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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맑스코뮤날레 학술문화제 발표논문

<김세균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2005-06-07 14:00:11

http://skkim.jinbo.net/bbs/view.php?id=article03&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

 

맑스주의에서 차이와 적대 문제


이 진 경(서울산업대, 교양학부)


1. 맑스주의와 차이의 철학


차이의 철학, 또는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일반적 설명이 아직도 필요할까? 맑스주의와 관련해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의 정치학은, 아마도 그 문제를 근본 차원에서 제기하기 위해서였을 텐데, 서양 철학 일반, 또는 서구적 사유 전체에서 동일성 철학이나 동일자 사유에 대해 비판해 왔고, 동일화하는 사유 권력에 대해서 비판해 왔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서구의 주류적인 사유에서 벗어나 있는, 또는 그것에 대해 역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맑스주의의 경우에는 그것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차이의 철학을 빌어 좌익적 정치학을 비판하는 경우에도, 통상적인 전체주의파시즘이란 비난의 언사에 너무도 쉽게 기댔기 때문에, 거꾸로 차이의 철학마저 낡아빠진 자유주의적 비판의 일종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물론 차이의 인정이나 차이에 대한 관용(tolérance)이 차이의 정치학이라고 말하는 안이한 철학이나, 어떻게 말해도 그런 식으로 밖에는 듣지 않는 둔중한 상식의 귀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리고 그것은 차이의 철학에 대한 일반적 오해의 중요한 요인임도 사실이다.)

동일자의 사유나 동일성의 권력에 대한 비판이 다른 것에 비해 맑스주의에 상대적으로 먹히지 않는 것은 아마도 맑스주의 자신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국가나 국민의 이름으로 동일화하는 정치학에 대해, 또는 인간의 이름으로 보편화하는 철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다는 사실에도 부분적으로 연유할 것이다. 즉 맑스주의가 처음부터 서구의 전통적인 동일자 안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분열을 직시하고 있었고, 그 분열의 적대성을 지적하고 있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차이의 철학을 주창한 사상가들이 맑스적 사유에 대해 호의와 애정을 갖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확하게 바로 그 지점이 차이의 사유가 맑스주의 안에서 차단되는 곳이다. 왜냐하면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의 일차성에 대해, 그것의 긍정성에 대해 말하고자 하지만, 그것은 단지 동일자를 둘이나 그 이상으로 쪼개고 대립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건 아니며, 더구나 적대와 투쟁을 통해 해소될 수 있는 문제 설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립이나 모순이 차이를 동일성에 귀속시키는 하나의 방법임은 이미 들뢰즈가 지적한 바 있지만,1) 적대의 사유 역시 그 이상으로 차이를 제거하고 배제하는 동일성의 철학을, 동일자의 메커니즘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문제에 대한 견해차이나 노선 차이, 또는 어떤 저작에 대한 해석 차이에 대해 통상 맑스주의자들이 갖는 일반적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오래된 레닌주의 정통성을 잣대로 하든, 또는 트로츠키나 마오 같은 사람들의 사상을 잣대로 하든, 맑스주의자들은 차이나 이견을 장애물로 본다. 그것은 투쟁하여 극복하고 이겨내야 할 대상이거나 설득을 통해서든 비판이나 숙청을 통해서든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부정해야 할 대상이다. 이러한 비판이나 비난을 위해 기회주의수정주의, 개량주의 등과 같은 용어가 사용되고, 결국 그 차이는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적인 입장이라는 계급적 대립 내지 적대로 소급된다.

 

이러한 적대 정치학이 가장 선명하게 작동하는 곳은 아마도 당이나 조직과 관련된 문제에서일 것이다. 당 규약 문제로 발생한 이견이, 서로를 소부르주아 기회주의라고 비난하는 조직 분열로 귀착된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경우는 아마도 고전적인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비록 레닌은 그 토론의 와중에도 그 불일치가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규약의 잘못된 조항 때문에 망하지는 않는다.2)고 말했지만, 이후 진행된 과정에 따라 그것이 이견과 논쟁이 조직 분열로 나아가는 것을 당연시하게 하는 하나의 고전적 전범이 되었음은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였을까? 스탈린은 이 논쟁에 대해 1905년에 발표한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강령, 전술과 조직적 견해 일치는 우리 당 건설의 기초다. 이러한 견해 일치만이 당원들을 하나의 중앙집권적 당으로 통일시킬 수가 있다. 만약 견해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당은 붕괴된다. 따라서 당의 이상과 자기의 이상을 합치시키고 당과 일치되게 행동하는 것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만이 이 당, 이 조직의 성원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3)

 

이러한 이견의 원천은 프롤레타리아계급 내에 스며든 다른 계급, 특히 소부르주아 계급의 기회주의로 설명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본주의 발전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된 농민과 소부르주아와 지식인의 유입으로 끊임없이 다시 채워진다. … 이들 소부르주아 그룹들은 … 분열과 기회주의의 원천이 된다. 당을 내부로부터 해체시키고 붕괴시키는 주원인은 대개 이들 소부르주아 그룹들이다.4) 요컨대 당의 안과 밖에서 의견 차이는 물론, 당내에서 의견 차이 또한 계급 대립 내지 계급 적대로 환원된다.

 

스탈린이 당 안의 의견 일치를 의무로서 요구하고, 불일치가 당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한 것은 이와 결부된 것이다. 물론 레닌처럼 의견 일치/불일치 문제를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레닌이 그러한 차이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갖고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레닌의 이름으로 의견 차이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를, 기회주의와 결연한 분리를 배우지 않았던가? 이견에 대한 레닌과 스탈린 차이가, 아니 스탈린이나 레닌과 우리 자신의 차이가 과연 정도의 차 이상일 수 있을까? 요컨대 견해 차이를 계급적 대립으로 환원하는 관점에서 어떤 이견에 대해 과연 긍정적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아니, 그런 이견에 대해 과연 적대적 태도를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여기서 의견 차이, 견해 차이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발견하지 않기는 아주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태도가 일반적일 때, 그 이견이 조직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대체 무엇으로 저지할 수 있을까?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민주집중제에 대해서, 또 조직 내 분파 금지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물론 민주주의적 토론과 비판이 논리적으로 가정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든 하나의 결론으로 합치해야 한다는 전제 밑에서만 가능하고 그 한도 안에서만 허용된다. 당이 지식인 토론 집단은 아닌 것이다. 최대치로 확대 해석한다고 해도 비판과 이견은 결국은 하나의 결론 안에서, 그 동일성 안에서만 허용되며, 그 동일성을 보충하는 한에서만 바람직한 것으로 긍정된다. 그러한 한도를 벗어났을 때, 이견은 제거되거나 청소되어야 한다. 즉 당이나 조직은 그 내부의 이견을 주기적인 숙정을 통해 해결하고 정화한다.

 

여기서 스탈린을 인용한 것이 어쩌면 적대 정치학에 손쉬운 부적을 주게 될는지도 모른다. 누구도 자신이 스탈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단지 스탈린으로만 환원할 수 있는 것일까? 레닌 자신이, 또는 사회주의 운동 전통 자체가 그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견해 차이를 계급 모순이나 적대로 환원하는 적대 정치학이 이 전통에서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까?

