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맑스코뮤날레 학술문화제 발표논문
<김세균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2005-06-07 14:05:19
맑스 사상과 차이의 철학
이 성 백(서울시립대, 철학)
1. 탈현대주의와 20세기 후반 서구의 시대인식
이차대전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서구사회에는 1960년대에 들어 다시 사회적 변혁의 파동이 몰려온다. 68혁명을 정점으로 한 이 파동 속에서 서구사회는 그 토대인 자본주의 경제의 축적체제에서부터 정치, 문화와 윤리적・정신적 가치관을 포괄한 상부구조의 전 영역에 걸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산업구조변동, 문화영역의 변동 등 모든 영역에서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현상들이 전개되고, 더욱이 환경과 여성 문제 등을 위시한 새로운 문명적, 사회적 모순들이 분출한다. 이러한 대대적인 전 사회적 변동은 이제 서구가 새로운 역사적 시대로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감지되어 이른바 각종 “포스트” 담론의 유행이 연출된다. 당시 범람한 수많은 포스트주의들은 크게 보면 탈산업주의(postindustrialism)와 탈현대주의(postmodernism)의 두 큰 줄기로 가름된다.
탈산업주의는1) 전반적으로 이 시기의 변화에 대한 우파쪽의 이념적 대응에 해당한다. 당시 서구자본주의 사회는 케인즈주의적, 포드주의적 축적체제의 삐걱거림, (탈산업주의론의 이념적 원조격인 다니엘 벨의 상황진단에 따르면) 경제와 문화사이의 모순의 증대, 이에 더해 자본주의사회의 변혁을 외치는 68혁명으로 내우에 처하고, 밖으로는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현존사회주의”의 강화로 외환에 처한다. 이런 수세적 상황에서 우파는 이 시기의 변화를 자신들의 이해와 관점에서 설명할 거시적 사회이론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 탈산업사회론이 대두된다. 탈산업사회론은 이 시기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를 서구사회가 이제 산업사회로부터 벗어나 탈산업사회란 새로운 역사적 시대로 이행해가고 있고, 당시의 사회적 모순과 혼란을 이행기의 일시적인 교란현상으로 설명한다. 특히 탈산업주의는 의사역사철학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맑스주의의 역사유물론에 대항하여 미래 역사 발전에 대해 이와 다른 로드맵을 제시해야 할 이데올로기적 경쟁의 필요에서 형성되었다. 당시 소련은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급진적인 변화를 인류역사발전의 5단계론으로 이해되고 있는 역사유물론에 따라 이제 자본주의가 몰락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해가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사회주의의 역사적 승리를 환호하였다.2) 탈산업사회론은 이후 계속 개념적 진화를 하면서 현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정당화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는 정보사회론 내지 지식기반사회론 그리고 지구화(세계화)론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파의 탈산업주의에 대해 좌파쪽에서 대두된 포스트담론이 탈현대주의이다. 탈현대주의는 문제 설정의 지평을 계급론의 틀에서 현대문명 자체의 근본적인 성격을 문제삼는 것으로 확장한다. 서구사회에서 초래되고 있는 여러 사회적 모순들의 원인을 본질적으로 억압성을 내포하고 있는 ‘현대’의 현대성 자체에서 찾고, 이제 현대라는 한 시대로부터 탈현대의 시대로 이행해 가야 할 것을 설파한다. 68혁명은 서구 좌파의 이론과 실천의 공간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이전까지 좌파들은 주로 맑스주의의 이념적 틀 내에 있었으나, 60년대에 들어 맑스주의에 일정한 한계와 비판을 설정하면서 비맑스주의적이거나 탈맑스주의적인 경향의 좌파들이 등장한다. 탈현대주의는 일의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맑스주의와 긴장 내지 대립 관계를 가지면서 등장한 좌파의 새로운 경향이다. 현대와의 단절에 입각한 탈현대주의에 있어서 맑스주의는 현대성에 기반을 둔 해방이론으로서 현대성에 고유한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기각되어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탈현대적 맑스주의로 변형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탈현대주의와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탈현대주의는 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이 탈현대주의를 독일에서 중심적인 경향이었던 네오맑스주의와 비교해 보면, 이 두 경향은 시대 상황과 현실 모순의 인식에 있어서 유사성을 보인다. 그런데 원인을 분석, 진단하는 철학적 구도 설정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탈현대주의는 원인을 현대성으로 진단하고, 현대성의 청산을 처방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현대성의 근본인 합리성과 이성에 대해 극단적인 혐오감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와 달리 네오맑스주의는 이성 자체가 아니라, 이성의 변질과 왜곡을 문제로 보고, 따라서 이성 개념의 새로운 구축에 근거하여 미완의 현대성의 기획을 바로 세우는 것을 기본 구도로 삼는다. 이 두 경향의 비교는 뒤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탈현대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있어서 여러 가지 고려할 점을 시사한다.
