “유물론적”이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잘못된 결혼으로 불행한 동거를 해 온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을 이혼시키고, 에코아나키즘과 재혼해야 합니다. 그들의 결혼이 불행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치 오월동주처럼 해방의 목표 혹은 대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페미니즘은 성의 해방을, 사회주의는 계급의 해방을 의도했기 때문이지요. 지금 그들은 별거중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별 생각이 없지만,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경제구조와 생물학적 성(sex)-젠더(gender) 체계가 물질적 조건에 따라 어떻게 서로를 강화해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상호 의존적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재결합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에코아나키즘은 최상의 맑스주의와 최상의 페미니즘을 통합할 수 있는 역사적·이론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코아나키즘은 문화/자연이라는 이분법으로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문화페미니스트들에게 ‘물질적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적 변화의 가능성을 어떤 식으로 제한하는지를 이해’시키고, 동시에 모든 예속과 부자유를 경제적인 관계로 환원함으로써 여성/자연을 하나의 범주로 설정하는 맑스주의의 비판으로부터 사회주의적 페미니즘을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성억압/자연억압의 동일화가 야기하는 딜레마를 알고 있는 에코아나키즘으로서는 ‘문화 대 자연’의 지속적인 투쟁 속에서 ‘문화와 여성’을 제휴시킴으로써 사회주의적 이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에코페미니즘이 안고 있는 이론적 딜레마를 해결해 주어야 하고, 이미 말했듯이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론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에코아나키즘은 사회 변혁과 지구적 생존이라는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의 상호의존적인 문제를 풀어 가는 절묘한 이론적 재결합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화된 문명으로부터 자연화된 문화(natural- ized culture)로의 통합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과 에코아나키즘의 연대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2.4. 생태(학)주의와 에코아나키즘
생태(학)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에코아나키즘’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생태·환경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지배와 권력관계의 문제입니다. 생태문제는 과학과 기술문명이 만들어 낸 산업사회의 권력관계는 그냥 놔 둔 채, 인간의 자연에 대한 물질적, 도덕적, 영적인 태도의 변화만을 의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이는 외연적, 개념적으로는 ‘자연생태론’―심층생태론이 그 예이다―에 대립해서, 그리고 내포적으로는 환경주의에 대립해 있습니다. 우리는 에코아나키즘을 페미니즘적 이상과 공동체주의적 비전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심층생태학이 말 그대로 순수하게 학문이라기보다는 심층생태(학) ‘운동’으로 출발했듯이, 에코아나키즘 역시 엄밀하게 학적(wissenschaftlich) 토대를 갖춘 생태학의 하부분과, 혹은 이데올로기로서의 아나키즘의 변종이 아니라, ‘현실적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할 점은 에코아나키즘은 환경·생태문제를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에코아나키즘의 유토피아는 얼핏보면 로데릭 내쉬(Roderick Nash)가 그려낸 “아름다운 정원 풍경”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에코아나키즘과 유사한 입장을 굳이 찾으라면―북친은 제외하고―미생물학자 르네 두보(Réne Dubos)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북친도 1974년의 책에서 두보를 최초의 에코아나키스트로 기술하고 있습니다.(M. Bookchin, Our Synthetic Environment, Newyork: Colophon 1974) 인간의 이성과 창조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점에서 두보와 북친의 견해는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북친은 생태학을 보다 근본적인 사회학적인 개념으로 이해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억압적인 산업 자본주의의 세계를 반위계적 사회관계에 근거한, 탈중심적-민주적 공동체로 변형시켜야”하며, 여기서는 “태양에너지와 같은 생태기술, 유기 농업, 인간적인 규모의 산업이 지배적이 될 것”이라는 주장(M. Bookchin, Remaking Society: Pathways to a Green Future, Boston: South End Press 199O)은 에코아나키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환경윤리학의 차원에서 북친은 두보를 버리고 존 클락(John Clark)과 더불어 비인간중심주의적 입장을 취합니다. “두보의 입장이 인간생태학이라면, 북친의 그것은 에코아나키즘”(Thomas Berry, ‘The World of Re'ne Dubos’, Amicus Journal, Winter 1991)이라는 토마스 베리(Thomas Berry)의 지적은 두 사람의 차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지향하고 있는 에코아나키즘은 이렇습니다: 비인간에서 인간을, 자연에서 사회를 도출하는 작업에서 어떤 불변의 법칙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은 사회에 생태윤리―자기선택과 진화를 통한 자유와 개체성의 보장에 근거한 상이성과 참여의 원리―를 제공해주며, 지배와 위계질서를 비교, 변경하는 패턴을 제공하고, 기존의 위계질서와 지배를 부정하도록 해준다는 의미에서 과ׂ정ׂ의ׂ철ׂ학ׂ이며, 참ׂ여ׂ의ׂ철ׂ학ׂ입니다.