 

그러한 이견이 결국 토론을 통해 설득하거나 비판을 통해 극복할 수 없는 경우,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별도 분파를 만들거나 별도 조직으로 독립한다. 분열과 분할. 그리고 이전에 함께 싸우던 사람들을 가장 치열하게 투쟁해야 할 적대 대상으로 상정하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우파는 부패로 인해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인해 망한다.는 세간의 말을 과연 쉽게 웃어넘길 수 있을까? 사회주의 운동 역사가 끝없는 분열 역사였다는 것을 과연 부정할 수 있을까?

 

이론가들 역시 동일하다. 진리가 하나 밖에 없듯이, 옳은 노선, 옳은 견해란 오직 하나만 있을 뿐이며, 그 밖의 견해들은 정의상 모두 비진리, 오류가 된다. 둘 이상의 견해가 공존한다면, 그것은 진리와 거짓이, 옳음과 틀림이 공존하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진리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용인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실천적인 차이로까지 이어진다면, 그 차이의 바닥에는 계급적 차이, 즉 계급 적대가 있는 것으로 보고, 상이한 견해들은 그러한 계급 적대의 반영, 다시 말해 계급투쟁이 된다. 이견이란 투쟁을 통해 해소되거나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통일성은 확보되며, 당이나 조직의 실천은 통일성을 갖게 된다.

 

맑스나 맑스주의에 대한 정통적 해석이나 일반적 해석, 또는 나의 해석과 다른 견해에 대해서는 용인할 수 없는 수정으로 보아 비난한다. 그가 어떤 조건에서 무엇에 대해 보려고 했는지, 그가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는지는 별다른 문제가 안 된다. 맑스의 저작이나 문구, 또는 다른 저자들의 저작이나 문구가 판단의 가장 중요한, 거의 유일한 논거가 되어 새로운 사유의 시도들, 새로운 해석의 시도들을 비난한다.

 

덕분에 당이나 조직은 가령 스페인 내전이나 체코 사태 등의 경우처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통일성을 유지했다. 물론 수많은 분파와 집단들로 분열하는 대가로 치러야 했지만 말이다. 이론 역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연구하고 글을 썼음에도 지루할 정도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사람들의 숫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 몇 명 되지 않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당대에 수많은 비난을 받는 수정주의자 내지 골칫거리가 되어야 했다. 이는 심지어 정통파를 자처하는 사람으로 한정되지도 않는다. 정통파의 비난을 받는 사람들조차 자신과 다른 견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견해에 대해서 이런저런 계급의 관형어가 달린 수정주의, 기회주의라는 비난 없이는 비판하지 않는다.

 

대립이나 적대의 사유는 차이를 사유하는 방법이 아니라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방법이다. 대립이나 적대의 사유는 차이를 이미 옳다고 믿는 어떤 것의 이나 동지 둘 중의 하나로 가른다. 그토록 다양한 것들은 오직 적과 동지 둘 중의 하나로 분류된다.5) 동일성을 갖거나 동일성을 보충하는 한에서 차이는 동지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결국엔 적이거나 적을 위해 기능하는 것―종종 앞잡이, 스파이 등의 극단적 표현으로 얻기도 한다―으로 본다. 전자가 동일화의 대상이라면, 후자는 배제와 타도의 대상이다. 이는 환원 불가능한 차이를 제거하거나 배제하고 동일한 것만을 재생산하는 동일자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구현한다.6) 마찬가지로 차이를 대립이나 모순, 또는 적대로 환원하는 한, 그리고 그러한 적대를 투쟁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는 한, 맑스주의 역시 차이를 긍정할 수 있는 사유의 공간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맑스주의에서 차이를 긍정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차이를 공존하는 것은, 아니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해, 차이를 장애물이 아니라 동료로 삼는 것은 불가능할까?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을 수정이란 말로 비난하거나 금지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능동적으로 촉발하는 것이 맑스주의 안에서는 불가능할까? 거대한 동일성의 등가물인 계급적 통일성, 조직적 통일성의 개념에 안주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 내는 창안을 통해 맑스주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할까?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어려운 조건에서 질문해야 한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항상이미 계급 적대의 효과 아래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일반적 질문에 머물러선 안 된다. 항상이미 존재하는 적대의 조건 밑에서 차이의 철학이 가능한지 물어야 한다. 계급 적대의 실존에도 불구하고 차이의 긍정은 가능한가? 이미 적대의 규정 아래 있는 조건에서, 적대 대상과 대결하는 조건에서 구성적 차이는 어떻게 작동할 수 있는가?



2. 대립 이전의 차이


차이는 그 자체로 실존한다. 밝음과 어둠 사이에는 수많은 밝음이, 또는 어둠이 있다. 대립은 그런 무수하게 다양한 밝음의 정도, 그 차이를 밝음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범주 안에 가둠으로써 만들어진다. 프리즘을 통해 보이는 색깔들 역시 무수한 차이로 실존한다. 심지어 빨강, 파랑, 노랑 등의 범주로 일정한 대역의 파장을 묶을 때조차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색들을 보색이니 뭐니 하면서 대비할 때 대립은 비로소 발생한다. 초원 위의 유목민은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그 무수한 방향에 북극남극이라는 대립되는 극성(極性)을 부여하고, 그러한 대립을 통해 사이에 있는 방향들을 구별할 때 방향은 대립에 의해 포착된다.

 

심지어 차이는 동일성 이전에 실존한다. 물론 빨강이라는 말로 명명되는 순간 그 색은 하나의 동일성을 갖게 되고, 다른 곳에서 동일하게 명명되는 어떤 것에 대해 적용됨으로써, 즉 빨강=빨강이라는 동일률의 형식으로 포착된다. 그러나 빨강이라고 명명되는 파장 안에는 무한히 많은 파장들이 존재한다. 빨강이라는 동일성은 그 차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동일화함으로써, 그 차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추상함으로써 성립된다. 차이란 다른 것이고, 그런 점에서 동일하지 않은 것이란 점에서 동일성을 전제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차이동일성이란 사이에 성립되는 관계일 뿐이다. 우주 안에 동일한 두 개의 나뭇잎은 없다는 플리니우스 식의 명제는 실재적 차이의 절대성을 보여 주는 말이다. 심지어 기적적으로 발견되는 동일성, 또는 우리의 무감한 눈으로 발견하는 동일성조차 무수하게 다른 것 안에서 특별하게 선정된 예외적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동일화를 야기하는 단어의 효과 아래서.

 

이런 점에서 대립이나 동일성이나 차이에 관한 한 동일한 효과를 갖는다. 다만 다른 것은 동일성은 무수한 차이를 하나로 묶는데 반해, 대립은 둘로 묶고 그것에 반대되는 성향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동일성은 다양한 차이를 하나의 이름에 부수되는 어떤 성질이나 본질로 동일화한다. 대립은 두 개의 반대되는 성질을 통해서 다양한 차이를 둘로 가르고 대립시키지만, 사실은 대립되는 범주를 할당하는 하나의 본질 안에서 그럴 뿐이다. 즉 대립되는 두 범주는 하나의 동일한 본질 안에 있으며, 그 본질 안에서 구별일 뿐이다.