이 글은 전통적 좌파이론인 맑스주의와 긴장 내지 대립 관계를 갖고 새로운 좌파이론으로 등장한 탈현대주의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시도한다. 비판한다고 해서 탈현대주의에 대해 어떤 부정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갖고 있거나, 맑스주의의 입장에서의 단순 반격으로 오해되어서도 곤란하다. 맑스가 틀렸다고 하니까, 맑스가 아니라 네가 틀렸다는 식으로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비판한다함은 탈현대주의가 해방의 담론적 대안을 얼마만큼 적절하게 발전시켰는가, 어느 점에서 이전의 논의를 넘어 새로운 이론적 기여를 달성하였으며, 어느 점에서 한계가 있는지를 짚어본다는 의미이다. 특히 논의의 초점은 맑스주의와 탈현대주의의 관계에 맞추어질 것이다. 과연 탈현대주의의 맑스주의 비판이 정곡을 찌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지점에서 도리어 길을 잘못 들었는지 따져 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찰의 목적과 결론이 탈현대주의와 맑스주의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렸다는 양자택일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20세기 후반에 서구의 시대상황은 변화하였다.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발전된 고전적 맑스주의의 틀 안에만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맑스주의는 노동해방에 맞추어져 있던 고전적 맑스주의로부터 시대 변화에 조응하여 노동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간을 비천하게 만드는 모든 상황들인 환경, 여성, 문화, 욕망,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보화 등 새로운 사회적 모순들을 포괄하는 사회이론으로 발전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3) 이를 위해서 맑스주의는 탈현대주의의 비판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이론들로부터 수용할 것은 수용하여 이론적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 다른 한편 뒤에서 지적할 것이지만 탈현대주의는 너무 성급하게 많이 나아간 면이 없지 않다. 동일성 개념, (모순) 변증법, 이성은 탈현대주의가 ‘매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방적으로 억압적이지 않다. 도리어 이것들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가 탈현대주의가 현실의 모순을 넘어 대안을 사고하고 실천하는 데에 자기 스스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본론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우선 탈현대주의가 제기하고 있는 모든 이론적인 문제를 여기에서 일일이 다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탈현대주의의 모든 문제들에 핵심적인 관건이 되고 있고, 그래서 이것만 해명되면 다른 문제들도 거의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요충’을 찾아 이것을 집중적으로 고찰하는 전략적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탈현대주의 사상가를 일일이 다 거론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는 들뢰즈를 주로 하여 논의를 해나갈 것이다. 그 이유는 우선 요즘 한국에서 프랑스 탈현대주의자들 중에서 들뢰즈가 주된 관심이 되고 있고, 또 필자가 보기에 탈현대주의자들 중에서 그의 사상이 깊이와 폭에 있어서 단연 탁월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사상은 한국의 들뢰지안들이 믿고 싶어하는 것처럼 ‘들뢰즈적 맑스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맑스주의와 친화적인 위치에 있기도 하다. 아마도 “탈현대 맑스주의”가 가능하다면, 아마도 들뢰즈가 가장 그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필자에게는 들뢰즈의 사상은 ‘무늬만’ 맑스주의이지 그 이론의 근본적 성격상 맑스주의로 분류될 수 없다.
탈현대주의는 합리성, 이성의 원리에 의해 세워진 현대가 억압적이라는 가설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점에서 현대가 억압적이라는 것인가? 이에 대해 탈현대주의는 그 원인을 동일성의 원리에서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과 차이의 개념이 탈현대주의의 요충이다. 그래서 본론의 첫 순서로 들뢰즈가 동일성 개념의 억압성을 어떤 식으로 해부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런데 동일성 비판은 그 역사를 돌아보면 들뢰즈나 데리다 등의 탈현대주의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이미 이보다 앞서 아도르노가 동일성 원리 비판을 탁월하게 정식화해놓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아도르노가 맑스의 "자본론"의 상품장으로부터 동일성 원리 비판을 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맑스야말로 동일성 원리 비판의 원조란 말이 아닌가? 두 번째로 상품장에서 동일성 원리 비판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제기된다. 탈현대주의가 현대의 억압적이고 지배적인 근거를 동일성 개념에서 찾고 있고, 헤겔과 더불어 맑스의 변증법 또한 현대의 지반위에 있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지만, 바로 그 동일성 비판이 맑스로부터 유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 문제에 대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며, 이를 세 번째로 다루게 될 것이다. 특히 여기에서 탈현대주의의 철학적 문제 설정의 기본적인 한계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제 철학적 논의에서 장을 바꿔 자신의 ‘차이의 철학’에 근거하여 발전시키고 있는 들뢰즈의 ‘차이의 정치학’, 들뢰즈의 사회이론에 대해 고찰한다. 그의 사회이론의 근본적 성격을 규정하고, 어떤 점에서 맑스의 사회이론과 그 접근방법론에 있어서 상이한가에 주목해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 해방의 사회이론으로서의 탈현대주의의 한계와 불가능성을 지적하고 ‘네오현대(Neomoderne)’를 그에 대한 적절한 대안으로 제안할 것이다.
2. 들뢰즈의 동일성 비판과 차이의 철학
현대는 ‘이성의 시대’이며, 합리주의가 현대의 사회적, 정신적 구성 원리였다. 이성이 인간을 지배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와 평등을 가능케 하는 힘이라는 합리주의는 아무도 의심할 수 없는 자명한 원리로 받아들어져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현대 서구사회에 내부적 모순이 표출되면서 합리주의는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바로 탈현대주의의 저항이다. 탈현대주의는 현대 서구사회에서 초래되고 있는 각종 문명적 야만성, 지배와 폭력의 책임이 합리주의에 있다고 질타하면서 합리주의적인 현대를 해체하고 전복하는 ‘탈현대적 해방’을 표방한다.
탈현대주의는 이성에 “이성의 타자”를 배제, 억압, 지배하는 기제를 내장하고 있으며, 바로 이런 이성의 억압적 기제에 의해 현대 서구사회에서 문명적 야만성, 지배와 폭력이 표출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합리주의를 자유와 평등의 보증으로 믿어 의심치 않아왔던 현대인들에게 합리주의가 배제, 억압, 폭력적이라는 주장은 건전한 오성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우며 그래서 탈현대주의가 어떤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가 궁금해진다. 바로 그 근거를 탈현대주의는 동일성 비판을 통해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동일성 개념, 그리고 이에 대한 대립개념인 차이가 탈현대주의 형이상학의 요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탈현대주의의 합리주의와 동일성 비판은 다른 어떤 철학적 사조보다도 바로 헤겔주의를 중심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탈현대주의에 있어서는 헤겔철학이 합리주의와 동일성 철학의 정점으로 간주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와 더불어 헤겔주의적, 변증법적 전통의 맑스주의 또한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다. 이는 “내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야”라는 들뢰즈의 말,4) “현대 인간중심주의의 주요한 책임자들은 바로 헤겔과 맑스다”라는 푸코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5)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동일성의 형이상학에 대한 고전적이고 전형적인 사례라 할 플라톤 철학과의 대결을 통해 동일성 비판을 수행한다. 플라톤적 우주는 이데아, 복사물(copy), 시물라크라(simulacra)로 구성된다. 이 플라톤적 우주에서 이데아는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고, 지상의 물질적 대상들은 이 이데아의 복사물들이다. 그런데 이데아와 복사물의 관계는 유사성이다. 비록 복사물이 원본인 이데아와 완전히 같아질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것은 원본과 닮은 것이다. 이에 반해 시물라크라는 사물의 외양만을 본뜰 뿐 사물의 참된 본성은 가리는 것이다. 복사물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원본과 같은 것인 반면, 시물라크라는 이것이 본뜨는 것과 본질적인 측면에서 같지 않은 것, 즉 차이가 나는 것이다. 시물라크라는 원본과의 상이성과 차이 위에 세워진다.