에코아나키즘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거주 환경이나, 지구의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리·보호·보존의 이념은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보수적이며, 인간중심적이라는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사회관계에 대한 생태학적 혁명이 선행되지 않으면 어떤 환경운동도 환경관리윤리(ethics of environmental management)에 불과한 것이지요. 에코아나키즘은 장기간의 지배와 억압적인 인간 정신과 체제인데, 그것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그리고 인간의 자연에 대한 억압과 지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의 갈등은 인간과 인간의 갈등이 확대되어 발생합니다. 생태(학)운동이 모든 측면에서의 지배의 문제를 포괄하지 않는다면 우리 시대의 생태운동의 근원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생태(학)운동이 단순히 오염 통제나 환경 보존을 위한 통제라는 개혁적 수준에 머문다면―한마디로 보다 광범위한 혁명의 개념으로 다루지 않고, ‘환경주의(environmentalism)’에 머문다면―자연적, 인간적 착취라는 기왕의 체제에 봉사하는 운동이 되고 말 것입니다.
3. 과제3: 포스트모더니즘과 에코아나키즘
이제 포스트모더니즘과 에코아나키즘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전후 프랑스의 지적 보헤미언 사르트르는 휴머니즘을 옹호함으로써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실존주의에서⇒러시아 공산주의⇒중국 모택동주의를 전전하면서 정치적 광대노릇을 하였지만, 실상 그는 만년에 “아나키즘이 자기 사상의 변치 않는 기반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던은 68봉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68봉기(일명 68 사태)의 원동력은 아나키즘이었습니다.
전후부터 6O년대 말까지 프랑스 지식인들의 실존적인 문제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돌파구를 마련하였습니다. 68봉기는 지적인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급진주의 학생들조차 포스트모더니즘을 알지 못했습니다. 6O년대에 등장한 푸코와 같은 ‘강단의 스타’들은 5월 학생 봉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급진파 학생들의 사상적 기반은 사르트르의 휴머니즘, 카스토리아디(Cornelius Castoriadis)가 이끄는 「사회주의 또는 야만(Socialisme ou barbarie)」 그룹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기 드보르(Guy Debord)의 상황주의,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일상성 비판, 그리고 문화적 아나키즘이었습니다. (학생봉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프랑스 사상가들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Arthur Hirsch, The French New Left (Boston: South End Press, 1981)를 참조하십시오. 히르쉬는 꽁방디(Daniel Cohn- Bendit)가 관계하고 있던 <Noir et Rouge그룹>과 상황주의자들의 영향을 빠뜨리고 있기는 하지만, 봉기의 이데올로기적 근원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습니다)
68봉기의 실패로 유럽과 미국에서는 신좌파가 몰락하고 허무주의적 반동의 길을 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은 반인간주의로 낙인찍히고 있습니다. 2O세기의 마지막 2O년 동안 니체,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6O년대 혁명운동의 이론적 중심이었던 아나키즘의 무기력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들 추상적이고 심정적인 아나키스트들은 이성적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후기-산업사회의 제 문제를 제거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모호하고 신비적인 푸코의 글은 사회적 해방을 성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푸코에 의하면 “우리는 현존 사회 질서에 저항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오직 ‘국지적 폭동’이라는 방어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계속해서 푸코는 “우리는 무소불위의 ‘진리 체계’의 권위에 도전하고 항의하고 타격을 가할 수는 있으나, 기존 질서와 철저히 결별하고 그 자리에 진정으로 해방된 질서를 대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적 삶과 그것의 불가피한 제도화는 본질적으로 복종과 지배의 체계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 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저작들, 특히 짧은 논문 ‘Subject and Power’에서 푸코는 “현재 내 연구의 일반적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주체”라고 선언했다. 이런 방향 전환은 “주체의 객관화에 대한 연구에서 권력의 정의를 사용할 때 그 정의의 차원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목표는 우리 자신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는 수백 년 동안 강요되어 온 이런 종류의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개체성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주관성을 촉발시켜야 한다.” Hubert L. Dreyfus and Paul Rabinow, Michel Foucault: Beyond Structuralism and Hermeneutics, 2nd e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3), 2O9, 216. 체계가 원하는 존재가 되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형태의 주관성을 촉발시키라는 푸코의 요구는 6O년대 초에 제기되었지만 결국 나르시즘의 숭배로 빠져 지배질서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렇기 때문에 에코아나키즘은 우리 자신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킬 필요를 강조하는 것이다.