 

맑스는 대립과 매개라는 헤겔 철학의 방법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사태를 아주 명료하게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대립적 사유는 사태를 양 극단으로 분할하여 몰아넣고는 그 양자의 대립을 본질적 구별인 것으로 본다. 그리고 양자 사이의 동일성 내지 통일성을 거기서 도출한다. 북극과 남극은 서로 끌어당긴다. 여성과 남성 역시 서로 끌어당기며, 그들의 극단적 구별들(Unterschiede)의 합일에 의해서 비로소 인간으로 생성된다.7)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첫 번째 것에 대해 말하자면, 북극과 남극은 둘 다 극(Pol)이다. 그들의 본질은 동일하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성과 성 양자도 하나의 유(類), 하나의 본질, 즉 인간적 본질이다. 북과 남은 하나의 본질의 대립된 규정들, 즉 동일한 본질의 그 최고로 전개된 수준의 구별이다. 그것은 분화된(differenzierte) 본질이다.”8)


이런 점에서 대립된 범주들은 진정한 본질의 차이를 표시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그 안에서 차이를 표시할 뿐이다. 헤겔은 차이란 규정된 구별이고, 그러한 구별 가운데 본질의 구별은 대립이라고 말하는데,9) 이 경우 차이는 이처럼 하나의 동일한 본질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진정한 본질적 구별, 현실적인 본질의 구별은 이러한 대립적 범주에 앞서 존재한다. 참된 현실적 극단들은 극과 비극(Pol und Nichtpol), 인간과 비인간일 것이다.10) 이런 점에서 그는 남극과 북극,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본질 안에서 실존의 구별에 지나지 않으며, 극과 비극, 인간과 비인간이 본질의 구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앞서 본 것과 비슷한 언어적 혼동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극과 비극, 인간과 비인간 역시 대립적인 범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대립과 저런 대립 사이에 있는 것이지 대립과 차이 사이에 있는 게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맑스에 따르면 극과 비극,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본질 구별에서, 비극이나 비인간이라는 대개념은 자립적인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단지 타자의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11) 다시 말해 비극이란 극과 무관한 모든 방향의 집합이고, 따라서 거기에는 방향들에 대해 하나의 내용을 부여하는 개념적 동일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극의 외부, 또는 극적 사유의 외부를 뜻한다. 비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대립적 사고에 길든 사람이라면 거기서 동물이나 식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은 대개 사유 능력으로 대비되는 인간/동물의 대립, 또는 운동성의 유무로 대비되는 동물/식물의 대립을 떠올린 것이지 인간/비인간의 구별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비인간에는 호랑이나 토끼, 떡과 망치, 컴퓨터와 로봇, 소나무와 스타킹, 박테리아와 바이러스 등이 모두 들어간다. 따라서 그것은 개념적 규정성이 없다. 즉 비인간이란 인간적 성질의 결여를 통해 인간이란 범주를 특권화하는 인간 중심주의 통념에서가 아니라면, 아무런 개념적 내용이 없는, 말 그대로 인간의 타자들을 추상화하여 하나로 모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잡다로 보는, 차이들의 거대한 집합이다.

 

그런데도 그것이 유의미한 것은 인간/비인간의 대쌍인간 내지 인류가 갖는 고유한 차이를, 그 수많은 것들 사이에서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호랑이와 비호랑이는 호랑이에 고유한 차이를, 바이러스와 비바이러스는 바이러스에 고유한 차이를 드러내 주는 대쌍이다. 그것은 잡다와 같은 거대한 차이의 바다에서 불쑥 솟아오른 어떤 것의 고유한 차이를, 그 특이성을 포착하기 위한 대쌍들이다. 여기서 바이러스와 비바이러스가 대립이 아니라 차이인 것처럼, 인간/비인간 역시 대립 아닌 차이를 표현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는 차이가 대립 이전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이 본질 구별인 한, 대립적 사유 같은 본질의 현실적 이원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12) 오직 차이의 일원론만이, 잡다와 같은 심연에서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솟아오르는 차이의 일원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대립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가? 가령 인간과 비인간의 범주는 인간과 대상, 또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개념 대립을 통해서 대상을 장악하고 이용하는 인간과 그것에 의해 이용되는 모든 것이라는 이원적 대립으로 변환된다. 다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그저 차이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닌 것이다. 차이는 특정한 조건 아래서 대립이 된다. 레닌의 말을 약간 바꾸어 표현하면, 어떠한 조건에서도 대립으로 전화되지 않는 차이는 없다. 그러나 이는 대립의 이원론을 또 다시 뒤로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차이는 특정한 대립 개념이, 또는 대립 관계가 그것을 포섭하는 조건에서만 대립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차이가 대립으로 변환되는 조건을 아는 것이고, 그러한 조건에서 어떠한 양상의 대립이 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어쩌면 유물론이란 이처럼 차이가 대립으로 전환되는 뚜렷한 조건에 대한 연구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맑스는 이와 관련해 매우 다양한 유물론적 분석 보기들을 제공해 준다. 아마도 가장 유명한 것 가운데 하나는 기계와 노동자 관계에 대한 것일 게다. 잘 알다시피 <자본론>Ⅰ의 「기계와 대공업」에서 그는 기계와 노동자의 차이가 자본주의적 관계라는 조건에서 적대가 되는 양상을 아주 환하게 보여준다.13) 이는 사실 도구와 생산자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도구와 생산자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고전적인 대립 개념을 동원하여 말하지 않는 한 대립이 아니다. 심지어 도구는 주체의 연장인 한에서 주체 일부이다. 그러나 그 도구가 소유에 의해 생산자와 분리될 때, 도구와 생산자는 대립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차이가 대립에 선행한다는 존재론적 명제에, 또는 대립의 이원론과 대비되는 차이의 일원론에 만족할 수는 없다. 거기서 차이는 아직 무언가를 생산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위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경우 차이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거나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는 대립들의 전조에 불과할 것이고, 차이의 철학은 단지 존재론적 우선성에서 위안을 구하는 철학적 방법이거나 그것이 사라진 현실에 통탄하는 철학적 탄식에 지나지 않는다.



3. 구성적 차이


인간과 비인간을 대비하여 인간과 다른 것들 사이의 차이를 포착하려는 경우에도 차이는 다른 것에 없는 어떤 특성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정적이고 감산적(減算的)이다. 즉 그것은 이런저런 것들이 갖는 특성을 정적으로 비교하여 어디에는 있고 어디에는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란 점에서 감산의 형식으로 이해된 차이이다. 가령 A에게 고유한 차이란 AB, AC, AD 등의 형태로 A와 다른 것들 간에 존재하는 간극을 표시한다.