들뢰즈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차이에 대한 동일성의 우위를 확인한다. 플라톤은 원본인 이데아와의 동일성과 유사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과의 차이, 즉 시물라크라를 추방하려고 한다. 들뢰즈는 복사와 시물라크라의 구별, 시물라크라의 추방에 플라톤주의의 실질적이고 결정적인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본다. “플라톤주의 전체는 상상(phantasm) 내지 시물라크라를 추방하려는 바로 이러한 의지 위에 세워져 있다. 상상과 시물라크라는 소피스트와 동일시된다. 소피스트는 바로 그 사악한 자요, 바로 그 아첨꾼이자 시뮬레이터(simulator)요, 바로 그 기만적인 사기꾼이다.”6) 그렇다면 플라톤은 왜 시물라크라를 추방하려 하는가? 그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소피스트들이 바로 시물라크라를 생산하는 사람들, 즉 “시뮬레이터”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선호하는 세계는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의 고요하고 조화로운 삶의 세계이다. 그런데 소피스트는 이러한 조화로운 세계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시물라크라는 추방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전복의 수단이 바로 플라톤이 그토록 추방하고자 했던 시물라크라다. 플라톤적인 조화롭고 위계적인 세계는 끊임없이 시물라크라에 의해 위협받으며, 그렇기 때문에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이 위협적인 시물라크라를 끌어들여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시도한다. 전복이란 여기에서 “복사에 대한 원본의 우위, 이미지에 대한 모델의 우위를 부인하고, 시물라크라와 반성의 통치를 예찬”7)하는 것, 한 마디로 말해 시물라크라의 우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적 세계를 전복하는 들뢰즈적 세계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가 일차적인 역할을 떠맡는 세계이다. 그러나 시물라크라에 우위가 부여된다고 해서 이것이 또 어떤 것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시물라크라의 우위는 “모델 혹은 특권적 지위라는 바로 그 관념이 도전받고 전복되는 행위”8)를 의미한다. 들뢰즈적 세계에서는 특권적 지위가 부여되는 이데아와 복사물들은 부인되고 시물라크라들만이 존재한다. 플라톤적인 동일성의 세계는 불평등한 위계적 세계인데 반해, 차이의 세계는 존재자들 사이의 위계적 차별이 철폐되고, 모든 존재자들이 시물라크라로서 대등한 지위를 갖는 평등한 세계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플라톤주의를 전복시키면서 차이의 원리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한다. 이 차이의 형이상학을 들뢰즈는 이제 동일성이 차이의 주위를 돌게 된다는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에 비유하고 있다.9) 들뢰즈에 따르면 이제 “이 모든 조짐들은 반헤겔주의로 집약될 수 있다. 즉 차이와 반복이 동일자와 부정적인 것, 동일성과 모순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10)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들뢰즈의 형이상학적 시도가 사회철학적인 관점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지점은 평등주의적 정향성이다. 그것은 존재자들 사이의 존재론적 서열을 파괴하고, 그러한 존재론적 위계제에서 억압받는 모든 존재자들의 대등성을 존재론적으로 기초지우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평등주의를 정향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점이 탈현대주의가 현대성의 억압성을 넘어서려는 해방의 철학임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3. 동일성 원리 비판으로서의 "자본론"의 상품분석
동일성 비판은 탈현대주의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이전에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과 "부정 변증법"에서 동일성 원리에 대한 비판을 사회비판이론의 차원에서 정식화하였다. 따라서 동일성 비판은 탈현대주의의 전매특허가 아니다. “동일성 원리(das Identitätsprinzip)”는 주체가 객체, 즉 자연과 사회 내에서 주체 자신과 다른 것들을 자기 자신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원리이다. 아도르노는 이 동일성 원리를 주체가 객체를 자기 수중에 장악하는 지배 원리로 해석하고 있다. 아도르노의 주장에 의하면 주체가 객체를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주체의 특정한 형식을 객체에 부과하여, 객체로 하여금 이 주관적 형식에 따르도록 강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때 객체가 주체가 부과하는 형식으로 환원되면서 객체 자체의 고유한 성격은 희생된다. 이렇기 때문에 아도르노에 의하면 동일성 원리는 객체로부터 객체 자체의 고유성을 억압하면서 객체를 주체의 형식에 복종시키는 지배의 원리이다. 동일성 원리는 사물의 즉자성을 파괴하고 그것을 인간을 위한 사물로 만드는 것이다. “계몽이 사물들과 갖는 관계는 독재자들이 인간들과 갖는 관계와 같다. 독재자는 인간들을 조종할 수 있는 만큼 인간들을 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그가 사물들을 조종할 수 있는 만큼 사물들을 안다. 이를 통해 그 자체로서의 사물은 인간을 위한 사물이 된다.”11) “만족할 줄 모르는 동일성 원리야말로 모순을 이루는 것을 억압함으로써 적대 관계를 영구화하는 것이다.”12)
그런데 아도르노의 동일성 원리 비판은 칼 맑스가 "자본론"에서 상품 분석에 적용하고 있는 방법적 논리를 발전시킨 것이다. 비록 맑스가 직접적으로 ‘동일성 원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칼 맑스는 동일성 원리라고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상품과 교환가치의 비판적인 분석에 적용하고 있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비판을 상품의 분석으로부터 시작한다. 상품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구성하는 기본 세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품이란 무엇인가?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두 요소로 구성된다. 상품은 우선 재화의 한 형태로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유용성, 즉 사용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용가치만으로는 아직 상품이 될 수 없다. 상품이 상품인 것은 그것이 구매되고 판매될 수 있는 재화이기 때문이다. 즉 상품이 상품인 것은 그것이 교환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품이 교환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하나의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된다는 것은 그 두 상품이 서로 질적으로 다른 것이지만, 그 둘을 동일한 것으로 비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물건에는 양자에 공통된 것의 동일량이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3) 상품으로부터 그것의 질, 즉 사용가치가 무시된다면, 거기에 남는 것은 그것이 노동생산물이라는 속성이다. (추상적) 인간 노동이 모든 상품에 공통된 그 무엇으로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구성한다. 