푸코가 세계 내에 존재하는 부정의를 근심하면서 인간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전투적으로 행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인도적인 인물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는 자신이 행동의 원리로 삼는 철학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런 철학이 출현을 다방면으로 훼방 놓고 있습니다. 푸코의 권력비판은 실상 우리에게서 운명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빼앗고, 니체와 더불어 신의 종말뿐 아니라 인간의 종말을 외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푸코의 반인간주의, 계몽의 가능성의 거부, 역사에 대한 무관심, 지배의 체제로서의 진리관 등은 사회를 너무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는 참여적인 프랑스 지식인의 전형적인 이미지와는 좀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푸코는 불과 2O년 동안에 스탈린주의⇒모택동주의⇒허무적인 생활양식 아나키즘을 전전하였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정신분열은 가족 내부의 병리현상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병리현상이다. 그들은 이것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적 접근과 다른 점이라고 주장합니다. 급진적 지식인의 과제는 사적인 병리현상을 포괄하는 사회적 영역을 탐구하되, 그것을 ‘미시정치적 수준’에서 행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르페브르의 일상생활(le quotidien)에 대한 강조와 유사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진정한 혁명운동이라면, 거대한 사회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개별적인 인간 ‘욕망 기계’ 내의 에너지 차단을 해방시켜주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하여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의식적 수준에서 혁명 집단은 권력의 장악에 있어서조차 종속 집단으로 남아 있다”고 주장합니다(Gilles Deleuze and Feʼ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R. Lane, New York: Viking Press, 1977).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이면에는 “욕망-생산”의 의식적 수준을 획득한 뒤에도, 혁명 “기계”가 어떻게 욕망 및 리비도적 성-정치와 함께 고조되어 소박한 “생활양식 아나키즘”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에코아나키즘의 수준에서 보면 여전히 사적인 수준의 해방입니다.
4. 과제4: 세계화와 에코아나키즘
이제 전략적인 차원을 넘어 좀 큰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에코아나키즘이 세계화에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현대’라고 부르는 시대는 분명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울리히 벡의 표현을 빌어 말하자면 우리 시대는 ‘제1현대(Der erste Moderne)’에서 ‘제2현대(Der zweite Moderne)’로의 이행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개념은 Ulrich Beck, Schöne neue Arbeitswelt, Frankfurt/M, Suhrkamp 1999의 3장, 그리고 Ulrich Beck, Die Erfindung des Politischen, Frankfurt/M, Suhrkamp 1993의 3장, 4장에 자세히 논의되고 있습니다.
‘제1현대’에서 사회는 영토적으로 이해되었으며, 그것은 오직 국가로 조직화될 때 의미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또 거기서는 나와 너를 분명하게 경계지우는 통일된 집단행동과 집단적 정체성(계급, 신분, 종교적·인종적 집단, 여성과 남성, 민족들)이 있습니다. 현대화는 일종의 합리화―정확히 말하자면, 단선적 합리화―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화는 더 많은 지식, 더 많은 학문, 더 많은 통제 그리고 더 큰 안전을 가능케 해주는 것으로 받아 들여졌습니다.