 

반면 이미 존재하는 것을 견주는 게 아니라 새로운 것이 생성되는 동적인 차이 개념이 있다. 가령 헤겔주의자였던 맑스는 포이어바흐 같은 헤겔 비판가들을 만나면서 다른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이 되었고, 프랑스 코뮌주의자들과 만남을 통해 이전과 다른 맑스가 되며, 또는 엥겔스와 만남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맑스는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만남으로써 이전의 자신과 다른(different) 사람, 다른 사상가가 된다. 여기서 맑스에게 발생한 차이, 맑스 자신에게 야기된 차이는 맑스가 자신과 다른 어떤 것과 만남을 통해 생성된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차이가 새로운 요소를 창조하는 생성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맑스는 자신과 다른 무엇, 즉 다른 인물, 다른 사상, 또는 영국이나 프랑스라는 다른 세계와 만남을 통해서만 새로이 변화된 자신이 되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것들은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더해 주긴 했겠지만, 맑스를 새로운 차원의 사상가로 비약시키진 못했을 것이다. 차이가 이 새로운 비약을 가능하게 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차이는 정적인 비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만남을 통해 새로운 것을 구성하는 동적이고 구성적인 것으로 작용하고 있다.

 

둘째, 맑스 자신이 다른 무엇과 만남을 통해서 이전의 자신과 다른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차이는 맑스와 그가 만난 대상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라, 맑스 자신에 내재하는 것으로도 있는 것이다. 그것과 만나기 전의 맑스와 만난 후의 맑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만약 이러한 내재적 차이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맑스와 다른 것의 만남은, 또는 맑스와 다른 것 사이의 차이는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는 적극적 역할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단지 사상가나 인간에 대해서만, 즉 스스로 변화를 선택하는 종류의 개체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산소 분자는 수소 분자와 만나 결합하면 물 분자가 되고, 일산화탄소 분자와 만나면 이산화탄소 분자가 된다. 유전자를 전사하는 RNA 상에서 두 개의 아데닌(A)이 시토신(C)과 만나면(AAC) 아스파라긴이라는 아미노산을 형성하지만, 구아닌(G)과 만나면(AAG) 리신이라는 아미노산을 형성한다. 망치는 못의 머리와 만나면 도구가 되지만, 사람의 머리와 만나면 흉기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차이는 새로운 관계, 새로운 무언가를 형성하는 구성적인 역할을 한다. 다르다는 것은 한편으론 새로운 것을 형성하기 위한 조건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것과의 만남을 통해 발생한 사건이다. 여기서 차이는 만남을 통해 발생하며, 만남을 통해 능동적 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령 A가 B와 만나서 A'가 되고, B 역시 그 만남을 통해서 B'가 되었다고 하면, 이를 이렇게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A+B → A'+B'

여기서 A와 B의 차이는 ()로 표시되는 정적이 비교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로 표시되는 구성적인 과정을 통해 동적으로 결합한다. 그리하여 A를 A'로, B를 B'로 바꾸어 놓는다. 다시 말해 A와 A' 사이의 내재적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 경우 차이란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생성되는 원동력이며, 그러한 창조를 통해 생산된 것이기도 하다. 즉 차이란,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면, 능산적인 힘인 동시에 그 결과 만들어지는 소산적인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구성하는 식으로 작동하는 이 능동적인 차이의 개념을 구성적 차이라고 명명하자.

 

헤겔적인 개념을 약간만 걷어 낸다면, 맑스의 가치 형태 도식은 이러한 차이 개념이 작동하는 양상과 더불어,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현실적 대립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먼저 가치 형태의 가장 단순한 도식을 보면,

알다시피 이 도식은 z량의 상품 A가 u량의 상품 B의 사용가치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등호는 이러한 관계의 성립을 표시하는 기호이지 수학의 등호가 아니다. 좌변이 가치라면 우변은 사용가치고, 좌변이 양이라면 우변은 질이기 때문에, 등호는 어떤 등가성을 표시하지 않는다. 다만 z량의 상품 A가 u량의 상품 B와 만나서 교환이라고 부르는 관계가 발생하게 되었음을 뜻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변의 B 역시 자신을 표현하는 저런 관계를 형성할 수 있지만, 일단 이 도식에서 A는 주어를 표시하고 B는 술어를 표시하기 때문에 좌⋅우변을 바꾸어 쓰면 안 된다. 이 역시 등호가 등가성 내지 양적 동일성을 표시하는 게 아님을 의미한다.

 

일단 여기서 등호로 표시되는 관계가 A와 B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로 인해 성립한다는 점을 주목하자. 맑스 자신이 말하듯이 동일한 상품이 우변에 오는 상황 z·A=z·A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이고, 어떠한 타자와의 관계에도 들어가지 않은 고립된 상황, 유아론적 상황을 표시할 뿐이다. 즉 동일성은 동일성의 기호로 표시되는 관계를 구성하지 못한다. 차이만이 그런 관계를 구성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양변이 다를 때 양자를 연결하는 기호 =는 관계의 구성을 표시하는 기호다. 그것은 차이가 구성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양상을 표시하는 기호인 것이다. 이로써 A는 자신의 타자와 만나고 타자와 함께 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이렇게 흘러 들어간 A는 고립된 상황 속에 있던 이전의 A가 아니라, 변화된 관계 속의 A, 곧 A'이다. 관계를 통해서 A 자신에 새로운 변화가,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사실 가치 형태론이 증명하려는 것이 가치라는 형식을 어떻게 발생하였는가 임을 안다면, 엄밀하게 말해 상품 A의 가치라는 말은 여기서 가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에 대해 가치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양적인 의미의 가치(value)가 아니라 타자에 대해 가치 있는 것(the valuable)을 의미한다.14) 이 경우 타자의 관계 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A 자신이 타자에 대해 가치 있는 것임을 확인하고 입증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등호의 양변을 가치라는 양과 사용가치라는 질로 대립시켜선 곤란하다. 가치 있는 것은 양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양적인 것이 되려면, 가치 있는 것을 양으로 동질화하는 척도가 도입되어야 한다. 이는 최소한 일반적 등가물이 발생한 연후에 가능하다. 그 이전에 가치 있는 것은 사실상 타자에게 어떤 유용성이 있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사용가치와 대립하지 않는다. 다만 우변에 온 것과 다른 유용성, 다른 질을 갖는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

 

좌변에 부여된 상대적 가치 형태라는 위치나, 우변에 부여된 등가 형태라는 대립 개념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좌변이 타자의 유용성을 빌어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하는 주어라는 말, 그리고 우변은 그것의 가치를 표현하는 술어라는 말의 개념적 표현이다. 즉 거기서 대립은 하나는 주어, 하나는 술어라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는 대립이지만 앞서 맑스가 말한 대로 현실적 대립이 아닌 추상적 대립이다. 왜냐하면 다른 도식을 만들어서 B가 주어가 되어 A를 술어로 사용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관계에서 두 변에 오는 항들은 결코 비대칭적이지 않다. 그것이 비대칭성을 갖게 되고, 그리하여 현실적 대립으로 전화되는 것은 우변에 오직 하나의 등가물이 들어서고, 다른 것이 그 자리에 들어오는 것이 배제되는 조건에서다.