노동은 모든 상품에 공통된 것으로 모든 상품을 동일한 것으로 만든다. 이때 상품의 질적 측면, 즉 사용가치는 무시되고, 상품은 특정한 양적 크기로만 나타난다. 상품은 인간 노동의 생산물이라는 관점에서 모두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며, 상품의 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투하된 노동의 양, 즉 노동 시간에 의해 결정된다. 20미터의 아마포와 저고리 1개가 등가물로 교환되는 것은 이 두 상품의 생산에 투하된 노동 시간이 같기 때문이다.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것은 상품들의 질적인 차이들은 배제되고, 인간 노동의 생산물로 동일화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품이 상품으로 현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동일성 원리에 의해서이다. 이렇게 볼 때, 상품교환사회로서 시민사회는 동일성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적인 상품생산은 맑스에 따르면 “사회적 적대”를 초래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단순 상품생산과는 달리 이윤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상품생산이다. 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해야 하며, 자본을 투자한 사람은 노동력을 이용함으로써 자본의 이윤을 실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자본의 이윤은 노동의 대가의 일부를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즉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실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간의 관계는 적대적이다.
"자본론"의 상품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동일성 원리 비판을 자본주의 상품생산의 비판에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분명 탈현대주의나 아도르노에 앞서 맑스가 동일성 원리 비판의 원조인 셈이다. 이제 여기에서 바로 문제가 발생한다. 탈현대주의에 의해 동일성 철학으로 비판되고 있는 맑스가 바로 동일성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이런 혼란이 발생했을까, 그리고 이 혼란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이제 이 문제를 다음 절에서 다루어보자.
4. 혼란의 해소 : 이성과 동일성 내에서의 차이
동일성 원리 비판은 탈현대주의에 있어서나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이성 비판과 불가분적으로 연관되어있다. 특히 탈현대주의에 있어서 동일성 원리 비판은 이성이 왜 억압적인지 그 근거를 밝히는 탈현대주의적 이성 비판의 구체적 내용이다. 그런데 이제 이성 비판에 있어서 탈현대주의와 아도르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탈현대주의에서는 이성 일반, 이성 자체가 문제인 것으로 거의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주장의 철학적 엄밀성을 위해서 탈현대주의는 이성 자체를 문제삼기 이전에 먼저 이성의 구체적인 형태들을 분석했어야 한다. 탈현대주의는 이성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기 이전에 칸트적 이성 비판의 단계를 거쳤어야 한다. 근대 철학사를 돌아보면 이성 개념은 동일하지 않고, 철학자들마다 이성 개념을 제각각 상이하게 규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철학자의 사상 내에서도 이성 개념은 여러 형태로 세분되고 있다. 칸트식으로 이성의 이와 같은 세부적인 형태들에 대한 엄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서 전체로서의 이성 자체가 억압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때에야,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탈현대주의에는 이러한 이성 개념의 분석론이 결여되어 있고, 이 점에서 탈현대주의의 이성비판은 독단론이란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탈현대주의의 이성 비판은 거의 “합리성에 대한 편집증적 공포”에 가깝다.14)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이성 비판은 이 점에서 탈현대주의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 계몽적 이성은 이성 자체 내지는 전체가 아니라,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이성의 한 형태일 뿐이다. 신화와 지배로 전락한 계몽적 이성의 본질은 객체를 주체의 목적합리성에 따라 조작하려는 ‘도구적 이성’이다. 도구적 이성은 이성 자체 내지 전체가 아니라, 그 한 형태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의 결론은 이성 자체에 대한 거부로 나아가지 않고, 도구적 이성의 지배성을 폭로하는 ‘비판적 이성’의 요청으로 나아간다. 이렇게 볼 때 탈현대주의에서는 이성의 한 유형으로서의 도구적 이성에 대한 비판이 이성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무리하게 확대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 개념들 내에서의 ‘차이’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모든 이성 개념들을 ‘싸잡아’ 하나의 이성으로 획일화하고 있다.15)
도구적 이성과 비판적 이성의 구분 이전에 이미 칸트에게 있어서 이성(Vernunft)은 오성(Verstand)과 이성(Vernunft)으로 구별된다. 이 구분은 칸트 이후 이성의 기본적인 구분으로 거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성의 특정한 형태들은 각각 그것에 부여되어있는 기능을 담당한다. 오성은 대상을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으로 주관의 합목적성(Zweckrationalität)과 연관되어 있다. 오성이 근본적으로 대상을 분리시키고, 합목적적인 데에 반해서 이성은 합목적성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분리된 것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도구적 이성과 비판적 이성의 구분은 대체적으로 오성과 이성의 구분과 일치한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성 내에서 상이한 형태들이 구분된다는 것과 이 형태들이 상이한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로부터 맑스와 동일성 개념과 관련된 혼란을 해소시킬 수 있다. 맑스에게서도 (비록 이를 그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성이 구분되고 있다는 것을 해독해 낼 수 있다. 그리고 이성의 형태 구분에 따라 맑스에게서 동일성 개념이 상이한 수준에서 다른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맑스의 관심은 현대 시민사회의 이론적 해부에 있다. 시민사회는 이의 구성원인 사적 개인들이 자신들의 물질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활동하는 영역이다. 시민사회 내에서 사적 개인들은 당연히 적은 노동과 적은 비용을 들여 더 많은 부를 산출하는 ‘합리적인’ 방식으로 행위한다. 다시 말해 목적합리성에 따라 행위한다. 시민사회는 따라서 이성의 측면에서 규정할 때 오성의 기능영역이자 도구적 이성의 영역이다. 그리고 위에서 고찰했듯이 동일성 원리가 관철되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맑스에게는 이제 제한적 구분이 따른다. 시민사회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일성 원리는 이성의 형태 중에서 ‘오성’의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는 동일성이다.