여하튼 합리화를 모토로 한 제1현대의 이 모든 기본 전제는 현대화과정 속에서 관철되었고, “자연화”되었습니다. 문명적 위협과 불확실성의 전지구적 성격을 갖는 제2현대로의 이행은 개인화(Individualisie- rung); 세계화(Globalisierung); 정규 노동의 감소와 비정규 노동의 증가; 성혁명(Geschlechterrevolution); 생태계 위기라는 다섯 가지 특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런 징후들에 직면하여 사회과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미지의 세계사회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기 위해 새로운 범형이 필요합니다. 나는 에코아나키즘으로 그러한 범형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국민국가라는 범형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 정치이론의 결함들로부터, 또 현대 정치이론이 길을 연 새로운 정보기술과 전지구적인 행위가능성으로부터 모더니티에 대한 저항이 생겨났습니다. 에코아나키즘은 이러한 반-모더니티의 도전에 직면하여 모더니티를 회피하거나, 포스트모던으로 초월하거나 하지 않고, 그것을 더욱 진전시킵니다. 에코아나키즘은 사회의 제 영역에서 역동적인 창조성을 발휘하게 하기 위하여 점증하는 문명의 불확실성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를 가르치고 배우는 자유교육제도를 활성화할 것입니다. 이러한 진보를 위하여 우리는 세계시민적 태도와 세계시민적 생활방식을 배우고 실천해 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국사회에서 에코아나키즘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중요한 문제들 중에서 현대화 과정, 특히 기술과 경제에서의 엄청난 압축 성장과 몇 년 전에 한국이 경험해야 했던 세계화의 부정적인 결과들을(금융위기와 IMF)을 정치적·사회적 현대화와 연관하여 생각해 보는 일일 것입니다. 에코아나키즘이 세계화의 부정적인 귀결들에 대항하는 유효한 이론적·실천적 지침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심화는 새로운 문제점들을 제기할 것이지만, 내가 보기에 보다 많은 민주주의만이 현실적이고, 이상적인 해결방안이라면, 에코아나키즘은 현대 민주주의의 무기력을 치유하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것입니다. 에코아나키즘은 민주주의 문화, 그리고 한국의 정치적 모더니티가 문화적, 종교적, 가족적, 법적인 차원에서의 한국 전통과 연결하는 이른바 “한국적 모더니티(koreanische Modernita¨t)”를 만들어 가는 실천적 지침이라는 것입니다.
Ⅳ. 아나키 공동체를 향하여
이상의 논의를 구체화하기 위해 나는 새로운 삶의 범형으로써 “아나키 공동체”를 제안합니다. 아니키 공동체는 모든 성원이 서로 얼굴을 알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 규모여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권위에 의한 규제없이 자유로운 공공체계(행정기능)의 운용을 가능하게 해주고, 경제적으로는 익명적 생산을 막을 수 있기 때문에, 생산과 분배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진정한 결핍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는 의사결핍(Pseudo-Not)을 줄일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친한 공간(intimate space)의 도덕만이 작동하기 때문에, 강제된 사회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훔쳐가는 권위,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이는 생태문화적으로도 바람직한 방향전환입니다.
아나키 공동체에서는 많은 재화들이 ‘교환금지’, 말하자면 지하자원, 공기, 물, 바다, 강, 삼림 등 모든 자연자원은 교환될 수 없습니다. 교환될 수 없으므로 값이 매겨지지 않고, 모든 사람이 공동으로 이용합니다.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물건(상품이 아니라)에 표현되어 있는 노동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공동체 내의 교환에서 물건은 가격이나, 만든 사람의 인격적 권위에 의해 값이 매겨지지 않고, 투여한 노동의 질에 의해 매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쟁이 없는 무위자연의 세상이 아니다. 아나키 공동체는 만인에게 불평등한 풍요를 평등한 풍요사회로 바꾸어 준다는 맑스주의적, 현실사회주의적 희망의 카드로 사람들을 꼬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거꾸로 상호의존적인 이익관심을 공유한 “자유로운 개인의 자율적인 동의”에 의해 만인에게 평등한 결핍사회를 공공연히 주장합니다.
그러면 아나키 공동체가 자본주의로 타락하지 말라는 보장은 있는가? 그것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타인의 생산수단이나 노동을 전면적으로 장악할 방도가 없다” 공동체 사회이론의 일반적 원리에 기초해 있습니다. 생산수단의 장악은 단순히 개인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기인합니다. 아나키즘은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권력을 원천 봉쇄하기 때문에, 자유 노동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인간이 자유로운 노동을 통해 자신을 구현할 수 있는 사회하면 자신이 소속된 결사체에 반감과 저항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고도한 기술혁명의 정점에 서 있음에도 인간은 기술에 의지해서 살라는 명령보다는 그 기술을 의심하라는 명령을 더 신뢰합니다. 실로 21세기는 거대한, 집단적, 공격적이고, 이기적인, 한마디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어울리는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의 범형을 찾으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요구는 우리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구체적이고 절박합니다. 나는 아나키 공동체에서 그 가능성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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