확대된 가치 형태를 보면 이 대립의 한 쪽인 우변이 특정한 제한적 규정을 갖지 않는 단순한 A의 집합임을 알 수 있다. 즉 그것은 A의 가치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 가능한, 유용성을 갖는 물건들의 집합이고, 이런 한에서 좌변의 A와 추상적으로 대립된다. 좌변은 비A들 속에서 A가 솟아오르면서 그 가치 있음이 부각된다. 다른 것들은 A가 갖는 유용성이 가치 있음으로 부상하게 되는 배경이 되어 준다. 이로 인해 이러한 형태에서는 마치 A의 가치 있음이 다른 것들의 사용가치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나타난다. 하지만 앞서 인간과 비인간 등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는 정적인 비교(A는 ~와 다르다)에 머물고 있는 게 아니라, A와의 구성적인 관계 속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이상에서 말한 것처럼, 단순한 가치 형태나 확대된 가치 형태의 도식은 추상적 대립 안에서나마 구성적 차이가 작동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거기서 양변에 오는 것의 차이는 부정해야 할 대상도, 동일화해야 할 타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참고 견뎌야 할 대상, 또는 인정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그 경우 차이는 어떤 것이 다른 것과 결합하여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 다시 말해 차이는 자신이 타자들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며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기회, 또는 가장 단순하게는 다른 것을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란 점에서 진정으로 긍정적인 것이다. 이러한 긍정성이 양자를 하나의 관계로 구성하는 능동적 힘을 발휘한다. 구성적 차이가 갖는 이러한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힘이 작동하는데, 상대적 가치 형태등가 형태라는 말로 표시된 추상적 대립은 아무런 근본적 장애가 되지 못한다. 확대된 가치 형태에서 우변이 무한한 상품의 계열에 열려 있다는 것은 구성적 차이가 갖는 무한한 개방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좌변의 A에게 주어져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인 셈이다.



4. 모순, 또는 현실적 대립


생산물 교환관계에서 차이가 현실적 대립 내지 모순 관계로 전환되는 것은 하나의 가치척도가 수립됨으로써 그렇게 된다. 그것을 맑스의 도식은 일반적 가치 형태와 화폐 형태로 구별해서 설명하지만, 맑스 자신의 말처럼 양자 간에는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다.15) 따라서 우리는 화폐 형태만을 다루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도식은 보다시피 확대된 가치 형태에서 좌우만을 바꾼 것에 지나지 않지만, 이는 사실 관계의 근본적인 전환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확대된 가치 형태 도식에서는 A는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A의 자리에 다른 어떠한 상품이 들어서는 것도 본질적으로 개방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자신과 다른 것과 만나서 관계를 구성하는 구성적 차이의 장을 표시하고 있었다.

 

반면 여기서는 자신의 가치를 표시하기 위해 오직 하나의 상품만을, 화폐라는 등가물만을 사용해야 한다. 어떤 것도 좌변의 자리에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자리에 들어서려는 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오직 하나, 화폐의 양적 차이를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화폐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한에서만, 즉 화폐와 교환될 수 있는 한에서만 자신의 가치를 표현할 자리가 허용된다.

 

물론 여기서도 좌변과 우변은 다르다. 그리고 좌변에 올 수 있는 상품 B, C, D … 들도 모두 다르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오직 하나의 척도만을 선택해야 하는 한, 그 무수한 차이들은 이제 화폐의 양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 귀속되고 동질화된다. 차이가 하나의 척도를 통해 동질화되고, 무수한 차이가 하나의 동일성으로 귀속되는 것을 이처럼 환하게 보여 주는 경우가 또 있을까?

 

여기서 좀 더 나아가 화폐 형태는 동질화의 현실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가치법칙이 그것이다. 사실 도식에서 좌변은 모든 것을 향해 열려 있고, 실제로 자본주의는 돈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 자리에 밀어 넣는다. 즉 가치화(Verwertung)한다. 성교나 육체는 물론 친절함도, 호의나 애정도, 원숭이나 앵무새도, 그리고 그림이나 낙서조차, 또는 생물들의 유전자들까지도. 하지만 돈이 되지 않는 것은 가차 없이 그 자리에서 밀어낸다. 사과도, 벼도, 환금성이 좋은 것만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것은 모두 쫓겨나서 멸종으로 밀려간다.16) 차이는 돈이 되는 한 조장되기도 하지만, 그런 한에서만 살아남는다. 그것은 정확하게 화폐적 동일성의 지배를 수용하는 한에서만 살아남는다. 화폐라는 동일성의 수용은 목숨이 걸린 강제다. 마치 프롤레타리아에게 노동이 죽을 자유를 짝으로 갖는 강제인 것처럼. 바로 이런 의미에서 화폐 형태적 체제는 차이를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체제고, 모든 차이를 동일성의 지배 아래 복속시키는 권력의 체제다.

 

화폐 형태를 이전의 것과 구별해 주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요소는 좌・우변이 실제적으로 교환 불가능하다는 사실(실제적 비대칭성)로 인해, 좌・우변의 추상적 대립이 명백한 현실적 대립으로 전화된다는 점이다. 앞서의 것과 달리 화폐 형태에서는 화폐 이외의 어떠한 상품도 우변에 올 수 없다. 그것은 화폐라는 오직 하나의 등가물만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반면 화폐는 또한 좌변에 들어갈 수 없다. 그 경우 기껏해야 p・M=p・M이라는 동어반복만을 만들어 낼 뿐이다.

 

따라서 상대적 가치 형태와 등가 형태 사이에는 근본적인 비대칭성이 존재하며, 양자의 대립은 이제 단순한 추상적 대립에 머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치와 사용가치의 대립도, 질과 양의 대립도, 이러한 비대칭성으로 인해 현실적인 대립이 된다. 화폐의 맞은편에 있는 무수한 생산물들의 집합은 단지 비화폐라는 막연한 추상적 집합이 아니라, 화폐와의 교환을 열망하고 화폐와 교환되기 위해 움직이는 하나의 동일한 욕망과 운동성을 갖게 된다. 그것은 화폐를 통해 통합된 하나의 상품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화폐와 대립하는 독자의 개념적 내용을 갖는 자립성을 획득한다. 그것은 실제로 화폐와 개념적으로 구별되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상품들의 흐름과 절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세계를.

 

하지만 그 자립성은 사실 상품들을 하나로 묶어세우는 화폐의 통합력에 의한 것이고, 화폐의 흐름에 의해 규제되고 통제되는 질서다. 이 세계에서 상품들의 차이는 오직 화폐화에 유리한가 여부를 위해서 고려된다. 그것은 화폐의 대립물이지만, 항상―이미 화폐에 의존하고 있으며, 화폐를 통해 존재하며, 항상―이미 화폐를 향해 이끌리는 세계다. 자립성을 갖는 두 개의 대립물이 상호 의존하고 통일되어 있는 모순적 관계가 바로 이 현실적 대립의 실제적 양상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처럼 단지 외적 대립의 양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현실적 대립으로 인해 역시 현실성을 갖게 된 가치와 사용가치의 이중성이 각각의 상품 내부에 자리 잡게 된다는 점에서 내적인 대립의 양상으로도 존재하는 모순이다. 이제 생산물은 그것의 고유한 질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가치와 사용가치라는 대립적 이중성 안에 존재하는 상품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아마도 여기서 자립성을 갖게 된 두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고전적인 모순 개념은 적절한 사용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화폐 형태는 생산물들의 차이가 모순으로, 다시 말해 현실적 대립으로 전화되는 실제적 조건이다.