그런데 오성의 작동에 의해 목적합리성에 따라 운용되는 시민사회는 모든 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자율적인 공간이 아니다. 사적 개인들의 욕구 충족의 행위들은 상호간에 필연적으로 충돌과 분열을 초래하며(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를 수습하기 위해서 시민사회는 특정한 조절장치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 의거한 시민사회는 맑스 시대에 이르러 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적 적대’(모순)를 초래한다. 바로 이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적대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양식에 기초한 시민사회의 부정성을 발견한다. 이성 비판의 차원에서 표현할 때, 시민사회에서의 사회적 적대는 모든 사물을 교환가치의 양적 크기로 환원하는 오성의 동일성 원리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제 이 사회적 적대를 해소하는 사회적 ‘통일’이 추구되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이제 오성의 수준에서의 동일성과 다른 수준의 동일성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자본론"의 상품분석에서 오성의 동일성이 맑스에 의해 비판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다른 수준의 동일성이 등장하고, 맑스에게 있어서 이 동일성은 긍정이다. 바로 이 점에서 맑스는 의심할 여지없이 동일성의 철학의 지반에 서있다. 그리고 이 사회적 분열을 봉합하는 동일성, 사회적 적대를 해소하는 동일성은 오성과 구별되는 이성의 동일성이다. 이 이성은 맑스의 이론 전개의 취지에 입각할 때 ‘거시적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16) 자본의 지배 하에서 오성은 사적 이해에 봉사하는 ‘미시적 이성’이다. ‘미시적 이성’들은 서로 충돌하여 무정부상태와 적대를 야기한다. 따라서 맑스의 통합의 역할은 사회 전체의 생산을 계획적으로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거시적 이성’에 주어진다. 그러나 이 동일성이 탈현대주의가 비판하는 대로 억압적이고, 그래서 이제 ‘차이’ 개념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인가? 맑스에게 있어서 억압을 빚어내는 동일성은 오성의 동일성이다. 이 동일성의 억압은 이성의 동일성에 의해 해소된다. 오성의 동일성이 억압이라면, 이성의 동일성은 해방이다. 맑스는 동일성 원리의 비판자이자, 동일성 철학자이다.
일단 탈현대주의는 이성 자체를 거부하기 이전에 이성에 대한 세밀한 비판을 수행했어야 한다. 이성의 분석론의 결여는 분명 탈현대주의의 결정적인 약점이다. 맑스나 프랑크푸르트학파 중심의 네오맑스주의는 이성의 형태들을 구분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 시민사회 내부에서 억압을 야기하는 요인이 이성 자체가 아니라, 이성의 특정한 형태에 있음을 정확하게 파악해 낼 수 있었다. 탈현대주의는 이성 자체, 동일성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이제 모든 것을 동일성과 전혀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 차이 위에 세우려는 ‘차이의 철학’을 표방한다. 그러나 동일성과 이성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탈현대주의는 너무 많이 나아갔다. 그 결과로 이성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차이의 철학은 차이의 해방을 추구해 나가는 어떠한 건설적인 대안적 프로젝트를 제시하지 못하고(아예 이런 것 자체가 잘못인 것으로 거부한다), 억압적 현실을 부정하는 ‘해체’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성 자체를 전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탈현대주의에 설정된 한계는 ‘차이의 정치학’, 탈현대주의의 사회이론의 곳곳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된다.
5. 들뢰즈의 차이의 정치학 : 이론적 기여와 한계
여기에서 탈현대주의에 대한 비판을 주로 다루고 있으나, 그렇다고 서 탈현대주의가 잘못된 주장임을 밝히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비판은 탈현대주의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기여를 전제로 한 것이고, 모든 진정한 비판이 그러하듯 여기에서의 비판도 이를 통해 탈현대주의의 담론을 포함하여 좌파의 담론이 더 심화, 발전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20세기 후반기 서구유럽의 시대적 변화에서 탈현대주의는 누구보다도 이 시대를 사상적으로 앞서 읽어내려는 이론적 아방가르드였다. 탈현대주의는 기존의 이론적 사유의 형식과 내용을 획기적으로 뛰어넘는 새로운 담론을 제시함으로써 좌파 담론의 지평을 넓혔으며, 전통적 사유틀 속에서 잠자고 있던 좌파들의 잠을 깨웠다. 탈현대주의는 욕망, 차이, 문화, 권력 등 이른바 ‘미시적’ 이론 영역을 확대시켰고, 이와 아울러 노동 문제를 넘어서 페미니즘, 환경, 소수자 등 실천의 영역 또한 확대시켰다. 이런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기여를 전제하고, 이제 탈현대주의가 사회이론의 측면에서 안고 있는 몇 가지 근본적인 성격과 한계를 짚어 보도록 한다.17)
우선 방법론상의 측면에서 볼 때 탈현대주의는 철저한 개인주의의 지반에 서 있으며, 이 개인주의가 탈현대주의의 이론적 공간 전체를 횡단하고 있다. 들뢰즈의 시물라크라는 개별적 존재자, 즉 바로 개인이다. 이 개인은 다른 개인과 견주어질 수 없는 자신에게만 고유한 차이를 갖는다. 개인이 개인인 것은 다른 개인과의 구별을 가능케 하는 차이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이 이데아를 닮도록 요구하면서, 즉 이데아와의 동일성을 요구하면서 개인들의 차이를 억압한다. 플라톤주의의 동일성 원리는 차이의 억압, 차이로서의 개인의 억압이다.
