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286호 (2013.03.15 02:5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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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인 게 부끄러울 때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고 외치는 진보에서도 부조리하고 부끄러운 관행들이 정당화되곤 한다. 성찰보다는 자기 주장의 옳음만 강조하는 이들을 볼 때 진보라는 편에 서기가 꺼려진다.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지난해 겨울, 따뜻한 연말연시를 보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동네에서는 나름 진보적이라 알려진 교수라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첫 만남에서 어째 덤터기를 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 한번 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가 기획하지도 않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어떤 문제의식과 관점으로 쓰는지 알 수 없으니 보고서를 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한숨도 쉬었지만 아르바이트이니 어쩔 수 없다며 꾸역꾸역 보고서 하나를 썼다.
연말이 지나고 1월 말쯤에 메일이 하나 왔다. 보고서 내용이 부실하니 약속했던 돈을 깎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최종 제출된 보고서를 보니 그 지역 사정을 약간 추가한 정도였고 수정된 내용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편집을 하고 최종 보고 때 마무리를 하며 품을 들였으니 그만큼 비용을 가져가겠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보고서와 관련된 일을 했고 애초에 없던 얘기가 나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그는 답장에서 이 보고서에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지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황당한 일이었다. 보고서 하나를 거의 다 작성했는데 어떤 노력을 더 증명해야 할까. 그 교수는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지만 그 얘기를 나누러 그 동네까지 갈 생각이 없었다. 자기 노력을 증명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대학에 있을 때 여러 연구 용역을 했지만 연구 책임자가 자신의 몫을 다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연구 용역이 대학과 대학교수를 통하니 연구 책임자는 용역을 수주하는 일만 했고 나머지는 그 프로젝트에 결합된 연구자들의 몫이었다. 공동 연구라고 말하지만 실제 관계는 갑을 관계와 같았다. 대학에서는 그런 일이 ‘관행’처럼 얘기되고, 그 관행에서는 진보·보수 어느 쪽도 자유롭지 않았다.
좋은 사회를 만들겠다고 외치는 진보에서도 부조리하고 부끄러운 관행들이 정당화되곤 한다.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지식인이지만 자신이 운영하는 단체나 출판사에서는 대표나 경영자로서 군림하려는 사람들의 얘기를 종종 듣는다. 자기 자신도 실현하지 못하는 원칙과 가치를 상대방에게만 요구하는 인간들을 보기도 한다. 밖으로는 좋은 구호를 내걸지만 그 구호들이 단체 내부의 운영 과정에 반영되지 않고, 그 이유가 활동가들의 역량이나 경험, 인성의 부족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자기 주장을 삶으로 증명하지 않는 사람들
어느 한 편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살다보니 내 귀에는 그런 얘기가 자주 들린다. 그런 민낯을 대면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속에서 열불이 난다. 내 마음이 이런데 어떻게 그 사람이나 단체, 운동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며 지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가끔은 진보라는 편에 서기가 좀 꺼려진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대중의 의식수준이 낮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자기 주장을 삶으로 증명하지 않는 자신을 먼저 탓해야 옳지 않을까? 어찌 보면 진보라 불리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성찰보다는 자기 주장의 옳음과 정당함만을 강조한다. 진보가 고립된 것은 그렇게 자초한 면도 크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부끄러운 선택을 할 때도 있다. 기득권층이 그런 선택을 힘으로 합리화한다면, 진보는 그것을 성찰하고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먼 미래를 위해 현실을 참고 견디라며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않고 지금의 어려움과 행복을 서로 공유할 때 진보적인 사회는 실현되리라 믿는다. 이 역시 남에게만 요구할 문제가 아니라 나 스스로 실현해야 할 얘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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