 

다음으로 화폐 형태에서 또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은 상품의 가치가 단 하나의 등가물을 통해서 표시되게 됨에 따라, 화폐는 상품의 가치를 표시하고 대변하는 일종의 대표/표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게 어떤 상품이든 얼마짜리라고 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상품 생산이 일반화된 조건에서 상품이란 사용하기 위한 게 아니라 팔기 위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이 얼마짜리인가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상품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화폐라는 등가물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역으로 모든 상품이 그것과 교환될 수 있는 화폐의 양을 표시하고 재현하게 된다. 어떤 상품이 표상할 수 있는 화폐의 양, 그것이 바로 상품의 진실(진리)이고 그 상품의 가치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화폐는 상품 세계를 통합하고 통치하는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상품의 가치를 대신하여 표상하는 대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여기서 가치의 대표, 가치의 진리라는 자리는 배타적이다. 일반적 가치 형태나 화폐 형태에서 등가물은 정의상 오직 하나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화폐 형태는 다른 것이 척도의 자리에 들어서는 것을 정의상 차단하고 금지한다. 마치 지식에서 오래된 진리가 자신과 다른 종류의 지식에 대해 그러하듯이. 확립된 정설(orthodox)이 자신과 다른 종류의 견해에 대해, 특히나 자신의 자리를 흔드는 견해에 대해 그러하듯이. 이런 점에서 화폐 형태의 도식은 모든 것을 가치화하려는 화폐 권력이 발생하는 지점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에 반하여 화폐의 척도로서 지위를 흔들며 그것의 단일성을 위협하는 활동의 중요성을, 화폐화를 거부하는 투쟁이나 화폐로 환원 불가능한 가치의 실존을 현실화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생산물이든 생산적 능력 자체든 간에. 척도 자체가 동일화하는 권력이라는 것을 화폐처럼 잘 보여 주는 경우가 또 있을까?



5. 프롤레타리아트와 적대의 정치학


이제 우리는 적대에 대해 말해야 한다. 적대는 대립되는 두 항의 이해관계나 욕망이 현재적이든 잠재적이든 충돌과 투쟁을 포함하는 경우를 지칭하며, 대부분 대립되는 적대자를 제거하는 방향의 운동을 야기한다. 맑스주의에서 이 문제는 무엇보다 우선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두 계급의 관계, 또는 두 계급의 투쟁과 결부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적대 역시 차이가 특정한 조건에서 두 항의 적대화된 관계로 전화된 것임을 볼 것이다.

 

맑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란 개념은 그가 경제학 연구를 시작하기 이전 저작인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처음 사용된다. 거기서 맑스는 이 개념을 계급이 아닌 계급이란 의미에서 비계급으로 규정한다. 철저하게 속박되어 있는 한 계급, 시민사회의 계급이면서도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아닌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를 추구하는 한 신분17)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적 궁핍에 의해 기계적으로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즉 주어진 규정 안에서 소득의 감소로 인해 몰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해체[즉 사회적 규정성의 급격한 해체]를 통해 특히 중간 계층의 해체로부터 출현한 사람들18)이다.

 

<자본론>에서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이 출현하는 곳은 인구법칙과 본원적 축적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본원적 축적과정이란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하여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드는 과정이었다.19) 그것은 기존의 신분 규정이나 경제 규정을 상실하여 비신분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직은 자본의 공리나 부르주아지를 정의해 주는 어떤 규정성도 획득하지 못한 상태가 무산자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차적인 개념이다. 즉 그렇게 대대적으로 창출된 근대적 프롤레타리아는 부랑자가 되어 사회를 떠돌거나 걸식하는 거지가 되거나 날품을 팔며 하루하루의 생계를 잇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람들을 통칭하는 개념이지, 하나의 적극적 규정에 의해 계급으로 정의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비신분인만큼이나 정확하게 비계급이다. 인구법칙을 다룬 부분에서 그것은, 자본의 축적에 따라 노동자가 기계 등의 불변자본에 의해 대체되어 가변자본으로서의 규정성을 상실한 실업자라는 점에서 비계급이다.

 

자본주의적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는 처음부터 계급으로 탄생하여 계급으로서 존속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처음부터 비계급으로서 탄생하며 비계급으로서 존속한다. 계급과 비계급의 이러한 관계는 극과 비극의 경우처럼 본질적인 차이를 표현하지만, 거기서 비계급이란 부르주아 계급의 타자의 추상화라는 점에서 추상적 대립이고,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란, 중세적 신분이 소멸했다고 가정하면, 부르주아 계급을 제외한 모든 성분들의 집합이다.

 

프롤레타리아트란 다양한 종류의 생산과 활동을 하던 사람들이 부르주아지에 의해 계급적 경계의 외부로 배제됨으로써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부르주아지에 의한 계급투쟁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존재 자체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언제나 부르주아지의 대립물이 되어 그들을 상대해야 하는 것도, 수동적이고 반작용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비계급이기에 계급적 포섭, 계급적 지배에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생산의 장을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비계급이기에 사태를 계급화 하지 않는 방식의 활동을, 비계급적 활동의 장을 창안할 수 있다. 부르주아 계급을 상대로 하지 않는 긍정적 계급투쟁. 이것이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의 적대자가 되기 이전에, 이질적이고 상이한(different) 집단들의 집합으로서 비계급의 적극적 의미일 것이다. 이러한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활동에서 긍정적인 차이의 정치학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 초기 이래 수많은 코뮌주의적 시도들이 이와 무관할까?

 

다른 한편 프롤레타리아트는 계급 자체의 해소를 추구하는 거대한 흐름, 거대한 운동을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 자체를, 생산양식으로서 자본주의를 전복하려는 모든 운동, 사회 전체적 차원에서 부르주아지를, 계급 자체를 제거하려는 거대한 운동. 이러한 운동은 이런저런 사람들을 부르주아지라는 하나의 계급으로 통합하는 물질적 장치인 국가 자체를 겨냥하여 진행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다양하고 이질적인 집단들이 대중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면서 국가 장치의 장벽을 해체하고 계급적 지배의 장치들을 부수면서 나아간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적인 흐름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은 계급적 경계들을 해체하고 파괴하지만 그 투쟁의 성과는 집약되거나 응축되지 않으며 대중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 자리를 살아남은 부르주아지가 다시 장악하고 계급적 지배의 장치들을 설치한다. 부르주아지의 반동이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은 이러한 사태를 반복적인 양상으로 보여 주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흐름에서 하나의 계급으로 변환시키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계급적 지배 자체의 철폐를 추구하는 계급, 부르주아지라는 계급에 대항하여 그것을 전복하고 해체하려는 또 하나의 계급, 또는 반계급(counterclass)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구성하는 것이 그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선언」 마지막의 유명한 문장은 비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하나의 계급으로 만드는 혁명적 시도였다.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들은 부르주아지에 대립하는 하나의 새로운 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를 발명한 것이다. 이를 위해 대중운동의 흐름을 조직하여 하나의 계급으로 묶어세우는 조직이 출현한다. 프롤레타리아 당이 그것이다. 부르주아지 타도를 목표로 하는 적대 계급이 탄생한 것이다. 해방을 지향하는 적대 정치학이 시작된다.