아닌 게 아니라 현대 시민사회는 분명 하나의 역설에 처해 있다. 이름하여 “주체로서의 개인 속에서 개인의 죽음”이다. 전통 시대로부터 현대로의 이행은 모든 전통적인 공동체적이고 신분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독립된 주체로서의 개인을 탄생시킨다. 이 개인들에 의해 시민사회가 구성되며, 따라서 이들이 시민사회의 주체가 된다. 이 개인들은 노동을 하고, 노동을 통해 생산된 산물을 소유하는 노동과 소유의 주체이다. 이러한 현대적 주체 개념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로 정식화된다. 이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중에서도 개인의 자립성을 극단적으로 실체화한 철학이 바로 자유방임주의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단자는 모든 다른 단자와 절연되어있는 독립된 자기완결성을 갖는 소우주이다. 단자들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이 단자들로 구성되는 대우주(현대 시민사회)는 예정조화(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단자들 사이의 충돌 없이 자동적으로 조절된다. 그러나 이러한 자립적인 노동과 소유의 주체로서의 현대적 개인 속에서 개인은 주체가 아니다. 개인은 노동의 이데아에 의해 동일화되고, 차이가 억압된다. 현대적 주체 속에서 주체는 사망하였다.
이러한 현대 시민사회 내에서의 주체의 사망선고에 맑스도 당연히 동참한다. 사용가치가 가치로 환원되면서 사용가치들의 고유한 질적인 차이들이 억압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맑스에게서는 현대 시민사회에서의 주체의 범주인 노동마저 객체로서 전락한다. 이제 맑스에게 있어서나 탈현대주의에 있어서나 과제는 ‘개인의 복권’이다. 바로 개인을 복권시켜나가는 길에 있어서 맑스와 탈현대주의는 갈라진다. 들뢰즈에 있어서 이데아에 대한 시물라크라의 우위는 개별적 존재자들의 동일화되기 이전의 차이 자체를 존재론적으로 기초지우는 것이다. 차이 자체를 실체화함으로써 들뢰즈는 개인의 원본적 환원불가능성을 강조한다. 차이 자체로서 개인은 다른 어떤 것과 비교될 수도 없고, 관계맺을 수도 없다. 들뢰즈의 이 개인관은 변형된 형태의 단자론으로서 거의 절대적 개인주의에 가깝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 우주이어야 하며, 아무런 창을 갖고 있어서도 안된다. 개인을 복권시키려는 들뢰즈는 자유주의보다 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길을 택한다. 그의 극한적 단자론에서는 그 반대급부로 사회 자체가 억압적으로 설정된다. 사회란 자체가 개인의 환원불가능한 차이들을 억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들뢰즈의 이런 반사회적인 경향은 ‘수목’과 ‘근경’의 대립, ‘국가’와 ‘유목민’의 대립으로 표출된다. 들뢰즈의 탈현대주의 사회론은 사회와 개인을 대립시키고, 사회로부터 개인의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무정부주의의 입장이다. 아마도 이런 무정부주의적 입장에서 사회 자체를 적대적으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에 대해서도 혐오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조직에 있어서도 조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조직인가를 고려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소련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에 있어서 그 권위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조직의 성격이 문제인 것이지, 밑으로부터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 ‘사회적 관계의 앙상불’이라는 존재론에서 출발하고 있는 맑스주의는 무정부주의적인 탈현대주의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개인은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고, 오히려 사회 속에서만 개인으로서 자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 맑스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론적 토대 자체를 부인하는 것과 매한가지이고, 현실성을 결여한 관념적 공상에 불과하다. 마치 부르주아적 자유주의가 근대 시민사회의 주체로서의 개인을 설정하면서 로빈슨 쿠르소란 허구적 개인을 만들어낸 것처럼. 맑스에게서 주체의 죽음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 자체가 아니라, 현대 부르주의 시민사회라는 특정한 사회 형태이다. 그리고 개인의 복권의 길도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의 특정한 형태(die bestimmte Form)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실현하는 사회의 특정한 형태로의 이행이다. 이 특정한 사회의 원리를 맑스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라고 불렀다.18)
이제 탈현대주의의 한계가 분명해진다. 탈현대주의의 개념적 장치들의 설정은 현실성을 갖지 못한다. 이성 자체, 사회 자체를 문제 삼고, 욕망 자체, 차이 자체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성은 이성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사회도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성 자체, 사회 자체는 부인이나 부정될 수도 없다. 모든 존재자는 오로지 특정한 형태로 규정된 존재자로서만 현존한다. 자체를 논하는 탈현대주의 담론은 현실에 지반을 갖지 않는 관념적 공상에 불과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개인을 복권시키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 바꾸어서 말하면 탈현대주의는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탈현대주의는 관념론적인 공중으로부터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들뢰즈가 맑스주의에 친화적이고 심지어 맑스의 객관적 역사유물론에 대해 욕망의 관점에서 역사유물론을 재구성하는 주관적 역사유물론을 서술해 내고 있지만, 들뢰즈의 욕망의 유물론은 절대적 개인주의에 근거하고 있는 그의 방법론 때문에 맑스주의로 분류될 수 없다.
탈현대주의 사회이론의 주요 특징의 하나는 미시적인 영역을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 좌파이론인 맑스주의의 투쟁 전략이 자본관계와 국가란 거시적인 영역에 한정되어 왔다면, 탈현대주의는 의식, 언어, 욕망, 문화, 일상생활 등의 영역으로 논의의 공간을 확대한다.19) 이는 또한 정치적 실천 전략과도 연결되는데 전통적인 계급투쟁과 같은 거시정치적 투쟁에 대해 미시정치적 투쟁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현대 시민사회에서 지배의 방식이 국가의 강압적 지배에서 일상의 미시적 영역으로까지 침투,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미시정치적 투쟁 전략은 전통적인 투쟁 전략의 한계를 넘어 변화된 지배 현실에 조응하여 투쟁 전략을 확장,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명확히 따져보아야 할 것은 미시정치적 전략과 거시정치적 전략 사이의 선차성의 문제이다. 국가와 같은 거시적 권력 구조가 시민사회 내에서의 일상적인 미시적 권력에 의존하는 것인가, 아니면 거꾸로 미시적 권력은 거시적 권력이 지배의 강화를 위해 미시적 영역으로까지 지배 방식을 확산시킨 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 푸코의 미시권력론은 미시적 영역에서 지배가 조직되고 이로부터 국가적 권력이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국가가 거시권력이 되기 위해서는 사전에 일상생활의 광대한 분자적 영역이 조직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푸코에게 있어서 미시권력을 깨는 것이 핵심적인 투쟁전략이 된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는 현대 시민사회에서의 미시권력과 거시권력 사이의 관계가 전도된 것으로 보이며, 현대 시민사회에서의 지배 방식의 역사적 발전과정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고전적 자본주의의 시기에는 기본적으로 지배 계급은 국가권력을 억압적 국가장치를 기본으로 하여 사회적 지배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배 영역은 점차 일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지배방식도 다원화되었으며 미시적 권력 장치가 발전되었다. 이는 비록 제한된 형식적 민주주의체제 내에서이긴 하지만 대중들의 정치적 참정권의 점진적 확대에 따라 지배계급의 지배 체제 유지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강구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적으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대중들로부터 정치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강압적 국가장치만으로는 더 이상 지배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와 구분되는 의미에서 일상적인 시민사회 영역 속에서 대중으로부터 정치적 지배에 대한 동의를 얻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정당성 획득의 기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렇게 해서 현대 서구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지배 체제의 유지에 있어 미시권력의 작동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고, 따라서 미시권력에 의해 지배체제내로 코드화된 대중들을 탈코드화하는 미시정치 투쟁 전략은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탈현대주의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탈현대주의에 있어서 거시정치적 투쟁에서 미시정치적 투쟁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지면서, 거시정치적 투쟁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투쟁 방식으로 비판되고 있다. 거칠게 말하면 이제는 미시정치적 투쟁만이 적절한 투쟁 전략이다. 그러나 이것은 탈현대주의가 권력과 지배 문제에 있어서 일면만을 본 것이다. 미시정치적 지배가 거시정치적 지배와 기계적으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작동되지 않으며, 상호 변증법적인 의존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미시권력의 작동은 거시권력의 작동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함으로써 지배 체제를 유지케 한다. 그러나 미시권력의 통제와 유지는 거시권력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는 일상성의 영역에서 미시권력의 지배체제에 균열이 생기자마자, 바로 거시권력이 전면에 나서서 이를 강압적 권력의 행사를 통해 봉합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지배권력은 평상시에는 웃는 얼굴로 대중에 대한 지배를 수행하지만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그 강압적 지배의 본성을 드러낸다. 따라서 좌파의 투쟁 전략도 이제 ‘낡은’ 거시정치적 투쟁을 뒤로 하고, 새로운 미시정치적 투쟁으로 옮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 투쟁을 변증법적으로 상호보완하는 거시정치적 투쟁과 미시정치적 투쟁의 변증법이어야 한다.
6. 포스트모던에서 네오모던으로
지금까지 탈현대주의의 근본적인 원칙적인 문제의 측면에서 그 비판을 시도해 보았다. 차이를 중심 개념으로 제시하는 탈현대주의의 철학적 시도를 그 요충이라 할 동일성 개념 비판과 관련하여 고찰하였다. 여기에서 탈현대주의의 원칙적인 한계를 지적하였고, 아울러 이 원칙의 한계로부터 귀결될 수밖에 없는 사회정치이론적인 문제점을 원론상의 수준에서만 몇 가지 지적하였다.
탈현대주의는 이성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어떤 건설적인 대안적 프로젝트를 제시하지 못하고, 억압적 현실을 부정하는 ‘해체’ 이상의 이론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특히 이성의 분석론의 결여는 탈현대주의의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며, 도구적 이성을 제어할 대안적 이성 개념이 시도조차 되지 못하였다. 탈현대주의의 차이의 정치학은 절대적 개인주의로부터 출발하여 개인과 사회 자체를 대립적으로 놓고 사회 자체를 억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 한에서 차이의 정치학은 특정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관념적으로 사고될 수 있는 사상에 불과하며. 현실성을 획득할 수 없다. 탈현대가 이성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사회 자체를 해체한 개인의 자립성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것으로서의 현대의 너머는 이미 애초부터 불가능한 기획에 불과하며, 그런 의미에서라면 현대를 넘어선 바깥으로서의 탈현대는 존재할 수 없다.