 

이제 모든 것은 두 계급 적대의 효과 안에 있다고 선언된다. 더불어 이전에 가동되던 비계급의 활동은, 그 차이의 정치가 작동하던 장은 이제 적대 정치학에 포섭되고 그 적대의 효과 안에서 변형된다. 왜냐하면 이제 계급 정치학은 프롤레타리아트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를 하나로 통일하여 하나의 동일한 계급으로 통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일성을 산출하고 통일된 계급을 지도하는 조직이 그 역동적 통합의 하나의 중심이 된다. 통상 당이라는 형태를 취하는 그 조직은 이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지도자, 대표자가 된다. 그리고 그 조직의 견해가 옳고 그름의 척도가 된다. 그 주위를 돌며 정통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확고한 정설(orthodoxa)들의 체계가 수립된다. 그리고 그것이 척도가 되어 다양한 지식의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법정이 만들어진다.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를 대신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진리가 출현한다.

 

그리고 그 척도를 중심으로 모든 것은 적인 부르주아지의 편인가, 아니면 우리 프롤레타리아트의 편인가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모든 차이는 이로써 적대적 대립으로 소급된다. 맑스주의 안에서, 또는 혁명운동이나 노동운동 안에서 모든 차이가 적대로 환원되는 것은 정확하게 모든 차이를 적대로 환원하는 이 적대 정치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차이에 대한 적대적 태도 역시 이런 적대 정치학의 효과 가운데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적대 정치학 역시, 그것이 비록 계급의 해소와 해방을 위해 기획되고 구성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동일자의 권력을 작동시키는 강력한 동일성의 정치학을 구성한다. 적과 동지라는 두 개의 적대적 범주는 동일화될 수 없는 모든 이견, 모든 타자를 적으로 보아 섬멸하려는 적극적 동일자의 정치학을 작동시키게 된다.



6. 차이의 정치학을 위해


자본주의는 적대 체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와 맞서는 적대 계급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노동력의 상품화 위에 성립되는 노동과정에서 적대 관계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노동력 상품화를 통해 정의된다. 노동력이 상품이 되어 팔리는 한, 그것의 처분권은 그것을 구매한 자본가에게 속하게 된다. 자본가는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 상품을 자기 의지에 따라 사용하고자 하며, 그것이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출발점을 이룬다. 그러나 노동력 상품의 사용가치인 노동은 또한 노동자 자신의 활동이고 노동자 자신의 신체 및 의지와 분리될 수 없다. 이 경우 노동은 노동자의 의지에 여전히 속한다.

 

이런 점에서 노동 자체는 자본가의 의지에 속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의지에 속한다는 점에서 대립하고 충돌한다. 이로 인해 노동과정을 좀 더 강력하게 장악하려는 자본의 공격이 일상적으로 진행된다. 상이한 양상의 노동의 포섭은 이러한 공격과 그에 대한 저항을 통해 산출된 결과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과정은 그 자체만으로 항상이미 계급투쟁의 과정이고, 노동 자체가 이미 그러한 계급투쟁을 함축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대립은 그와 같은 노동력 상품화를 통해 타인의 노동을 장악하고 이용하려는 욕망과, 타인에게 처분권을 양도할 필요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활동하려는 욕망 사이에 있다. 자본과 노동자 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인 적대성을 갖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독립적인 계급의 탄생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것은 부르주아지에 의해 비계급화된 다양한 층들을 묶어서 하나의 계급으로 만들며, 그들의 힘을 생산능력을 상품화하는 체제 자체의 전복을 위한 역량으로, 계급 자체의 해소를 위한 역량으로 변환시키고자 한다. 자본주의에서 적대 정치학이 해방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미 본 것처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해를 대변하는 대표자, 그 이익을 표현하는 계급 진리의 담지자로서 당이라는 형태로 귀속되는 한, 또는 자본주의 국가를 대체하는 사회주의 국가로 귀결되는 한, 그것은 자본주의적 척도를 대체하는 또 하나의 척도를 수립하게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대체하는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옳고 그름의 유일한 척도로 수립하는 것이다. 하나의 척도를 대신하는 또 하나의 척도의 지배가 시작된다.

 

적대의 정치학 안에서,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적과 동지로 나누고, 모든 것을 정통성의 잣대로 재서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그러한 체제에서 차이는 숨 쉴 공간을 상실한다. 차이는 기존의 척도 아래 통합되어야 할 무엇이 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질병 같은 것이 된다. 여기서 차이를 긍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말하는 차이의 정치학은 단지 다양한 이견이나 성향을,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라고 요구하는 그런 정치학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를 생성되고 구성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보수 정치학이고, 너의 차이를 인정하는 만큼 나의 차이도 인정하라는 식으로 각자의 차이를 유지하는 자유주의 정치학의 새로운 버전이다. (차이에 대한 관용을 요구하는 정치학 역시 차이를 참고 견디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차이는 단지 남과 다른 것이란 점에서 감산적인 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인정하고 보존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차이를 단순한 감산적 개념과 구별되는 가산적 개념으로, 보존적 개념과 구별되는 구성적 개념으로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대략적으로 본 것처럼 구성적 차이의 개념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게 되는 이유가 되고, 그것을 통해 나 자신이 변화될 계기를 만들고자 한다는 점에서 보존의 정치학이 아닌 변혁의 정치학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거기서 차이란 참고 견뎌야 할 부정적 대상이 아니라, 나 자신이 먼저 변화될 기회를 뜻한다는 점에서 반갑게 긍정할 수 있는 긍정의 대상이다. 이러한 차이란 어떤 체제의 동일성을 전복하여 새로운 체제를 구성하기 위한 혁명의 씨앗을 담고 있다.

 

반복하지만 차이의 정치학은 단지 이견이나 분파의 허용이나, 적대와 대비되는 소박하고 고상한 활동의 허용을 요구하는 편하고 한가한 정치학이 아니다. 분파의 허용조차 사실은 차이의 인정이라는, 차이의 적대적 부정에 비해서는 좀 낫다고 할 수 있지만, 자유주의 정치학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구성적 차이에 기초한 차이의 정치학과는 거리가 멀다. 구성적 차이의 정치학은 무엇보다도 우선 모든 차이를 대립과 모순으로 인도하고, 결국은 적대의 효과 아래 복속시키는 척도의 권력에 대한 투쟁을 통해 정의된다.