문제는 이성이냐 욕망이냐, 동일성이냐 차이냐, 개인이냐 사회냐의 대립과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욕망의 새로운 관계, 동일성과 차이의 새로운 관계, 개인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의 설정에 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점은 현대가 시작된 최초의 계몽의 기획과 현재까지 진행된 실증적인 계몽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탈현대주의가 탈현대 세계 속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푸코의 표현을 빌면, ‘존재의 미학’20)에서 찾을 수 있다. 탈현대의 세계는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사는 문화적 세계이다. 이 ‘존재의 미학’에 반해 현대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존재의 경제학’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인간이 자기유지, 경제적 소유의 논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이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 현대의 실증성이다. 그래서 탈현대주의가 그렇게 설정했던 것처럼 ‘존재의 미학’은 현대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애초에 계몽의 기획은 ‘존재의 경제학’ + ‘존재의 미학’이었다. 그러던 것이 계몽의 역사적 발전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적 경제적 생산양식이 성장하고 자본의 논리(도구적 이성의 논리)가 전 사회를 포섭해 들어감으로써 ‘존재의 미학’의 길은 봉쇄되고 ‘존재의 경제학’만이 지배하는 사회로 되어버렸다. 이미 맑스 시대에 계몽의 야만으로의 변증법적 전락은 그 모습을 드러내었고, 이에 맑스주의는 계몽의 본래적 기획을 복원하여 애초의 기획대로 현대의 역사가 나아가도록 하려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야만으로 전락한 계몽은 이전보다 더 많은 새로운 사회적 모순들을 초래했다. 야만으로 전락한 계몽, 자본의 논리와 도구적 이성의 논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탈산업주의가 산업사회의 종말과 그 이후의 역사적 시대의 도래를 노래하고 있으나, 탈산업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 도구적 이성의 논리는 도리어 전 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있고, 후기산업주의는 이를 은폐하려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탈현대주의도 없다. 이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성 개념의 규정, 이성과 욕망의 관계의 새로운 설정을 통해 계몽의 기획을 복원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을 뿐이다. 이는 탈현대주의자들이 추구하는 탈현대주의가 될 수 없다. 이는 여전히 계몽의 기획안에 현대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네오모던’이라 부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제 ‘네오모던’이라 부르지만, 이 ‘네오모던’은 맑스주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앞으로 좌파의 길도 현실성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을 불가능한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네오모던의 길을 대안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다.
1) postindustrialism은 한국에서는 현재까지 일반적으로 후기산업주의로 번역되어 왔으나, 산업사회의 종언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탈산업주의로 표현한다.
2) 이제 다 지난 뒤에 이런 생각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마는 당시 소련과 동구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바라보며 승리감에 취해있었으나, 정작 자체 내부적으로 사회개혁이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못하였다. 이미 이때 동구권 경제도 개혁이 필요했고, 또한 개혁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자원도 있었다. 단 하나 결여된 것이 있었다면, 개혁의 정치적 주도세력의 부재였다. 이미 지배권력구조가 된 국가관료주의체제는 체제에 위협을 가져올 개혁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985년도의 개혁은 그를 위해 가용할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이 고갈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3) 인간 해방의 이론으로서 맑스주의를 인도하는 기본 원칙은 “인간이 비천하게 되고, 노예화되고, 버림받게 되고, 경멸적인 본질이 되어버리는 모든 상황”의 비판과 전복에 있다. 맑스 당시에 이것은 자본에 의한 노동의 착취에 있었다. 노동 착취만이 아니라 인간이 비천하게 되는 다른 상황들이 있으면, 이는 당연히 맑스주의의 과제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노동해방만을 과제로 보고 다른 문제들에 눈을 돌리지 않으면, 이는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맑스주의의 기본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이러한 경직된 고정관념이 바로 20세기 후반에 맑스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기도 하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신좌파의 이론이 맑스주의와 긴장관계를 갖게 된 것도 이러한 경직성과 무관한 것 같지 않다. 서구유럽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프랑스 공산당은 관료주의화된 조직체계 속에서 이념적 쇄신은커녕 사회변혁적 실천을 수행할 만한 능력마저 상실하였다. 그런 프랑스 공산당은 68혁명을 반대하였다. 대부분이 공산당원이었던 탈현대주의자들이 혁명의 전선으로 나아가기 위해 공산당을 탈당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4) 질 들뢰즈, "질 들뢰즈 대담 1972―1990", 솔, 1993, 29쪽.
5) M. Foucault, “Arts” (15 juin 1966), 뤽 페리, 알랭 르노, "68사상과 현대 프랑스 철학", 인간사랑, 1995, 159쪽에서 재인용.
6)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285쪽.
7) Ibid, 162쪽.
8) Ibid, 167쪽.
9) Ibid, 112쪽.
10) Ibid, 17쪽.
11) M. 호르크하이머, Th. 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 김유동 외 옮김, 문예출판사, 1995, 31쪽.
12) Th. 아도르노, "부정 변증법", 홍승용 옮김, 한길사, 1999, 218쪽.
13) 칼 맑스, "자본론"Ⅰ(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91, 46쪽.
14) 더글라스 켈너, "탈현대의 사회이론", 정일준 옮김, 현대미학사, 1995, 4쪽.
15) 여기에서 탈현대주의 자신이 “동일성 원리”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성들 내에서의 차이를 억압하고 이를 하나의 이성자체로 동일화시키고 있다.
16) 이 ‘거시적 이성’ 개념 규정은 밀리반트로부터 끌어온 것임. Ralph Miliband, Socialism for a sceptical Age (London, 1995), pp. 12―13 참조.
17) 여기에서는 탈현대주의의 사회정치이론적 주장들을 모두 일일이 다룰 수 없다. 좌파의 사회이론으로 그것이 안고 있는 방법론적 난점들을 지적하는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차후에 따로 독립된 연구들로 수행될 것이다.
18) 물론 노동문제를 중심으로 한 고전적 맑스주의의 이 사회주의 사회의 이 규정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새로이 규정되어야 한다.
19) 물론 미시적 영역에로의 관심 이동은 탈현대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는 당시의 전반적인 경향으로서 네오맑스주의도 그러한 관심을 가졌고, 그람시의 시민사회론도 맑스주의 정치이론의 미시정치이론화라고 할 수 있다.
20) M. Foucault, The Use of Pleasure. The History of Sexuality, Vol. 2, trans. R. Hurley (London, 1985),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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