 

기존의 척도를 해체하는 부정적 형식의 투쟁이든, 또는 다른 종류의 척도를 수립하여 기존의 그것을 상대화시키고 약화시켜 구성적 차이가 작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긍정적 형식의 투쟁이든 간에, 그것은 척도에 대한 투쟁이지 척도 안에서 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그런 종류의 투쟁이 아니다. 가령 노동력을 상품화하길 거부하거나(흔히 노동 거부라고 명명된다) 생산물 상품화를 거부하는 그런 종류의 활동은 생산능력이나 생산물의 가치를 화폐라는 척도에 종속시키길 거부하는 것이란 점에서 차이의 정치학에 속한다. 다른 한편 비척도적인 차이를 구성하는 활동, 그래서 기존의 척도로 잴 수 없고 판단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생산하는 긍정적 활동 역시 척도와 대결하는 구성적 차이의 정치학에 속한다. 이러한 종류의 정치학은 척도를 재생산하는 활동이 아니라 비척도적 차이를 생산하거나 복수의 척도를 생산하는 활동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에 던졌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계급 적대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또는 그러한 적대 효과 아래에서 구성적 차이의 정치학이 과연 가능한가? 차이의 정치학이 척도의 권력에 반하는 투쟁인 한, 그 척도의 지배에 대항하여 그것으로 환원 불가능한 것을 창출하는 활동인 한, 그것은 적대를 야기하는 척도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가동될 수 있다. 더구나 그것은, 적어도 자본에 대한 투쟁에서라면, 지배적 척도를 재생산하려는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계급적 지배 자체를 해소하려고 하는 맑스주의적인 적대의 정치학과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고 해야 할 지도 모른다. 비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반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거리처럼.

 

그러나 그것은 아주 제한적인 조건에서만 해방을 꿈꾸는 적대 정치학과 나란히 갈 수 있다. 즉 하나의 척도를 다른 하나의 척도로 대체하는 투쟁이 아니라 하나의 척도의 지배 자체를 해소하려는 투쟁을 지향하는 한, 그리하여 당이나 국가적 형태의 견해나 결정을 척도로 이견을 판결하려 하지 않는 한, 적대의 정치학과 구성적 차이의 정치학은 공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또한 척도에 대한 투쟁을 단지 기존 척도의 부정으로 제한하지 않는 한, 그리하여 비척도적 차이의 생산이나 복수의 척도를 생산하는 활동에 적대하지 않는 한, 구성적 차이의 정치학은 자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적대의 정치학과 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오서독스(orthodox)라는 척도의 재생산에 반하여, 척도를 무력화시키는 파라독스(paradox)의 기능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이해할 수 있는 한, 그리하여 차이의 생산이나 이견의 생산을 자신에 대한 위협(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새로이 변화시켜 새로운 능력을 제공할 기회로 본다면, 구성적 차이의 정치학이 적대의 정치학과 적이 되어야 할 이유는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동일자의 지배와 동일성의 정치학으로 귀착되었던 맑스주의적 정치가 구성적인 차이의 정치학으로 변환되는 문턱을 표시하게 될 지점인지도 모른다. 맑스주의가 진정으로 차이를 긍정하는 게 가능함을 표시하는 새로운 전환점이 될 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차이의 정치학과 맑스주의의 만남을 통해서 맑스주의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 아닐까? 그 경우 우리는 맑스의 이름 아래, 구성적인 차이의 정치학이 새로운 희망으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이런 식의 만남이 가능하다면, 차이의 정치학을 구체화하는데 맑스의 사유가 여전히 결정적인 이론적 자원을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화폐와 자본이 모든 종류의 이질성, 모든 종류의 삶의 방식을 동일화하고 동질화하는 거대한 권력의 장을 형성하는 현재의 역사적 조건에서, 그러한 동일자의 정치와 대결하려는 사람들에게 맑스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적 자원일 것이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범위로 진행되는 생산과 착취의 확장, 생활의 모든 영역으로 침투하고 있는 자본과 화폐의 권력에 맞서, 모든 것을 자본으로, 화폐로 동일화하는 권력에 맞서 그것의 외부, 화폐화되지 않고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삶의 가능성을, 차이가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창안하려는 사람들에게 맑스는 여전히 중요한 이론적 자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경우 차이의 정치학을 구성하려는 사람들에게 맑스는 미래의 사상이요 희망의 이름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1) G. Deleuze, <차이와 반복>, 김상환 역, 민음사, 2004, 120―24쪽.

 


 

 2)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당대회 : 당 규약 제1조에 관한 토론」, 닐 하딩 편, 이성혁 역, <러시아 맑스주의>, 거름, 1987, 421쪽.

 


 

 3) J. Stalin, 「프롤레타리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 당」, 서중건 역, <스탈린 선집>1 1905―1931, 전진, 1988, 28―29쪽. 강조는 스탈린.

 


 

4) J. Stalin, 「레닌주의의 기초」, <스탈린 선집>1, 151쪽.

 


 

 5) 칼 쉬미트는 정치적인 것에 고유한 관념을 바로 이러한 적대의 정치학을 통해 정의한다.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기인으로 생각되는 특수 정치적인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이 구별은 규준이라는 의미에서 개념 규정을 제공하는 것”이다(C. Schmitt, <정치적인 것의 개념>, 김효전 역, 법문사, 1995, 31쪽.)

 


 

 6) 이러한 사유의 결과는 옳은 것―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과 동일하다고 보는 동일성의 확대재생산이다. 특수성이나 차이는 그러한 동일자의 확대와 확장을 위해 구체적 조건을 고려하여 응용하고 적용하는 데서 고려되는 조건일 뿐이다. 즉 그것은 동일성의 확대를 위해 고려해야 할 조건이지, 옳다고 믿는 어떤 동일성을 저지하거나 변형시키는 어떤 것도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일성의 사유는 정확하게 사유의 제국주의적 모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7) K. Marx, 「헤겔 국법론 비판」, 홍영두 역, <헤겔 법철학 비판>, 아침, 1988, 129쪽.

 


 

 8) 같은 책, 129쪽. 강조는 원문.

 


 

 9) G. Hegel, 서동익 역, <철학 강요>, 을유문화사, 1987, 148―49쪽.

 


 

10) K. Marx, 「헤겔 국법론 비판」, 130쪽.

 


 

11) 같은 책, 130쪽.

 


 

12) 같은 책, 131쪽.

 


 

13) K. Marx, 김수행 역, <자본 : 정치경제학 비판(제2개역판)>1권(하), 비봉출판사, 2001, 529쪽 이하.

 


 

14) 이에 대해서는 이진경, 「맑스 가치 형태론에서 화폐와 재현」, <문화과학>, 2000년 겨울호 참조.

 


 

15) K. Marx, <자본론>Ⅰ(상), 90쪽.

 


 

16) 이진경, 「화폐와 허무주의」, <진보평론>, 2000년 여름호 참조.

 


 

17) K. Marx,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앞의 책, 202쪽.

 


 

18) 같은 책, 203쪽.

 


 

19) K. Marx, <자본론>1권(하), 9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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